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수필 당선작, 2005 세계한인문학가 협회 문예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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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세계한인문학가협회 문예공모

[밴쿠버 중앙일보] 기사입력 2005/06/06 16:18

수필 당선작

프레이저(Fraser)강변을 걸으며
        김 홍 섭

연 3일을 비가 오더니 오늘은 날씨가 개였다.
하늘에는 구름이 덥혀 있으나 비는 오지 않고 서쪽하늘은 훤하게 햇빛이 빛나고 있다.
3월 중순의 거리는 도처에 벚꽃이 흐드러지고 집 앞에도 자목련이 화사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개나리는 벌써 지기 시작했고 앵두꽃과 이름 모를 흰 꽃들이 자그마한 나무에 수없이 피어 환한 불빛을 연출하며 서 있기도 한다.
늦은 점심을 먹고 아들과 함께 산책을 나섰다.
평소의 가까운 공원보다 오늘은 좀더 멀리 나가보기로 했다.
차를 타고 조금 후에 우리는 프레이저 강가에 도착했다.
강은 겨울철의 우기와 점차 따뜻해지는 날씨로 산의 눈들이 녹아서인지 물이 많이 불어 넘실거리고 있다.
약간의 흙빛을 하고 작은 파도를 만들며 물은 쉼 없이 도도히 흘러간다.
내가 자주 걷던 한강보다는 강폭도 좁은 편이고 수량도 적은 것 같으나 계절에 큰 변동 없이 프레이저강이 유장하게 흐른다.
강변에 수없이 솟아오른 나무와 숲들이 한강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강변을 따라 난 좁은 산책길이 우리를 유혹한다.
겨우내 잘 견디어 낸 풀잎들이 제법 완연한 초록을 피워내고 있다.
길은 꾸불꾸불 언덕을 돌아 또 길로 이어지고, 길옆에 작은 호수들은 햇살을 받아 초봄의 싱그러움으로 빛나고 있다.
호수 면에 노니는 오리 떼와 작은 물방울들은 서로 장난을 하듯 반짝거린다.
강물이 나무 사이로 보이다가 사라지고, 걸으면 다시 나타났다가 또 멀리 조용한 흐름으로 저만치 흘러간다.
푸른 풀잎들 위에 기적처럼 노오란 민들레가 피어있다.
왕관처럼 황홀한 빛깔로 저만큼의 넉넉한 넓이를 차지하며 의연하게 피어 봄을 맞고 있다.
Dandelion란 말이 어울리게 정말 사자의 의젓한 황금빛 갈기를 한껏 새우고 민들레가 당당하게 푸른 풀밭 위에 좌정하고 있다.
항상 내게 봄의 경이와 즐거움을 선사하던 노란 봄의 전령사가 아닌가? 얼어붙은 동토에 생명의 환희로 다시금 힘차게 시작해 보라고 용기를 주던 희망의 춤꾼이 아닌가?

다시 강의 흐름이 눈에 들어온다.
강은 그 쉬지 않는 흐름으로 우리에게 많은 경제적 유익을 주며 정신적 자양과 힘을 준다.
강은 그 물의 흐름으로 길을 새로 열어 나간다.
강변에는 흙과 언덕이 파여 나가 새로운 단애가 형성되며 강은 새로운 길을 오랜 세월을 두고 열어나가고 있다.
영겁의 시간 속에서 한강과 압록강의 물길이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을 것이며, 황하나 양자강이 그렇고 나일강과 도나우강이 세월과 함께 노래하며 바람을 벗 삼아 유유하게 길을 가고 있으리라.
강은 우리를 겸허하게 한다.
낮은 곳을 찾아 내리고 흐르고 낮아지고 또 낮아지고, 그래서 한줄기 도랑물이 되고 시내가 되고 작은 강으로 흐르고 큰 강물이 되고 마침내 대양에 다다른다.
아무리 많은 강물과 큰 하수가 흘러 들어 와도 또 바다는 언제나 거기 그대로 있은 따름이다.
수만 강물이 바다를 채우지 못함이 강물을 겸허하게 한 것일까?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이라 했다.
흐르는 물은 서로 먼저 나가려고 다투지 않는다.
강은 그 유장한 흐름 속에서 함께, 더불어 하나의 온전한 흐름이 되고 노래가 되고 춤이 된다.
베토벤의 여유롭고 조용한 달빛소나타가 되고 빠른 템피스트가 되기도 한다.
강의 참모습은 우리 민족의 영욕과 애환이 서린 한강이나, 어쩌면 스메타나의 잔잔한 몰다우(Die Moldau)일 지도 모른다.
소동파(蘇東坡)가 우주의 주인처럼 노닐던 깨달음의 양자강이나 공자(孔子)가 목노아 울던 성현의 발자취가 머문 황하일 수도 있을 것이다.

