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취임과 함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판매량이 95배나 증가해 7만5천부가 새로 간행됐다. 허위를 조작하고 복종을 요구하며, 외국의 적들을 악마화하는 오웰의 소설 속 정부가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아는 빅브러더는 끊임없이 기록을 조작해 과거를 다시 쓴다. 한국에서도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교과서가 추진됐다. ‘빅시스터’가 탄핵을 당하면서 우리의 역사는 간신히 조작을 피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번역된 <동물농장>이나 <1984>에 대한 독서열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동물농장>이라는 이름의 티브이 프로그램도 오웰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이든 한국이든 세계 어디든, 오웰이 예언한 악몽의 전체주의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심지어 좌우의 일도 아니다. 가령 미국 버락 오바마 민주당 정권에서 추진한 ‘국방수권법’이나 ‘미국자유법’은 <1984>에서 묘사된 악몽보다 더욱 위험한 인권침해법이었다. 무기한의 군사적 억류를 가능하게 한 ‘국방수권법’은 <1984>의 ‘2분 증오’(적국이나 반역자를 상대로 증오심을 표현하는 의식)를 ‘무기형’으로 확대했고, 모든 자료의 불법 수집을 가능하게 한 ‘미국자유법’은 그 이름과 달리 미국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봉쇄하는 것이다. 비슷한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오웰 이전에도 그러했다. 히틀러가 있었고 스탈린이 있었다. 빅브러더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다.
이튼 졸업했지만 평생 가난하게 살아1903년에 태어나 1950년에 죽은 오웰의 47년 삶은 너무 짧았다. 그나마 어려서부터 자유를 추구한 탓에 이방인처럼, 이단자처럼 외톨이로 살았다. 주로 군인이나 제국주의자를 양성하는 소위 명문고인 이튼학교를 다녔지만, 학교가 가르친 것은 단순한 암기식 수업뿐이었고 그 속에서 자신은 계급 차별로 인한 따돌림을 당했다고 회고했을 정도로 적응하지 못했다.(결국 167명 중 138등으로 졸업했다.) 그래도 대학선발시험은 통과했지만 가난 때문에 대학이 아니라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의 경찰직을 택했다. 식민지 인도의 관료 출신인 아버지의 권유가 있었고, 당시 유행한 오리엔탈리즘, 즉 동양에 대한 환상을 가진 탓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제국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버마에서는 90명 정도의 영국인 경찰 간부가 그 150배가 넘는 1만3천명 정도의 현지인 경찰을 두고 그 15만배가 넘는 1300만명의 인구를 지배했다. 이런 식의 간접 통치는 당시 영국 식민지에서 일반적이었다. 사교를 즐기는 다른 식민지 영국인들과 달리 오웰은 원주민의 언어를 익히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중과 매춘부에 대한 경멸은 뒤에 그가 제국주의자임을 부정한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끝내 버리지 못했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혐오로 5년 만에 식민지 경찰을 그만둔 뒤로는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반체제자로 살면서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며 글을 쓰다가 외롭게 죽었다. 1934년에 쓴 첫 작품인 제국주의와 식민체제를 비판한 <버마의 나날>부터 시작해, 그의 모든 작품은 자신의 직접 체험에서 나온 것이지 머리나 솜씨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투옥 경험을 쌓을 목적으로 일부러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식민지 경찰을 집어치우고 런던과 파리에서 아르바이트와 노숙자 생활을 한 끝에 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나 탄광 노동자의 처참한 생활을 쓴 <위건 부두로 가는 길>도 생생한 체험의 기록이었다.
