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적국 3웅

2019. 9. 20. 07:31정치와 사회

일본 통일의 기초를 닦은 삼걸 이야기| 회원 작품실

이강산 | 조회 125 |추천 0 | 2015.02.21. 04:10



일본전국시대 지도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역사는 민족의 거울이란 말도 있다. 

시간의 흐름을 문화문명 인간사 모두를 고스란히 거울처럼 있는 그대로 기록된 역사는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한국역사가 그동안 실체적 진실을 얼마나 반영했으며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부단하게 이어지고 있다. 

한국사가 신빙성 면에서 그리고 객관성 면에서 그다지 신뢰받지 못하는 이유는 

역사를 기록하는 기관의 비독립성 때문인지 모른다. 역사시대 초기부터 외세간섭침탈과 

사색당쟁의 정파적 왜곡과 정치적 영향에서 벗어나기 힘든 상황에서 

역사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정직하게 기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이런 면에서 일본인들은 적어도 역사문제에 국한해서는 덜 혼란스럽다. 

대개의 역사가 오류가 많듯 일본역사도 완벽하다고는 볼 수 없다. 모든 역사가

강자의 편을 대변하고 강자의 입장을 옹호하는 틀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일본사도

예외일 수는 없어도 일본사는 어느 정도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평가는 얻고 있는 편이다. 

전국이 사분오열되어 전란이 끝일 새 없던 전국시대이거나 막번 시대거나 혹은 근대에 

들어서서나 일본역사를 기술하는 분야에 속한 사람들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외부적인 

힘에 의한 간섭을 덜 받았던 모양이며 아직까지 정파적이거나 정치적인 입장에서 

초연할 수 있었다는 평판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역사 가운데 가장 역동적이고 중추적인 시대는 통일을 향해 질풍노도같이 달려가던 

16세기 초중반과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의하여 막번시대를 확립해나가던 17세기 초중엽과 

일본의 근대화를 향하여 치달리던 19세기 중엽의 명치유신 시대를 들 수 있겠다.


먼저 군소영주끼리 영지확장전쟁으로 전국토가 전란에 휩싸이던 1500년 당시 일본은 

자중지란의 난세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1534-1582)와 

토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 그리고 토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 라는 

3인이 걸출한 영웅이 일본 역사에 출현하면서 일본의 전모는 완전하게 달라진다. 

일본은 비로소 통일의 길로 근대화의 길로 중흥의 길로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제국주의국가까지 본격적으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본의 통일과 정치적 집중화를 통해서 우리는 배우고 느낄 점이 많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분단국가라는 수치를 해결하지 못한 비극적 상황에서도

일본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한 채 일본을 오해하는 부분이 많은 것이다. 

일본학에 정통한 소수의 사람들을 빼면 우리는 일본을 이유없이 우월하게 보거나 

아니면 왜놈이라며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자만심의 결과일 수도 있고 

일종의 열등감의 발로일 수도 있다. 상당수는 일본하면 일제강점기를 떠올리며 

치를 떠는 사람도 상당수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은 일본을 왜국이라고 폄하해 왔다.

그러나 일본역사를 냉철한 시각으로 냉정한 분석자의 입장으로 접근해간다면 우리는 

저들을 무조건 적대하거나 거부하거나 폄하하기 보다는 저들의 단점은 버리고

자들의 장점은 취하는 대국적인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본 3걸 가운데 나이가 많은 오다 노부나가가 활동하던 시기의 우리나라의 형편은

 상대적으로 취약했었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한 뒤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난다. 

1559년에는 사단칠정의 논쟁이 이황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당시의 사화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다. 당시 유럽에서는 1547년 러시아 황제 이반 4세가 짜르 칭호를 

주창했고 1558년 영국에서는 에리자베스 1세가 즉위한다. 그리고 1562년 프랑스에서는 

위그노 전쟁이 일어난다. 한편 조선에서는 1559년부터 1562년 사이에 임꺽정이란 도적이 

날뛰면서 민심이 흉흉해졌다. 명종 즉위부터 선조 연간 일본은 천하를 통일하는 대장정에 나서서 

통일부국을 향해 질주하지만 사색당쟁으로 일관하던 조선은 분열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채 

약화일로를 걷다가 마침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연거푸 겪는다. 