조용한 물이 깊이 흐른다(Still waters run deep)란 말은 강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강물은 이미 하나의 온전한 합일체를 이루어 서로를 감싸며 부둥켜안고 다투지 않으며 유연하게 흐른다.
물길에 따라 흐름이 느릴 수도, 빠를 수도 있을 따름이지 그 강물은 언제나 같은 강물이며 하나이며 조화로운 교향악이다.
만해(萬海)의 나룻배와 행인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도우며 강물을 건너고 건네준다.
도도한 강물은 시기하여 나룻배를 흔들지 않는다.
완숙한 뱃사람은 강물을 어루만지며 대화하며 같이 호흡하고 노래한다.
도를 찾아 수많은 방황과 번뇌를 체험한 헷세(H. Hesse)의 싯다르타는 강과 더불어 시간과 공간의 혼돈의 세계를 초월하여 영겁의 평온과 혼융을 통해 도를 깨닫는다.


강변의 길가에 노란 작은 새 몇 마리가 풀 위를 거닐며 먹이를 찾고 있다.
가지고 있던 먹이를 던져 주어도 반응이 없다.
전혀 인간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는 새 본래의 모습이리라. 저 편 호수에는 기러기 한 쌍이 천천히 걷고 있다.
풀밭에서 먹이를 찾으며 여유롭게 좌우를 살피며 걷고 있다.
이 넓은 초원과 숲의 대지에 단 둘이서 산책을 하고 있는 한 쌍의 기러기는 어느 먼 곳에서 온 귀빈인가? 기품있는 모습이 멀리 날아 강과 바다를 건너 온 기쁜 소식인 것 같다.
같이 어울리는 모습이 아름답다.
어릴 때 배웠던 멀어져 간 사랑을 그리워 한 유리왕의 황조가가 떠오른다.
“펄펄 나는 꾀꼬리는 암수 서로 정다운데,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편편황조(翩翩黃鳥) 좌웅상의(雌雄相依) 염아지독(念我之獨) 수기여귀(誰基與歸)>. 길은 함께 가는데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법이다.
강물도 함께 어우러져 흘러야 제대로 된 흐름이리라.

길은 점점 이어져서 울창한 나무의 숲으로 들어간다.
하늘까지 치솟는 침엽수림이 그득한 숲길로 난 작은 사이길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비온 뒤의 숲길은 적당한 습기와 온도로 방문객을 맑은 숲의 세계로 안내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길이다.
가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간단한 인사말을 교환한다.
우리는 영화의 한 장면에 주인공이 된 느낌을 갖고 길을 걸으며 숲을 호흡한다.
숲은 하나의 생명체다.
어떤 나무는 한 뿌리에서 나와 두 그루가 되어 마주보며 하늘 닿을 듯이 높이 솟아 있는 나무가 있다.
형제의 나무가 서로를 도우며 성장한 것이리라. 어떤 나무는 서로 붙어서 위까지 자라 오른 나무도 있다.
서로 헤어지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는 부부의 나무로 보인다.
또 어떤 늙은 나무는 쓰러지고 그 그루터기에서 서너 개 또는 예닐곱 개의 새로운 나무들이 자라 오르는 나무도 있다.
부모의 사랑과 헌신위에 자녀들이 자라는 인간의 모습들이 이 숲의 나무에 있음이 아름답다.


