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차대전 중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150만 명 학살 등 고난의 역사로 점철
⊙ ‘노아의 방주’ 아라라트산이 보이는 호르비랍수도원,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槍이 발견됐다는 게가르드수도원, 코카서스에서 유일하게 그리스식 列柱가 있는 가르니사원
⊙ 스탈린 때문에 사라질 뻔했던 제주도만 한 면적의 세반호수
허우범
1961년생.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교육학 석사, 박사 과정 수료(융합고고학) / 인하대 홍보팀장, 同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대외협력처 부처장 역임. 현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원 / 저서 《삼국지기행》 《동서양 문명의 길 실크로드》
⊙ ‘노아의 방주’ 아라라트산이 보이는 호르비랍수도원,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槍이 발견됐다는 게가르드수도원, 코카서스에서 유일하게 그리스식 列柱가 있는 가르니사원
⊙ 스탈린 때문에 사라질 뻔했던 제주도만 한 면적의 세반호수
허우범
1961년생.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교육학 석사, 박사 과정 수료(융합고고학) / 인하대 홍보팀장, 同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대외협력처 부처장 역임. 현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원 / 저서 《삼국지기행》 《동서양 문명의 길 실크로드》
코카서스 3개국은 아르메니아・조지아・아제르바이잔을 일컫는다. 코카서스 산맥이 이 나라들을 감싸고 있는 데서 이르는 말이다. 이 세 나라는 동서로 카스피해(海)와 흑해, 남북으로 이란・터키 및 러시아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옛날부터 실크로드의 요충지(要衝地)로서 중시됐다.
점심때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모스크바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 도착하니 현지시각으로 새벽 1시. 16시간 만에 코카서스의 첫 나라에 도착했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해보지만 피곤한 몸과는 다르게 정신은 말똥하다. 5시간이란 시차가 있으니 우리나라로 치면 아침 6시, 이제 일어날 시각이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호텔 창밖으로 접하는 예레반의 첫인상은 엽서 속의 풍경이다. 멀리 만년설(萬年雪) 덮인 산맥이 보이고 구릉과 평지에는 고만고만한 건물들이 조밀하게 늘어섰다. 뉴욕과 상하이(上海)처럼 빌딩 숲이 아닌 것이 오히려 아늑하다. 청명한 하늘과 공기가 아침 햇살을 타고 도시 전체를 감싸고 그 사이로 정겨운 새들의 지저귐이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아르메니아 여행은 크게 세 곳으로 나뉜다. 시내를 돌아보며 아르메니아인의 삶과 역사 둘러보기, 그들이 성산(聖山)으로 여기는 아라라트산이 가까운 호르비랍 지역과 와인 생산지, 해발 1900m에 있는 휴양지 세반호수 지역이다. 우리는 시내를 둘러보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國花는 물망초
“아르메니아의 국화(國花)가 뭔지 아십니까?”
우리의 안내를 맡은 아르메니아인은 한국말을 잘했다. 그러하니 더욱 친근감이 간다.
“글쎄요?”
“물망초(勿忘草)입니다. 혹시 그 꽃의 꽃말을 아시나요?”
“‘나를 잊지 마세요’죠.”
“맞아요. 우리는 디아스포라와 대학살이라는 슬픈 역사가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물망초를 국화로 정했어요.”
아르메니아인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강제 이주와 학살을 당했다. 전쟁 당시 이들이 적국(敵國)인 러시아와 손을 잡으려 했다는 이유에서다. 학살로 희생된 인원은 150만명에 이른다. 이 대학살을 피해 많은 난민이 세계 도처로 흩어졌다. 가이드는 “아르메니아 인구는 300만명에 불과하지만, 외국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은 대략 600만명에 달한다”고 말한다.
디아스포라의 슬픈 역사는 예레반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도심을 흐르는 라잔강(江) 서쪽 언덕에는 제노사이드 추모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대학살 50주년인 1965년에 아르메니아인들이 당시 소련 정부에 학살의 인정과 위령탑(慰靈塔) 건설을 요구하는 시위를 통해 얻어낸 것이다.
