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기의 혁명 - 킹 질레트

2008. 7. 9. 12:59경영과 경제

면도기의 혁명 - 킹 질레트
7월 | 2008/07/09 08:00 정윤수
 
100회 맞아 작은 자리를 마련합니다
이 블로그가 드디어 오늘(7월 9일, 수)로 100회를 맞이했습니다. 100회! 생각해보니 꽤 걸어온 듯 싶기도 하고, 앞으로 265회나 남아 있어서 막막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많은 분들이 찾아주시고, 읽어주시고, 또 격려와 질책의 댓글도 많이 달아주셔서 그 힘으로 남은 265일을 걸어갈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작은 자리를 준비하였습니다. '100회 특집 '북 스와핑'', 이런 자리가 되겠습니다. 시간은 저녁 7시30분, 장소는 홍대 앞 카페 '창밖을봐바람이불고있어하루는북쪽에서하루는서쪽에서'입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100회 작은 기념자리를 갖습니다'를 보시고,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그곳에 댓글로 약속을 남겨주시면 조촐한 자리,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

최초의 안전면도기 발명가 질레트

20세기 초엽의 미국 자본가들은, 이 거대한 나라가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한 2차 대전 이후의 대자본가들보다는 그래도 인간적인 면모를 조금은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첫 번째 고객은 자기 자신이거나 이웃이었으며 그런 까닭에 주차장 구석에서 개발하여 몸소 발로 뛰며 파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기업의 초석을 다지게 되면 초발심을 잃지 않고 금욕적인 태도로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2차 대전 이후의 기업가들처럼 거대한 금융자본을 끼고 후진국 정부의 등을 치면서 이 작은 지구를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는 일은 그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초기 자본가들은 때로는 인류의 발전에 기업 이윤이 정말로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더러는 격렬한 시장 경쟁에 허덕거린 나머지 반자본주의적 사상에 빠지기도 했다. 1932년의 오늘, 7월 9일에 사망한 면도기의 대명사 킹 캠프 질레트(King Camp Gillette)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질레트는 1855년에 미국 위스콘신 주의 폰드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날마다 뭔가를 발명하기 위해 창고에 틀어 박혀 지냈고 어머니는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는 데 골몰했다. 이러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 질레트는 틈만 나면 새로운 도구의 발명에 골몰했다. 16살 때인 1871년 시카고 대화재가 발생하여 그는 가족들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하게 된다. 질레트는 세일즈맨으로 어려운 사회 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발명에 몰두하여 마침내 1895년, 이중면도날을 고안하게 된다. 상품화에 성공한 것은 1903년. 그의 나이 48살 때 완성한 이중안전면도기는 20세기 남성들의 생필품이 되었다.



질레트 면도기의 설계도

질레트의 부모는 모두 발명에 미쳐 있었다. 샐러리맨이었던 아버지는 퇴근하고 나면 밤 늦도록 창고에 틀어박혀서 각종 발명품 설계도를 그리고 또 그렸다. 많은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어머니는 새로운 요리 연구가였다. 질레트의 나이 32살 때인 1887년, 어머니가 지은 <백악관 요리법>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팔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롱스테디셀러에 속한다. 발명가 부모 밑에서 성장한 질레트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1890년, 35살 때 질레트는 4종류의 발명 특허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고단했다. 인생의 후반전으로 들어서던 40살 때의 질레트는 코르크 병마개 회사의 세일즈맨이었다.


1백여 년 전, 미국에서 특별한 기술이 없는 남자들이 금방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바로 광대한 대륙을 횡단하면서 새로 나온 생필품을 파는 일이었다. 산업이 발달한 동부 지역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오는 인류사상 최초의 물건들이 중서부로 팔려나가려면 건강한 인력이 필요했다. 당시의 가장들은 세일즈맨들이 되어 촌구석까지 돌아다녔다.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강대국의 밑그림을 그린 아버지상으로 꼽는 세 가지 모형이 있는데 그 첫째가 대서양을 건너온 근대의 청교도들이고 둘째가 서부개척시기의 카우보이,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세일즈맨들이다. 미국인들의 증조부는 모두가 세일즈맨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 직업은 서민들의 전형적인 직업이었다.


명성을 드높인 블루 블레이드

1949년에 아서 밀러가 발표한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은 바로 이 눈물의 역사를 다룬 걸작이다. 30년 동안 가족을 위해 외판원 생활을 했으나 살림은 나아지지 않고 가족과도 심하게 다투게 된 세일즈맨. 그는 가족의 미래를 위해 보험을 들어놓고는 자살을 감행한다. 고통스럽게 죽어간 세일즈맨의 부인은 이렇게 독백을 한다. “출장 간 것만 같구료, 다시 돌아올 수 없나요. 오늘 마지막 집세도 냈다구요. 이젠 빚도 없고 홀가분해졌는데......”


1895년 여름, 보스턴의 어떤 허름한 여관에서 가난한 세일즈맨 질레트는 서둘러 짐을 챙겼다. 자칫하면 면담하기로 한 거래처에 늦을 지도 모를 상황. 질레트는 황급히 면도를 하다가 살을 베고 말았다. 선사 시대부터 그 무렵까지 인간은 작두날 같은 면도기를 숫돌이나 동물 가죽에 갈아서 면도를 했다. 얼굴에 상처를 입기 일쑤였다.


