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사스 3국, 아제르바이잔

2018. 8. 3. 14:54건강과 여행

코카서스 3국 기행 〈3〉 아제르바이잔

‘바람의 도시’를 ‘불꽃의 도시’로 바꾼 카스피해의 오일머니

글 : 허우범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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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더의 부하 장수가 세운 터키계 민족의 나라… 언어의 80%가 터키어와 같아
⊙ 셰키왕의 여름궁전, 베니스 무라노産 유리로 만든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 알렉산더 뒤마도 감탄
⊙ 古代 실크로드의 일부… 카라반들의 숙소였던 카라반 사라이는 호텔이나 카페로 개조되어 성업 중

허우범
1961년생.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교육학 석사, 박사 과정 수료(융합고고학) / 인하대 홍보팀장, 同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대외협력처 부처장 역임. 현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원 / 저서 《삼국지기행》 《동서양 문명의 길 실크로드》
카스피해를 둘러싸고 있는 바쿠만과 바쿠 시내의 모습. 오일달러의 힘으로 세워진 현대적인 빌딩들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꾸고 있다.
  조지아 국경을 통과하여 아제르바이잔에 입국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와 사이가 좋지 않다. 지금도 국경에서는 종종 충돌이 일어나곤 한다. 두 나라 모두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영토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나라를 오갈 때에는 특히 신경이 쓰인다. 자칫 운이라도 사나운 날이면 모든 짐을 샅샅이 조사받아야 한다. 오늘은 입국자들이 밀려 있기 때문인가. 여권을 살펴보던 심사자는 나의 이름만 확인하고는 수월하게 입국을 허가한다.
 
  미리 마중 나온 안내자와 반갑게 인사하고 셰키(Shaki)로 향한다. 국경에서 셰키까지는 자동차로 두 시간 정도의 거리다.
 
  “아제르바이잔도 고유의 언어가 있나요?”
 
  “네, 그런데 터키어와 거의 비슷합니다.”
 
  “터키어를 쓰는 것은 아니고요?”
 
  “똑같진 않아요. 그런데 80% 정도가 같습니다.”
 
  “참 신기하네요.”
 
  “그래서 ‘한 민족 두 나라’라고도 합니다.”
 
  아제르바이잔 대통령과 터키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할 때에 통역 배석이 없이도 소통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인가. 이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아제르바이잔 튀르크어’라고 부른다.
 
  아제르바이잔은 우리나라보다 약간 작은 나라다. 북으로 코카서스 산맥, 동쪽으로 카스피해(海), 남서쪽으로는 초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드넓은 초원 지역은 농업이 발달해 있고, 카스피해 지역은 원유와 가스가 무진장으로 매장되어 있다.
 
  아제르바이잔도 고대(古代)부터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다. 역사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8세기 메디아왕국 때부터다. 이때 아제르바이잔은 메디아왕국의 일부였다. 아제르바이잔이 최초로 독립국가가 된 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무찌르고 이 지역을 차지한 이후다. 알렉산더 대왕의 참모 중 이곳 출신인 아트로파테스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가 코카서스를 다스리는 총독이 됐는데, 그의 이름에서 아제르바이잔이라는 국명(國名)이 유래됐다고 한다.
 
  이후 부침(浮沈)을 거듭하던 아제르바이잔은 7세기부터 아랍의 지배를 받았다. 11세기에는 셀주크튀르크, 13세기에는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16세기부터 근 3세기 동안은 페르시아와 오스만튀르크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했다. 그러면서 이슬람이 이 땅으로 들어왔다.
 
  19세기 초반 제정(帝政)러시아가 이곳으로 진출했다. 19세기 중엽에는 남북으로 분리되어 제정러시아와 페르시아의 보호령(保護領)이 되기도 했다. 19세기 후반 카스피해에서 원유(原油)가 발견됐다. 아제르바이잔은 이때부터 세계적인 산유국(産油國)이 됐다.
 
 
  隊商들의 숙소 카라반 사라이
 
18세기에 건축된 카라반 사라이. 현재도 호텔로 사용 중이다.
  코카서스 산맥의 남쪽에 위치한 셰키는 1만8000명이 살고 있는 한적한 시골이다. 나지막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이곳은 한눈에 보아도 살기 좋은 마을임을 알 수 있다. 3000년의 역사를 지닌 이 마을은 아제르바이잔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셰키라는 지명은 기원전 4세기에 흑해(黑海)에서 살고 있던 사카족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됐다.
 