추모공원 입구에는 이곳을 방문한 각국의 주요 인사들이 심은 수목(樹木)들이 있다. 학살 당시 희생자들의 마을이 새겨진 추모의 벽을 지나면 남쪽으로 아라라트산을 바라보며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추모비는 12개의 석판이 원형으로 둘러섰고 오른편에는 40m에 이르는 첨탑이 우뚝하다. 12개의 석판은 오늘날 터키의 영토가 된 소(小)아르메니아의 12개 지방을 의미한다. 첨탑도 두 개로 이루어졌는데, 작은 것은 소아르메니아를 의미한다.
원형의 석판으로 들어가니 가운데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불꽃 주변에는 추모객들이 놓고 간 조화(弔花)가 가지런하다. 평화를 상징하는 흰 비둘기가 몇 마리 날아든다. 잠시 묵상에 잠기려 할 때 비둘기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진다. 다가서도 날지 않는다. 비둘기는 날개도 상했고 눈도 다쳤다. 대학살을 당한 영혼들의 절규인가.
국립역사박물관
국립역사박물관. 사진 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어서 섭섭한 마음을 달래며 눈으로만 살펴본다. 전시실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아르메니아의 역사를 주제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아르메니아는 실크로드의 길목에 위치했다는 이유로 언제나 여러 민족의 각축장이었다. 이로 인해 융합의 문화를 꽃피우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복속의 역사였다. 특히 참담함과 슬픔으로 점철된 근현대사는 이를 둘러보는 사람들에게 동정과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박물관을 둘러본 후 기념으로 도록(圖錄)이라도 사려고 했으나 구할 수가 없다. 박물관이 도록 자체를 만들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나라가 박물관에서의 사진촬영을 허가한다. 아르메니아는 오스만튀르크제국에 의한 제노사이드가 국제적으로 공인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자면 박물관의 전시물을 누구나 촬영할 수 있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아르메니아의 역사를 전 세계에 알리게 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지 않을까.
박물관 앞에는 멋진 분수대가 있다. 분수대 앞은 공화국 광장으로 불린다. 구소련 시대의 공화국 도시마다 레닌 광장이 있었듯이 이곳도 예전에는 그렇게 불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광장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곳에는 박물관을 비롯하여 정부부처와 미술관, 호텔이 있다. 이곳이 고대 실크로드의 주요 도시였었다는 흔적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유럽풍의 현대적 건물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핑크도시’ 예레반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을 현대풍의 도시로 설계한 이는 알렉산드르 타마니안이다. 그는 흑해 연안 출신의 뛰어난 건축가로 45세 때에 아르메니아로 이주해 15년을 살았다.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도 예레반이다. 아르메니아를 사랑한 그는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그가 설계한 예레반 시내의 건물들은 대부분이 응회암(凝灰巖)으로 지어졌다. 이 석재는 화산이 분출할 때 재와 모래가 엉겨서 굳어진 돌로 연한 분홍색이다. 그래서 예레반을 가리켜 ‘핑크도시’라고 부른다.
공화국 광장에서부터 인공계단폭포가 있는 캐스케이드 공원까지 가는 길은 예레반의 중심가이다. 이 길을 걷노라니 오페라하우스가 근사한 위용을 자랑한다. 이 건물도 타마니안의 작품이다.
캐스케이드 공원 입구에는 무언가를 골똘히 내려다보는 모습을 한 타마니안의 석상이 있다. 아마도 예레반의 도시 설계도를 보고 있는 것이리라. 석상 뒤로는 넓은 정원이 조성되어 있고 정원 사이사이마다 유명 작가들의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는 폐타이어 조각으로 만든 힘이 넘치는 사자상이 있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 조각가인 지용호의 작품이다. 다른 유명 작품보다도 더 많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정원 끝에는 6개의 계단으로 이뤄진 스피커 모양의 인공폭포 구조물이 있다. 여름이 아니어선지 폭포는 작동되지 않는다. 계단구조물 내부에도 예술작품들이 있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관람할 수 있다. 모두가 현대조각품들이다. 사실 이 공원은 타마니안 생전에는 완성되지 못했다. 1970년대 말 예레반의 도시계획위원장을 역임한 짐 토로스얀이 타마니안의 유작(遺作)에 자신의 생각을 추가하여 건설한 것이다.
〈글래디에이터〉의 마지막을 장식한 피리 두둑
근처에 벼룩시장이 있어서 둘러보기로 했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각종 기념품과 음식을 팔고 있었다. 그중에서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악기인 두둑(Duduk)입니다.”
“오! 우리나라의 피리와 모양이 똑같네요.”
