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과 믿는 것

2021. 7. 27. 05:07정치와 사회

[김정헌 칼럼] 모든 보는 것은 미래로 열려 있다

등록 :2018-12-13 18:33수정 :2018-12-14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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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에게는 ‘보는 법’의 일정한 원칙이 생긴 것 같다. 그 하나는 ‘가까운 데(현실)보다는 먼 데(미래)를 본다’. 다른 하나는 ‘중심(권력)이 아니라 작고 낮은 곳, 낯선 곳, 변두리를 본다’. 이는 욕망하는 인간들이 자기를 절제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김정헌
화가, 416재단 이사장
얼마 전 용산 미군기지 터에 투어를 다녀왔다. 미8군 옆 용산고를 나온 나는 각별한 심정으로 이 방대한 기지를 둘러봤다. 투어가 끝난 다음 기지 바로 옆에 있는 아모레퍼시픽 사옥 안의 조선시대 병풍 전시회를 유홍준 교수의 해설(그는 이미 용산기지 터 1차 투어를 마치고 답사기를 <한겨레> 2018년 11월5일치 9면에 기고한 바 있다)로 관람했다. 그의 해설은 거의 완벽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해설을 듣기보다는 나의 눈으로 모든 것을 담고자 했다. ‘아는 만큼’이 아닌 ‘모르는 만큼’ 나의 예리한(?) 눈은 여러 가지를 탐색한다.유홍준 교수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나로서는 ‘본 만큼 알게 된다’고 말하고 싶다.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눈을 뜨면 삼라만상이 보인다. 이 보이는 삼라만상 가운데 보는 이는 골라서 보게 된다. 그러면서 세상만사를 생각한다.‘시지각’ 이론가 루돌프 아른하임은 이를 ‘시각적 사고’라고 한다. 그들이 말하는 ‘시각적 사고’란 형태를 발명하는 수단이고 보는 대상의 복잡한 형태나 공간의 구조와 질서를 파악한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고는 보는 일로부터 시작한다고 주장한다.그러니까 ‘아는 만큼 보인다’와 ‘본 만큼 안다’는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제유의 형식으로 맞물리는 보완적 관계이고 그만큼 시각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셈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죽는 사람을 가리켜 ‘숨을 거둔다’ 하지 않고 ‘눈길을 거둔다’고 했다. 눈길(시각)의 중요성을 인간의 목숨에 준해 생각한 경우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을 보면 16세기의 이슬람제국에서 최고 경지에 이른 화원화가들은 제 눈을 찔러 스스로 보는 것을 멈췄다고 한다. 아마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세상을 다 파악한 화가로서 현실의 보는 눈이 더는 필요없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는 보는 법의 차이로 전통 화원화가들과 베니스 화파의 영향을 받는 세밀화가들 사이의 엄청난 암투를 그리고 있다. 보는 법의 차이로 인한 권력투쟁이 이 소설의 주제다.또 모든 국민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의도에서 1970년대에 이미 국민총행복지수를 만든 부탄에서는 왕국 내 모든 건물의 창호를 불교식 창문으로 통일시켰다.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에 대해 ‘시각의 평등성’을 구현한 것으로 보인다.어쨌든 인간들의 ‘보는 방법’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미술사를 한번 살펴보자.어쩔 수 없이 인류 최초의 그림인 구석기시대 동굴벽화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동굴벽화들을 보면 이 벽화를 그린 사람은 동굴 근처에 모여 사는 어떤 자그마한 부족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알려진 대로 이 동굴벽화들은 사냥의 대상인 들소와 사슴 따위를 매우 사실적으로 생동감 넘치게 그리고 있다. 먹이를 구해야 하는 절실함으로 그들이 본 사냥 현장은 캄캄한 동굴 속에서도 마술적으로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리라. 그들의 눈은 현장에서 들소를 포획하는 눈으로 세상을 본 셈이다.그런데 수렵생활을 하던 구석기시대에서 농경이나 목축의 정착생활을 주로 하던 신석기시대에 오면 이런 동굴벽화는 없어지고 일종의 기하학적인 무늬나 도형으로 바뀐다. 그들은 더 이상 사냥 현장에서 목숨을 내걸고 사냥을 할 필요가 없었다. 