영국 자본주의의 가혹한 계급 구조에 절망한 오웰은 1936년에 프랑코의 파시즘에 반대해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 무계급의 민중군대를 보고 희망을 발견했지만, 목을 관통당하는 부상을 입고 가까스로 살아남아 <카탈로니아 찬가>를 썼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정치적 편향 없이 자신이 본 것만을 사실적으로 전달하려고 했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전쟁문학으로 꼽히지만, 오웰이 죽을 때까지 초판조차 다 팔리지 못할 정도로 무시당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1938년에 모로코에서 요양을 하며 쓴 <숨쉬러 올라오기>는 문명화나 산업화로 인한 상실을 묘사한 것으로 이는 그의 묵시록적 소설인 <1984>로 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뒤 1941년부터 영국의 국영방송인 <비비시>(BBC)에서 인도인을 대상으로 한 선전방송을 했지만 제국주의적 태도와 검열 등에 불만을 품고 2년 만에 그만두었다. 1945년에 스탈린 체제 소련을 풍자한 우화 <동물농장>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어 처음으로 가난에서 벗어났지만, 1948년 전체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충격적인 이미지로 묘사한 <1984>를 쓰고 2년 뒤 1950년 폐결핵으로 숨졌다. 그의 모든 작품은 모든 억압에 반대하는 그의 사상을 여러 상황을 통해 보여준 것이었다.
냉전체제에서 ‘반공주의’로 악용돼<동물농장>이나 <1984>가 반공주의 작품으로 오해받는 것을 오웰은 가장 두려워했다. 그 작품들이 냉전시대 영미 등 자본주의 주도의 냉전에서 정치적으로 악용되었고, 냉전의 진지인 한반도에서 특히 그러했음은 비록 그것이 작가의 사후에 벌어진 일이었다고 해도 부당한 것이었다. 종래 ‘반공주의적 디스토피안’으로 소개된 오웰을 내가 ‘아나키즘적 유토피안’으로 보는 이유는 그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를 모두 권위주의라는 이유로 거부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무엇보다도 중시했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이나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권위주의 체제나 성격을 분석하기 이전인 1944년에 이미 오웰은 가학증과 피학증, 성공숭배와 권력숭배, 국가주의와 전체주의가 깊이 연결된다고 보았다. 특히 이윤추구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지식인이 독재를 하면서, 표를 얻기 위한 거짓말만 일삼는 정치와 언론 왜곡을 현대사회의 정신병으로 비판했다. 2차대전 중 오웰이 근무한 비비시 방송국에서는 2016년 오웰의 동상을 세우면서 그의 다음 말을 새겼다. “만약 자유에 의미가 있다면, 자유란 사람들이 듣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릴 권리를 뜻할 것이다.”
다양한 개성의 자유로운 개인들이 스스로 자치하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추구하기 위해 오웰은 정치와 예술을 합일시키는 것을 평생 작가로서의 이상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합일을 특히 민중적 설화를 사용해 완벽하게 형상화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오웰의 교훈은 삶과 글의 완벽한 일치다. ‘나의 삶이 나의 메시지’라는 말은 간디가 남긴 말이지만 간디에 비판적인 오웰도 꼭 그렇게 살았다. 그의 글은 그의 삶에 대한 완벽한 고백이고, 그 삶 속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생각의 정직한 표현 자체이다. 거짓의 조작 없이 수정처럼 바르게 산 오웰의 삶과 생각은 거짓을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허위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특히 무제한의 독재권력이 그런 이중 사고를 밥 먹듯이 해대는 새로운 권위주의와 전체주의 시대에, 그래도 절망하지 않고 유토피아를 향해 저항하기를 우리에게 촉구한다.
“자비로운 독재는 없다. 나 스스로 나서야 한다.”(<동물농장> 서평에 답한 글, <오웰 전집> 중 <에세이집>에서) 우리 모두 함께 오웰과 함께 독재자 빅브러더/빅시스터를 쏘아야 한다. 오웰을 디스토피안이 아니라 유토피안, 특히 그람시가 말한 ‘지성의 비관, 의지의 낙관’을 체현한 실용주의적 유토피안, 리얼 유토피안으로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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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 영남대 명예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