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2. 03:36ㆍ정치와 사회
장애인, 격리되거나 미화되거나…‘동료 시민’의 자리는 어디?
등록 :2021-05-01 10:49수정 :2021-05-0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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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⑦ 그림 속 장애인
장애인을 ‘없는 존재’로 여기던 시절
이들을 주인공으로 그린 두 작품
순결한 영혼 강조한 ‘눈먼 소녀’
동정심 일으키려 삶의 고단함 지워
다모증 소녀 그린 ‘안토니에타…초상’
‘궁정 눈요깃감’의 삶 그대로 증명
장애인다움 어긋나면 비난하는 우리
그때 그 시절과 뭐가 얼마나 다를까
존 에버렛 밀레이, <눈먼 소녀>, 1856년, 캔버스에 유채, 영국 버밍엄 미술관.
한때 미국에는 ‘어글리 법’(Ugly Laws)이 있었다. 눈에 띄는 장애를 지닌 사람이 공공장소에 나타나는 것을 금지한 법이다. 킴 닐슨의 책 <장애의 역사>에 따르면 1867년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병에 걸렸거나, 신체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거나, 몸이 훼손된 사람, 혹은 어떤 형태로든 신체가 기형이거나 보기 흉하거나 역겨운 존재”들을 거리, 주요 도로, 공공장소에서 추방했다. 포틀랜드에서는 “불구, 신체에 영구적 손상을 입은 사람, 신체가 훼손된 사람”의 공공장소 구걸 행위를 금지했고, 1911년 시카고에서는 “불구 및 기형인 신체 부분의 노출을 금지”하도록 주법을 개정했다.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이런 법이 1974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폐지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장애란 추하고 보기 흉하고 역겨운 것이기에 눈앞에서 치워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애인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하지만 어글리 법에는 미세한 틈이 있었다. ‘특이한 장애인’은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외모가 아름답거나 장애를 ‘극복’해 대중에게 감동을 주는 ‘슈퍼장애인’, 혹은 기괴한 외양으로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흥미를 줄 수 있는 장애인은 사회에 나올 수 있었다. 여기에 부합하는 대표적 슈퍼장애인으로는 헬렌 켈러(1880~1968)를 들 수 있다. 인형을 품에 안고 선생님의 손바닥에 ‘Doll’(인형)이라고 쓰는 소녀, 무릎 위에 점자책을 펼쳐놓고 장미꽃 향기를 맡는 천사 같은 여자, 시각·청각 장애를 뛰어넘은 인간 승리의 주인공. 우리가 아는 헬렌 켈러의 모습이다.어릴 적 접한 <헬렌 켈러> 위인전은 그녀가 명문 래드클리프대학 학사모를 쓴 장면까지만 보여주고 끝맺곤 했는데, 이는 사실 의도된 것이다. 켈러는 그저 장애를 이겨낸 ‘숭고한 성처녀’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대중은 켈러가 시각·청각 장애로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접하지 못해, 순백의 영혼을 지녔을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켈러는 원래의 튀어나온 눈 대신 유리로 만든 파란색 의안을 이식했고, 수수한 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채 카메라 앞에 서야 했다.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재능을 갖췄지만 ‘불행히도’ 장애를 지닌 여성은, 사회가 편안하게 소화할 수 있는 안전한 이미지였다. 사람들은 동정이 깃든 눈길로 그녀에게 ‘숭배의 박수’를 쳤다. 헬렌 켈러를 향한 이런 ‘낭만적’ 시선은, 영국의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의 그림 <눈먼 소녀>에서도 찾을 수 있다.