조선을 침공한 일본은 조선의 숱한 장인들과 기술자들 끌고 갔다. 엄청난 양의 금은 보화와

값을 알 수없는 문화재를 약탈함으로써 조정이나 백성들 모두 가난뱅이로 만들어버렸다. 

재정이 바닥나고 국토 전체가 전란으로 황폐화 된 상태로 나라꼴은 약화될 대로 약화되어 

더 이상 국력을 회복할 기회가 없었다. 이런 빈털털이 극빈 상태로 조선은 20세기 초엽을 맞았고 

결국 외세침략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36년간 일본에게 통합되어 식민지가 됨으로써 

고유의 국권까지 송두리째 내어주는 수모를 겪어야했다. 

이런 비극적인 조선의 역사와 강성대국을 향해 일관되게 달려가는 일본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앞으로는 미국 중국 일본 소련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적으로 국방을 이루고 

명실공이 자주독립의 국가와 부국강병의 국가를 완성해나갈 필요가 있음을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도 상당부분 미국에게 국방을 의지하고 있으며 

여러 면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금 우린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라고 당당하게 주장하기에는 면구스런 점이 없지 않다. 

차제에 우리는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할 필요가 있다. 

강대국의 전유물인 핵무기는 약소국가에 대한 협박수단이며 

특히 남한에 적대적이고 우월감을 감추지 못한 채 오만하고 방자하게 

남북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북한까지 핵무기로 무장한 채 주변국가에 대하여 

핵보유국임을 인정해달라고 강요하는 판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이 핵개발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은 어불성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미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벗는 

나약한 정치권 때문에 한국이 여전히 굴욕적인 대우를 받는 것은 공정하지도 

공평하지도 못한 경우다. 이제 우리는 강한 대한민국이 되었다. 앞으로 어떤

외세에도 굴종하는 일이 없이 당당한 대한민국을 지켜나가야겠다. 그리고 일본의 

중흥을 불러온 일본의 통일과정에 지대한 공헌을 한 3인의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고질적인 분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볼 필요가 있겠다.


일본 3걸 중에서 가장 걸출했던 인물은 역시 오다 노부나가였다. 

성격이 직선적이고 거칠었지만 그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고 상당히 개방적이었으며 또한 영민했다고 한다. 그는 선이 굵고 뱃장이 두둑한 거침없이 행동하는 뛰어난 무인이기도 했었다. 한마디로 오다 노부나가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지만 포용력과 의리와 인정미는 남달랐던 모양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주변 사무라이들의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한때 불량기를 보이며 눈총을 받던 보잘 것 없는 청년은 심기일전 한 뒤 본격적인 사무라이로 변모함으로써 비교적 짧은 시기에 주변의  여타 영주들과의 패권전쟁에 나설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미천한 가정 출신인 히데요시를 신임했다. 오다 노부나가에게 견마의 충성을 맹세한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신발을 가슴에 품어 따뜻하게 했다가 신겨준 뒤 말 위에 오르는 오다 노부나가를 위해 스스로 엎드려 발판이 될 정도로 충성을 보였다.                               <오다 노부나가>

이런 히데요시를 오다 노부나가는 끔찍하게 신용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오다 노부나가의 수하로 들어온 토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오다 노부나가로 부터 

사랑을 받지만 오다 노부나가의 신뢰는 히데요시에게는 결코 미치지 못했다. 

15세기 초엽 촉발된 일본 통일전쟁의 시발점은 센코쿠 다이묘의 출현부터라고 알려졌다. 

