2018. 7. 30. 03:33ㆍ건강과 여행
[최보식이 만난 사람] "퇴각 결정 머뭇거리면.. 더욱 위험에 빠지고 다시 해볼 기회도 없어져"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18.07.30. 03:12
한왕용(52)씨를 만난 것은 그가 '뉴스의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인생 얘기가 혹 어떤 이들에게는 위안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그는 히말라야 8000m 고봉 14좌(座)를 완등한 산악인이다. 국내에서는 엄홍길과 고(故) 박영석, 그다음인 세 번째의 완등자다. 세상은 '넘버 3'까지 제대로 기억할 리 없다.
'한왕용 대장'으로 불리던 그는 이제 직원 한 명을 둔 트레킹 전문 여행사의 대표로 변신해 있었다. 히말라야 원정 대신 그는 고객을 이끌고 몽블랑, 돌로미테, 파타고니아, 잉카, 아이슬란드 등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지 올해로 15년이 됐습니다. 그 목표를 이루고 난 뒤 무기력증에 빠졌습니다. 자신을 바쳐 해야 할 일이 사라졌으니까요. 히말라야에 오르는 것보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더 힘들다는 말이 맞았습니다."
―국내에서 세 번째 완등이라 매스컴의 주목을 못 받았지요?
"우리나라는 1등만 알아주는데…, 3등은 명함 내밀 데가 없지요. 엄홍길과 박영석 선배가 열띤 경쟁을 벌이며 14좌 완등을 한 뒤라 제가 계속 한다는 것에 심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도전은 처음이 의미가 있지, 남들이 이뤄 놓은 것을 뒤따라가면 도전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이미 게임이 끝난 14좌 완등에 매달리는 제 모습에 '바보 아니냐'고 비웃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도 14좌 등정을 계속한 이유는요?
"그때 저는 히말라야 8개 봉우리를 등정한 상태였습니다. 솔직히 중간에 멈출 수 없었습니다. 기록보다는 저 자신을 위해 매듭은 지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엄홍길과 박영석에 비해 지명도가 낮아 대기업으로부터 원정 경비를 후원받는 것도 쉽지 않았지요?
"처음에는 엄홍길이나 박영석 원정대의 대원으로 참가했습니다. 그러다가 제 원정대를 꾸렸지요. 제가 좋아서 하는 등반인데 남에게 도움을 바라는 것이 싫었습니다. 기업의 후원과 협찬을 받으면 그만큼 자유롭지 못하니까요. 제가 이끄는 원정대는 각자 나름대로 번 돈으로 원정 경비를 부담했습니다."
―가장은 바깥에서 돈을 벌어 귀가해야 하는데, 생활도 안 되고 전망도 없는 등반을 계속할 때 가족은 뭐라고 했습니까?
"간호사인 아내가 집안을 꾸렸던 셈입니다. 결혼한 지 4년이 된 2003년에는 14좌 완등을 위해 남은 봉우리가 가셔브롬2봉과 브로드피크봉이었습니다. 저는 원정을 떠나는 게 일상(日常)이었으므로 당연히 아내도 익숙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당신이 그동안 원정을 떠나 있을 때 한 번도 편히 잠을 못 잤다'는 말을 처음 꺼냈습니다. 아내에게 그런 불안을 줬다는 게 미안했어요. 그래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번으로 히말라야 등반은 끝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결과론적으로 14좌 완등을 이뤘으니, 그 마지막 등반은 성공적이었군요.
"가셔브룸2봉을 등정한 뒤 내려오다가 몸이 허공으로 떨어졌습니다. 크레바스(빙하의 갈라진 틈)를 밟은 겁니다. 항아리처럼 생긴 크레바스 속에서 제 몸이 대롱대롱 매달렸습니다. 대원들이 30분 넘게 로프를 끌어당겨 저를 살렸습니다. 이런 사고를 겪고서도 브로드피크봉으로 가 14좌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히말라야 고산 등반은 목숨을 거는 모험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뭔가 심심해요. 매스컴의 조명을 받지 못한 데는 '넘버 3'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스토리를 강렬하게 대중에게 전달 못 해 그랬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제 등반 과정을 극적으로 포장을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정해진 루트(route)를 따라 올라가는 방식의 히말라야 등반을 생사를 넘나드는 행위로 과장할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죽을 고비는 많이 있었습니다. 2000년에는 K2봉을 등정하고 내려와서 죽을 뻔했습니다. 쇠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으로 쓰러졌으니까요. 응급처치를 받고 헬기로 후송됐습니다. 뇌혈관 확장 수술을 받아야 했지요. 그럼에도 노멀(normal) 루트로 올라가는 등반은 고산 등반 능력을 갖춘 전문 산악인에게는 크게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공식만 벗어나지 않으면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그때 우리는 히말라야 봉우리를 남들이 가지 않은 루트로 올라가느냐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더 많이 오르느냐를 두고 경쟁했습니다. 이미 남이 올라갔던 길, 만들어놓았던 길. 상대적으로 쉬운 길을 골라 또 올라가는 것입니다. 소위 '등정(登頂)주의'였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여기에는 모험의 본질이 사라진 거죠."