동정받게 하려는 아름다움
방금 소나기가 그쳤나 보다. 소녀 두명이 숄을 뒤집어쓴 채 길가에 앉아 있다. 낡은 숄이지만 그나마 두 소녀의 머리는 젖지 않게 도왔을 것이다. 바로 그때, 여전히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에 쌍무지개가 떴다. 동생으로 보이는 소녀는 신기한 듯 무지개를 바라보는데, 다른 소녀는 눈을 감은 채 옆에 있는 들꽃만 만지작거린다.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는 목에 걸린 문구로 알 수 있다. ‘PITY The BLIND’(눈먼 자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녀는 시각 장애인인 것이다.밀레이는 1854년 영국 서식스의 윈첼시 지방에서 이 자매를 직접 만나 그렸다고 한다. 장애인에 대한 동정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했던 밀레이는, 그림에 정교한 장치를 하나 배치했다. 눈먼 소녀의 오른쪽 어깨에 나비 한마리가 내려앉는 장면이 그것인데, 이는 소녀가 ‘순결한 영혼’을 지녔다는 은유이다. 이 순수함 덕분에 눈먼 소녀는 쌍무지개로 표현된 희망과 구원에 언젠가는 가닿을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구원받기 전, 소녀의 ‘현생’은 어떠한가. 소녀의 무릎 위에는 육각형 손풍금인 콘서티나가 놓여 있다. 아마도 소녀는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콘서티나를 연주하고 적선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는 중일 것이다. 이 신산한 삶이 소녀의 얼굴에 흔적을 남기지 않기란 어려울 터. 하지만 밀레이는 그녀의 얼굴에서 삶의 고단함을 의식적으로 도려냈다. 여러 겹 기운 낡은 옷을 입었음에도, 소녀의 머리칼에는 광택이 흐르고 볼은 발그스름하며 입술은 앵두처럼 붉다. 혹여나 소녀의 아름다운 외모가 대중의 동정을 사는 데 방해가 될까 봐, 밀레이는 잊지 않고 약간 애처로운 표정까지 소녀의 얼굴에 입혔다. 이러한 장애와 순결함의 조합은 헬렌 켈러처럼 ‘거룩한 성처녀’ 같은 분위기를 뿜어낸다. 그 덕분일까. <눈먼 소녀>는 대중에게 편안하게 받아들여졌고, 1857년에는 리버풀 아카데미 상까지 받을 수 있었다.이와 반대로 ‘비장애인’과 비교해 극단적으로 다른 외양일 때도 장애인들은 대중에게 ‘환영’받을 수 있었다. 이들이 선사하는 ‘충격과 공포’를 대중은 기꺼이 즐겼기 때문이다. 거인이거나 왜소증, 다모증, 소두증, 샴쌍둥이이거나 팔다리가 없는 ‘기이한’ 사람들은 서커스나 상점 앞의 ‘구경거리’로 전시되었다. ‘프리크 쇼’(freak show)라고 불렸던 이 공연은 1840년 초부터 미국 곳곳을 순회하며 열렸고, 그때마다 큰 인기를 끌었다. 구름처럼 몰려든 대중은 기묘한 몸을 보기 위해 기꺼이 호주머니를 털어냈다. 그리고 ‘비정상적’인 존재들을 관람하며 자신이 ‘표준’이며 ‘정상’이라는 것을 확인받았다.프리크 쇼에 전시됐던 이들 중 멕시코 여성 파스트라나의 삶은 유독 기구했다. 그녀는 1834년 얼굴과 몸에 많은 털을 지니고 태어났다. 장애학 연구자 로즈메리 갈런드톰슨의 책 <보통이 아닌 몸>에 따르면, 파스트라나는 ‘곰과 오랑우탄에 가까운’ 특징을 지녔다는 이유로 프리크 쇼에서 ‘준인간’(semi-human)으로 전시됐다. 이처럼 평생 조롱받았던 파스트라나는 1860년 불과 26살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심지어 죽은 뒤에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이 방부처리되어 1972년까지 100년 이상 계속 프리크 쇼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파스트라나는 죽은 지 무려 153년이 지난 2013년에야 비로소 땅에 묻힐 수 있었다.
대물림된 구경거리 운명
사실 정상성에서 벗어난 이들을 구경거리로 삼은 역사는 오래되었다. 프리크 쇼 이전, 이미 16세기에 파스트라나처럼 털이 많다는 이유로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 대놓고 거래된 소녀가 있었으니 말이다. 이탈리아 화가 라비니아 폰타나(1552~1614)가 그린 <안토니에타 곤살부스의 초상>은 다모증을 앓던 소녀의 쓰라린 삶을 증거하고 있다.
라비니아 폰타나, <안토니에타 곤살부스의 초상>, 1594~1595년, 캔버스에 유채, 프랑스 블루아성.