영토 확장에 열을 올리던 호전적인 영주들이 이웃 영지를 복속하고 병합하는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전란이 점화된 것이다. 작은 영주가 좀더 큰 영주에게 복속하고 병합되는 과정에서 

1560년 부터는 많은 수의 군소 영주가 사라지고 보다 큰 영지를 가진 강력한 다이묘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호오죠오, 우에스기, 이마가와, 오오우치 및 시츠마 등은 

이미 강력한 군사력을 완비한 채 결속하여 막강한 연합군을 전장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무력정복은 또한 정통성을 획득하는 길이었다. 전쟁에 지면 역적이 되므로 

합병과 복속을 향한 전쟁은 더욱 치열할 수밖에 벗었다. 

정통성 확보의 선두주자는 우에스기 겐신이었다. 

1588년 그는 쿄오토로 가서 천황으로부터 칸토오 칸레이라는 

별로 실속도 없는 칭호를 부여받고 본령인 에치코로 돌아오자마자 

칸토의 지배권을 주장하면서 호오죠오와 다케다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교오토와 더욱 가까이 있던 이마카와 요시모토 역시 쿄오토로 발진한다. 

그러나 26세의 오다 노부나가가 2천 병력으로 이마가와를 기습하여 그를 패주시킨다. 

노부나가의 근거지인 오와리는 교오토에는 가깝지만 격전지로부터는 다소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전략적으로 좋은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1568년 34세의 오다 노부나가는 3만의 병력을 이끌고 교오토에 입성하여 

천황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또한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쇼오군의 자리에 봉한다. 

오다 노부나가는 아시카가로부터 모든 정치적 결정권을 맡긴다는 서약서까지 받아낸다. 

 오다 노부나가는 비로소 일본전국을 통일할 수 있는 정복전쟁의 기틀을 다진 것이다. 

그러나 사방의 적들 역시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1571년 오다 노부나가는 

종교적인 자비심은 눈을 감고 히에이산 승원에 불을 지름으로써 생애에서 가장 무자비한 

공격을 승려집단에 가한다. 1571년 노부나가는 새로운 도량형과 감정체계를 만든 뒤 

토지조사를 실시하여 토지대장을 정비하고 세수를 확대해나갔다. 

노부나가는 물자의 거래와 유통을 자유화 시키면서 성하정 안에 있는 

상인들에게 상거래상의 여러 가지 편리와 특권을 부여하면서 자유시장을 개설하게 했다. 

이로써 전체 상인들은 노부나가의 군사조직에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군수보급부대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상인에게도 노부나가에게도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불교사원이 소유한 대부분의 토지를 몰수한다. 

종교시설에 자신의 대리인을 파견하고 불교와 신도로 하여금 

자신의 군사정권을 섬길 것을 확약 받는다. 


1573년에는 아사이와 아사쿠라를 격파하여 영토를 복속시킨다. 

그리고 쇼군에 앉혔던 아시카가를 몰아내고 스스로 쿄오토의 패자로 군림한다. 

1576년 에는 에치겐과 카가의 일향종 집단을 굴복시킨다. 

오다 노부나가는 1576년 부터1579년 까지 비와호안에 거대한 아즈치성을 축성하여 

일본 군사사에 새로운 장을 연다. 아즈치 성은 총포의 사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7층의 천수각을 중심으로 웅대하게 솟은 성채는 석벽과 방어전용의 석벽으로 둘러쳐져 

오오미 평야를 굽어볼 수 있었다. 노부나가에 의해 처음으로 구사된 새로운 전투방식인 

집단전쟁과 아즈치에 세워진 거대한 성채의 새로운 축성방식은 대부분의 정예상비군을 

성안의 사령부에 집결시킬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이묘들의 가족까지 인질로 거주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무가귀족을 농촌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정복지 중에서 

가장 좋은 땅을 스스로 챙겼고 측근 가신들을 정복한 적의 요새의 다이묘로 임명했다. 

저항없이 항복해온 다이묘와 적장들은 동맹자로 받아들인 뒤 전쟁터에 선봉장으로 

적전에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정예 병력에 대한 손실을 막으면서도 

저들의 충성도를 시험힐 있었다. 1577년 노부나가는 서쪽 먼 곳에 포진하고 있는 적들을 향해 

원정에 나섰다. 서쪽 끝에 12개의 쿠니를 지배하고 있는 모리가 첫 번째의 목표였다. 

