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 프리모 레비

2020. 1. 27. 19:41정치와 사회

아우슈비츠에서 극적 생환해 증언문학에 몸바친 프리모 레비
재일조선인 서경식씨가 탐구한 그의 죽음의 의미
프리모 레비(1919~1987). 유대계 이탈리아인으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것이 인간인가> <주기율> 등의 작품을 내놓은 ‘증언문학’의 대표 작가로 꼽힌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예외자로서 ‘증언’을 자신의 의무로 삼아 열정적인 글쓰기에 매진하던 그는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아파트 난간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만다. 극한의 고통을 견디고 살아남은 이가, 그리고 자신의 어깨 위에 인류사적 증언이라는 엄중한 책무를 얹어 놓았던 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재일동포 작가 서경식(55)씨의 1999년 저작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쓰여졌다.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서씨는 “이 책은 그 동안 내 사유 활동의 핵심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고 쓴다. 프리모 레비의 삶과 죽음은 문제적이다. 그것이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서 인류 전체에게 해당되는 ‘징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역시 수용소를 체험한 유대인 작가 장 아메리가 1976년에 자살하자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쓴다. “인생에서 목적을 가지는 것은 죽음에 대한 최선의 방어다. 그리고 그것은 수용소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수용소에서의 최우선적 목적은 물론 인간적 존엄을 잃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었다. ‘수용소 이후’ 인생 최대의 목적은, 레비의 경우, 증언을 통한 인간성의 재건이었다. 동료 유대인 아메리의 자살에 유감을 표하며 ‘살아남은 자의 의무’를 강조했던 레비가 자살을 하다니! 아메리의 자살이 레비에게 충격이었듯이, 서경식씨에게는 레비의 자살이 큰 충격이었다. “레비가 1987년에 자살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단순 명쾌했을 것이다.” 불가리아 출신 문학이론가 츠베탕 토도로프의 말은 바로 서경식씨 자신의 화두가 되었다.

“나는 이성을 믿으며 서로 대화하는 것이 진보를 위한 최상의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증오보다도 정의를 선호한다.”

‘젊은 독자에게 답하다’라는 레비의 글의 한 대목이다. 독일인을 용서한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레비의 ‘증언’은 복수나 단죄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홀로코스트는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가, 하는 인류사적 질문에 이성적으로 대응하는 가운데 인류의 진보를 위한 희망을 찾아 보려는 안간힘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돌연한 자살이 뜻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이성적인 사람, 증인으로서 살아갈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한 사람, 항상 삶을 긍정하던 사람, 조용한 낙관주의자 쁘리모 레비”(254쪽)의 자살은 그런 안간힘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는 반증이 아니었을까.

<시대의 증언자…>에서 서경식씨는 섣부른 결론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자살의 이유는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270쪽)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그렇지만 자살의 이유를 짐작할 만한 정황증거는 아프도록 풍부하다. 무지라는 방패 뒤에 숨어서 나치의 만행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하는 독일인들, 심지어 ‘가스실은 없었다’는 식의 아우슈비츠 부정론 내지는 수정주의 역사관은 레비의 가슴을 무너지게 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유대인들의 나라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1982)이라는 엉뚱한(?) 사태가 그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 놓았을 것이다. 이 무렵 그의 눈에 인류라는 ‘괴물’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시대의 증언자…>에서 지은이 서경식씨는 레비의 고향이자 그의 무덤이 있는 이탈리아 토리노를 찾아 그의 삶과 죽음의 흔적을 더듬으며 그 의미를 탐색한다. 그러나 서씨는 단순한 관찰자의 자리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주변부’ 인간으로서, 박정희 정권의 폭압을 온몸으로 겪은 아픈 가족사의 소유자로서 그는 ‘레비라는 객관’과 자신의 주관적 체험을 끊임없이 연결지음으로써 책의 울림을 한층 풍부하게 한다.

(책의 제목과 기사 본문의 표기가 다른 까닭은 출판사 창비가 외래어표기준칙과 다른 독자적인 표기법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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