수확이 끝난 뒤 남는 시간에 그들은 활동의 대부분을 생활에 필요한 옷이나 기구 등의 공예품을 만드는 데 할애했다. 옷이나 공예품 제작에는 사실적인 그림보다는 무늬나 패턴화된 장식 그림이 필수적이다.신석기시대 이후에 ‘보는 눈’의 역사는 모두 권력과 관계가 있다. 이집트 미술에서부터 그리스·로마 시대를 거쳐 중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보는 법은 절대권력인 지배자나 신의 ‘보는 눈’을 기준으로 하였다. 영원을 향한 이집트의 ‘정면성의 원칙’은 파라오나 절대권력들이 내세에까지 영원하도록 원칙이 정해져 있었고, 그림들은 읽을 수 있도록 상형문자로 기능했다.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왕족이나 귀족들이 보는 눈(미관)에 따라 신상이나 초상조각들이 만들어졌으며 기독교 종교 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이 신의 말씀을 도해로써 보여주는 것이 원칙이었다.또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표현은 계급적으로 묘사되었는데 중요한 지배자나 상위계급은 중앙에 크게, 하인이나 시종들은 변두리에 작게 그리는 게 원칙이었다.그러나 이 대원칙이 크게 바뀐 적이 있으니 바로 르네상스에서 발견한 ‘투시원근법’이다. 이 투시원근법은 아직도 우리 시대의 ‘보는 법’으로 절대적인 기준이 되고 있다. 르네상스의 투시원근법은 사실 과학과 수학 심지어는 인문학의 발달에 힘입은 바 있지만, 그와 더불어 상업의 발달로 경제의 번영을 구가하던 피렌체 같은 도시국가의 산물이었다. 다시 말하면 부기법이나 금리를 따지는 상업자본이 발달함에 따라 보는 법도 여기에 맞추어 일목요연하게 세상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바로 투시원근법이다.투시원근법의 대표 작품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자. 가운데 예수를 중심으로 모든 제자들이나 실내 풍경이 수렴되고 있다. 엄청난 집중감을 자아낸다. 이는 보는 사람에게 잘 정렬돼 있는 세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는 셈인데, 보는 사람이 이런 그림을 주문한 자본권력임을 방증한다. 상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대부르주아지나 막강한 자본력을 가진 교황청이 이에 해당한다.이후에 보는 법은 현대로 들어오면서 인상파 화가들에게서 또 한번 크게 바뀐다. 실내의 어두컴컴한 스튜디오에서 밝은 자연으로 나온 인상파 화가들은 자연의 대기와 광선 밑에서 이전보다 훨씬 자유스러운 눈길로 자연을 보고 그것을 그리게 된다. 그들은 자연을 보고 자연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시각적 사고’의 여유를 갖게 된 셈이다.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에게는 ‘보는 법’의 일정한 원칙이 생긴 것 같다. 일종의 시각의 (도덕적) 기준이다. 그 하나는 ‘가까운 데(현실)보다는 먼 데(미래)를 본다’. 사람은 주로 가까운 데를 보면서 산다. 눈앞에는 아귀다툼하는 국회의원들도 보이고 공적 지원금을 사취하는 유치원 원장들도 보인다. 그러나 가끔가다 우리는 멀리 여행을 떠나거나 산에 올라 맥맥이 이어진 산들을 본다. ‘눈씻이’를 하면서 미래를 보는 셈이다.다른 하나는 ‘중심(권력)이 아니라 작고 낮은 곳, 낯선 곳, 변두리를 본다’. 이는 욕망하는 인간들이 자기를 절제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중심으로 향한 시선은 욕망을 낳고 모든 사람을 타자화하는 ‘혐오의 시선’을 잉태하기 마련이다. 여기에는 온갖 허세와 ‘갑질’이 들끓는다. 특히 예술가들은 ‘익숙한 것’에 머물지 말고 항상 ‘낯선 것’에 시선을 던져야 한다.이렇게 ‘보는 법’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하는 일차적 매체이다. 다른 감각기관과 달리 시각의 큰 장점은 그것이 고도로 명료한 매체일 뿐 아니라 외계의 물체와 사건들에 관해 무제한으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있고,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세계를 다시 재조직하게 해주는 데 있다. 그러므로 보는 것은 일종의 창조적 참여다.우리가 정말 기막힌 경치를 보면 ‘그림 같다’고 하는데 이는 좋은 경치를 보면 바로 이상적 세계를 그린 그림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는 것(시각) 자체만으로도 가상의 세계를 조직해 우리의 세계를 미래로 이끌 수 있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874350.html#csidx6af334a3ed842268adba44c0605f2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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