모오리를 정벌하기 위해 노부나가는 서진의 선봉장으로 그가 각별한 신임하고 있던 

히데요시를 내세웠다. 선봉에선 히데요시는 파죽지세로 탐바, 탄고, 타지마, 이나바, 하리마를 석권한다. 1578년에는 비젠과 미마사키의 우키다까지 항복시킨다. 대군을 가진 모오리와의 대전은 

힘이 들었고 오래 끌었다. 1582년 타카마츠 전선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채 꼼짝 못하던 히데요시는 

할 수 없이 오다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해야 했다. 히데요시를 돕기 위한 서진에는 여러 가지 위험과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위기에 빠진 히데요시를 구해야 되겠다는 결심이 선 오다 노부나가는 

큰아들과 아케치 미츠히데를 대동하고 아즈치를 떠난다. 그러나 쿄오토를 벗어나자 말자 

아케치 미츠히데가 반란을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와 아들을 살해해버린다. 

미츠히데가 충성하던 주군 노부나가 부자를 살해한 동기는 구구하다. 

그중 몇이 야사처럼 전해진다.

미츠히데는 유능한 외교관이자 정치가였지만 


성격이 급하고 직선적인 데다가 자기 이외의 

인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오다 노부나가는 

미츠히데와 같이 고지식한데다 

말귀를 한번에 못 알아듣고, 교양 많고, 말을 빙빙 돌려서 하는데다 자존심도 강한 스타일의 인간을 대단히 좋아하지 않았다. 


정치권력" 능력이 있기 때문에 미츠히데를 근처에 두고 중용


하면서도 기분 나쁘면 부하들 앞에서 


대머리라고 불렀고 머리채를 잡거나 마구 구타하는 정도였


다. 


어떻게 보면 늦건 이르건 사단이 나게 되어 있는 관계였다.


하루는 공식 석상에서 갑자기 광기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사소한 이유로 미츠히데를 때려죽일만큼 두들겨 팼다고 한


다. 미츠히데는 두들겨 맞으면서도                                                      아케치 미츠히데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고 한다. 근처의 다른 무장들이 말리고  대피시켜서 


살았다고도 하는데 역심을 품었다면 이쯤이었을 것이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프로이스도 <일본사>에서 


"노부나가가 미츠히데를 발길로 걷어찼다는 소문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일설에는 노부나가가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미츠히데가 술을 사양하자 


"내가 주는 술을 마실 수 없다면 이거나 먹어라"라면서 칼을 목에 들이밀었다고도 한다.


이런 예기 말고도 미츠히데가 노부나가를 배신한 이유는 따로 더 있을 것이다.

영민하고 도량도 넓고 영웅의 조건을 두루 갖춘 노부나가도 

미츠히데란 다이묘 하나를 잘못 다루므로써 일본통일을 앞둔 시점에 

비참하게 참살당한 것은 후세에 여러가지 교훈을 준다. 

예로부터 머리검은 짐승은 함부로 신뢰하지도 막무가내로 다루지도 말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일까?


비극적인 참살소식을 접한 히데요시는 모오리와의 전쟁을 즉각 접고 

쿄오토로 급히 돌아와 미츠히데를 단번에 격파해버린다. 

3걸 중 최연장자였던 오다 노부나가가 정복전쟁의 도중 전국토의 

3분의 1을 정복한 상황에서 49세의 나이로 요절한 다음 노부나가의 주요 가신들은 

상속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를 갖는다. 어린 손자가 상속인으로 지명되고 

네 사람의 후견인이 선정되어 보호역할을 맡게 된다. 

이들 중 미츠히데를 단번에 격파하여 노부나가의 복수를 완수한 히데요시는 

수도방위권을 부여받는다. 3년이 지나지 않아서 히데요시는 명실공이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나섰다. 