  마을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이곳도 고대 실크로드 대상(隊商·카라반)들의 주요 교역로였다. 이곳에서는 실크 제조와 수공예가 유명했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실크와 수공예품을 판매하고 체험하는 공방(工房)들이 운영되고 있다. 18세기에 지어진 대상들의 숙소인 카라반 사라이는 시설과 크기에 있어서도 여타 도시에 뒤지지 않는다. 이 지역이 산골마을이지만 바쿠에서 조지아로 넘어가는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지였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대상들은 수십 마리에서 수백 마리의 낙타를 이끌며 실크로드의 교역품을 실어 날랐다. 낙타가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는 최대 40km 정도였다. 대상들의 숙소인 카라반 사라이는 낙타의 하루 거리에 맞춰 위치했다. 카라반 사라이에는 낙타가 먹고 쉴 수 있는 공간과 인부들의 숙소, 목욕탕과 바자르 등의 부대시설도 필수조건이다. 대상들은 이곳에서 여독을 풀며 다음 여정을 준비했다.
 
  카라반 사라이에서는 교역과 정보 교환도 이루어졌다. 지역관리들은 이곳을 세금징수 장소로도 활용했다.
 
  카라반 사라이의 활성화는 지역경제에도 한몫을 했다. 대상들이 숙소에서 묵어감에 따라 여러 가지 경제적 이득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역 영주(領主)들은 앞을 다퉈 카라반 사라이를 짓고 대상들에게 무료로 제공했다. 대상들은 자신들이 오가는 길목에 위치한 카라반 사라이에 적절한 도움을 주면서 자신들의 사업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지금은 호텔로 개조된 셰키의 카라반 사라이는 옛 모습을 잃지 않고 오가는 여행자들의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 옛날 낙타와 인부들이 쉬었던 장소는 각종 기념품을 판매하는 상점으로 변했다.
 
 
  베니스産 색유리로 만든 스테인드글라스
 
셰키왕의 여름궁전 전경.
  셰키는 실크로드의 요충지이기도 하지만 왕의 여름궁전으로도 유명하다. 러시아에 합병되기 전 76년간 이곳에는 셰키왕국이라는 작은 왕국이 있었다. 카라반 사라이가 성황을 이룰 때였다. 왕국의 통치자인 후세인 무스타크 왕은 풍광이 좋은 곳에 40개의 궁전을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오직 한 곳만 남아 있다.
 
  카라반 사라이와 공방거리를 지나 언덕에 오르면 작은 성채가 나타난다. 그 안에는 코카서스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셰키왕의 여름궁전이 있다. 이 궁전은 1797년에 지어졌다. 궁전 앞에는 정원수로 심은 나무가 좌우를 지키고 서 있다. 높이가 42m, 둘레가 14m나 된다. 이 궁전의 역사를 간직한 이 나무는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고 있다.
 
화려한 색채의 스테인드글라스인 ‘세베케’. 베니스 무라노산 유리로 만들었다.
  궁전 내부는 관람인원 수가 정해져 있어서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밖에서 보는 궁전은 그리 아름다운 축에 들지 못한다. 하나 내부를 보는 순간, 그러한 생각은 번개처럼 사라진다. ‘세베케’라고 부르는 화려한 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난다.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호두나무로 만든 작고 세밀한 5500개의 틀에 박혀 환상적인 정취를 연출한다. 이탈리아 베니스의 무라노산(産) 색유리로 만들었는데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이드가 설명한다.
 
  “천장과 벽의 그림들은 시인 나짜미의 글을 바탕으로 그린 것입니다.”
 
  “엄청 화려하네요. 당시에 그린 것인가요?”
 
  “네. 템페라 기법이라고 하는데, 안료에 달걀노른자를 섞어서 변하지 않습니다.”
 
  왕의 집무실 천장에는 사자 두 마리가 왕관을 받드는 문양이 선명하다. 벽에는 사냥하는 모습, 몽골과의 전쟁 장면 등이 보인다. 접견실에는 용과 꽃의 그림이 화려하다.
 
템페라 기법으로 그린 궁전 내부의 천장 벽화.
  독특한 그림이 보인다. 왕관을 쓴 사자가 생선을 밟고 있고 뱀이 사자를 물려고 하는 그림이다. 왕 스스로가 항상 자만과 나태를 경계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독서실도 있는데 흰색과 하늘색뿐이다. 잡념을 없애고 독서에 집중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왕비실은 화려한 색상의 꽃과 새들의 그림으로 가득하다.
 
