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제재 철회와 체제 보장을
핵과 맞교환하려는 김정은 셈법
북한이 세계무대로 나온 만큼
힘들게라도 열매를 맺어야 한다
‘행복한 사람은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은 과거만 있다’. 호주의 문필가 리처드 플래너건이 소설에서 그리 썼지만 과거 없이 행복할 수는 없다. 과거는 대체로 역경에 속하고, 그것을 헤쳐나온 이력이 인생이다. 북으로 가는 먼 길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심사는 복잡할 것이다. 흥남 철수 미군 함정을 타고 부산에 정착한 가족의 이력도 그렇거니와 평양에 이르는 길에 묻힌 민족상잔의 혈흔, 65년이 지나도 서로 쑤셔대는 증오와 원한의 과거를 청산할 길이 막막해서다. 남북관계엔 피로 물든 ‘과거’만 존재했다. 증오의 발원지 휴전선을 품고 행복으로 나가는 좁은 출구를 찾으러 오늘 대통령이 간다.
그러나 평양행 봇짐에 든 협상용 선물리스트는 초라하다. 4·27 판문점 선언의 국회 비준이라도 챙겼다면 마음이 그리 졸리진 않았을 테고, 야당 대표와 정부 요인을 대동한다면 조금은 든든했을 것이다. 대국적 견지에서 당리당략을 거둬달라는 대통령의 애원은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 퇴짜 명분은 가지각색이었다. 남북관계 개선 비용을 은폐했다는 포퓰리즘 발언이나 ‘체통 지키기’는 겉으론 근사했으나 생뚱맞은 소인배 정치였다.
퇴짜를 맞건, 선물봇짐이 초라하건, 이전 두 번의 방북길과는 질적 차원이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는 오히려 풍요롭다. 이전의 상대 김정일이 은둔자였다면 김정은은 국제무대에 이미 발을 들인 데뷔자다. 8년 전 김정일이 김정은을 대동하고 중국 방문에 나섰을 때만 해도 투탁(投托) 정치를 우려했다. 김정은은 예상을 깨고 중국 의탁에서 독자노선 쪽으로 운신의 폭을 상당히 넓혔다. 핵정치의 위력이었다. 김정은이 싱가포르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사실은 어쨌든 국제적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압박감을 의미한다.
버티는 양쪽을 달래야 하는 중신아비 노릇도 힘들지만 협상 당사자가 되면 뭔가 선물을 꺼내 놔야 한다. 비핵화와 종전선언을 향한 먼 길의 출발선에서 상대를 유혹할 선물 리스트는 대체로 엄청난 비용이 드는 것들이다. 철도 부설, 자원과 에너지 개발을 위한 인프라 투자도 그렇고, 경제협력·산단개발·문화교류를 합쳐 거의 천문학적 돈이 든다. 이걸 합의했다 해도 미국과 유엔의 봉쇄선을 넘어야 하고, 무엇보다 국내 반북세력의 ‘퍼주기 논란’을 돌파해야 한다.
종전선언이든 비핵화든 공짜는 없다. 전쟁 책임을 따져 묻고, 국군포로 송환과 적화통일을 명시한 북한 노동당 규약 수정 약속을 미리 받아내야 한다는 일부 강경파의 당찬 주장은 ‘통일대박’을 내세워 딴전 피우는 교활한 가식과 다를 바 없다. 마찬가지로 핵무기에 목숨 건 김정은이 자신의 명줄을 그리 쉽게 놓겠는가? 경제 제재 철회와 보상, 체제의 완전 보장을 핵과 맞교환하려는 김정은과 북한 당국의 셈법은 누구나 아는 바다. 트럼프에게서, 남한으로부터 확약받은 무엇이 없다면 김정은은 자꾸 중얼거릴 것이다. ‘핵 폐기하면 안 되갔구나’.
미국의 무역 강공으로 중·일·러가 한쪽으로 몰려가는 판국에 북한을 달래 붙들어야 하는 우리 대통령의 심사는 복잡하다. 남북 협상은 실패의 무덤이었고 원점 회귀를 반복했다. 이번은 협상의 문법이 바뀌었다. 북·미 정상회담이 배경에 깔려 있고, 김정은은 북한을 끌고 세계무대로 나왔다. 힘들게 조성한 이 환경이 열매를 맺는 것, ‘북으로 가는 먼 길’을 나서야 할 필연적 이유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