―당시에도 14좌 완등 경쟁을 '땅 따먹기 식'이라는 비판은 있었지만, 일반 사람들은 그런 등반조차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전문 산악인의 세계에서 말하는 겁니다. 고산 등반에서 가장 위험한 요소는 날씨입니다. 하지만 인공위성의 일기예보 자료를 구입할 수 있게 됐습니다. 등산 장비의 기능성도 좋아졌고요. 돈만 내면 전문산악인이 달라붙어 산소마스크를 씌운 일반 고객을 에베레스트봉까지 올려줄 수 있게 됐습니다. 공식대로 가면 어느 확률까지 안전할 수 있다는 겁니다."
―8000m 고산 자체에 항상 예기치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왜 당신 스스로 14좌 완등에 대해 낮게 평가하려는 겁니까?
"저는 최대치의 능력을 발휘했던 것 같습니다. 제 능력은 노멀 루트로 올라가는 것 거기까지였습니다. 당시 어떻게 올라가느냐의 과정을 중시하는 '등로(登路)주의' 바람이 불었다면 저는 산악인 축에 끼지 못했을 겁니다."
―별말씀을. 히말라야 14좌 완등은 여전히 후배 산악인에게도 큰 목표가 아닐까요?
"제가 14좌 완등을 한 뒤 이를 우려먹기 위해 여러 이벤트를 펼쳤으면 산악계에서 욕먹었을 겁니다. 세계적인 추세가 '등로주의'로 바뀌고 있었는데, 그 시점에 제가 잘 끝낸 것 같습니다. 더 나은 등반은 후배들의 몫입니다."
그는 전주 우석대 산악부에 들어갔고, 1994년 초오유봉 등정으로 히말라야와 인연을 맺었다. 그가 14좌 완등을 하는 과정에서 단 한 명의 동료도 잃지 않았다는 것은 특기할 점이다.
―당신은 체력이 고갈 난 상태에서 눈앞에 정상(頂上)이 보이면 그래도 끝까지 올라가는 쪽이었습니까, 아니면 단념하고 내려오는 쪽이었습니까?
"저는 겁이 많아 몸을 사리는 쪽이었지요. 운도 좋았습니다. 히말라야 14좌를 처음 완등한 전설적 산악인 라인홀트 매스너는 '나는 살아서 돌아왔다'는 책을 썼듯이 등반의 완성은 살아서 내려오는 데 있습니다."
―정상을 눈앞에 두고 퇴각 결정은 어렵습니다. 현실적으로 원정대를 꾸리기가 쉽지 않고 철수하면 다음을 기약하기 쉽지 않지요.
"그렇지만 저는 그런 결정이 빠릅니다.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철수를 해야 할 시점인데, '혹 좋아질지 모르니 조금 더 기다려보자'며 머뭇거리면 시기를 놓칩니다. 더욱 위험에 빠지게 되고 결국 다음에 다시 해 볼 기회까지 없어집니다."
―그런 진퇴 결정을 순전히 본인의 경험에 의해 내렸습니까?
"올라가느냐 퇴각하느냐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날씨입니다. 저는 기상 조건에 관해서는 현지인 셰르파(등반가이드)의 말을 따릅니다. 이들만큼 그쪽 날씨를 더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등반과 트레킹을 합쳐 50회 이상 히말라야 산을 다녀 어떤 루트에서는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지인 셰르파를 꼭 고용합니다. 예기치 않는 상황이 발생할 때는 특히 이들의 판단이 중요합니다. 갑을(甲乙)의 고용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파트너로 대하면 이들은 제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줬습니다."
―14좌 완등을 하고 나니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제게 스스로 부과한 숙제를 마쳤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제가 완등해도 엄홍길과 박영석 선배처럼 관심을 안 가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직장 생활에는 좀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은 있었지요. 완등하기 전 해인 2002년부터 등산 장비 업체의 홍보부장으로 들어갔으니까요."
―산에만 다니다가 직장 생활을 해보니 어땠습니까?
"안정된 직장 생활이 너무 좋았습니다. 등반 경험을 살려 등산 제품 개발에도 참여하고, 제품 홍보를 위해 연예인들과 산행하는 방송 프로에도 나갔습니다. 각국의 산악인들이 히말라야에 버려놓은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 등반도 그때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7년간 근무했을 때, 사세를 확장한 그 등산 장비 업체는 더 지명도가 있는 산악인 엄홍길씨를 이사로 영입했다.
"회사에서 제게 관두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회사를 나간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창피한 거예요. 내가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었어요. 듣는 순간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을 뿐입니다."
세월이 흘렀는데도 술자리에서 그는 상처의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지었다.
"제 마음을 정말 아프게 한 것은 잘린 뒤였습니다. 회사 관계자가 '사장님과 자리를 한번 하자'고 연락해왔습니다. 제가 어려울 때 그분이 챙겨준 것을 생각했습니다. 마음이 풀렸습니다. 약속 시간에 맞춰 회사 바로 앞에 왔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사장님이 바쁜 일이 있어 나갔다'는 겁니다."
아마 그 등산 업체 사장은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그 뒤로 지인의 제안으로 여행사 일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2012년 '한왕용의 트레킹이야기'라는 여행사를 차렸다. 앞서 말한 대로 직원은 한 명이다. 한 번 다녀간 고객의 구전(口傳)이 고객들을 끌어온다고 한다.
밥벌이는 한때 천하의 14좌 완등자에게 굴욕을 줬지만 이제 그는 세상에 풍광 좋은 곳만을 다니고 있다. 그를 보고 있으면 후반부 인생이 이렇게 펼쳐질 수도 있으니 성급할 게 없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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