  물을 끌어들여서 분수대를 만든 것이 특이하다. 가습과 냉방의 효과도 있다고 하니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외부에서 볼 때는 별로 대단할 것 없어 보이던 총 6개 방의 2층짜리 궁전의 내부는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코카서스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전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프랑스의 문호 알렉산드르 뒤마는 이 궁전을 둘러보고는 “위대한 신이시여! 이 아름답고 역사적인 유적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해 주소서”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셰키왕의 여름궁전을 드높이는 홍보문구가 되어 오늘도 이곳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땅에도 귀가 있다”
 
여름궁전 입구의 대통령 사진. 일함 알리예프는 구소련 시절 아제르바이잔공산당 제1서기 출신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강권통치를 하고 있다.
  궁전을 나와 언덕길을 내려가는데 길가에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의 사진이 큼지막하다. 그는 부친인 게이다르 알리예프에 이어 대통령의 자리에 앉았다. 부친은 소련 시절 이곳 공산당 제1서기였다. 소련 붕괴 후 독립한 국가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그도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됐다. 2003년 부친이 사망하자 아들 일함이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 역시 부친처럼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독재정치를 행하고 있다. 그는 ‘대통령 3선’을 금지한 헌법조항을 폐지했다. 올해 2월에는 부인을 부통령에 임명했다. 4월에는 6개월을 앞당겨 대통령 선거를 실시, 90%에 이르는 찬성표를 얻어 4선 대통령이 됐다. 임기는 2025년까지다.
 
  “아버지와 아들이 근 50년에 걸쳐서 독재를 하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나요?”
 
  “경제가 많이 좋아졌어요.”
 
  “정치가 발전해야 진정한 민주국가가 될 수 있을 텐데요?”
 
  “우리나라 속담에 ‘땅에도 귀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민들은 구(舊)소련의 잔재가 배어 있는 독재정치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꺼려 한다. 비밀경찰이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인가.
 
 
  메이든 탑의 전설
 
바쿠로 가는 길목의 목가적인 풍경.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로 가는 길목은 몇 개의 산길을 넘어가야 한다. 이따금씩 만나는 가판에는 둥글고 알록달록한 모양의 과자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다. 이곳의 전통과자인 ‘할바’다. 할바는 꿀과 호두를 넣어서 만든다. 너무 달아서 홍차와 함께 먹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생김새와 맛이 꼭 우리나라의 반대기 엿과 같다.
 
  바쿠의 외곽에 접근하자 황량한 땅에 모래바람이 뿌옇다. 바람 사이로 여기저기 낮은 집들이 빼곡하다. 바쿠가 왜 ‘바람의 도시’인지 초입에서부터 실감한다. 하지만 모래바람과 뙤약볕보다 더 끔찍한 것은 도로와 마을, 골목 사이를 무질서하게 질주하는 고압선들이다.
 
바쿠성을 지키기 위해 세워진 메이든 탑.
  바쿠는 12세기 즈음에 실크로드의 중요한 중개무역 장소였다. 바쿠의 중심부에 위치한 구시가지에는 고대 실크로드의 유적들이 여럿 남아 있다. 11세기 건립된 시그니갈라 미나레트(첨탑)와 성벽, 12세기에 지어진 메이든 탑과 목욕탕, 15세기의 시르반샤 궁전 등이 중세도시의 위용을 간직하고 있다.
 
메이든 탑 주변의 실크로드 교역터에는 당시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원통형 모양의 독특한 탑인 메이든 탑은 성곽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 탑은 페르시아, 아랍, 터키, 러시아 등 다양한 민족들의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도 바쿠가 실크로드의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역사적인 유적에는 전설이 있다. 이곳 메이든 탑에는 어떤 전설이 있을까. 가장 유력한 전설은 이곳을 다스리는 왕이 공주인 메이든을 너무 사랑했다고 한다. 이에 공주가 탑을 세워달라고 하고 탑이 완성되자 꼭대기에서 투신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광적(狂的)인 사랑이 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고대 실크로드의 교역 장소였던 바쿠고성.
  탑 주변부터 바쿠고성(古城)까지 이어진 길목에는 옛날 상인들이 물건을 거래하던 장소부터 그들이 숙소로 머물던 카라반 사라이까지 실크로드의 유적들이 남아 있다. 특히, 카라반 사라이는 지금도 레스토랑으로 성업 중이다. 이곳에서 만찬과 함께 공연을 즐기며 당시 번화했던 거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15세기에 지어진 시르반샤 궁전은 당시 수도였던 셰마키에서 지진이 나자 바쿠로 옮겨와서 다시 지은 것이다. 왕의 집무실과 접견실, 연회장과 거주공간, 사원과 첨탑 등이 조밀하게 들어서 있다. 궁전 건물 벽에는 총탄의 흔적이 선명하다. 18세기에 제정러시아 해군의 공격에 성벽이 파괴됐는데 그때를 잊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남겨놓은 것이다.
 
