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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말고도 중요한 일은 많다. 조직이 있으면 예산과 회계가 없을 수 없고, 국가로 보면 안보와 경제, 온갖 사회문제 해결까지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필요하다면 전쟁까지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모든 일이 결국 사람이 결정하고 집행하는 것들이기에 ‘인사가 전부’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인공지능(AI)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라 할지라도 최종적으로는 인간의 선택이 남을 뿐이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의 말로가 좋지 못했던 것이 한마디로 인사를 잘못한 탓이라 해도 결코 섣부른 결론이 아닐 것이다. 어떤 경로로 정권을 획득했든, 일단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는 국가 경영에 최선을 다했을 터다. 하지만 다양한 인재를 폭넓게 중용하지 못하고 자기 편만 요직에 앉히다 보니,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하고 전혀 다른 길로 빠지고 말았다. 이명박 정부는 ‘강부자 고소영’ 인사의 후유증으로 시작부터 ‘식물 정부’로 출범했으며, 박근혜 정부가 임기를 채우지 못한 것도 결국은 ‘오직 내 편’ 인사 탓이었다. 심지어 인사에도 없는 ‘비선 라인’이 국가정책을 좌지우지하기까지 했으니 말할 것도 없다.
전임자의 자살골로, 언감생심 꿈꾸지도 못했던 정권을 ‘거저 주운’ 문재인 정부 역시 이런 ‘내 편만’ 인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조국처럼 위선적이고 부도덕하다 못해 연극성 인격장애까지 의심받는 인물을 숱한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용함으로써 잘못된 인사의 정점을 찍었다. 가차 없는 역사의 채찍이 문재인 정부한테만 관용을 베풀 리 없다. 문재인 정부 또한 좋지 않은 결말이 예상되는 이유다. 잘못된 인사가 초래하는 필연이다. 또 한차례 불행이 반복되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좋은 인사란 어떤 것인가. 실천하기는 어렵지만 답은 간단하다. 능력이 있다면 내 편이 아닌 인물도 등용하는 것이다. 간단한 이치다. 내 편만 고집했을 때보다 능력 있는 인재 풀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난다. 실패할 확률은 반 이하로 줄어든다.
정부 인사를 볼 때마다 매번 답답했던 것은 왜 그 알량한 자기네 인재 풀에서만 사람을 고르는가였다. 내가 인사권자라면 가장 난제가 많은 자리에 유능한 적의 편을 기용하겠다. 그래서 그가 어려운 문제를 잘 해결해내면 내가 좋고, 못하면 적의 탓으로 돌릴 수 있지 않느냔 말이다. 적의 탓으로 돌리기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적의 비판을 좀 무디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게다가 적의 편을 품에 안으면 그를 내 편으로 만들 가능성도 있다. 목표가 좋은 나라를 만들자는 건데 중책을 맡은 적의 편이 나를 해치기 위해 잘못된 정책을 펼칠 위험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런 결말을 역사가 오랫동안 수없이 많은 사례를 내세우며 가르쳐주는데 배우지 못한다. 눈앞의 이익에만 군침을 흘리기 때문이다. 좋아 보이는 그 이익이 결국 독과(毒果)라는 게 보기 어렵지 않은데도 그런다. 참으로 딱한 일이다. 독과를 골라내는 역사의 지혜를 살펴보자.
독과를 거르는 역사의 지혜
주지하다시피 제나라 환공은 중국 춘추오패 가운데 첫 번째 패자가 됐던 인물이다. 그가 그런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던 힘은 다름 아닌 인사였다. 적의 편에게 중책을 맡겨 성공한 대표적 사례다.
제 환공의 아버지인 희공(僖公)에게는 세 아들 제아와 규, 소백이 있었다. 희공이 죽자 장남인 제아가 양공(襄公)으로 즉위한다. 양공은 즉위 전부터 난폭한 인물이었다. 그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한 규는 노나라로 달아나고 소백은 거(莒)나라로 망명을 한다. 양공은 예상대로 폭정을 휘두르다 사촌동생인 공손무지의 손에 죽고 만다. 이어 공손무지가 왕위에 오르나 오래지 않아 살해되고 제나라는 규와 소백 사이의 후계자 다툼에 빠진다.
이때 규에게는 관중이 모사로 있었고, 소백에게는 포숙아가 있었다. 제나라 백관들이 소백을 후계자로 삼고 초빙했다. 관중은 자신이 모시는 규를 왕좌에 오르게 하기 위해 소백을 죽일 생각을 한다. 관중은 제나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소백이 나타나자 화살을 쏘아 맞힌다. 소백이 쓰러지자 관중은 쾌재를 부르고 규에게 소백이 죽었다고 보고했다. 이에 규는 여유 있게 제나라로 향했지만, 도착해보니 이미 소백이 제나라에 들어와 왕이 돼 있었다. 관중이 쏜 화살이 소백의 허리띠 쇠장식에 꽂혀 천우신조로 목숨을 구한 것이었다.
