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중앙은 8월 17일 발행된 9월호에서 라종일 전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이 말하는 ‘북한의 선진화 전략’을 소개했다. 얼마 뒤인 9월 5일 공익법인 여시재에서 북한을 한반도 4차 산업혁명의 지렛대로 활용하자는 혁신적 주장을 담은 책을 펴냈다. 저개발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의 현실 여건과 이점을 최대한 살리는 한반도 미래 비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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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여시재(與時齋)의 한반도미래팀장으로 있는 민경태 북한학(경제·IT 전공) 박사는 이른바 ‘제7의 감각’을 북한 선진화 방안에 적용하고자 한다. 그는 최근 출간한 저서 [서울 평양 스마트시티](미래의창 펴냄)에서 도시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새로운 한반도의 경제통합 방안을 제시했다. ‘스마트 시티’란 곳곳에 깔린 사물인터넷(IoT) 센서들을 통해 모은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물류·교통·에너지 등의 공급망을 가장 효율적인 상태로 관리하는 도시를 뜻한다. 민 박사는 “첨단 기술이 네트워크로 연결돼 4차 산업혁명의 플랫폼으로 기능하는 스마트 시티를 구축하자”고 제안한다. 서울-평양 스마트 시티는 첨단 인프라를 기반으로 하는 도시 네트워크다. 기존의 물리적 연결뿐 아니라 초고속 통신망과 광대역 통신 기술을 통해 서울-평양 간 공간적 제약을 극복하고 두 지역을 동일한 경제권으로 통합한다는 사업이기도 하다.
이는 국가 미래전략을 연구하는 싱크탱크 여시재의 지향점과도 일맥상통한다. 2015년 12월 조창걸 한샘 명예회장이 출연해 설립한 공익법인인 여시재는 통일 한국과 동북아의 미래 변화를 위한 정책을 개발하고, 세계를 이끌어 나갈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한다. 현재 이광재 전 강원 지사가 원장으로 활동한다.
여시재의 이광재 원장과 민경태 박사는 과거 개발도상국의 경제개발 여정을 떠올리며 북한이 중국과 베트남식 성장 과정을 답습하는 게 옳은지 자문(自問)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10년 후에도 북한이 중국보다 후진적인 임가공 산업을 기반으로 경제를 성장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과거와 같은 개발도상국 발전 방식을 북한에 적용해서는 남북한이 함께 시너지를 낼 조건을 갖추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이 근저에 깔려 있다. 이는 미래 한반도의 성장을 도모하는 방법이 될 수 없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그래서 남과 북이 함께 잘사는 미래를 실현하자면 변화를 선점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두 사람은 입을 모은다.
이상적인 모델 실험에 적합한 나라,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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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정반대다. 낙후한 인프라를 새로 구축해야 하고 토지 수용과 보상 문제가 복잡하지 않은 국가이자 정책이 결정되면 일사불란하게 집행될 수 있는 정치체제를 갖춘 나라인 것이다. 첨단 기술을 적용한 새 서비스를 도입하더라도 이해관계자나 기득권의 반대가 거의 없다. 이상적인 모델을 실험해 보기에 적합한 나라인 셈이다. 남북한이 함께 스마트 시티의 이상적 모델을 실험하고 제안해 미래 사회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는 배경이기도 하다. 신기술이 성숙 단계에 접어들었는데도 시장 시스템에 의해 거부되거나 기존 투자와 중복돼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도입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한국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나라가 바로 북한이다.(60쪽 박스기사 참조)
민 박사의 구상은 북한이 지정한 5대 경제특구, 22개 경제개발구를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8대 광역 경제권, 즉 스마트 시티 벨트 구상으로 확장된다. 광역교통망 차원에서 거점 항만을 중심으로 해양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철도·도로·에너지 등 복합 물류 네트워크를 구축하자는 청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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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주의 모두 인류 숙제를 푸는 데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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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원장은 월간중앙 9월호에 실린 라종일 전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의 기고문 ‘북한 선진화 전략’에서 착안점을 찾았다고 했다. 라 교수는 기고문에서 저소비·저투자 상태의 북한이 기존의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 사회주의적 생산방식 모두를 초월하는, 4차 산업혁명 기술에 기반을 둔 ‘저소비 클린 에너지’ 국가로 이행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 원장은 “자본주의, 사회주의 양대 체제 모두 우리가 직면한 숙제를 푸는 데 한계를 보이는 지금 라 교수의 제안은 인류가 가진 유일한 보금자리인 지구에서 지속 가능한 국가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공감했다.
