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17. 10:58ㆍ물류와 유통
5.24 조치와 대북 사업가의 고민
인천의 '제1국제여객터미널'은 중국 단둥으로 일주일에 3번 출항하는 단둥페리가 정박한다. 그곳에서 북한 관련 사업 및 무역을 시작한 지 17년이 넘은 노년의 대북 사업가를 만났다. 그는 대북 사업 1세대에 속한다. 그와 악수를 하면서 5년 전을 회상했다. 5.24 조치 때문에 그가 북한의 공장에 투자한 금액을 회수하지 못해서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잠시 지나가는 어려움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5년 넘게 그는 5.24 조치 해제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고 두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규모는 줄어들었지만 비공식적으로 여전히 대북 사업을 하고 있다. 한국의 '재고 의류'를 중국 단둥을 경유해서 북한으로 보내기 위해 서류를 검토하던 그가 나에게 "5.24 조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해제 이후, 민간 차원의 남북의 만남들이 걱정됩니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되지 않을까요? 단둥과 네 집단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5.24 조치가 언제 해제 될지를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서, 내가 생각해도 생뚱맞은 대답에 그는 화답했다.
"그래 맞아! 너무 긴 세월이 지나가고 있어! 5.24 조치에 대한 해제의 목소리를 높여야 하지만 동시에 해제 이후에 어떻게 남북이 만나고 경제 활동을 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우리는 몇 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지만, 요즘 단둥에서 북한 무역 대표 또는 대북 사업가인 조선족과 북한 화교들을 만나면 그들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껴. 그동안 국경 무역과 관련된 사업 노하우가 쌓인 그들을 한국의 젊은 사업가들이 감당을 할 수 있을까?"
"경제 활동은 곧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출발을 하는데 말이지. 해제 후, 남북의 물류가 배와 비행기를 통해 연결이 된다고 능사는 아니지! 지금이야말로 단둥을 북-중 무역이 아닌 삼국(한국-중국-북한) 무역의 메카로 만들어오고 있는 우리와 같은 대북 사업가들(단둥 거주 한국 사람)의 경험에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귀 기울여 주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아!"
그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단둥의 국경 무역 구조의 역사와 현재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5.24 조치 해제 이후를 준비하는 첫걸음이자 해제의 명분들을 확보하는 지름길이 아닐까?"
5.24 조치 해제의 명분은 많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5.24 조치로 남북 관계가 멈춘 동안, 중국은 북한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우선권을 획득하고 있다"라며 "지금 남북 관계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중국에 뒤쳐져 따라잡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우려가 높다"라고 평했다. (…) 그는 "5.24 조치로 북한 경제가 타격을 입은 것이 아니라 우리 기업들만 손해 봤고 북한의 중국 의존도만 높였다"라며 "이렇게 5.24 조치가 6년째 경제 협력의 발목을 잡고 우리 기업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일요신문> 2015년 11월 17일자)
이는 문재인 대표만의 의견이 아니고 5.24 조치 해제를 희망하는 사람들과 시민단체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이처럼 해제의 명분은 "남측의 경제적 피해" 가운데 "우리 기업의 피해"를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모양새이다. 해제의 명분을 주장하는 또 다른 목소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나는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과연 5.24 조치 해제 이전에 '북한의 변화'를 먼저 요구하는 정부의 입장이 바뀔까? 과거 남북의 경제적 교류에 대해서 '일방적 퍼주기'로 오해하고 있는 국민들의 동참과 여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그렇다면 5.24 조치 해제와 관련된 명분과 이유를 더 구체화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남북 교류에 대한 다양한 선입견과 편견을 극복하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단둥, 남북 관계를 들여다보는 거울
한국 사회는 단둥에 대한 두 가지 잘못된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용하고 있다.
하나는 5.24 조치 이전에도 그랬지만, 단둥의 국경 무역을 북-중 무역으로만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2010년 이후, 한국 언론은 단둥에서 대북 무역을 하는 한국 사람이 없다고 보도한다. 이러한 시각이 주류인 한국 사회는 5.24 조치라는 장벽의 균열과 틈을 통해서 여전히 실천되고 있는 남북 교류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있다.