언젠가 친지의 초대로 집에 가서 차를 마실 기회가 있었다.
그는 많은 정성을 들여 집에 차 공간, 그야말로 다방(茶房)을 차려서 귀한 객들을 초대하여 좋은 차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의 취미였다.
그는 다방에 다회(茶會)를 위한 소나무 탁자를 한국에서 수송하여 준비해 놓았다.
그는 탁자에 얽힌 얘기를 하면서 문득 나무의 나이를 물었다.
물론 나이테를 보면 대충은 알 수 있으나 대개 탁자는 나무의 한 가운데를 자르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 나무를 절단하고 다듬어 탁자로 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탁자에는 많은 옹이들이 있었는데, 옹이 옆에는 많은 나이테의 물결이 농울쳐 있었다.
이 옹이들은 나무에서 나온 가지이며 가지의 나이테는 또 별도로 새로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무도 가지를 새로 뻗쳐나가는 데는 많은 아픔과 상처를 안으로 감내하며 성장시킨다는 말을 했다.
이 숲의 나무들도 자녀와 가지를 위해 썩어지는 자연의 섭리를 따르며 숲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끼 낀 썩어진 나무 위에는 작은 새 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끼는 만물을 또 흙으로 돌려보내는 그만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숲은 그렇게 각자의 위치를 지키며 오랜 세월을 함께 도우며 살아오고 있었다.


다시 강이 시야에 들어온다.
강은 길을 옆에 두고 숲을 벗하며 부단히 숲과 대화를 한다.
물가에 심은 나무는 마르지 않고 시절을 조차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오래 무성히 자라 많은 꽃과 열매를 맺을 것이다.
강물은 도도한 흐름으로 하나 되고, 세월을 초월하여 언제나 거기 그만큼의 위치에 흐르며 존재할 것이다.
강가의 나무는 강물과 풀과 숲을 벗 삼아 성장하며 꽃과 열매를 맺을 것이다.

앞서가는 아들을 본다.
나보다 훨씬 큰 키에 잘 생기고 준수한 용모의 아들이 자랑스럽다.
지금 배우는 중이니 인격과 학문이 점차 자라 시대와 국가의 동량이 되길 바란다.
그보다 저 강물처럼 다투거나 서두르지 않는 유장하고 도도한 흐름이 되길 바란다.
저 숲의 나무처럼 서로를 도우며 함께 성장하여 하늘까지 솟아오르며 꽃과 열매를 풍성히 맺기를 기대한다.
먼저 나는 부단한 흐름으로 물길을 여는 앞 강물이 되어야 한다.
튼실한 그루터기의 오래고 우람하여 듬직한 그런 나무, 그런 숲과 높은 산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아들딸들이 우리를 토양으로 더 크게 성장하기 위해, 더 큰 강물로 흐르게 하기 위해, 오늘 우리의 길을 가야 하리라. 나뭇가지가 바람에 강물처럼 출렁인다.
돌아오는 길에 구름사이로 햇살이 환하게 비치고 있다.


당선소감 (수필)김홍섭

응축된 노래와 풀어진 노래 만나는 삶의 현장 지켜야

부족한 사람에게 가고 싶은 새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립니다.
앞을 못 보면서도 여러 지방을 여행하며 고대 희랍의 신화와 역사를 노래한 호머와 인생의 신산을 겪은 후 돌아와 늘그막에 눈 먼 아버지가 한자 한자 부르면 딸이 받아 써 완성한 존 밀턴의 실낙원은 시대를 초월하여 빛나고 있습니다.

문학은 현실에 발을 딛되 눈을 들어 먼 산과 하늘과 별을 보는 일일 겁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다가오는 영감을 빌어 상상과 상징의 세계를 보며, 현상과 이데아간의 교호작용으로 삶을 고양시키며, 애환을 승화하는, 기다림을 통한 창조의 길이라 생각합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미의 최고를, 순수와 진보의 극한을 우리가 예술이라 함은, 그것이 인간의 모든 분야에 닿아 있음을 의미하며, 그 아름다움으로 가치를 오래 간직하기에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가 “인생을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 말한 걸로 느낍니다.

아지랑이 아롱아롱 피어 오르는 봄 하늘가를 달리던 유년의 싱그러움은 우리들의 정신의 자양이자 고향입니다.
민들레와 냉이 그리고 종다리가 흐드러지게 어우러진 봄의 대지는 우리의 어머니이며 무의식의 근저입니다.
오늘 여기에 함께하는 우리 곁의 가족과 친지가 사랑을 이루는 천국의 동반이며,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는 도반일 것입니다.

