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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마다 술집이나 클럽을 순회하듯 하는 이들이 왜 그러는지 관찰한 연구가 있다. 당사자들은 하나같이 “술을 좋아한다”거나 “춤추는 게 즐겁다”고 했지만 마음 저변에는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자신이 외롭다고 느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두 배나 많은 초콜릿 쿠키를 먹었다. 알다시피 초콜릿 쿠키는 비만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이들의 뇌를 살펴 보니 외로움이 쿠키의 맛을 더 좋게 느끼도록 하고 있었다. 심지어 맛있다고 느끼지 못했을 때에도 외롭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보다 더 먹었다. 외로움이라는 고통을 고지방 음식을 먹는 즐거움으로 달래고 있었다.
협력이 절실했던 원시 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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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이론을 따라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 성향은 우리가 인류로서의 발걸음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 마음 깊숙이 뿌리내린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600여 만 년 전 우리 인류가 숲에서 초원으로 생존공간을 옮겼을 때, 초기 인류는 정말 별 볼 일 없는 존재였다. 지금보다 키도 훨씬 작았을(약 150cm) 뿐만 아니라 별다른 생존무기도 없었다. 당연히 기회의 땅인 초원에 쉽게 진입할 수 없어 400만년 가까이 변두리 신세에 머물러야 했다. 사자와 하이에나 같은 맹수들이 터줏대감처럼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덩치가 컸을 뿐만 아니라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있었고 속도 또한 월등하게 빨랐다. 어찌 해볼 수 있는 경쟁상대가 아니었다.
인류가 이런 상황을 역전시킨 건 새로운 생존전략을 개발한 덕분이었다. 어느 생명체보다 긴밀한 협력이 그것이다. 혹시 크고 무거운 물건을 여럿이 들고 가는 침팬지나 고릴라를 본 적이 있는가?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없을 것이다. 그들도 집단생활을 하고 어느 정도 협력을 하지만 인간만큼 정교한 협력을 하지는 못한다(개미는 한다! 그러니 지금도 번성하고 있을 것이다).
협력이란 다 같이 살면서 힘을 합치는 것이다. 인류 개개인은 약하디 약한 존재이지만 긴밀한 협력을 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집단은 어느 맹수보다 덩치가 크고 빠르고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혼자 있는 건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었을 것이니 죽으나 사나 항상 같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외로움의 기원은 여기에 있다. 다 같이 있어야 잘 살아갈 수 있고 안전한데 ‘지금 무리에서 떨어져 있어 위험한 상태’라는, 우리의 오랜 생존 무의식이 보내는 경고 신호다. ‘빨리 무리로 돌아가라’는 몸이 보내는 메시지다. 워낙 중요하게 깊이 뿌리내린 본성이라 우리가 의식적으로 뿌리치기 힘들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톤즈의 성자’로 불릴 정도로 헌신하다 사망한 이태석 신부는 성자 같은 분이다. 생전에 그를 찾아갔던 홍창진 신부가 쓴 [유쾌한 인생 탐구]라는 책을 보면 그가 했다는 말이 나온다. “너무 힘들어요. 봉사는 견디면 되는데, 이 적막함과 문명과의 이별, 뇌가 정지된 기분…, 힘들고 지칠 땐 가끔 들에 나가서 울고 옵니다.”
분명 현지인들과 같이 살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외로웠을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외로움은 단순히 여느 사람들과 같이 있다고 해서 해소되는 게 아니다. 마음을 나눌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없으면 사람들 속에서도 외로움을 느낀다(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아니면 협력이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외로움은 각종 질환의 원인 중 하나
홍 신부는 “한없이 위대하게만 느껴져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존재로만 생각했던 그가 실은 나와 똑같은 두려움을 안고 사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나도 어쩌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적고 있지만, 성자 같은 분이 이렇게 힘들어 할 정도로 우리 안의 외로움은 힘이 세다. 마치 중력이 그렇듯이 보이지 않게 우리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30년 정도 직장생활을 하다 은퇴한 이들이 겪는 허전함, 갑작스러운 노화는 당연한 것이다. 외로움이 각종 질환을 일으킨다는 연구도 많다.