노부나가가 죽은 2년 뒤인 1584년 히데요시는 노련하고 치밀한 수완을 발휘하여 

다른 3명의 후견인을 축출하고 쿄오토에 대한 영속적인 지배권을 장악했다. 

이전에 함락시킨 오사카의 이시야마의 요새 자리에 새로 거대한 성을 쌓아서 자신의 본거지로 삼았다.


                                                          오사카 성

1585년 히데요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동맹을 맺고 노부나가 가문일족까지 포함한 이전의 모든 가신들로부터 충성을 확보했다. 히데요시는 조정의 위계와 천황의 집권자인 캄파쿠 칭호로 자신의 지위에 권위를 부여했다. 1585년 29세의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남긴 천하통일의 위업을 재개할 준비에 들어갔다. 히데요시의 주위에는 호오죠오, 타케다, 우에스기, 토쿠가와, 모오리, 쵸오소카베, 오오토모, 류우죠오지, 시마츠 등 9명의 다이묘가 이끄는 대연합이 버티고 있었다. 이들 중 우에스기, 토쿠가와, 모오리 3자와는 동맹을 맺고 있었으므로 히데요시의 당면 사업은 나머지 세력들을 약화시키는 일이었다. 히데요시는 먼저 쵸오소카베부터 손을 썼다. 1585년 히데요시는 20만 대군을 시코쿠에 투입하여 항복을 받아낸다. 2년 뒤인 1587년에는 28만 대군을 이끌고 큐우슈우로 진격했다. 북큐우슈우의 오오토모와 류우죠오지는 이미 힘을 잃고 있었다.

남은 시마즈도 히데요시의 압도적인 군세 앞에 굴복했다. 1590년 히데요시는 가장 힘든 상대인 오다와라의 호오죠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20만 병력을 이끌고 칸토오로 진격한 히데요시는 오다와리성을 포위했다. 두달 뒤 히데요시군의 끈질긴 포위공격으로 기진맥진해진 호오죠오는 하는 수 없이 항복한다. 얼마 님지 않았던 군소다이묘들 역시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해왔다. 이로써 일본의 군사적 통일은 일단락 되었다. 전국토는 희데요시와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한 다이묘들의 수중에 들어왔던 것이다. 히데요시가 모든 다이묘들의 영향력을 배제하여 절대적인 군주가 될 수 없었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히데요시는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많은 수의 다이묘들과 일종의 동맹화친관계를 유지하면서 전쟁에서 전공을 쌓은 다이묘에게 영지를 나누어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당장 절대군주로 나서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노부나가나 히데요시나 이에야스 모두 작은 다이묘에서 출발하여 큰 다이묘로 성장한 셈이었고 나중에는 다이묘의 통솔자로 성장했던 것이다. 전국을 통일한 히데요시 역시 권력의 정점    에는 있었으나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동맹체제의 외연에 어떤 권력기반이 없는 한 동맹을 맺은 다이묘들에게 등을 돌리고 이들을 제거하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전국적인 새 정부는 히데요시의 통치시기에 수립되었다. 전국은 단일의 다이묘오 연합으로 정복되었고 상급영주가 국내의 권력자가 되었다. 국토는 완전히 분권화 된 상태로 통일되었다. 히데요시는 전국적인 토지조사에 들어갔다. 모든 경작지는 石(석: 코쿠: 180 리터)이란 쌀 생산단위로 표시되었다. 1598년의 경우 전국평가의 합계는 1850만 석이었다. 히데요시의 영지는 200만 석이었다. 그의 영지는 넓은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지만 주로 키나이와 오오마, 오와리 등의 전략적 요충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비와호 부근의 비옥한 토지들과 쿄오토와 사카이 같은 요충도시도 그의 소유가 되었다. 큐우슈에서는 하카다와 나카사키 등의 항구에 대한 지배권도 쥐고 있었다.


1590년 히데요시와 연합하여 충성을 맹세한 다이묘는 200명을 밑돌았다. 