“그렇지요. 두둑은 3000년의 역사를 지닌 악기로 살구나무로 만듭니다.”
“피리와 소리가 같은가요?”
상점 주인이 내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두둑을 물고 연주를 한다. 두둑은 피리처럼 맑고 경쾌한 음색이 아니고 중저음의 소리를 낸다. 잠깐 듣고 있노라니 음악에 문외한인 나도 왠지 모를 우울함과 슬픔 같은 것이 느껴진다.
“영화 〈글래디에이터〉 보셨지요?”
“여러 번 보았죠. 로마시대의 검투사 이야기지요.”
“네, 마지막 장면의 음악이 바로 이 두둑으로 연주한 거예요.”
“주인공의 손끝이 푸른 밀을 스치며 죽어가던 그 장면에서 흐르던 음악이 바로 이 악기에서 나온 것이었군요.”
“네, 그렇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유난히 슬펐는데 바로 이 두둑 연주가 대미를 장식했네요.”
공화국 광장의 평화시위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향하는데 몇십 명의 청년이 도로를 막고 시위를 하고 있다. 아르메니아 국기를 몸에 두른 청년이 ‘자유!’와 ‘총리 교체!’를 외치면 모두가 함께 따라 외친다. 자동차에도 그들의 국기가 걸려 있다. 가이드가 말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반(反)폭력 평화시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대통령제(制)에서 내각제로 바뀌어 첫 총리를 선출하는데, 지난 10년간 대통령을 했던 사람이 다시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대통령 재임기간에 신임을 얻지 못했나요?”
“부패가 심했지요. 그러다 보니 경제도 더 어려워지고 실업률도 높아져서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쉽지 않아요.”
“그렇군요. 그런데 시위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네요?”
“이제 점점 거리로 나올 거예요. 공화국 광장에서 매일 7시에 집회를 열거든요.”
도로 길목마다 모여든 시위대들이 차량을 막고 가두행진을 벌인다. 경찰들도 보이지만 막지는 않는다. 이들은 이를 ‘벨벳혁명’이라고 말한다. 저녁을 먹고 식당을 나서니 공화국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이 행진을 벌인다. 모레가 새로운 총리를 선출하는 날이라는데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노아의 방주’의 아라라트山
다음날, 일찍 호텔을 나섰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성산인 아라라트산을 보다 가까이 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아라라트산은 터키에 속해 있다. 터키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 호르비랍수도원이 아라라트산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다.
“왜 아라라트산이 아르메니아인들의 성산인가요?”
“성경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 아시지요? 그 방주가 걸린 산이 아라라트산이고, 비둘기가 날아오자 노아가 첫 발걸음을 디딘 곳이 이곳 아르메니아 땅입니다.”
“아, 그래서 성산이라고 하는군요.”
“노아가 그때 포도 씨앗을 심었는데 이후로 이곳에 포도가 번창해졌습니다. 5000년 전의 포도 씨앗과 가죽신발도 발견됐답니다. 아레니 지역의 포도가 특히 유명하여 그곳에서 생산되는 와인이 맛있습니다.”
아르메니아는 로마보다도 12년 먼저 기독교를 국교(國敎)로 받아들인 나라다. 호르비랍수도원은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했던 성(聖)그레고리가 13년간 감금됐던 곳이다. 그가 공주의 현몽(現夢)으로 왕의 병을 고쳐준 데 감동을 받은 왕이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아르메니아는 최초의 기독교 왕국이 됐다.
수도원 가까이에 이르자 아라라트산이 손에 잡힐 듯하다. 평원을 수놓은 포도밭 너머 나지막한 언덕에는 이곳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성지(聖地)인 호르비랍수도원이 있다. 그리고 그 뒤로 푸른 하늘에 새하얗게 반짝이는 두 개의 아라라트 봉우리가 기상을 내뿜고 섰다. 아라라트산은 아르메니아인들뿐만 아니라 호르비랍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도 탄성과 경외감을 자아낸다.
