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7. 13:00ㆍ정치와 사회
현대사회에서 조직신학을 한다는 것
[탐독의 시간]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서론>(비아)
- 기자명 김진혁
- 승인 2021.01.05 15:11
SNS 기사보내기
SNS 기사보내기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 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 카카오스토리(으)로 기사보내기 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 네이버밴드(으)로 기사보내기
바로가기 메일보내기 복사하기 본문 글씨 줄이기 본문 글씨 키우기
뒤로멈춤앞으로
이변의 희생양(?) 판넨베르크 |
2006년 여름, 세계인의 관심이 독일 월드컵에 집중될 때, 온라인에서는 현대 조직신학자 월드컵(World Cup of Modern Systematic Theologians)이 대중의 무관심에도 뜨겁게 진행되었다.1) 20세기 큰 영향력을 남긴 32명의 신학자가 추천되었고, 온라인 투표로 승자를 가리는 16강 토너먼트가 시작되었다. 매 경기 상대보다 표를 더 많이 얻은 신학자는 8강, 4강, 준결승전, 결승전으로 차곡차곡 올라갔다. 전통적인 축구 강국이자 신학 강국인 독일의 강세가 시종일관 이어졌고, 결국 희망의 신학자로 잘 알려진 위르겐 몰트만이 결승에서 가톨릭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를 꺾고 우승을 거머쥐었다.
뒤로멈춤앞으로
월드컵이 흥미진진한 것은 강팀끼리 겨루다 우승 후보가 조기 탈락하고, 전통의 강호마저 약팀에 덜미를 잡히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온라인 투표로 진행되던 신학자 월드컵에도 여러 이변이 있었다. 특히 8강에서 칼 바르트 이후 독일어권 개신교 신학을 대표하던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d Pannenberg, 1928~2014)가 폰 발타사르에게 패한 것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두 신학자에게는 바르트의 영향을 깊게 받으면서도 바르트를 넘어서는 신학 방법을 제시하고, 철학자 헤겔을 신학적 구성의 중요한 틀로 사용하며, 타 학문과 교단 간 대화에 적극적이고, 교리사와 사상사를 읽어 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등 여러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이성의 보편성과 공적 학문으로서 조직신학을 추구하던 판넨베르크에 비해, 미적 지각을 강조하고 영성과 교리의 통합을 추구하던 폰 발타사르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정서에 더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신학자 월드컵이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 저술이 출판되고 널리 읽히던 20세기 후반에 열렸다면 결과는 상당히 다르지 않았을까? 국내외에서 출간된 현대 신학사 교재 중 폰 발타사르에 대한 소개가 없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판넨베르크가 빠진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현대 신학계를 이끌 젊은 신학자로서 판넨베르크의 이름을 각인시킨 1961년 작 <역사로서 나타난 계시>가 한국에서 1979년에 출간된 이후, 지난 40여 년간 국내에도 그의 저술이 간간이 소개되었다.2) 특별히 판넨베르크가 1988년부터 약 10년에 걸쳐 집필한 <조직신학> 3부작의 한국어 번역이 2019년 말에 끝났고, 이 기념비적 대작의 출간을 계기로 판넨베르크에 관한 관심이 실제로 고조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판넨베르크의 사상이 매우 난해할 뿐만 아니라, (몰트만에 비해) 아시아 출신 제자가 적고, 유럽이나 북미 밖으로는 여행을 잘 하지 않아서인지, 그의 신학이 국내에 소개되고 소화되는 계기가 충분하지는 못했다. 일반 독자나 신학생, 목회자에게 판넨베르크는 이름은 많이 들어 봤고 한번쯤 꼭 읽어 보고 싶어도 제대로 공부하기에는 까다롭고 어려운 신학자로 여전히 남아 있다.