 
  카스피해, 바다인가, 호수인가
 
바쿠의 랜드마크인 프레임타워. 밤이면 조명쇼를 한다.
  구시가지를 벗어나면 현대 바쿠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프레임타워가 있다. 일명 불꽃타워로 알려진 이곳은 세 개의 건물이 타오르는 불꽃 형상으로 이뤄진 건물이다. 이 건물의 높이는 190m로 6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2013년에 완성됐다. 건물 외곽은 LED조명으로 만들어 밤마다 조명쇼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건물 모양과 조명이 한데 어울려 수도 바쿠의 랜드마크가 됐다. 이제 바쿠는 ‘바람의 도시’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산유국임을 자랑하는 ‘불의 도시’로 변모한 것이다.
 
  카스피해는 세계 3위의 원유 매장량을 가지고 있는 보고(寶庫)이다. 카스피해 동쪽 카자흐스탄에서 채취된 원유는 악타우항에서 유조선에 실려 반대편의 아제르바이잔 바쿠항에 도착한다. 바쿠는 세계에서 가장 긴 1769km의 파이프라인이 시작되는 곳이다. 바쿠에서 출발하는 파이프라인은 조지아의 트빌리시를 거쳐 터키의 세이한 항구에 도착한다. 세 도시의 약자를 따서 BTC 파이프라인이라고 부른다. 내해인 카스피해에서 생산된 원유가 BTC 파이프라인을 거쳐 지중해로 이동하고 이곳에서 다시 유럽으로 공급되는 것이다.
 
카스피해 연안의 바쿠유전.
  구소련 시절에는 카스피해의 에너지를 소련과 이란이 양분했다. 1991년 소련 붕괴 후 독립한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등이 영유권을 주장하자 이들의 권리는 각 20%로 축소됐다. BTC 파이프라인은 막대한 경제적 이득과 정치적 영향력 등을 고려한 국가와 기업들이 11년간의 공사를 거쳐 2005년에 완성했다.
 
  카스피해를 둘러싼 유전 쟁탈전은 카스피해를 바다로 볼 것이냐, 호수로 볼 것이냐에 따라 판이하게 다르다. 바다로 본다면 해양법에 따라 해안선이 긴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에 유리하다. 호수로 본다면 5개의 나라가 각각 똑같이 20%의 지분을 갖게 되어 나머지 3개국에 유리하다. 해당 국가들은 여러 번에 걸쳐 영유권 문제를 협의했지만 아직까지 해결을 못하고 있다.
 
 
  유럽 흉내 내기
 
  프레임타워 옆, 바쿠만과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순교자의 길이 있다. 이곳은 우리의 국립현충원과 같은 곳으로 국가를 위해 전사(戰死)한 이들이 묻힌 곳이다. 이곳에 서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바쿠시내와 타워크레인이 즐비한 항구 그리고 카스피해를 오가는 선박들을 볼 수 있다.
 
  공항으로 가기에 앞서 점심 식사를 하려고 식당으로 향한다. 대로변 옆의 작은 길들은 모두가 벽으로 가로막혔다. 10분이면 도착할 거리가 30분이나 걸린다.
 
  “도로를 막아놓았는데 무슨 행사가 있나요?”
 
  “지난달에 F1그랑프리 대회가 있었어요.”
 
  “끝난 지 한참 됐는데 아직도 그대로 있네요?”
 
  “준비하느라 몇 달, 치우느라 또 몇 달. 우리도 정말 불편해요.”
 
  코카서스 3개국은 모두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독립했다. 오랫동안 소련의 영향을 받아왔던 까닭에 아직도 그때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의 바쿠는 다르다. 정치체제는 아직도 구소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소련 시절에 만들어진 낡은 건물들은 오일머니의 힘으로 지워버린 지 오래다. 그리고 오늘도 수도 한복판에서 시민들의 불편함은 아랑곳없이 유럽인들이 열광하는 자동차 경주를 유치하며 스스로 유럽 선진국들의 모습을 흉내 내려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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