예레반 시내로 들어오는 길목 여기저기에 폐허인 채로 버려진 공장들이 보인다. 옛 소련 시절에 가동되다가 독립 이후 폐쇄된 공장들이라고 한다. 공산주의 시절, 계획경제에 따라 도시마다 세워졌던 공장들이 이제는 흉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저녁을 먹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어서 예레반 시내에 있는 고문서(古文書)박물관을 찾았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메스로프 마슈토츠 고문서관이다. 마슈토츠는 405년경, 36글자의 아르메니아 문자를 창제한 사람이다. 박물관 입구에는 마슈토츠와 그의 제자상이 있고, 벽면에는 그가 창제한 문자로 처음 적었다는 솔로몬의 잠언(箴言)이 새겨져 있다. 아르메니아 문자는 몇 번의 변화를 겪었지만, 마슈토츠 덕분에 소련시대에도 문자 해독률이 90%에 달했다고 한다.
박물관 안에는 1만7000여 권의 중세(中世)시대 책과 필사본 등 귀한 자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휴관일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의 문자에 대한 자긍심을 살펴보려 했는데 못내 아쉽기만 하다.
‘우리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일했다’
아르메니아는 최초의 기독교 국가답게 수도원과 교회가 많다. 게가르드수도원도 아르메니아를 대표하는 곳이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세워진 수도원은 암굴에서 시작됐다. 호르비랍에 감금됐던 그레고리가 맨 처음에 이곳 동굴에서 성스러운 샘물을 발견하고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槍)이 발견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와 함께 빠뜨릴 수 없는 곳이 가르니사원이다. 이곳은 코카서스 지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리스식 열주(列柱)가 있는 사원이다. 몽골 침입 당시에 무너진 것을 소련 시대의 고고학자들이 복원해 놓았다고 한다. 사원은 강물이 굽이도는 계곡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세워졌다. 계곡의 절벽에 서니 굽이치는 강물이 만든 주상절리(柱狀節理)가 또 다른 절경을 보여준다.
이곳에서는 사원뿐만 아니라 기원전 1세기에 만든 왕의 별장과 목욕탕도 발굴됐다. 사원 건너편에 있는 목욕탕 유적지를 살펴보았다. 입구에는 불을 지펴 물을 끓였을 아궁이가 보인다. 칸칸이 만들어진 방은 온돌의 흔적이 보인다. 맨 안쪽에는 다른 곳보다 한결 넓은 방이 있다. 다른 방에서는 볼 수 없는 색색의 모자이크 타일이 깔려 있다. 반 정도 남아 있는 타일 한가운데에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적혀 있다. 가이드의 말로는 ‘우리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일했다’는 의미라고 한다. 저런 글을 타일에 새겨놓다니 대단히 용감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코카서스 지역에서 가장 큰 淡水湖
해발 1900m에 위치한 세반호수는 아르메니아인들의 휴양지로 이름이 높다. 제주도와 맞먹는 넓이의 호수로 코카서스 지역에서 가장 큰 담수호(淡水湖)다. 호수 안으로 길쭉하게 들어간 끄트머리에 풍경 좋은 세바나반크수도원이 있다. 호수의 북쪽으로는 병풍 같은 설산(雪山)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섰다.
이 수도원은 스탈린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호수 안 섬에 있었다. 수도원에 가려면 배를 타야 했다. 스탈린이 관개용수(灌漑用水) 공급과 수력(水力)발전을 위해 터널을 뚫고 준설(浚渫)을 하면서 호수의 물을 뺐다. 호수의 수위(水位)는 급격히 낮아졌고 수도원은 육지와 연결됐다.
중앙아시아의 아랄해도 무분별한 관개용수 개발로 풍요롭던 어업이 결딴났다. 사막으로 변한 아랄해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세반호수도 아랄해의 전철(前轍)을 밟을 뻔했다. 스탈린이 죽자 공사가 전면 중단됐다. 수위를 되돌리기 위해 수력발전도 화력발전으로 대체했다. 그 결과 세반호수는 살렸지만 수도원은 옛 모습을 찾지 못했다.