방금 필자가 웅얼거린 것이 너무 자조적으로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이 한국만의 특별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의 중요 저술이 골고루 번역되어 있고, 그의 제자들이 활발히 활동했던 영미 신학계에서도 판넨베르크는 다른 현대 신학자와 비교하면 소위 '진입 장벽'이 높은 편이다. 판넨베르크가 직접 쓴 작품은 읽어야겠지만 난이도나 분량 때문에 선뜻 그의 대표작을 읽어 나가기 곤란할 때, 오랜 기간 훌륭한 대안으로 사용되었던 영어 소책자가 있다. 그것은 바로 미국에서 나온 지 약 30년 만에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조직신학 서론: 현대 조직신학의 문제들과 체계적 재구성>(비아)이다.3)
<조직신학 서론 - 현대 조직신학의 문제들과 체계적 재구성> /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지음 / 박정수 옮김 / 비아 펴냄 / 156쪽 / 1만 2000원
짧은 '서론'에 담긴 심오한 사유 |
판넨베르크가 미국 웨스턴신학교에서 강연한 내용을 모은 이 책은 원서로는 69쪽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분량만으로 <조직신학 서론>의 무게감을 평가할 수는 없다. 이 책은 대가가 자신의 신학을 쉽게 풀어 쓴,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흔히 접했던 '작은 책'과 여러모로 다르다. 우선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 2권이 독일에서 출간된 해에 미국에서 나온 책인 만큼, <조직신학 서론>은 조직신학 3부작이라는 완성을 향해 가던 거대 기획을 배경 삼아 조직신학의 정수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게다가 판넨베르크는 조직신학, 성부, 성령, 성자에 관한 각각의 장에서 종교철학, 형이상학, 현대 과학, 성서신학과 전통 교리를 연관 짓고자 한다. 복잡해질 수도 있는 논의를 간결하게 하나씩 매듭지어 나갈 때마다 신학적 사유를 타 학문과의 대화를 통해 합리적으로 검증하려 했던 신학자로서 그의 일관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평소 본인이 생각한 신학의 본질과 방법론에 대해서는 타협을 거부하지만, 독일어에 능통하지 못한 미국인을 대상으로 했던 강의를 원재료로 삼은 책인 만큼 이전 독일어 서적 번역본에서는 볼 수 없는 '친절한' 판넨베르크도 만나 볼 수도 있다.
<조직신학 서론>에서 흥미로운 점은 판넨베르크가 책 제목에 '서론'(introduction)이란 단어를 붙였다는 사실이다. '서론'을 독자가 어떻게 개념화하느냐에 따라 책의 성격을 오해할 수도, 책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해석의 이정표를 발견할 수도 있다. 보통 조직신학에서 서론이라면 본격적으로 교리를 설명하기 이전에 책에서 사용된 신학적 방법론, 자료, 언어, 체계 등을 정리해 놓는 프로레고메나(Prolegomena)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얇은 책은 그 자체로 뛰어난 완결성을 가지고 있고, 뒤에 따를 거대하고 복잡한 신학 서술을 예비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조직신학의 프로레고메나와는 차이가 있다.
어떤 면에서 '서론'으로서 이 책은 입문자를 위한 판넨베르크 신학의 요약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실제 <조직신학> 1권과 <조직신학 서론> 1-2장, 그리고 <조직신학> 2권과 <조직신학 서론> 3~4장의 내용에서 겹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아코디언 풀무가 늘었다 줄었다 하며 공기를 압축하여 소리를 만들듯, <조직신학>의 광대한 논의가 <조직신학 서론>의 4개 장에 꽉 들어차며 단단하고 깔끔한 신학 입문으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이 책이 판넨베르크 신학의 중요 내용을 맛보게 해 주더라도 그의 장기인 폭넓은 논의와 치밀한 논증이 소책자에 온전히 담기기에는 한계가 있다. 철학적 신학과 에큐메니컬 대화 영역에서 그가 활동할 때 신학적으로 탄탄한 배경이 되어 주었던 인간론과 교회론, 종말론 등도 이 책에는 거의 소개되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조직신학 서론>이 웬만한 입문서보다 판넨베르크를 아는 데 더 유용하고 신뢰할 만해도, 조직신학 전체를 조망하는 요약이 되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조직신학 '서론'인 이 책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서론으로 번역된 단어 introduction은 '안으로(intro-) 끌다 혹은 인도하다(ducere)'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동사 introducere에서 나온 명사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 책은 단지 판넨베르크 조직신학의 서론이나 요약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으로서 조직신학의 아름답고 광대하고 정교한 세계 '안으로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 실제 <조직신학 서론>은 현대인에게 사변적이고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하느님에 관한 교리가 세속 사회에서 파편화된 진리 주장을 비판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사유의 틀을 형성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세속 문화 세계에서 사람들은 '하느님'이라는 말을 당연시하지 않으며, 혹 그렇다 해도 종교 언어의 징표, 종교 담론이라는 고립된 섬 안에서만 유효한 말이라고 여깁니다. (중략) 좀 더 심각한 문제는 상당수 성직자, 목회자가 하느님의 현실성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 결과 자신들이 전해야 할 메시지를 변화하는 시대 분위기에 맞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 무엇보다 해야 할 일은 세속 문화의 우상숭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 하느님의 궁극적 현실성을 새길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4)
판넨베르크가 진단할 때 오늘날 교회와 신학의 위기는 근대성의 도전에 순응하려다 조직신학이 본래 사명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 결과 그리스도교가 개인의 '경험'이나 '신념'의 문제로 축소되었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류가 수백 년간 학습한 시대적 변화를 무시하고 신학과 교회의 '옛 영광'이 찬란한 종교개혁 혹은 그 이전 시대로 돌아가자고 깃발을 흔드는 선동적 신학을 할 수도 없다. 오히려 학문으로서 조직신학은 보편적 진리를 역사적 맥락에서 추구하고, 교회와 개인이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을 진리에 관해 경쟁하는 여러 목소리와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대화를 통해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조직신학 서론>은 기독교의 '고유성'에 집중하면서도, 현대사회를 형성하고 해석하는 여러 담론과 '공적' 대화에 들어가려는 저자의 고민과 경험을 매력적이면서도 간결하게 보여 준다.