환공으로 즉위한 소백은 규를 유배시킨 뒤 죽였다. 자신에게 화살을 쏘았던 관중 또한 당연한 처형 대상이었다. 하지만 포숙아가 극구 만류해 목숨만은 살려준다. 환공은 포숙아를 재상으로 삼으려 했지만 포숙아는 또 한번 극구 사양하며 대신 관중을 추천한다. 환공이 말했다.
“아니, 관중은 나를 죽이려고 활을 쏜 자요. 어찌 그런 자를 재상으로 쓸 수 있단 말이오?”
포숙이 말했다.
“관중은 신하로서 도리를 다한 것뿐입니다. 관중이 대왕을 쏠 때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공자 규만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대왕께서 관중을 쓰신다면 관중은 대왕을 위해 천하를 화살로 쏠 것입니다.”
“신하로서 할 일을 했기에 목숨을 살려주긴 했지만 그를 재상으로 삼을 순 없소.”
포숙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제나라만 다스리는 일이라면 제가 재상이 되어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패자가 되어 천하를 호령하려 한다면 저는 크게 부족합니다. 관중이 아니면 누구도 대왕을 도와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제 환공은 포숙아의 말을 받아들여 관중을 재상으로 기용했다. 관중과 포숙아의 우정을 말하는 ‘관포지교(管鮑之交)’는 너무나 유명한 고사성어다. 관중이 자신보다 뛰어난 것을 알고 있던 포숙이 재상 자리를 친구에게 양보한 것이다. 기회만 오면 자신에게는 과분한 자리인 줄 알면서도 덥석 물었다가 사달이 나는 게 다반사인 요즘 세태로 보면 포숙아도 참으로 훌륭한 인물이다. 사마천은 『사기』에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재능을 칭찬하기 앞서 인재를 알아본 포숙아를 더 칭찬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그런 충언을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갖춘 제 환공 역시 뛰어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해도 자신을 죽이려 했던 원수를 받아들이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원한을 잊고 능력 있는 인물을 중용함으로써 춘추오패의 첫 패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재 구하려 정원을 밝힌다
이처럼 선이 굵은 제 환공의 인재관을 설명하는 고사성어가 또 있다. ‘횃불로 정원을 밝힌다’는 뜻의 ‘정료지광(庭燎之光)’이다. 훌륭한 인재를 기다리고 찾는 준비와 마음가짐을 일컫는다. 제 환공은 인재를 구하는 데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자기를 찾아오는 인재가 길을 못 찾을까 걱정해 정원에 횃불을 켜 밝히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일 년이 지나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점쟁이 하나가 찾아와 말했다.
“인재들이 오지 않는 것은 누구도 자신의 능력과 재주가 대왕의 지혜로움을 넘어선다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왕께서 보잘것없는 저를 발탁하면 저보다 뛰어난 인재들이 용기를 얻어 찾아올 것입니다.”
이에 제 환공이 그에게 걸맞은 자리를 내리자 이후 수많은 인재가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당 태종도 제 환공과 아주 흡사한, 적을 끌어안는 인사로 위업을 이룬 인물이다. 당 태종 이세민도 장남이 아닌 둘째 아들이었다. 수나라가 고구려 원정과 대규모 토목공사로 피폐해지자 곳곳에서 반란군이 일어났다. 이세민의 아버지 이연도 이때 반란의 깃발을 들었는데, 이세민은 뛰어난 지략과 용기로 아버지가 장안을 손에 넣고 당나라를 창건하는 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이연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장남인 이건성을 황태자로 삼고 이세민은 진왕(秦王)에 봉했다. 이세민은 이후에도 반란을 일으켰던 귀족과 지방호족들이 당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창을 겨누자, 정벌에 나서 단 한 번도 패한 적 없이 모두 토벌했다. 이연이 ‘천책상장(天策上將)’, 즉 ‘하늘이 내린 장수’라는 별호를 내릴 정도였다.
당연히 이세민의 권세와 인기는 높아졌고, 황태자 건성은 자신의 자리를 세민에게 빼앗길까 봐 좌불안석했다. 이때 건성 아래에는 위징이라는 뛰어난 신하가 있었다. 그는 세민의 존재감이 황태자를 누르게 될 것을 예견하고 태자에게 이세민을 암살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건성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막내 동생인 제왕(齊王) 이원길과 함께 대책 마련에 골몰했다.