라 전 보좌관이 지적한 바와 같이 산업 문명이 만든 대도시는 오늘날 지속 가능한 지구의 주범이 되고 있다. 환경오염, 자원 고갈, 빈부격차, 사회문제 등 대도시가 가진 문제점이 심화되고 지속 가능성을 잃게 된다면 도시의 미래도 없다는 게 이 원장의 진단이다. 이 원장과 민 박사는 한반도에서 새로 탄생할 서울-평양 메가시티에서 그 답을 찾아보자고 한다. “창조적 혁신이 기다리고 있는 북한에 개성공단식의 과거 모델로만 접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대도시가 아닌 중소도시 네트워크를 통한 미래 한반도의 신경제 전략 구상이 필요한 시점이다.” 여러모로 낙후된 북한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 4차 산업혁명의 최적지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은 실로 획기적이라고 강조한다. 기술 발전과 사회 변화에 따라 미래 도시의 형태도 변화하고 있으며 한반도에도 새 도시 모델이 필요한 시기에 접어든다는 게 여시재의 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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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연장선상에서 북한의 변화 모델로 베트남보다는 중국, 중국보다는 싱가포르, 싱가포르보다는 에스토니아가 더 적합하다고 이 원장은 직관한다. 인구 130만 명의 발트해 소국인 에스토니아는 전자시민권(e-residency) 등의 정책을 펼쳐 디지털 스타트업과 블록체인 분야의 세계 최강으로 발돋움한 대표적 국가다. 에스토니아는 비트코인이 탄생하기 전인 2008년부터 세계에서 최초로 블록체인을 행정에 도입하는 연구를 했고, 그 성과에 힘입어 2012년부터 블록체인을 의료·사법 기록에 도입했다. 지금은 행정 업무의 99%를 온라인으로 처리하는 등 입법·사법·행정은 물론 상거래에도 블록체인이 적용된다.
“쉬워서가 아니라 어려운 도전이라 해볼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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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재는 지구의 중력장을 벗어나 인류 문명의 지평을 우주로까지 확장한 나사 프로젝트, 인간 생명의 비밀을 해독해 낸 휴먼 유전체 프로젝트 등 인류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대 프로젝트들 모두가 당대 최고의 기술과 자원, 그리고 인류의 축적된 지식과 경험이 총동원된 기획된 창조력의 산물이라고 강조한다. 인류와 지구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신문명 미래 도시는 21세기 최첨단의 디지털 기술과 탁월한 혁신 역량, 낯설고 새로운 길을 마다하지 않는 리더십이 융합될 때 비로소 성공할 수 있는 프로젝트라는 지적이다. 여시재는 “신문명 미래 도시의 구현을 위해 필요한 창조 역량과 리더십, 구체적인 솔루션과 방법을 함께 고민하는 자리”라고 베이징에서 열릴 ‘2018년 여시재포럼’의 성격을 규정했다. 1962년 당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도 국민들에게 “달에 가는 일이 쉬워서가 아니라 어려운 도전이기 때문에 향후 10년 내에 해내자”고 독려했다. 북한의 스마트 시티 등 선진화 전략도 길이 안 보이는 전대미문의 도전이기에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게 이들의 믿음이기도 하다.
[박스기사] 남한 인프라 접속만으로도 북한 첨단도시 건설 - 사회주의 체제가 첨단 기술과 새 시스템 실현에 더 유리…평화체제 수립 후 북한 군대도 산업인력으로 활용 가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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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첨단 인프라 구축의 효용 가치가 높다.