'진리'에 대한 학문으로서 조직신학 |
그리스도교 신앙이 당연시되던 문명은 되돌릴 수 없는 과거사가 되어 버린 상황 속에 인류는 살아간다. 물론 교회의 진리 주장이 사회 곳곳에서 큰 저항 없이 통용되던 근대화 이전에 대한 향수를 재생산하는 것을 사명 삼는 신학이 지금도 있다. 하지만 조직신학은 지난 수백 년간 인류가 경험한 역사적 변화와 과학기술의 발전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를 위해 오늘날 조직신학자는 옛 선배들과 차별화되는 자기 나름의 '신학적 출발점'을 선택하고, 이에 적합한 '방법론'을 구축할 수밖에 없다.
20세기 신학사를 기술하는 일반적 방식에 따르면, 판넨베르크는 20세기 중반 신학계를 대표하던 칼 바르트와 루돌프 불트만의 유산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넘어서는 신학적 패러다임을 제시한 사람이라 평가받는다.5) 다른 학문과 구별되는 신학의 구체성을 규정하고 설명하고자 바르트는 말씀(혹은 예수 그리스도)을 강조했다면, 불트만의 경우 실존 개념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전유했다. 하지만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방법론은 각각 그리스도교 신학의 공적 지평을 상실하게 하거나 인간 중심적 주관주의로 흘러가게 할 위험이 있다고 비판한다.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 시대가 저물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초래한 위기에 반응하며 글을 썼던 두 거장의 영향력 아래서 신학을 공부했던 판넨베르크이지만, 그가 자신의 신학적 사유를 발전했던 생생한 맥락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히 세속화하는 현대사회였던 셈이다.
조직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조직신학 서론>의 한국어판에만 있는 부제 '현대 조직신학의 문제들과 체계적 재구성'은 판넨베르크의 기획이 내포한 의미를 함축적으로 보여 준다. 조직신학은 교회의 권위가 해체된 현대 문명의 다양한 도전을 마주하면서 '조직신학답게' 진리의 현실성을 합리적이고 일관적인 방식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각 개인이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계시를 통해 알게 된 하느님에 대한 이해가 '보편적인 진리'임을 확인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특정 시공간과 얽혀 있는 역사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던 성서의 하느님이 인류 모두에게 유일하고 참된 신이라는 것도 인정할 수가 있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 장의 핵심 주제인 조직신학이 필요한 이유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은 결국 진리 물음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는 하느님, 예수가 믿는 하느님이 유일하고도 참된 하느님일 때, 바로 그때라야만 유대인이 아닌 사람도 하느님을 믿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생길 것입니다. (중략) 진리의 최종 기준을 규정하는 것은 일관성(coherence)입니다. 일관성은 진리의 속성이기도 하기에 기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참된 것은 무엇이든 궁극적으로 다른 모든 진리와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진리는 하나이면서도 모든 것을 아우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는 한 분 하느님이라는 개념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6)
그리스도교 신학은 이스라엘의 역사 혹은 역사적 예수라는 '구체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근원적 관계를 맺는다. 바로 '그' 특정한 역사가 진리라면, 진리는 본성상 '모든' 이에게 참이어야 하고, 그 진리를 설명하는 방식은 이성을 적절히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합리적이고 체계적이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조직신학의 '학문성'을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속화한 사회에서 조직신학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 혹은 텍스트에 무조건 우월한 '권위'를 부여하거나, 이로부터 신앙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공유하고 사용하는 '언어 게임'을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진리의 보편성을 증언할 수 없다. 신학자는 한편으로 그리스도교의 진리 주장에 대한 헌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삶과 역사에 대한 전적으로 세속적인 해석"과 "권위에 의지하는 모든 논증 형식에 대한 비판"7)이 일상화된 세계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포괄적이며 일관적인 해석을 제시해야 한다.