이들이 1600만석(미곡 1석은 180 리터)의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일본전국을 군사적으로 통일을 했다고 해도 히데요시의 지위는 확고부동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중앙부에 위치한 그의 직속 다이묘들은 모두 규모가 작았고 10만석 이상의 영지를 가진 

다이묘는 소수였다. 히데요시의 신임이 두터웠던 규슈우의 카토오는 25만석, 코니시는 20만석, 

카이코오후의 아사노는 21만 8천 석, 야마토 코오리야마의 마시타는 20만 석 오오미 사와야마의 이시다는 19만 4천 석 정도였다. 한편 노부나가 시절 이전부터 다이묘였던 히데요시의 외곽 가신들은 한번 정도는 히데요시와 대적한 경험이 있었다. 이들 중 에도의 토쿠가와는 255만 7천석, 히로시마의 모오리는 120만 5천석 아이즈의 우에스기는 120만 석 오오자키의 다데는 58만 석, 오카야마의 우키타는 57만 4천 석 가고시마의 시마즈는 55만 9천석 미토의 사타캐는 52만 9천 석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가신들을 재배치했다. 전략적인 입장에서 가신들을 그들의 근거지로부터 분리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토오토오미를 떠나 연고가 없는 칸토오의 옛 효오조오로 옮겨가야했다.

중심부에서 외곽으로 전봉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직속 다이묘에 의하여 포위된 채 감시받는 

                                                                                                   <토쿠가와 이에야스>


상태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그가 가장 신임할 수 있는 다이묘는 중앙부로 전봉시켰지만 상속자인 

히데츠구는 노부나가의 근거지였던 오와리에 배치했다. 군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히데요시를 섬기다가 다이묘가 된 키노시타는 서부방비를 위해 하리마에 배치되었다. 카토오와 코니시는 시마즈와 나베시마와의 균형 상 큐우슈우에 배치되었다. 히데요시의 패권은 정부과 가신들 사이의 봉건적인 유대관계에 의존하고 있었다.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한 가신들은 자신들의 가족을 인질로 히데요시에게 보내야했다. 오사카성은 가신들의 인질을 위한 거주지로 다이묘들의 배우자와 그 상속인들과 기타 자녀들을 위해 축성된 것이었다. 나중에 이들은 히데요시의 본거지인 후시미성 주변에 주거를 짓도록 의무화되었다.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한 가신들은 언제라 도 히데요시의 명령이 떨어지면 즉각 소집에 응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살면서 처자권속들 모두는 히데요시의 인질이 되어야했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들 가신들에게 히데요시의 이름 가운데 한자를 주거나 히데요시의 친척들이나 자녀들과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봉건적인 유대강화를 더욱 공고히 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이런 전통적인 방식 보다는 가신들의 충성을 얻을 수 있는 보다 더 확고한 방법을 찾아내야했다. 천출(賤出)인 헤데요시는 후지와라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서 조정으로부터 고위칭호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1585년 최후의 작전에 돌입하기 전에 히데요시는 캄파쿠(관백)의 관위를 제수받고 이어서 토요토미(秀吉)의 성을 하사받는다. 이듬해에는 태정대신

의 관위를 제수받았다.

1588년에는 후시미의 대저택에 천황과 주요 다이묘들을 초청한 가운데 성대한 잔치를 벌렸다. 히데요시는 천황의 면전에서 모든 다이묘들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을 맹세시켰고 천황기구에 대한 옹호의 맹세까지 시킴으로써 자신의 신분을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어갔다.

