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의 파시즘

2019. 10. 7. 18:08정치와 사회

이진우의 의심]‘광장의 파시즘’을 경계한다



광장의 파시즘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검찰개혁을 통해 조국 사태의 국면 전환을 시도하였던 지난달 28일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인근에서 열린 ‘검찰개혁 촛불문화제’는 광장정치에 불을 댕겼다. 개천절에는 조국 사퇴를 촉구하는 범보수 진영의 집회가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참가인원이 5만인지, 200만인지, 300만명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토론을 통한 합의와 타협의 장소인 국회는 공동화되고, 정치적 구호만 난무하는 광장이 세력을 보여주는 전시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광장이 단순한 힘의 전시 공간이 되는 순간, 참여민주주의의 상징이었던 광장에서는 오히려 파시즘이 싹튼다.

[이진우의 의심]‘광장의 파시즘’을 경계한다

‘조국 사퇴’와 ‘조국 수호’의 광장 집회가 거듭할수록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민주주의는 퇴보할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국민통합의 약속을 저버리고 독선의 정치를 일삼은 집권세력의 책임이 크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이 정권이 흠집난 도덕성을 덮기 위해 다시 촛불을 동원하였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촛불집회를 통해 표출된 민심을 반영하여 검찰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통치행위처럼 보인다. 여기서 파시즘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파시즘은 자유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파시즘은 권력을 위해 민중을 동원하는 방식이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통치자가 반대세력을 포용하기는커녕 대화조차 안 하고 국민과 ‘직접’ 소통하겠다는 것은 파시즘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민주주의는 우리 안의 파시즘을 경계하지 않을 때 위기에 직면한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국가의 지도자가 비민주적 행태를 보이는 새로운 파시즘을 목격하고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체주의적 정권이 붕괴하였다고 전체주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한나 아렌트의 경고가 현실이 되고 있다. 파시즘도 마찬가지다. 민주적 열린 사회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야수로 되돌아갈 수 있다. 집권세력에 의한 권력의 사유화와 정치적 불의를 처벌하기 위해 스스로 촛불을 들고 광화문광장으로 나갔을 때는 새로운 정치가 시작할 것이라는 뜨거운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나고, 기득권 세력은 좌우와 관계없이 똑같다는 차가운 인식만이 남았다. 

이 정권이 설령 ‘광장 민주주의’로 집권하였다고 하더라도 제도와 절차를 통한 민주주의 개혁에 힘썼어야 한다. 광장의 힘을 맛본 정권이 광장의 유혹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정권이 다시 민심을 반영하는 촛불집회의 이름으로 광장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에 호소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집권세력이 기득권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광장의 민중을 동원할 때 여지없이 파시즘이 함께 등장한다. 지금처럼 의회정치가 실종되고 광장정치만 남아 있게 되면 파시즘은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첫째, 파시즘은 기득권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파편화된 민중을 결집한다. 기득권 세력의 불법과 비위를 밝히기 위해 광장에 모이는 것은 깨어 있는 시민의 참여행위이지만, 부정과 불의의 의혹을 받는 자를 보호하기 위해 광장에서 집단의 힘을 과시한다면 파시스트 중우정치이다. 검찰개혁을 위한 촛불집회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인다 하더라도 ‘검찰개혁=조국지지’라는 프레임이 굳어진다면, 촛불을 들고 광화문광장에 나갔던 상당수의 사람들을 포함하여 국민의 반은 등을 돌릴 것이다.

둘째, 파시즘은 권력 쟁취의 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낸다. 우리 사회가 이미 촛불과 태극기로 양분되어 있음에도 운동권 출신 기득권 세력은 새로운 적을 찾아낸다. 타도할 부정부패 세력이 있을 때 저항 운동은 명료하고 강력하다. 싸울 상대가 뚜렷하지 않을 때 운동권은 스스로 부패한다.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노선과 맞지 않는 사람을 모두 적으로 낙인찍는다. 괴물과 싸우다 보면 스스로 괴물이 된다는 니체의 말처럼 이분법에 저항하던 사람들이 선악의 이원론에 갇혀 있는 것이다. 

셋째, 파시즘은 차이와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하더라도 한 의견만 있는 곳에서는 건강한 여론이 형성되지 않는다. 조국 사태에 대처하는 집권세력은 일사불란하다. 청와대, 민주당, 친정부 시민세력 모두 한 사람처럼 움직인다. 어쩌다 조금이라도 비판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소위 작가, 지식인이라는 운동권 엘리트들이 나타나서 궤변으로 인신공격을 한다. 집단성이 도덕성을 넘어설 때 파시즘은 고개를 쳐든다. 

넷째, 최고의 통치자가 민중과 직접 소통하려는 방식이 파시즘이다. 독일 철학자 베냐민이 파시즘의 핵심으로 꼽고 있는 것은 바로 정치적 권력이 민중에게 나타나는 방식이다. 민심을 듣겠다고 의회를 무시하면, 그것이 바로 파시즘이다. 오늘날 민심을 조작하고 호도할 수 있는 많은 매체 기술이 발전하면서 파시즘이 기승을 부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파시즘은 이렇게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한국 민주화에 많은 기여를 했던 운동권 좌파 정부에서 파시즘의 기운이 엿보이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요즘 광장만 있고 의회는 없다. 정쟁만 있고, 정치는 보이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촛불을 꺼트리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는 광장의 파시즘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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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10062047025&code=990100#csidxa02bf3d962646d2a81f751ae403baf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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