낌새를 알아챈 이세민이 먼저 움직였다. 세민은 황제를 알현하고 형제들이 자신을 없애기 위해 모함한다고 일렀다. 이연은 곧바로 건성과 원길을 불렀고, 두 사람이 황궁의 현무문을 지난 순간 매복한 이세민의 군사들이 그들을 살해했다. 이른바 ‘현무문의 변’이다. 며칠 뒤 사실을 보고받은 황제는 이세민을 황태자로 삼을 수밖에 없었고, 얼마 후 그에게 양위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세로 일컬어지는 당 태종의 ‘정관의 치(貞觀之治)’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위징에게는 최악의 결과였다. 자신이 독살하라고 건의했던 인물이 황제가 됐으니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위징은 현실을 받아들여 죽음을 각오하고 황제의 부름을 기다렸다. 이세민은 위징을 발밑에 꿇어앉힌 뒤 물었다.
“너는 어찌해서 우리 형제 사이를 이간질해 이처럼 참혹한 지경에 이르게 했느냐?”
위징은 오히려 담담하게 반문했다.
“이건성이 제 말을 들었다면 어찌 제가 이 지경에 처했겠습니까?”
당 태종은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위징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주군을 보필하기 위해 상대를 죽이라고 충언한 것은 죄가 될 수 없는 일이었다. 태종은 위징을 간의대부로 삼았다.
이 같은 당 태종의 결정에 공신들은 불만을 품었다. 어느 날 연회 중에 태종의 처남인 장손무기가 위징을 비꼬았다.
“참으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오. 두건덕(호족세력)과 이건성의 부하였던 그대와 이렇게 한자리에서 술을 마시게 될 줄 누가 알았겠소. ”
위징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가 두건덕을 보좌할 때 둔전제를 시행해, 수익은 백성에게 돌아갔고 국가는 부유해졌소. 나는 두건덕이나 이건성 개인을 위해 일하지 않고, 오로지 오랜 전화로 도탄에 빠진 백성을 위해 일했소. 백성이 가장 중요하고 그에 비해 권력은 가벼운 것이며 사직은 마지막인 것이오. 오직 주군에게만 충성하고 백성은 나몰라라 하는 사람들과 나는 다르오.”
윤석열 검찰총장이 위징의 이 말을 생각하고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과 묘하게 맞닿아 있다.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당 태종은 “내가 위징을 쓰는 것은 그의 충심과 사심 없는 태도를 알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위징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말라”고 명했다.
이후 위징은 황제에게 수없이 쓴소리를 했다. 간언한 횟수가 300회에 이를 정도였다. 태종이 불같이 화를 내며 위징을 처형할 것을 명했다가 곧바로 취소한 것만 수차례였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간언을 계속한 위징도 대단하지만, 그런 위징을 계속 중용한 당 태종은 더욱 훌륭한 인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인재를 구하는 데 아낌이 없었던 당 태종에게는 뛰어난 신하가 많았다. 하지만 누구도 황제의 목숨을 노린 적이었던 위징을 앞서지 못했다. 당 태종이 친히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실패하고 돌아오며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이 같은 어리석은 짓은 못 하게 했을 텐데”라고 아쉬워하며 후회했다는 것은 유명한 고사다.
제 환공의 경우는 더욱 치명적이다. 다시 제 환공한테 돌아가 보자.
관중이 병으로 쓰러지자, 환공이 문안을 왔다. 관중이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임을 알고 환공은 그의 후임으로 누가 적임자인지 물었다. 환공은 역아와 수조, 개방을 거명했지만 관중은 그들은 절대로 안 된다고 말했다. 역아는 원래 노예였는데 요리 솜씨가 뛰어났다. 환공의 눈에 들기 위해 자기의 세 살짜리 자식을 죽여 음식으로 만들어 바쳤다. 수조는 환공을 가까이서 모시기 위해 스스로 생식기를 잘라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환관이 됐다. 개방은 위나라의 공자였으나 위나라가 전쟁에서 제나라에 패한 뒤 인질로 왔다가 환공의 총애를 잃지 않기 위해 부모까지 버린 인물이다.
가히 엽기적인 인물들인데도 환공은 관중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재상으로 기용한다. 아니나 다를까, 이 세 사람은 재상 자리에 오르자마자 환공을 밀실에 가두고, 권력다툼에만 몰두했으며, 환공은 아무도 오지 않는 골방에서 홀로 굶어 죽어야 했다. 그야말로 엽기적인 최후다.
제 환공과 당 태종 두 사람 모두 자신을 해치려 한 인물을 기용해 성공을 거뒀고, 그를 잃고는 낭패를 겪었다. 그것은 자신을 해치려던 사람을 기용할 만큼 사람을 보는 안목과 누구든 가슴에 품을 수 있는 넓은 도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안목과 도량을 잃는 순간, 자신을 해치려 할 때보다 더 큰 위험이 비로소 다가오는 것이다.
※ 이훈범은…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되었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이고 있다. 역사 속 사건과 인물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1989년 중앙일보에 얽매여 기자로 산 지 30년째, 그중 10년 이상을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역사, 경영에 답하다』(2009), 『대한민국 국격을 생각한다』(2010, 공저),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2014), 『품격』(2019)이 있다. 파리10대학 문학박사 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