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17. 11:02ㆍ물류와 유통
단둥은 변하지 않았다
2000년 여름 한 달, 나의 현지 조사는 두만강변 혹은 만주 벌판의 어느 산 속 움막이었다. 그곳에서 탈북 청소년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후 2006년 가을, 박사 논문을 위한 장기 현지 조사는 단둥의 민박집에서 시작하였다. 북한 아줌마가 옆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나에게 아침밥을 해주었다. 한 달 뒤, 나는 그녀가 파출부 일을 통해서 번 돈을 가지고 구입한 물건을 가지고 신의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나는 한국 사람과 북한 사람이 함께 하는 모임과 술자리에 수시로 동석을 할 수 있었다. 한국 사람과 북한 사람의 관계 맺음과 국경 무역 방식들은 나의 연구 내용이었다. 단둥은 그들의 만남을 일상적으로 참여 관찰할 수 있던 공간이었다.
2015년, 남북이 공존하고 교류하는 단둥은 변하지 않았다. 다시 찾은 민박집에서 압록강 건너 신의주에서 들려오는 아침 노래 방송과 닭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한국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의 아파트 구멍가게에는 "북조선 계란 판매" 문구가 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한국 사람은 북한의 대동강 맥주를 마시고 북한 사람은 슈퍼에서 한국 우유를 구입하고 있다. 그들은 삼국의 국기가 걸려있는 식당에서 스스럼없이 함께 식사를 하고 있고, 사우나에서 서로의 벗은 몸을 보면서 때를 미는 곳이 단둥이다.
북한 노동자와 함께 하는 고기 잔치를 꿈꾸다
단지 단둥의 변화를 하나만 이야기를 한다면, 북한 노동자들이 근무하는 중국 공장(봉제, 수산물, 전기·전자)들이 2010년을 전후해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공장을 운영하는 조선족과 북한 화교는 나에게 북한 노동자의 계약서를 보여주기도 하고 그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전해준다. 덕분에 나는 그들의 근무 환경 및 식단 메뉴를 수첩에 적었고, 그들이 외출을 하면 주로 어디에 가고 무엇을 구입하는지 알고 있다.
그녀들은 단둥 생활 1년차에는 북한의 부모님과 가족을 위해서 물건을 구입한다. 2년차에는 자신들이 필요한 생필품을 숙소 한 구석에 하나 둘 모으고, 3년차에는 북한에 돌아가 장마당에 팔 수 있는 가전제품 등을 주로 쇼핑한다. 그녀들의 대형 귀국 가방은 최소 2~3개가 필요하다. 그녀들의 가방에 담긴 물건들은 북-중 무역 통계에 대부분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제한적이고 정확하지도 않은 북-중 통계를 통해서 북한 경제를 분석한다.
그들의 계약서에 담긴 인건비 액수는 단둥이 "또 하나의 개성 공단"임을 보여주고, 그들의 월급 사용 방식을 들여다보면 북한 사회에 미치는 경제적 효과는 개성 공단을 뛰어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단둥의 북한 노동자에 대한 참여 관찰은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이를 알기에 내가 단둥에 가면, 조선족과 북한 화교는 함께 공장에 가자고 권유한다.
"오늘 공장에서 5명의 조선(북한) 노동자들을 위해서 생일 잔치가 있는데 가자?", "내일 저녁 때,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공장 마당에서 고기를 구울 계획인데 함께 하지?", "핸드폰 보여줄까, 이 사진은 지난 달 고기 구워 먹는 모습인데 이 친구들이 춤과 노래를 잘해요. 일하는 모습도 봐야지, 자네 인류학자잖아!"
그때마다, 나는 순간 일탈을 고민하지만 허탈한 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한다.
"(5.24 조치가) 해제되면, 바로 단둥에 오겠습니다. 돼지 한 마리를 사 가지고 공장에 가서 북한 노동자와 함께 마음껏 고기 잔치를 합시다. 대신에 오늘은 그동안 있었던 북한 노동자들을 보면서 느낀 점들을 이야기해주세요. 요즘 공장에 하청을 주는 회사는 한국 회사예요, 아니면 미국 회사예요? 북한 여공들이 만든 MADE IN CHINA 옷을 한국에 수출하고 남은 것이 있으면 하나 주세요."
'공장 앞마당에서 북한 노동자와 함께 먹고 마시는 고기 잔치'를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둥에 거주하는 북한 사람에 대한 연구를 중단한 것은 아니다. 단둥에는 공장에만 북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북한 식당, 호텔, 식당과 술집, 사우나, 무역 상점, 세관과 기차역 주변, 조선족 거리, 도매 시장, 신시가지, 보세 창고 등에서 나는 현지 조사를 하고 있다.