1591년 양자인 히데스쿠에게 지위를 물려주고 은퇴한 뒤에도 타이코오로 불렸는데 은퇴한 캄바쿠라는 뜻이다. 히데요시는 주로 캄바쿠란 자격으로 천황으르부터 위임받은 문무에 걸친 최고지상의 권력을 여전히 주장했지만 아무도 히데요시의 이런 주장에 대하여 반박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정치술이 능란했던 히데요시는 천황의 권위를 한껏 등에 업고 다이묘와 자신 사이의 주종관계를 더욱 확고부동한 것으로 조직해나갔다. 다이묘들과의 주종관계가 명확해짐과 동시에 히데요시는 지배권을 더욱 강화하면서 화폐를 주조하고 대외정책을 결정짓는 일에 주도적으로 대응해갔다. 전국에 시행될 법령을 발표하고 일본전체의 절대적인 통치자로 소임을 다하면서도 각 지역의 지방행정은 지방의 다이묘로 하여금 자립해서 처리하게 허용해주었다. 영토의 유지 또한 아예 공개적으로 개별 다이묘들에게 위임했다. 전국적 규모의 행정문제를 처리하는 일에 대해서도 히데요시는 다이묘들에게 권한을 대부분 위임해서 그들로 하여금 시의 적절하게 처리하게 만들었다. 히데요시는 직할령의 행정을 통해서 일본의 중심부와 대도시는 안정시킬 수 있었다. 히데요시는 권력은 확고부동하게 틀어잡았지만 세부적이고 지엽적인 소규모의 권력 행사는 유력한 다이묘들로 하여금 대신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우월적인 지위은 그대로 유지해나가면서 연맹과 통합관계는 유지하려고 했다. 군정과 민정의 권한과 여러 가지 기능들을 가신들과 다이묘들에게 맡겨서 집행하게 한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가신들 중에서 유력한 다이묘인 아사노 나가마사는 히데요시 영지의 가신업무의 관장을 책임지는 부교오에 임명되었다. 미에다 켄이는 무가의 대리총독으로써 교토오에 배치되어 도시행정과 공경과 승려를 관장하였다. 나츠카 마사이에는 히데요시 직할영지의 재정과 민정담당 부교오를 맡았다. 그밖의 가신들은 중신들의 주거문제 건설 교통문제, 군사조직과 보급 등 여러 가지 직능을 맡아서 처리했다.

무사가 아니면 칼을 소지할 수 없게 했고 사무라이는 함부로 주군을 버리고 떠날 수 없도록 법제화했다. 사무라이는 또한 농촌으로 귀환이 금지되었고 농민은 농촌을 떠날 수 없게 하면서 수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할 수 없게 했다. 이렇게 해서 히데요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하여금 별개의 법적 지위를 부여받는 4계급의 사회제도가 정착되는 기반을 만들었다.







                                                  코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

임진왜란:

노부나가와 히데요시가 일본통일에 열중하던 16세기 중반부터 일본해적들은 중국과 불법적인 무역을 통해서 엄청난 재화를 획득하고 있었다. 일본해적들은 인도차이나와 그 뒤쪽까지 진출하고 있었고 서양인들 역시 밀무역에 가담하면서 해상무역을 통한 이익창출경쟁은 한층 가열되고 있었다. 부유한 다이묘들은 다투어 유럽의 무역상을 후원하거나 동업자로 끌어들이며 경쟁적으로 자신들의 부를 키워나가는데 열중했다. 거금을 모은 일부 다이묘는 직접 선단을 만들어 무역대열에 끼어들었다. 히데요시는 내외통상거래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중심지인 오사카에 축성된 성하정에 자리를 틀어잡았다. 히데요시가 근거지로 삼은 오사카야말로 일본 중심부에 위치한 대규모항구로서 중국과의 비단교역이나 여러가지 대외교역을 통한 막대한 이익을 독점할 수 있는 요충 중의 요충이었다. 대외무역을 통한 이익창출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히데요시는 상인과 무역상들에 대한 자신의 우월적인 권한을 펴서 모든 해외교역활동에 대한 국가적인 통제체제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외교협상에 뛰어들어 이들 국가들로부터 유리하면서도 합법적인 무역상의 이권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일본 해적들의 해적행위를 억압하고 해외로 나가는 모든 일본인은 붉은 도장이 날인된 특허장을 소지하게 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이런 기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중국은 히데요시의 교역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에 격노한 히데요시는 다른 여러 가지 다른 요인도 작용하고 있었지만 특히 무역상의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중국을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키우게 된다. 전국을 통일한 뒤에도 다이묘들의 전쟁 열기는 식을 기미가 없었다. 전쟁에 참여한 대가를 바라는 다이묘들의 기대 역시 만만치 않았다. 다이묘들 사이에 전쟁을 갈망하는 에너지가 넘치고 있음을 간파한 히데요시는 중국대륙에 대한 정복을 본격적으로 꿈꾸기 시작했다. 중국의 군사력을 깔보는 그의 오만함과 중국을 정복한 뒤에 광활한 대륙의 영토를 다이묘들에게 분봉하겠다는 그의 과대망상증은 전쟁을 불사한다는 의지로 치닫게 되었다. 1591년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침공하려고 하니 조선을 마음대로 통과하게 해달라는 서신을 선조에게 보낸다. 명나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선조는 일본의 이런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해버린다.