그러면 같이 있는 건 언제나 좋을까?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화재 경보 소리가 들린다. 가능한 빨리 밖으로 대피하는 게 좋겠지만, 작은 화재라 금방 끌 수 있는 것이라면 괜히 대피하느라 소란 떠는 것보다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게 나을 것이다. 이럴 때 다른 많은 사람과 함께 있는 게 좋을까, 아니면 혼자 있는 게 좋을까?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과 같이 있을수록 결과가 좋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는 자신이 스스로 판단해서 대피했지만, 같이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 판단하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칠 때가 많았다. ‘다른 사람이 피하지 않는 걸 보니 그리 위험하지 않는가 보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은 서로를 따라 했던 것뿐인데 말이다.
이유는 하나, 다른 많은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게 좋다는 성향 때문이다. 실제로 며칠 전 한 카페에 갔는데 화재 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사람들은 얼른 대피하거나 상황을 알아보기 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살폈다. 사람들이 그대로 있으니 다들 그대로 있었다. 다행히 오작동이었기에 망정이지 실제로 화재가 났다면 죽음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는 것일 수도 있었다.
협력은 좋은 것이지만 같이 있다고 항상 좋은 건 아니다. 무엇보다 마음이 맞지 않으면 같이 있는 게 지옥이 된다. 거대한 바위처럼 짓눌러 숨을 막히게 하는 상사들이 그렇고 고슴도치처럼 뾰족한 가시를 가지고 있어 다가올수록 견디기 힘든 사람들이 그렇다. 나쁜 관계보다 차라리 모르는 사이가 낫다는 말 그대로다. 내향적인 성격이라면 스트레스는 날로 쌓인다.
자, 어느 날 어렵고 골치 아픈 업무가 떨어졌다. 25개 도시를 연결하는 최적의 루트를 짜라는 일이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아마 크게 두 유형으로 나뉠 것이다. 필요한 자료를 챙겨 커피숍이나 빈 회의실로 가서 혼자 끙끙거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전화나 e메일, 또는 소셜미디어로 좋은 방법을 수소문하는 유형이 있을 것이다. 누가 더 빨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할까?
미국 하버드대와 보스턴대 연구팀이 참가자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 성과를 실험했다. 1그룹에게는 혼자서 문제를 풀게 했고, 2그룹에게는 여기저기 연락하면서 문제를 풀게 했다. 3그룹은 1+2의 유형, 그러니까 혼자 문제를 풀면서 여기저기 연락할 수 있게 했다. 결과는 명확했다. 혼자서만 문제에 매달린 참가자들은 몇몇 좋은 아이디어를 내긴 했지만 대체로 성과가 별로였다. 여기저기 연락한 2그룹은 1그룹보다 조금 낫긴 했지만 역시 별 차이 없었다. 그러나 1과 2를 합한 3그룹은 뛰어난 답을 찾은 이들이 많았다. 평균 또한 당연히 높았다.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자신만의 차별화된 해결법을 생각해 냈기에 다양성이 높았고, 주변과 소통을 하다 보니 흡수력 또한 좋았다.
다른 연구에 따르면 브레인스토밍을 할 때도 이런 방식이 효과적이었다. 일단 모여서 자유 토의를 하는 것보다 먼저 개별적으로 생각하게 한 다음 모여서 토의를 하는 게 더 좋은 성과를 냈다. 또 다른 연구에서 보면 한 공간을 다 같이 쓰는 개방형 사무실 같은 시끄러운 장소에서는 집중력이 저하돼 어떤 일을 헤아리는 능력이 상당히 떨어졌다. 반면 혼자 있는 공간에서는 집중력이 올라갔다. 같이 있는 것도 필요하지만 혼자 있는 것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미다(조직 차원에서도 혼자 있음을 적극 장려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창의적인 걸 원한다면 말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는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다. 시간을 잡아 먹는 괴물이라는 생각에서다. 대신 하루에 두 시간씩 명상을 하고 1년에 한두 달은 아예 조용한 곳으로 가서 자기 안으로 들어간다. e메일도 전화도 받지 않는다. 그렇게 완벽한 혼자 있음을 만들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한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신의 생각을 가리고 있고, 하고자 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게 무엇인지 헤아린다. 마음 속의 어떤 감정이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지 관찰한다. “예전에는 정보 결핍이 문제였다면 이제는 수도 없이 이거 하라, 저거 하라고 하는 정보 홍수가 문제다.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강한 중심이 필요하다. 나 자신을 잃지 않는 중심이 필요하다.”