그곳에 가면 5.24 조치의 굴레에서 벗어나 북한 사람을 직접 만나지 않아도 그들의 삶의 방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참여 관찰 방식이 예전을 생각하면 성에 차지 않는다. 참, 아직 안 가본 곳이 있다. 당구장이다. 한국에서 북한 화교 C에게 전화를 하면, 그는 "당구장에서 북한 사람과 접대 당구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단둥, 한국 사람보다 북한 사람이 많다
2015년 전 세계에 거주하는 재외 동포가 718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런던 남서쪽에 위치한 뉴몰든은 영국의 대표적인 한인 타운이다. 1000여 명의 탈북 주민도 뉴몰든에 살고 있다." (<미디어오늘> 2015년 11월 10일)
"북한은 약 16개국에 5만∼6만 명의 노동자를 내보낸 것으로 추산된다." (<연합뉴스> 2015년 9월 16일)
이런 내용들을 접할 때마다, 나는 두만강변의 중국 국경 도시들을 포함해서 아프리카, 중동, 러시아의 어느 도시에는 아마도 한국 사람보다 북한 사람이 많을지 모르겠다고 생각을 해본다.
네 집단의 규모는 2000년대 이래, 북한 사람과 북한 화교가 2000명 이상, 조선족이 8000명 이상, 한국 사람이 2000명 전후로 추산되고 있다. 조선족이 꾸준히 증가하는 것 외에는 약 10년 동안 큰 변동이 없었다. (<나는 오늘도 국경을 만들고 허문다>(강주원 지음, 글항아리 펴냄))
하지만, 2010년 전후부터 네 집단 가운데 북한 사람과 한국 사람의 규모에 변화가 있다. 단둥에 거주 혹은 체류하는 기존의 북한 사람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북한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근무하는 중국 공장들이 생기면서, 2000명 이상을 유지하던 북한 사람들이 약 2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5.24 조치의 여파로, 한국 사람은 2000명 수준에서 1000명 미만으로 줄어든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국 사람과 북한 사람이 단둥에서 더불어 살아온 역사가 약 20년이 넘었다. 이를 시기별로 정리하면, 2010년 기준으로 전에는 그들의 규모가 비슷한 수준에서 유지 되어 왔다. 이후에는 한국 사람보다 북한 사람이 더 많이 살고 있는 대표적인 도시가 단둥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 국가"라는 이미지가 강한 북한에 대해서 "한국 사회가 생각하는 만큼의 폐쇄적 국가, 북한은 아니다"를 설명 할 수 있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단둥의 한국 사람 규모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2010년 전에 나는 탈북자가 아닌 북한 사람도 단둥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한국 사회에 말하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2010년 이후 풀어야할 숙제가 하나 더 생겼다. 단둥 한인회 이희행 회장이 나에게 한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요즘 현실에서 우리들이(단둥의 한국 사람) 사는 방식을 있는 그대로 말하기에는 한계가 있잖아! 그래서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물어보면, 주변의 한국 사람들은 그냥 단둥에 한국 사람의 규모가 줄어들었다는 말을 반복하곤 했지! 그러다보니 한국 사회는 단둥에 한국 사람이 없다고 판단을 하는 것 같아. 대북 사업은 조선족과 북한 화교들의 몫으로만 생각하고, 단둥에 한국 사람이 있는 이유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 그래서 나는 어쩌다 한국에서 한인회를 찾아오는 분들에게 마지막의 한마디를 꼭 해. 단둥에 한국 사람이 있는 것을 잊지 말아달라고!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이것 밖에 없는 현실이 답답해!"
5.24 조치에서 자유롭지 못한 단둥의 한국 사람이 낯선 한국의 기자와 연구자에게 처음부터 한국 사회 기준으로 위법 행위에 해당되는 "지금도 우리는 단둥에서 대북 사업을 하고 있다"고 말을 할 사람은 없다.
합법적으로 간접적인 대북 사업을 하는 방법도 있다. 그것은 그들만의 사업 노하우에 해당이 된다. 이를 쉽게 언급할 사업가는 없다. 그들의 준비된 단골 답변은 "한국 사람의 규모가 줄어들었다"는 말 뿐이다. 이런 정황을 한번쯤 생각했다면, 기사 내용은 다른 내용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하지만 2010년 이후 한국 사람들이 단둥을 떠나거나 규모가 줄어들었다는 보도가 주를 이루고 있다.
2010년 북한과의 교역을 전면 중단시킨 5.24 조치가 나온 지 5년이 돼가면서 많은 한국 사업가들이 단둥을 떠났다. (<국민일보> 2015년 5월 17일)
한 때 단둥 시내 식당과 호텔을 가득 채우던 한국인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연합뉴스> 2015년 6월 19일)
틀린 설명은 아니다. 그렇다고 맞는 설명도 아니다. "많은 한국 사람이 단둥을 떠났다"와 "여전히 한국 사람이 단둥에 있다" 가운데 어디에 방점을 두어야할까?
확실한 것은 전자의 내용이 주로 강조되면서 부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이 단둥에 왜 지금도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은 채, 국경 무역을 한국 사람이 배제된 북-중 무역으로만 설명하는 기사 내용으로 이어지곤 한다. 그 결과 5.24 조치 이후에도 여전히 단둥에서 삼국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한국 사람의 경제 활동을 보지 못하는 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 때문에, "단둥에는 한국 사람보다 북한 사람이 많다"라는 말을 한 뒤, 나는 잊지 않고 "한인회관이 단둥에도 있습니다"라는 추가 설명을 한다. 이처럼 단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기가 필요하다. 단둥에 현지 조사를 갈 때마다. 나는 신영복 선생의 글귀를 다시 읽곤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한 이해에서 출발하여 사실보다는 진실에 주목하고 그 사람과 그 처지를 함께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글=강주원 프레시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