진리가 빚어낸 신학의 개방성과 포괄성 |
다원성에 익숙한 많은 현대인에게 '보편성'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의심쩍은 단어이기 십상이다. 그리스도교적 진리의 '보편성'을 의심치 않는 신앙인이라도 성서의 진리를 '선포'하는 대신 다른 이론과 '공적 대화'에 나서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게 느낄 수도 있다(실제 노년의 바르트는 역사학적 판단을 선호하는 판넨베르크에게 우려 섞인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8) 그런 의미에서 판넨베르크가 선택하고 걸었던 신학의 길은 결코 쉽지 않았고, 대중의 관심을 상대적으로 덜 끌었고,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 즉 그리스도교의 특수성과 진리의 보편성의 접점에서 판넨베르크의 독창성과 중요성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별 뜻 없이 사용하고는 하는 '보편성' 개념은 사실 의미의 결이 다중적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그리스도교적 진리가 보편적이라면 다른 종교나 학문의 진리 주장은 상대적이거나 거짓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진리관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스도교인의 '대화'란 처음에는 열린 자세로 들어 주는 척하다 결국 상대방을 굴복시킬 기회를 엿보는, 다른 말로 하자면 상호성을 가장한 일방적 독백 혹은 독단적 설득이 될 위험이 크다. 하지만 종말론적 역사관을 신학적 사유의 핵심 범주로 삼았던 판넨베르크였기에 종말 이전 역사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지식이 잠정적이고 부분적이라는 바울의 말(고전 13:12)을 신학적 체계에 녹여 낸다.9) 모든 지식이 잠정적 성격을 가진다면 보편적 진리를 탐구하는 조직신학이라 하더라도 시공간과 언어의 차이를 뛰어넘는 보편타당한 지식을 담보할 수 없다. 오히려 조직신학은 성서를 통해 인류에게 전해졌고, 교회의 전통을 통해 전달되어 온 진리를 매번 변화된 언어와 형태로 새롭게 서술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진리 주장은 '보편적'이면서도 '잠정적'이기에, 조직신학은 진리에 전적으로 헌신하면서도 다른 학문과 대화에 들어감으로써 이론적 타당성과 체계적 통합성을 추구할 수 있다. 신학과 타학문과 교류를 통해 "양쪽 모두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게"10) 하려는 의도 이면에 판넨베르크가 고안한 '다원주의 프로그램' 내지 '융합 학문 프로젝트'가 있다고 섣불리 짐작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진리의 본성에 관한 진지한 고려 자체가 각자의 관점과 언어와 통찰을 비판적 대화를 통해 교류하는 상호 주관적인 관계를 요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조직신학은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진리 주장과 관용이라는 탈을 쓴 점잖은 무관심 모두에 저항하며 합리적이면서도 개방적인 논증을 통해 하느님에 대해 재진술하는 사명을 가진다.
진리의 보편성은 조직신학자가 자신이 처한 역사적 제약에도 포괄적 지평 혹은 포괄적 해석을 추구하도록 계속 자극한다. 실제 <조직신학 서론>의 각 장을 읽어 보면 포괄성을 향한 조직신학의 이중적 추동력이 세부적 논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으로 판넨베르크는 유일하신 하느님의 피조물인 세계를 '포괄적'(comprehensive)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일례로 <조직신학 서론> 3장은 현대 물리학의 '장(field)이론'과 대화를 시도하여 과학적 우주론 시대의 창조론을 모색한다.11) 우주 안의 다양한 개별 존재와 이를 존재하고 운동하게 하는 힘에 대한 물리학 이론에 관한 성찰은 전통적으로 창조주 성부 혹은 말씀이신 성자와 관계되어 설명되던 창조를 '성령론'을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놀라운 신학적 상상력으로 이어진다.