이제 7살이 된 안토니에타 곤살부스(1588~?)가 캔버스 밖을 응시하고 있다. 얼굴 전체가 털로 뒤덮여 있지만, 눈빛만큼은 또렷하고 생기 있다. 이 소녀는 누구일까? 호화로운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걸 보면 혹시 귀족일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일단 안토니에타가 들고 있는 종이를 보자. 안토니에타의 아버지 돈 피에트로(페트루스 곤살부스)가 직접 손으로 썼다는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야만인 돈 피에트로는 카나리아제도에서 프랑스의 앙리 2세에게 보내졌다. 거기서 파르마 공작의 궁정에 전달됐다. 안토니에타와 나는 지금 소라냐 후작 부인인 이사벨라 팔라비치나의 궁정에 머물고 있다.” 즉 이 종이는 안토니에타의 아버지가 자신과 딸이 누구의 소유인지를 밝힌 일종의 자기소개서인 셈이다.페트루스 곤살부스는 선천성 다모증이라는 피부병을 앓았다. 이 때문에 얼굴과 손, 팔을 비롯한 그의 온몸은 털로 뒤덮였다. 자기소개서 속에서 자신을 ‘야만인’으로 칭한 건 그런 이유다. 당시 유럽 궁정은 짐승처럼 털이 난 사람을 ‘애완’하는 게 유행이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페트루스는 왜소증 장애인, 광대 등 ‘애완할 수 있는 인간’을 좋아했던 프랑스 앙리 2세의 궁정에서 자랐고, 이후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궁정 사이에서 ‘눈요기용 선물’로 거래됐다. 성인이 된 후 페트루스는 비장애인 여성과 결혼해 7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이 중 4명이 다모증을 물려받았고 안토니에타가 그중 한명이었다. 안토니에타의 운명은 태어난 순간 이미 확정된 것과 다름없었다. 그녀가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이 궁전 저 궁전 옮겨 다니며 ‘구경거리’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한 것은 틀림없다. 그림 속 안토니에타가 화려한 옷을 입은 것은 그녀가 궁정의 (괴물) 인형이었기 때문이다.어글리 법은 이제 없다. 우리는 어글리 법이 존재했던 과거의 미국을 미개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21세기 한국은 분명 어글리 법이 없는데 왜 공공장소에서 장애인과 마주치는 일이 드물까. 얼마 전 지하철 내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라며 시위를 벌이던 장애인들에게 일부 시민들이 “이러니까 동정도 못 받는 거야!”라고 매몰차게 소리쳤다는 기사를 보았다. 사회가 원하는 장애인들의 모습은 ‘박제된 천사’ 아니면 ‘주눅 든 불쌍한 존재’여야 하는데 감히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살지 않고 마치 ‘비장애인’처럼 행동하면 대중은 얼굴을 찌푸리며 “선을 넘었다”고 나무란다.‘어린이 위인전’이 애써 감춘 헬렌 켈러의 모습을 통해서도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헬렌 켈러는 삶의 어느 시점부터 ‘성인 석고상’같이 꾸며진 모습을 박차고, 서재에 커다란 붉은 기를 매달아놓은 사회주의자이자 인종차별, 아동노동, 사형제도에 격렬히 반대하는 사회운동가로 살았다. 그녀는 <뉴욕 타임스> 기자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전투적 참정권론자입니다. 나는 참정권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내게는 사회주의가 이상을 실현하는 운동입니다.” 이에 놀란 신문들은 “사회주의자들과 볼셰비키가 헬렌 켈러의 명성을 이용하려고 하며, 그녀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해서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기사를 썼다. ‘특출한 장애인’이라고 켈러를 찬양한 사람들이 장애인이라며 그녀를 무시한 셈이다.뇌성마비 장애인 인권 운동가 해릴린 루소는 책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에서 “(비장애인들이) ‘정말 대단하세요’식의 영웅주의, 고결한 사람 만들기, 역경을 극복한 승자로 모시기 같은 왜곡된 렌즈를 통해 자기 위안을 얻음과 동시에 은연중에 장애인들을 비장애인과 따로 구분짓는다. 이는 친절하고 달콤한 말로 위장한 또 다른 형태의 편견”이라고 짚었다. 그런 의미에서 비장애인들이 딴에는 좋은 뜻으로 사용하는 ‘장애우’라는 말도 얼마나 부적절한 표현인가. 장애인들은 비장애인에게 ‘친구’가 되어달라고 한 적이 없다. 일방적으로 친밀감을 표시하는 이 말 자체에 이미 시혜와 연민의 시선이 깃들어 있다. 장애인이 바라는 것은 숭배도 동정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같은 사람’, ‘동료 시민’이기 때문이다. 과연 한국에는 어글리 법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 이유리 작가. <화가의 출세작> <화가의 마지막 그림> 등 예술 분야의 책을 썼고, <한겨레> 토요판에 연재한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을 묶어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을 냈다. 이번엔 그림을 매개로 인간 사회에 작동하는 다양한 층위의 권력관계를 드러내고, 여기서 발생하는 부조리를 3주에 한번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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