압록강 하류의 중국 항구 도시 단둥(丹東). 여기서 강을 건너 신의주를 거치면 곧바로 평양까지 갈 수 있어 북-중 교역의 상징과도 같다. 양국 무역의 80% 정도가 단둥 항과 세관을 통해 이뤄져 '북한 변수'에 가장 민감한 도시이기도 하다. (<한국일보> 2015년 11월 13일)
5.24 조치로 장벽에 갇힌 것은 북한만이 아닌 듯하다. 북-중 접경 무역의 한 축을 거머쥐었던 한국 기업가들이 20여 년 동안 터 닦은 접경 지역에서 지도에도 없는 변경으로 밀려났으니 말이다. (<한겨레21> 2015년 3월 19일)
위의 두 기사는 사실에 근거를 둔 내용이 아니다. 2015년의 단둥은 북-중 무역만이 존재하는 지역이 아니고 한국 사람이 대북 무역에서 밀려난 것도 아니다. 5.24 조치 이후에도 북-중 무역의 통계에는 보이지 않는 한국 사람과 북한 사람의 경제 교류가 녹아있다.
또한 5.24 조치가 단둥에서 대북 사업에 종사하는 한국 사람 모두를 사라지게 하지는 못했다. 이는 5.24 조치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실마리이다. 이처럼 단둥의 무역 구조와 현주소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해제의 명분들을 알아가는 출발점이다.
5.24 조치 해제의 명분들을 열거하자
"그들은 오늘도 경의선 통과가 상징하는 국경 넘나들기라는 내용과 그 역할을 단둥에서 실천하고 있다." (<나는 오늘도 국경을 만들고 허문다>(강주원 지음, 글항아리 펴냄))
이렇게 마무리한 나의 책은 2013년 10월에 초판을 찍었다. 때문에 2010년 5.24 조치 이후의 단둥의 변화상을 부분적으로만 다룰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보완하고 후속 연구의 일환으로, 나는 2010년 이후에 '삼국을 연결하는 네 집단의 경제활동과 교류'와 관련되어 어떤 변화가 있는지 혹은 다른 현상을 주목해야하는지를 고민해왔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 기업의 피해"만이 강조되는 해제의 명분에 뼈와 살을 붙여보겠다.
1992년 한중 수교 전후부터 2010년 5.24 조치 이전까지 단둥은 남북 교류가 실천되고 펼쳐지는 실질적 장이었고 남북 교류가 '일방적 퍼주기'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가 있다. 2010년 이후의 단둥을 들여다보면, 5.24 조치가 북한에 대한 경제적 봉쇄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한국의 기업뿐만 아니라 국민의 경제적 삶에 직간접적으로 손해를 입히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5.24 조치 이후에도 단둥은 삼국(한국, 중국, 북한) 무역의 구조와 역할을 유지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해제 이후의 청사진을 그릴 수 있는 곳이 단둥이다. 그곳에 북한 화교와 조선족뿐만 아니라 북한 사람과 한국 사람 즉 네 집단이 있기 때문이다.
단둥에서 남북의 만남을 준비하자
2010년부터 5.24 조치가 남북의 만남을 막고 있다. 그 결과 공식적으로 남북의 경제적 교류는 짧은 이별이 아닌 긴 헤어짐이 되고 말았다. 이쯤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해제 후,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 될까? 아니다. 긴 세월 헤어졌던 사람을 만날 때, 쉽게 범하는 실수가 상대방을 예전의 모습으로 대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5.24 조치 해제 이후, 민간 차원의 남북의 만남은 2010년 모습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북한 사회와 북한 사람의 변한 모습을 미리 파악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그 만남은 어색하고 불편할 것이다. 5.24 조치 해제만을 주장하면서, 만남을 막연히 기다리지 말자.
5.24 조치 이후에도, 단둥에서는 북한의 변화를 직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북한 무역 일꾼과 대표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볼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은 사업 파트너인 북한 대표 혹은 무역일꾼들과의 끈을 비공식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조선족과 북한 화교들은 몇 년 사이에 국경 무역의 노하우를 빠르게 습득하고 있는 북한 무역일꾼들을 대처하는 방식을 알고 있다.
네 집단의 관계 맺음은 현재 진행형이고 남북 교류의 축소판이다. 그들은 남북 교류의 디딤돌이다. 5.24 조치 해제의 명분을 구체화하고 열거할 수 있는 사례들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해제 이후, 예상되는 남북의 다양한 만남들을 준비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단둥이다.
글=강주원 프레시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