또한, 한 분 하느님의 현실성은 교회론적 혹은 구원론의 논의가 구성되는 포괄적(inclusive) 맥락을 형성한다. <조직신학 서론> 4장에서 판넨베르크는 나사렛 예수에게 붙여진 '하느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그와 성부의 고유하고 배타적인 관계를 계시할 뿐만 아니라, 성자 안에서 피조물인 인간도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포괄적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다"(행 4:12)라는 사도의 고백은 그리스도교 배타주의의 근거 본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포괄주의의 핵심, 달리 말하면 온 인류를 향해 교회가 지닌 사명의 원천"12)을 알려 준다. 이렇게 판넨베르크는 19세기 이래 신학계의 뜨거운 주제였던 역사적 예수 문제를 그리스도론과 새롭게 통합하고,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를 피하면서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존재와 사명을 인류 전체를 위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교(missio Trinitas)라는 배경 속에서 볼 것을 제안한다. 물론 이는 <조직신학 서론>의 출간 7년 뒤에 나오게 될 <조직신학> 3권에서 자세히 다뤄지는 주제인지라, 이 얇은 책에 담긴 내용에 너무 큰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클라스는 영원하다 (class is permanent!)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라는 말씀은 방황하는 인류에게 하느님께서 선물하신 복음의 정수이다. 하지만 이 구절은 안타깝게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진리 물음을 원천 차단하는 역할을 하고는 했다. 심지어 신학은 진리를 수호하려다 진리를 경직된 신학 체계에 맞게 길들이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하지만 판넨베르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진리 추구 사이의 창조적인 긴장을 다시 생생하게 살려 내어, 현대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를 새롭게 되찾게 도와준다. 근대성의 도전을 회피하거나 단순화하지 않으면서, 변화한 지적 환경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구성한다. <조직신학 서론>은 이러한 판넨베르크의 모습을 잘 알려 줄 뿐만 아니라, '세속화한 세계에서 신학은 이렇게 하는 거야'를 배울 수 있는 매우 수준 높은 사례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물론 성서나 전통으로부터 신학을 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조직신학의 지향성을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이끄는 판넨베르크의 시도가 낯설거나 불편할 수도 있다. 반대로 다른 학문의 방법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현대 과학이나 역사학과의 대화를 시도하지만 결국 이를 전통적 교리와 연관을 지어 해석하는 고집스러움에 실망할 수도 있다. 조직신학이 진리에 관한 탐구라는 데는 동의하는 신학자라도, 진리의 속성이자 기준으로 '일관성'을 우선시하는 데는 의견을 달리할 수도 있다. 세속화한 사회를 배경으로 학문으로서 조직신학을 추구하다 보니, 세계 기독교 시대의 복잡한 신학적 도전이나 복잡한 정치적 맥락에 그가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무시할 수 없다.
판넨베르크 본인이 모든 신학적 작업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짐을 잘 인식했던 만큼,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신학도 다른 관점에서 '역사적' 평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일평생 살아가며 남긴 업적에는 역사로 환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는 법이고, 인류는 그러한 가치에서 시대적 유행에 희석되지 않는 지적·영적 자양분을 얻으며 지금껏 살아왔다. 쉽고 재밌고 실용적인 것이 학문을 판단하는 중요 잣대처럼 되어 버렸고, 가짜 뉴스가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을 위협하고, 신학이 성서와 전통의 언어 밖으로 나오기를 두려워하여 대화의 능력을 상실하는 현 상황에, 낯섦과 새로움에 대한 열린 자세를 잃지 않으면서도 진리를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탐구하자고 초청하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를 <조직신학 서론>을 통해 들을 수 있는 것은 몹시 고무적이고 반가운 일이다.
글을 끝맺으며 월드컵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2006년 월드컵 8강에서 초호화 멤버로 구성된 브라질이 그해 준우승팀 프랑스에 1:0으로 패했다고 당시 브라질을 약팀이라 부를 축구 팬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해 열린 현대 조직신학자 월드컵 8강에서 판넨베르크가 준우승자 폰 발타사르 때문에 탈락했다고 그의 신학이 덜 중요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신학의 각론에서 탁월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여러 진리 주장에 정합성을 부여하며 포괄적 체계를 형성하는 과정을 뒤따르며 '조직신학다움'이 뭔지 배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판넨베르크를 읽을 이유는 충분하다. 전설적 운동선수에게 붙고는 하는 '클래스는 영원하다'(class is permanent)는 멋진 표현이 진리까지는 아닐지라도 신학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명언임을 <조직신학 서론>이 입증해 보일 것이다.
P.S. 이쯤 되면 개신교와 가톨릭 통틀어 20세기 최고 신학자로 손꼽히고는 하는 칼 바르트가 현대 조직신학자 월드컵에서는 왜 결승조차 오르지 못했는지 궁금해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안타깝지만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 바르트는 글을 쓸 때 비서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실격 처리되었다. 이는 토너먼트 경기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들려는 주최 측의 농간이었다는 뒷소문도 들린다.
김진혁 /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부교수
주 1) Patrik Hagman, "Worldcup Lineup and Groups (2006.06.09.)," God in a Shrinking Universe, http://shrinkinguni.blogspot.com/2006/06/world-cup-lineup-and-groups.html (2020. 12. 7. 최종 접속) |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