만유인력을 발견하고도 진리의 거대한 대양이 넘실거리는 바닷가에 작은 예쁜 조가비를 발견한 아이처럼 기뻐했던 뉴톤처럼, 아름다움이 넘실거리는 자연의 오묘함 앞에 예쁜 조약돌들을 주어 담으며 즐거워하는 아이이기를 바랍니다.
마로니에와 라일락 피고 지는 눈부신 아름다운 날에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포만과 절제의 날들에 감사하며, 시베리아를 달리는 기차에서, 자작나무 흔들리던 겨울 대지에서 빛나던 지바고의 눈빛처럼 깨어 빛나기를 다짐해봅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젊은 순수처럼, 평생을 청년으로 남기를 바라던 시인처럼, 내 인생은 항상 가을이라는 젊은 이처럼, 물가에 심기운 나무를 노래한 목동처럼, 유장한 강물처럼 항상 젊게 꾸준히 달리기를 스스로에게 바랍니다.
인생은 노래라 합니다.
워털루에서 돌아와 자신의 빛나는 승리를 저 토마스 그레이의 한 줄의 시구만큼도 못하다던 웰링턴은 오히려 아름다운 한 노래였을 겁니다.
응축된 노래와 펼쳐진 노래, 그것이 만나는 곳이 우리의 삶의 현장이며, 우리가 이루고 지켜야 할 노다지가 아닐는지요.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리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고맙게 생각합니다.


성균관대 경영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경영학과 졸업 경영학박사
인천시립대교수, 트리니티 웨스턴대학 방문교수
건군 34주년기념, 전우신문 문예응모, 시 당선
동인시집 ‘마당과 지평’ 출간

수필 심사평
‘프레이저 강변…’ 절제된 표현 장점
‘아버지’ 예리하고 개성적인 필치 호감

수필은 마음이 담겨있는 글이다.
제한된 글 속에 마음을 담는 일은 쉽지 않다.

남이 아닌 나를 드러내는 일이지만 넘치지 않게 마음을 엿보인다는 것은 조심스럽다.
그래서 어려움이 따른다.
그 글에 담긴 마음에 따라 온기와 감동을 느끼게 된다.

문장의 전달 효과는 언어의 구조가 간결하고 함축적일 때 배가 된다.
그래서 수필은 쓰기 이전에 문장 수련 과정을 필요로 하는 문학이다.
그만큼 자연스런 문장이어야 한다.
글맛이 도는 글이기 위하여 절제된 표현을 요구한다.

때때로 우리는 그런 글을 만날 때가 있다.
이번에 응모한 작품 중에 당선작인 김홍섭씨의 ‘프레이저 (Fraser) 강변을 걸으며'에서 그런 글맛을 느껴볼 수가 있었다.

바다를 채우지 못하는 강물의 겸허를 생각하고 강변의 나무와 새, 꽃들의 흐름,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가는 인생의 흐름을, 아니 어쩌면 흐름 위의 흐름까지도 보고 있음이다.
이미 스스로의 자리를 마련한 분이란 생각이 든다.
앞으로의 글에 기다림을 더해 본다.

우수작으로 선정된 백현옥씨의 ‘아버지’에서는 이야기 줄거리와 마음 그림이 반반 담겨 있는 글이었다.
아버지를 섬기는 딸의 섬세한 심성, 그것이 이 글에 있어서의 수필인 것이다.
예리하다 할 만큼 개성적인 필치도 호감이 가는 부분이다.
수필을 보다 산뜻하게 하기 위해서는 구성의 요체도 중요하지만 어휘의 선택도 유의할 점이라고 본다.
그만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해 나아갈 것으로 본다.

그 외에도 이민지의 생활 경험을 소재로 하여 쓴 이인숙씨의 ‘내가 탔던 꽃마차’와 정숙인 씨의 ‘봄 내음’ 등이 눈길을 끌었지만 선에 들지 못하여 아쉬웠다.
다음을 기약하기 바란다.

(유병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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