조지아로 가기 위해 국경으로 향한다. 국경 근방의 터널을 지나 갑자기 무성한 숲이 펼쳐진다. 멀리 국경마을과 호수도 보인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영토문제 등을 놓고 앙숙관계지만 호수는 공동으로 관리한다고 한다. 생명수(生命水)인 물이 두 나라의 적대(敵對)관계를 씻어주고 있는 셈이다. 두 나라의 평화와 공존을 기원하며 다음 목적지인 조지아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점심때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모스크바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 도착하니 현지시각으로 새벽 1시. 16시간 만에 코카서스의 첫 나라에 도착했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해보지만 피곤한 몸과는 다르게 정신은 말똥하다. 5시간이란 시차가 있으니 우리나라로 치면 아침 6시, 이제 일어날 시각이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호텔 창밖으로 접하는 예레반의 첫인상은 엽서 속의 풍경이다. 멀리 만년설(萬年雪) 덮인 산맥이 보이고 구릉과 평지에는 고만고만한 건물들이 조밀하게 늘어섰다. 뉴욕과 상하이(上海)처럼 빌딩 숲이 아닌 것이 오히려 아늑하다. 청명한 하늘과 공기가 아침 햇살을 타고 도시 전체를 감싸고 그 사이로 정겨운 새들의 지저귐이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아르메니아 여행은 크게 세 곳으로 나뉜다. 시내를 돌아보며 아르메니아인의 삶과 역사 둘러보기, 그들이 성산(聖山)으로 여기는 아라라트산이 가까운 호르비랍 지역과 와인 생산지, 해발 1900m에 있는 휴양지 세반호수 지역이다. 우리는 시내를 둘러보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國花는 물망초
제노사이드 추모공원의 추모비. 1차대전 말기 오스만튀르크제국에 의해 150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됐다. |
우리의 안내를 맡은 아르메니아인은 한국말을 잘했다. 그러하니 더욱 친근감이 간다.
“글쎄요?”
“물망초(勿忘草)입니다. 혹시 그 꽃의 꽃말을 아시나요?”
“‘나를 잊지 마세요’죠.”
“맞아요. 우리는 디아스포라와 대학살이라는 슬픈 역사가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물망초를 국화로 정했어요.”
아르메니아인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강제 이주와 학살을 당했다. 전쟁 당시 이들이 적국(敵國)인 러시아와 손을 잡으려 했다는 이유에서다. 학살로 희생된 인원은 150만명에 이른다. 이 대학살을 피해 많은 난민이 세계 도처로 흩어졌다. 가이드는 “아르메니아 인구는 300만명에 불과하지만, 외국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은 대략 600만명에 달한다”고 말한다.
디아스포라의 슬픈 역사는 예레반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도심을 흐르는 라잔강(江) 서쪽 언덕에는 제노사이드 추모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대학살 50주년인 1965년에 아르메니아인들이 당시 소련 정부에 학살의 인정과 위령탑(慰靈塔) 건설을 요구하는 시위를 통해 얻어낸 것이다.
추모공원 입구에는 이곳을 방문한 각국의 주요 인사들이 심은 수목(樹木)들이 있다. 학살 당시 희생자들의 마을이 새겨진 추모의 벽을 지나면 남쪽으로 아라라트산을 바라보며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추모비는 12개의 석판이 원형으로 둘러섰고 오른편에는 40m에 이르는 첨탑이 우뚝하다. 12개의 석판은 오늘날 터키의 영토가 된 소(小)아르메니아의 12개 지방을 의미한다. 첨탑도 두 개로 이루어졌는데, 작은 것은 소아르메니아를 의미한다.
원형의 석판으로 들어가니 가운데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불꽃 주변에는 추모객들이 놓고 간 조화(弔花)가 가지런하다. 평화를 상징하는 흰 비둘기가 몇 마리 날아든다. 잠시 묵상에 잠기려 할 때 비둘기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진다. 다가서도 날지 않는다. 비둘기는 날개도 상했고 눈도 다쳤다. 대학살을 당한 영혼들의 절규인가.
국립역사박물관
국립역사박물관. 사진 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어서 섭섭한 마음을 달래며 눈으로만 살펴본다. 전시실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아르메니아의 역사를 주제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아르메니아는 실크로드의 길목에 위치했다는 이유로 언제나 여러 민족의 각축장이었다. 이로 인해 융합의 문화를 꽃피우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복속의 역사였다. 특히 참담함과 슬픔으로 점철된 근현대사는 이를 둘러보는 사람들에게 동정과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박물관을 둘러본 후 기념으로 도록(圖錄)이라도 사려고 했으나 구할 수가 없다. 박물관이 도록 자체를 만들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나라가 박물관에서의 사진촬영을 허가한다. 아르메니아는 오스만튀르크제국에 의한 제노사이드가 국제적으로 공인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자면 박물관의 전시물을 누구나 촬영할 수 있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아르메니아의 역사를 전 세계에 알리게 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지 않을까.