유발 하라리만이 아니다. 남다른 성과를 이뤄낸 이들의 삶을 찬찬히 살펴 보면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혼자 있는 시간이 있다. 물론 혼자 있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혼자다. 세계 최고의 부자로 꼽히는 워런 버핏은 아예 ‘한적한 시골’에 산다. 최고의 투자가인데도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뉴욕 월스트리트에 살지 않고 미국 중부의 작은 도시 네브래스카 오마하에 산다. ‘오마하의 현인’이라는 별명답게 그곳에서 조용히 세상을 관찰한다. 소설가이자 탁월한 번역가였던 이윤기 씨의 표현대로 하자면 ‘자기 길을 가는 침묵’이라고나 할까.
왜 이들은 혼자 있음을 지향할까? ‘같이 있는 상태’에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느 조용한 곳에서 혼자 커피나 차 한 잔을 음미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평소 경험하지 못했던 지나온 시간으로 여행을 할 때가 있다. ‘아, 그때 내가 너무 서둘렀구나’ ‘이런 말은 나중에 했어야 했는데 마음이 앞섰구나’ 하는 것 같은,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깨닫지 못했던 것을 느낄 수 있다. 부대끼며 사느라 나도 모르게 내 눈 앞의 것만 보게 되는, 시각이나 시력에 치우쳤던 눈을 시야를 보는 눈으로 전환할 수 있다.
혼자 잘 지낼수록 공감능력 더 높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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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방송에서 재미 있는 연구를 했다. 공부 잘하는 학생은 기억력이 좋을까, 아니면 인지능력이 좋을까? 상위 0.1%의 학생들은 기억력보다 인지능력이 좋았다. 무엇보다 자신을 인지하는 능력,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력이 높았다.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의미다. 이런 건 누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아니니 혼자 스스로 생각하고 관찰했을 것이다. 무엇이 부족하고, 어떤 걸 어느 정도로 더 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생각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은 그들대로 비슷한 게 많다. 대체로 학원에 가는 이유가 같다. 다른 학생들이 학원에 가니 나도 간다. 남들 다 다니는데 나만 안 다니면 이상하기 때문이다. 남들 따라 간 곳이다 보니 스스로 알아서 하기보다는 하라는 것만 하고 풀라는 문제만 푼다. 학원 입장에서는 더 나은 성적을 내야 하니 문제 풀이를 많이 시킬 수밖에 없고 그럴수록 학생들은 지겨워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학원을 나가면 생각하기도 싫어진다. 이들의 생활을 보면 혼자서 자신을 탐색하는 시간이 없다. 반면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은 자신에 대한 탐색에서 발견한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해 학원을 간다. 목적이 명확하다. 목적이 명확하니 성적이 오를 수밖에 없다.
학생들만 그럴까? 미국 코넬대 연구팀이 포춘 500대 기업에서 CEO가 될 가능성이 있는 임원들을 대상으로 ‘CEO에게 가장 중요한 자격 요건’을 물었다. 가장 많은 대답은 자기 이해 능력이었다. 사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거대한 기업을 알고 세상을 알겠는가?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는데 어떻게 세상을 통찰할 수 있겠는가?
밀리고 당해서 혼자가 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혼자를 선택하는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은 갈수록 중요해질 것이다. 혼자 있음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될수록 뭘 잘 하고 뭘 못 하는지 알게 되니 효과적인 집중과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 대한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 있으니 이런저런 일을 마음 먹은 대로 해낼 수 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내 안에 자신감이 조용히, 조금씩 들어서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신감(自信感)이란 게 뭔가? 나를 믿는 것이다.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와 같은 자기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나를 믿지 못하는데 무엇을 할 수 있나
자신에 대한 이해는 선순환 연쇄효과를 부른다. 무엇보다 갈수록 중요해지는 자기 생각, 자기 의견을 자연스럽게 축적할 수 있다. 이게 축적되면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중심을 잡을 수 있어 쉽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얇은 귀가 아닌 깊은 귀를 갖게 되니 휩쓸리지 않고 자기 길을 갈 수 있다. 남들이 가는 길이 아닌 자기 길을 간다는 건 혼자 가는 길일 수밖에 없는데, 덕분에 그 길을 의연하게 갈 수 있다. 여기저기 떠벌리지 않고 자기 길을 가는 침묵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