남한에는 에너지·교통·통신망 등 주요 인프라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구축돼 있다. 남한에 첨단 기술을 적용하려면 기존의 인프라를 해체하기 위한 별도의 비용과 투자가 요구된다. 반면 북한의 인프라 수준은 매우 미비하고 열악해 부분적 개선보다는 완전히 새로 건설하는 게 더 적합한 상황이다. 기존 인프라 해체나 전환 비용 없이 인프라 구축이 용이하다. 현재 남한의 인프라 수준보다도 훨씬 앞선 최신 기술을 적용한 차세대 시스템을 북한에 구축하는 것도 효용 가치를 높이는 방편이 된다.
둘째, 신속하고 효율적인 정책 추진이 가능하다.
북한은 최고지도자의 의지와 당의 결정을 통해 필요한 정책을 신속하게 실행에 옮길 수 있다. 현재 북한이 지정한 경제특구, 개발구는 27개에 이른다. 이들 경제특구, 개발구에는 별도의 법률을 적용해 지역의 특성에 맞는 스마트 시티를 개발해볼 수 있다. 신도시 개발에 엄청난 비용과 복잡한 절차를 요하는 남한과는 대조적이다. 북한의 사회주의 정치체제가 첨단 기술과 새 시스템을 실현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는 데 더 유리하다.
남한 3분의 1 비용으로 북한 인프라 건설
셋째, 토지 보상이나 건설 비용이 적게 든다.
북한에는 사유재산권이 없기에 토지 수용 문제나 보상에 대한 부담이 현저히 적거나 없다. 국가가 대안을 제시하고 집행하는 데 있어 남한보다 수월하다.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권을 인정하지 않는 게 장점으로 작용하니 아이러니하다. 건설공사에 투입되는 비용도 저렴하다. 자연에서 채취하는 골재나 자원이 모두 국가 소유이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대규모 토목공사에 드는 노동력을 군대서 채우는 경우가 많다. 평화체제가 성립되더라도 북한군의 대폭적인 감축은 실질적으로 어렵다고 볼 때 상당수 군인을 공병으로 전환해 공사에 투입하는 방안도 생각해봄 직하다. 도로·철도와 같은 인프라 건설이 남한의 3분의 1 정도 비용으로도 가능하다는 게 민 박사의 계산이다.
넷째, 이상적 도시 모델을 구현할 수 있다.
남한에서 새 도시를 건설하자면 사업성이 우선시된다. 남한의 기존 도시를 재생하고자 할 때 아무리 이상적인 기술이나 디자인을 갖고 있어도 단기에 사업성을 보장하지 못하면 투자 유치에 애를 먹게 마련이다. 신도시 상가의 대지는 잘게 쪼개져 분양되고 그 위에 용적률 높이기에 급급한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게 되는 게 한국의 현실로 묘사된다. 사회주의에서는 비록 단기적으로 사업성이 떨어져도 중장기적으로 가치가 있고 이익이 된다면 정부 주도로 미래 지향적 투자가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북한은 이상적인 도시를 시험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해 가장 첨단화된 스마트 시티 모델을 북한에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 시장과 산업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없다.
주도적인 몇몇 기업에 의해 독점적 시장이 형성된 분야에서는 기술의 혁신성만으로 시장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어렵다. 이미 투자한 기업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신기술 도입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새로운 산업과 관련된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저항도 만만찮다. 스마트 시티에 자율주행차를 도입하고 원격 의료, 원격 교육 시스템을 적용할 경우 기존 운송업체, 의료기관, 교육기관 등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을 살 수 있다. 관련 법규 제·개정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북한에는 이 같은 시장과 산업 기득권의 저항이 아주 미약하다. 정책 결정을 통해 신도시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첨단 기술을 바로 도입하는 데 별문제가 없다. 북한은 신기술을 시험하고 새 서비스를 상용화하는 최상의 ‘테스트베드’로 각광받을 것이다.
- 박성현 월간중앙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