박물관 앞에는 멋진 분수대가 있다. 분수대 앞은 공화국 광장으로 불린다. 구소련 시대의 공화국 도시마다 레닌 광장이 있었듯이 이곳도 예전에는 그렇게 불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광장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곳에는 박물관을 비롯하여 정부부처와 미술관, 호텔이 있다. 이곳이 고대 실크로드의 주요 도시였었다는 흔적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유럽풍의 현대적 건물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핑크도시’ 예레반
캐스케이드 공원 입구에 있는 알렉산드르 타마니안의 석상. 타마니안은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과 시내의 주요 건축물들을 설계했다. |
공화국 광장에서부터 인공계단폭포가 있는 캐스케이드 공원까지 가는 길은 예레반의 중심가이다. 이 길을 걷노라니 오페라하우스가 근사한 위용을 자랑한다. 이 건물도 타마니안의 작품이다.
캐스케이드 공원에 있는 한국인 조각가 지용호의 사자상. 廢타이어로 만들었다. |
〈글래디에이터〉의 마지막을 장식한 피리 두둑
아르메니아의 전통 피리 두둑.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곡은 두둑으로 연주한 것이다. |
“이것은 우리나라 악기인 두둑(Duduk)입니다.”
“오! 우리나라의 피리와 모양이 똑같네요.”
“그렇지요. 두둑은 3000년의 역사를 지닌 악기로 살구나무로 만듭니다.”
“피리와 소리가 같은가요?”
상점 주인이 내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두둑을 물고 연주를 한다. 두둑은 피리처럼 맑고 경쾌한 음색이 아니고 중저음의 소리를 낸다. 잠깐 듣고 있노라니 음악에 문외한인 나도 왠지 모를 우울함과 슬픔 같은 것이 느껴진다.
“영화 〈글래디에이터〉 보셨지요?”
“여러 번 보았죠. 로마시대의 검투사 이야기지요.”
“네, 마지막 장면의 음악이 바로 이 두둑으로 연주한 거예요.”
“주인공의 손끝이 푸른 밀을 스치며 죽어가던 그 장면에서 흐르던 음악이 바로 이 악기에서 나온 것이었군요.”
“네, 그렇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유난히 슬펐는데 바로 이 두둑 연주가 대미를 장식했네요.”
공화국 광장의 평화시위
공화국 광장에서는 부패한 전직 대통령이 새 총리로 취임하는 것을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반(反)폭력 평화시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대통령제(制)에서 내각제로 바뀌어 첫 총리를 선출하는데, 지난 10년간 대통령을 했던 사람이 다시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대통령 재임기간에 신임을 얻지 못했나요?”
“부패가 심했지요. 그러다 보니 경제도 더 어려워지고 실업률도 높아져서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쉽지 않아요.”
“그렇군요. 그런데 시위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네요?”
“이제 점점 거리로 나올 거예요. 공화국 광장에서 매일 7시에 집회를 열거든요.”
도로 길목마다 모여든 시위대들이 차량을 막고 가두행진을 벌인다. 경찰들도 보이지만 막지는 않는다. 이들은 이를 ‘벨벳혁명’이라고 말한다. 저녁을 먹고 식당을 나서니 공화국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이 행진을 벌인다. 모레가 새로운 총리를 선출하는 날이라는데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노아의 방주’의 아라라트山
아레니의 와인저장창고. 아르메니아인들은 노아 시대부터 이 나라의 포도 재배가 시작됐다고 믿는다. |
“왜 아라라트산이 아르메니아인들의 성산인가요?”
“성경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 아시지요? 그 방주가 걸린 산이 아라라트산이고, 비둘기가 날아오자 노아가 첫 발걸음을 디딘 곳이 이곳 아르메니아 땅입니다.”
“아, 그래서 성산이라고 하는군요.”
“노아가 그때 포도 씨앗을 심었는데 이후로 이곳에 포도가 번창해졌습니다. 5000년 전의 포도 씨앗과 가죽신발도 발견됐답니다. 아레니 지역의 포도가 특히 유명하여 그곳에서 생산되는 와인이 맛있습니다.”
아르메니아는 로마보다도 12년 먼저 기독교를 국교(國敎)로 받아들인 나라다. 호르비랍수도원은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했던 성(聖)그레고리가 13년간 감금됐던 곳이다. 그가 공주의 현몽(現夢)으로 왕의 병을 고쳐준 데 감동을 받은 왕이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아르메니아는 최초의 기독교 왕국이 됐다.
