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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23. 21:15자연과 과학

인간의 근거는 무엇인가 AI는 ‘국가시민’인가

‘알파고 파란’이 던진 철학적 질문들

  • 백종현 | 서울대 명예교수, 한국포스트휴먼학회 회장 paekch@snu.ac.kr


  • ● 힘이냐, 폭력이냐… ‘경계’에 선 과학기술
  • ● 인간을 ‘물리적’ 존재로 보는 근대 문명
  • ● 포스트휴머니즘의 질주…철학적 과제부터 풀자
인간의 근거는 무엇인가 AI는 ‘국가시민’인가

 

2016년 3월 구글의 알파고가 서울에 출현한 것을 계기로 많은 한국인이 인공지능(AI)을 새롭게 의식하게 된 것 같다. 이제 진보에 가속이 붙은 인공지능, 로봇, 드론, 사물인터넷, 자율주행 자동차, 그리고 뇌과학, 의생명과학 등 과학기술은 자연생명체인 인간의 삶 전반을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이들 기술은 ‘이성적 동물’로 규정되던 ‘인간’ 개념 자체의 변경까지 종용하고 있다. 

알파고의 활약에서 보듯 인공지능은 이미 어떤 면에서는 자연인간의 지능을 뛰어넘으며 기존의 지식 개념을 흔들고 있다. 인공지능처럼 날로 발전하는 생명과학 기술 역시 생명의 탄생과 유지 및 종결 방식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면서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거듭 요구한다.  

인간의 노동을 기계적으로 대신하는 단순한 로봇의 시대는 지났다. 정보통신, 생명과학, 인공지능 기술이 융합한 사이보그가 등장하고, 오래지 않아 자기산출 능력을 가진 유사인간 종(Post Homo Sapiens)까지 마주한다면 우리 자연인간들은 ‘인간다움’ ‘인간의 존엄성’ ‘인격’이라는 인간의 본질 규정을 재검토해야 할 상황에 놓일 것이다.  

인간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에서 인간 존엄성의 가장 강력한 근거는 인간의 자율성이다. 이 자율성의 본부로는 ‘정신’이 상정됐다. 이름하여 인간은, ‘정신적 존재자’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근대 문명의 형성과 함께 그 기력이 희미해져갔다. 근대 문명의 핵심요소는 시민사회와 과학기술이다. 시민사회의 토대인 민주주의와 과학기술의 기초인 자연과학은 근대인의 최고 성취라 할 것인데, 이 둘은 ‘정신’의 희생을 대가로 요구한다.

기실 근대 문명은 정신과 신체의 분열로 시작돼 신체의 점진적 우위로 진전돼갔다. 많은 이가 ‘사람은 마음과 몸으로 이뤄져 있다’는 정신-물체 이원론에 동의한 것은, 그래야만 인간의 인간다움의 배경인 윤리세계를 자연과학의 물리세계로부터 분리·보존할 수 있겠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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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근대 문화와 함께 ‘정신’은 두 방면에서, 즉 정치사회와 자연과학의 협공을 받아온 게 사실이다. 민주주의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이념에서 출발한다. 주권재민은 투표권으로 표상된다. 그런데 투표권은 ‘1인 1표’로 실현된다. 이때 ‘1인’은 ‘하나의 몸’을 단위로 한다. 사람은 누구나 본래적으로 자유롭다고 선언하면서 주장한 첫 번째 자유의 권리가 ‘신체의 자유’다. 즉, 민주주의의 기저를 이루는 것은 신체적 존재자로서 인간인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정신적’ 존재자라기보다는 ‘신체적’ 존재자다.

이는 인간이 인간임은 그 신체가 아니라 정신에 있다는 보통의 생각과 상충된다. 그런데 이러한 상충에서 자연과학은 민주주의 기조의 편에 선다. 자연과학이 이해하는 자연 세계의 사물들과 사건들은 모조리 인과관계 가운데 있다. 그러니까 자연 안에 자유로운 존재자란 있을 수 없다.  

인간도 자연물들의 인과관계 속에 있는 하나의 물체일 따름이다.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인간은 신체인데, 신체란 물체 이상의 것이 아니다. 무릇 물체의 움직임에 무슨 책임을 물을 수 있겠는가. 인간은 더 이상 행위의 주체, 인격으로 간주될 수가 없다.



오래된 懷疑

현대의 ‘과학’과 자연과학주의는 인격의 기반인 인간의 자율성, 그리고 자유의지에 대해 부정적이다. 물리학주의이든 생물학주의이든 같은 결론에 이른다. ‘자연 안에 있는 모든 존재자의 운동은 물리 법칙에 따른다’는 물리학주의와, ‘인간의 행위는 뇌 운동의 외현인데 뇌의 운동은 무질서하다’는 생물학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론에 깊은 회의를 표명한다.

인간(homo)이 한낱 자연물인지, 그 이상의 품격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오랜 논란을 더욱 격화시키고, 인간 위격(位格, humanism)의 근본을 뒤흔드는 상황을 빚은 것은 포스트 호모 사피엔스, 유사인종의 출현이다. 인간의 지능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그것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이 개발되고 그에 힘입어 종래에 인간이 해내던 일을 더욱 더 효과적으로 해내는 로봇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생명공학이 추구하는 사이보그가 등장하는 국면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의 수명 연장과 능력 증강에 대한 욕구가 과학기술을 부추기면, 아마도 자연인으로 태어난 인간도 종국엔 모두 사이보그가 될 것이다. 낡은 심장은 기계펌프로 교체되고, 부실한 신장과 혈관은 여느 동물의 신장과 혈관으로 대체된다. 파괴된 한쪽 뇌는 인공지능이 대신할 가능성이(또는 우려가) 점점 커진다. 생명공학적 조작으로 다수의 동일인이 대체(代替)적으로 생을 이어갈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 수명이 1000세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당초 인간이 제작하고 조종하던 로봇이 정교화를 거듭해 마침내 스스로 로봇을 제작하고 조종해 인간을 제압하는 국면이 도래할지도 모를 일이다.

“지식이야말로 힘이다”(프랜시스 베이컨)라는 매력적인 표어는 과학기술이 전근대적 삶의 고초들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고, 나아가 의식주를 구하는 데 매인 인류의 삶에 자유와 여가를 줌으로써 충분한 신뢰를 확보했다. 그러나 지식은 타인을 지배하고, 자연을 개작하고, 세계를 정복하고, 수요가 있는 곳에서는 제한 없이 이용된다. 지식은 기술에든, 자본에든, 권력에든, 전쟁에든, 가리지 않고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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