                                                  가토오 키요마사


 1592년 임진년 북규슈에 원정군 사령부를 설치한 히데요시는 대륙정복을 위한 함선과 군대와 군수품을 조달하도록 모든 다이묘들에게 명령했다. 20만에 이르는 제1차 침공군은 동해를 건너 부산에 상륙한 뒤 20여일 만에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점령하고 수십일 뒤 평양까지 점령한다. 그러나 해전에서 참패한 뒤 보급에 큰 애로를 느낀 나머지 전선에 있던 일본의 다이묘들은 명나라의 대군을 만나자 중국군에 대한 협정문서상의 승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구로다 나가마사>



히데요시는 중국의 황녀를 히데요시의 후비로 삼을 것, 조선을 중국과 일본이 대등하게 분할할 것, 조선에 일본총독을 둘 것, 그리고 일본과 중국의 자유무역을 요구했다. 히데요시의 요구에 대하여 중국 측은 대답을 늦추다가 나중에 거부하자 1597년-1598년 제2차 침공(정유재란)을 시도한다. 1598년에 이르러 히데요시는 병세가 악화되었다. 죽음에 이르기 전 히데요시는 애첩인 요도기미가 낳은 어린 자식을 자신의 상속자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중신들 사이의 세력 균형을 조금씩 공식화 시키려고 시도했다. 먼저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토시이에, 우에스기 카게가츠, 모오리 테루토모, 우키다 히데이에 등의 집안으로 이루어진 회의체 5인의 집정관제를 지명했다. 5인의 최대급 토자마 다이묘로 구성된 이 집단에게 평화를 유지하고 히데요시의 대통을 유지하겠다는 특별서약을 시켰다. 어린 상속인에게 닥칠 위험과 불행을 미연에 막아보자는 기도였다. 그러나 1598년 62세 나이로 히데요시가 죽자 이런 특별서약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모든 가신들을 병합하거나 멸살하거나 연합하여 결국 모든 권력은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장악하게 된다.

조선에 대한 2차 침공(정유재란)도 끝이난다. 무분별한 침략야욕으로 시도된 두 차례의 조선원정은 형편없는 망상과 무모한 투기였음이 드러난다.


일본의 역사상 노부나가와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을 위해 혼신을 바친 40여년은 일본인이 경험했던 것으로는 가장 개방적이고 모험에 가득한 시대로 평가되고 있다. 어느 누구도 노부나가와 히데요시가 누리던 개인적 실력이나 전체적 권력이나 소비적인 부를 향유한 적은 없었다. 자수성가한 이들은 극도로 독단적이었고 어디서나 안하무인이었다. 이들은 아시카카 요시미츠나 후지와라노 마치나가 같은 이전 시대를 풍미했던 일본의 위대한 지도자들보다 월등히 막강했다. 언제 어디서고 자신들의 거침없는 충동을 억제 하지 않았던 이들은 굵은 스케일로 당당한 생애를 보냈다고 평가된다.

(차후에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일본 천하 완전통일 편을 게재하겠습니다.)

 


'정치와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을 중용하라  (0) 2019.10.05
한반도 위상  (0) 2019.09.20
황희석 검찰 독점권한   (0) 2019.09.19
조지 오웰  (0) 2019.08.18
평화경제  (0) 2019.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