수도원 가까이에 이르자 아라라트산이 손에 잡힐 듯하다. 평원을 수놓은 포도밭 너머 나지막한 언덕에는 이곳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성지(聖地)인 호르비랍수도원이 있다. 그리고 그 뒤로 푸른 하늘에 새하얗게 반짝이는 두 개의 아라라트 봉우리가 기상을 내뿜고 섰다. 아라라트산은 아르메니아인들뿐만 아니라 호르비랍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도 탄성과 경외감을 자아낸다.
예레반 시내로 들어오는 길목 여기저기에 폐허인 채로 버려진 공장들이 보인다. 옛 소련 시절에 가동되다가 독립 이후 폐쇄된 공장들이라고 한다. 공산주의 시절, 계획경제에 따라 도시마다 세워졌던 공장들이 이제는 흉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저녁을 먹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어서 예레반 시내에 있는 고문서(古文書)박물관을 찾았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메스로프 마슈토츠 고문서관이다. 마슈토츠는 405년경, 36글자의 아르메니아 문자를 창제한 사람이다. 박물관 입구에는 마슈토츠와 그의 제자상이 있고, 벽면에는 그가 창제한 문자로 처음 적었다는 솔로몬의 잠언(箴言)이 새겨져 있다. 아르메니아 문자는 몇 번의 변화를 겪었지만, 마슈토츠 덕분에 소련시대에도 문자 해독률이 90%에 달했다고 한다.
박물관 안에는 1만7000여 권의 중세(中世)시대 책과 필사본 등 귀한 자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휴관일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의 문자에 대한 자긍심을 살펴보려 했는데 못내 아쉽기만 하다.
‘우리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일했다’
가르니사원은 코카서스 지역에서 유일하게 그리스식 列柱를 가진 사원이다. |
게가르드수도원의 성가대. 동굴수도원 안에서 듣는 성가는 특별한 울림이 있다. |
이곳에서는 사원뿐만 아니라 기원전 1세기에 만든 왕의 별장과 목욕탕도 발굴됐다. 사원 건너편에 있는 목욕탕 유적지를 살펴보았다. 입구에는 불을 지펴 물을 끓였을 아궁이가 보인다. 칸칸이 만들어진 방은 온돌의 흔적이 보인다. 맨 안쪽에는 다른 곳보다 한결 넓은 방이 있다. 다른 방에서는 볼 수 없는 색색의 모자이크 타일이 깔려 있다. 반 정도 남아 있는 타일 한가운데에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적혀 있다. 가이드의 말로는 ‘우리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일했다’는 의미라고 한다. 저런 글을 타일에 새겨놓다니 대단히 용감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코카서스 지역에서 가장 큰 淡水湖
세반호수와 세바나반크수도원. 원래 수도원은 호수 안의 섬에 있었다. |
이 수도원은 스탈린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호수 안 섬에 있었다. 수도원에 가려면 배를 타야 했다. 스탈린이 관개용수(灌漑用水) 공급과 수력(水力)발전을 위해 터널을 뚫고 준설(浚渫)을 하면서 호수의 물을 뺐다. 호수의 수위(水位)는 급격히 낮아졌고 수도원은 육지와 연결됐다.
중앙아시아의 아랄해도 무분별한 관개용수 개발로 풍요롭던 어업이 결딴났다. 사막으로 변한 아랄해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세반호수도 아랄해의 전철(前轍)을 밟을 뻔했다. 스탈린이 죽자 공사가 전면 중단됐다. 수위를 되돌리기 위해 수력발전도 화력발전으로 대체했다. 그 결과 세반호수는 살렸지만 수도원은 옛 모습을 찾지 못했다.
조지아로 가기 위해 국경으로 향한다. 국경 근방의 터널을 지나 갑자기 무성한 숲이 펼쳐진다. 멀리 국경마을과 호수도 보인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영토문제 등을 놓고 앙숙관계지만 호수는 공동으로 관리한다고 한다. 생명수(生命水)인 물이 두 나라의 적대(敵對)관계를 씻어주고 있는 셈이다. 두 나라의 평화와 공존을 기원하며 다음 목적지인 조지아로 발걸음을 재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