1백여 년 전, 질레트도 그랬다. 질레트는 피가 흐르는 거울 속의 제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서둘러 면도해도 전혀 베이지 않는 면도기를 개발하면 대성공을 하리라고 믿었다. 그는 이발소를 떠올렸다. 이발사는 먼저 빗으로 머리카락으로 누른 후 솔 사이를 뚫고 나오는 머리카락을 안전하게 잘라내는데, 질레트는 이 점에 착안했다. 그로부터 5년 동안 질레트는 면도기 개발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기의 첫 해, 1901년에 특허를 획득하고 회사를 설립했으며 1903년, 마침내 손잡이 위에 아래위로 정교하게 움직이는 헤드가 달려 있고 그 안에 이중 날을 끼운 안전면도기를 판매하게 되었다. 48살 때의 일이다.


1930년의 질레트 면도기 광고.


산업화 초창기의 낭만파 기업가답게 질레트는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 <인간적 이동>이라는 책까지 썼다. 사실 이는 과학적인 신념이라기보다는 거듭된 실패로 인하여 젊은 날을 패배의 세월로 보낸 질레트의 감정이 앞선 책이다. 책에는 사회주의에 대한 전망보다는 산업문명에 대한 도덕적인 질타와 감정적인 흥분이 앞서 있다. 무한경쟁을 해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고 질레트는 썼다. 그는 경쟁 없는 미래를 꿈꿨고 자연친화적인 쾌적한 도시를 설계하였으나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만년의 킹 질레트

중요한 것은 그가 면도기를 통해 엄청난 부를 성취한 다음에도 자신의 이상을 꺾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55살이 되던 1910년에 면도업계를 완전히 장악했다. 상품 포장지에 자신의 얼굴을 사용하는 바람에 도심지를 걸어다니기 불편할 정도로 성공을 했다. 이렇게 부를 성취한 질레트는 경쟁없는 인간적 미래,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하자고 주장하면서 테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과 자동차왕 헨리 포드를 만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은 질레트의 연락을 회피했다.


물론 이번에도 그의 주장을 흥미롭게 듣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1929년 대공황이 닥쳐왔다. 조금은 신비화된 측면이 있지만 어쨌거나 거대 기업가로서는 드물게도 그 나름의 이상 사회를 꿈꾸며 돌아다니다가 회사 경영권을 박탈당했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에 생생하게 나타난 것처럼 대공황 전후의 미국 자본주의에는 질레트 같은 사람이 서있을 영토가 없었다. 1932년의 오늘, 7월 9일에 질레트는 7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20세기의 사람들
아이콘 | 바버라 캐디 엮음 | 박인희 옮김 | 거름

몇 해 전에 이 책의 뒷부분에 짧은 글을 써야 했던 약속으로 편집 상태의 원고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미디어와 이미지 시대의 현자인 존 버거의 책 <글로 쓴 사진>(열화당)을 읽는 느낌이었다. 이 책에는 20세기를 '대표하는' 200명의 인물이 실려 있는데, 이 200명에 대해 세계적인 사진가들이 찍은 수천 컷의 사진 중에서 딱 200장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글보다 사진이 사실은 이 책의 주연이다. 그런데 사진 없는 상태의 편집본 원고를 읽으면서 나는 200명의 인물에 대한 흥미로운 상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출간된 책을 보니 내 상상은 사실과 부합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고, 그럼에도 아주 유쾌한 독서가 되었다. 다이애나 황태자비, 에디트 피아프, 제시 오언스, 아인슈타인, 마이클 조던, 스티븐 호킹, 알 카포네, 휴 헤프너, 무하마드 알리...... 질레트는 없지만, 아무튼 200명으로 압축한 20세기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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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문명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
철도 여행의 역사 | 볼프강 쉬벨부쉬 지음 | 박진희 옮김 | 궁리출판

자세한 수치는 모르지만 이 책은 인문 분야 서적으로 꽤 많이 팔린 것으로 알고 있다. 90년대 후반에 몇몇 대학의 논술 시험에서 '느림'이란 주제가 여러 차례 출제되었고, 그때마다 이 책의 몇 구절이 제시문으로 출제된 적 있다. 그 다음에는? 공부 좀 한다는 고2 학생들이 앞다퉈 사지 않겠는가. 그래도 안 사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다. 좋은 책이기 때문이다. 철도를 통해 근대의 시공간이 어떻게 해체 재구성되는가를 읽다 보면 질레트의 면도기나 할리 데이비슨의 오토바이가 현대의 문명 틀에서 어떤 이미지(기능만이 아니라)를 갖는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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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과 형식의 이중주
20세기 디자인 | 피터 필 엮음 | 박혜수 옮김 | 아트앤북스

제목에 '디자인'이란 단어가 들어있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20세기 사물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달리 마땅한 책이 없어 이 책을 골랐지만, 고르고 보니 썩 괜찮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단지 '새끈한 신상품' 카달로그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로 생활용품에 집중되어 있지만, 기술의 내용과 디자인의 형식이 어떻게 높은 차원에서 결합하여 현대 문명의 꽃이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헤닝 코펠의 은주전자, 마리오 벨리니의 올리베티 계산기, 헨리 벡의 런던 지하철 노선도, 알베르토 베다의 루체플란 램프, 야콥 옌센의 뱅&올룹센 베오그람 오디오, 오틀 아이허의 베를린올림픽 픽토그램, 허먼 밀러社의 플랫폼 벤치...... 아, 질레트 면도기는 빠져있다. 내가 만약 한 페이지 쯤 참견할 수 있다면 최근에 애용하고 있는 '6중날 면도기 PACE6'을 꼭 넣겠다. 덥수룩한 수염을 산뜻하게 깎아준다. 이 면도기의 유일한 '단점'은 해외의 글로벌 브랜드가 아니라 도루코라는 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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