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 상도

2008. 1. 3. 16:25경영과 경제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의 추사고택(秋史古宅)으로 차를 몰면서 최인호씨는 "요즘 '상도(商道)' 독자들의 전화를 받으면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김정희 선생이 그린 '상업지도(商業之道)'를 어디 가면 볼 수 있습니까?"

"'계영배(戒盈盃)'는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까?"

"대학로를 뒷골목까지 샅샅이 뒤졌는데도 여수(如水)기념관을 찾을 수 없던데요."

여수기념관은 없다. 가공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계영배도 존재가 확인되지 않은 우리 전설 속의 술잔이고, 상업지도는 최씨가 '상도'에서 창작해낸 그림이다.

독자들은 최씨에게 보기좋게 속아넘어가고(?) 있다.  그것이 그의 솜씨다. 한국일보에 3 년 3 개월간 연재된 후,  단행본으로 나온  '상도'는 전국 서점 집계 베스트셀러 1 위에 올라있다.

정통문학으로서는 근래 드물게 70 여만 권이 팔려나갔다.

조선시대 거상 임상옥(林尙沃ㆍ1779~1855)의 생애가 '상도'의 주내용이다.  임상옥에 관한 자료는 구한말의 사학자 문일평(文一平)이 쓴 간략한 평전이 전부다. 최씨는 그 자료만으로 상업의 도를 이뤘던 인물을 그려냈다.  '상도'는 작가의 공부와 상상력이 결집된 대로망이다.

김정희(金正喜ㆍ1786~1856)와 혁명아 홍경래(洪景來ㆍ1780~1812)의 생애가 임상옥의 그것과 얽혀드는  '상도'야말로 작가의 공부의 절정을 보여준다.  부와 명예와 권력, 인간의 세 가지 욕망을 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눈에 보이듯 그려냈다. 임상옥이 세 가지 욕망은 솥(鼎)의 세 발처럼 서 있어야지,  모두 가지려 하면 무너진다는 진리를 김정희의 노자 '도덕경'을 통한 암시로 깨우치고 위기를 극복하는 무대가 추사고택이다.

추사고택은 또한 김정희가 임상옥이 만년에 깨달은  '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ㆍ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의 게송을 보고 생애 최후의 대작  '상업지도'를 그려준 장소이기도 하다.

추사고택은 추사의 그림과 글씨처럼 단아했다.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이 18 세기 중엽에 지은 이 집은 원래는 50 간이 넘는 큰 집이었지만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 사랑채만 남아있다. 추사는 이 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고 장성한 후에는 서울 본가에 살면서도 이 집에 자주 내려와 사색과 서화에 몰두했다.

"이야, 저 처마에서 떨어지는 눈녹은 물 좀 보게." 동행한 시인 김형영(57)씨가 북쪽의 팔작지붕을 가리켰다. 지붕에 수북한 잔설이 초봄 햇볕에 녹아 똑, 똑, 똑 소리를 내며 떨어져 마당에 홈을 내고 있었다. 문을 나서면 석정(石井)이 남아있다. 곳곳에 '歲寒圖(세한도)'의 모작과 추사 글씨를 모사한 유묵들이 붙어있다.

'畵法有長江萬里(화법유장강만리) 書藝如孤松一枝(서예여고송일지)', 그림 그리는 법은 긴 강이 만리에 뻗친 듯하고 글 쓰는 기법은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와 같다, 추사의 유장하고도 고절한 그림과 글씨의 기품을 드러낸 문장이다. 그가 쓰던 붓과 벼루, 염주, 낙관도 사랑채 방에 남아 있다.

"10 여년 전 들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도로 포장도 제대로 안되었던 것 같은데.. 다시 찾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도'에서 임상옥이 추사의 집을 찾은 시기는 1811 년 5 월이다. 당시 김정희는 생원시에 합격하고 연경에 다녀온 후 이 집에서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고택 맨 위편에는 추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고, 왼편으로 고택을 나서면 추사묘가 있다.

묘의 왼편과 뒤로는 우람하고 기품있는 소나무들이 서 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상징이 남아있다. 묘에서 북서쪽으로 500 m 쯤 가면 백송이  '세한도'의 소나무마냥 우뚝 서 있다. 추사가 스물다섯살 때 연경에서 돌아오면서 구해 와 고조부 묘 앞에 심은 나무다. 회칠을 해놓은 것처럼 새하얀 껍질을 두른 채 고절하다.

 

"연재하는 동안 어떻게 써내려 갈 수 있었는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1,000 회가 넘는 신문 연재를 3 번이나 했지만  '상도'만큼 몰입해 쓴 소설은 없었습니다." 백송을 우러러보며 한 최씨의 말에는 너스레가 있다. 그는 처음부터  '상도'를 21 세기를 앞둔 한국의 새로운 경제철학을 제시하기 위해 쓰겠다고 밝혔었다. 연재 직후부터 지금까지 경제는 수렁에 빠져있다.

솥의 세 발인 부와 권력, 명예는 제 자리를 못찾아 쓰러져 있고, '가득 채우면 잔 속의 술이 사라져버리고 오직 8 할 정도 채워야만 온전하다'는 계영배가 던지는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이익만 추구하는 행태도 여전하다.

등단 이후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을 누구보다 먼저 포착해온 작가 최씨가 '상도'를 통해 제시한 화두는, 김정희가의 백송 마냥 시대가 변해도 우리를 경계하고 있을 것이다. 최씨는 돌아오는 길에 장보고를 다룬 새로운 역사소설을 올해 안에 전작으로 발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넘치는 의욕으로 문제적이면서도 대중에 읽히는 작품을 쓰려 하는 글 욕심이 드러난다. "요즘 젊은 작가의 소설에서는 로망이 사라진 것 같다"고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문학은 학문과 다릅니다. 문학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있지요. 작가들은 그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안타까운 듯이 덧붙였다.

'상도'의 무대는 추사고택과 작품 말미에 천주교인으로 순교한 여주인공 송이의 순교현장 공주 등에 부분적으로 남아있지만, 언젠가는 북녘의 임상옥ㆍ홍경래의 유적에도 가 닿아야 한다.

조선시대 거상 임상옥의 생애

●줄거리

작가인 나는 독일에서 신차 시험운행 중 죽은 기평그룹 총수 김기섭 회장의 유품으로 나온 문장 '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의 출처를 확인하다 그 지은이가 조선 후기의 무역왕 임상옥임을 알게 되어 그의 생애를 추적한다.

임상옥은 중국 베이징(北京)에 들어가 첫 인삼장사에서 큰 돈을 벌지만 유곽에서 만난 소녀 장미령을 구해주고 상계에서 추방된다. 입산하여 스님이 된 그에게 석숭 스님은 평생 맞이할 세 번의 위기를 구해줄 비책으로 '죽을 사(死)'자와 '솥 정(鼎)'자, '계영배(戒盈盃)'를 내려준다.

환속한 임상옥은 베이징 인삼상인들의 불매동맹을 '죽을 사'자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인삼을 불태움으로써 타파하고 천하 제일의 거부가 된다. 홍경래는 임상옥의 상가에 점원으로 들어와 그를 혁명에 끌어들이려 하지만, 번민하던 임상옥은 베이징 행에서 알게 된 연하의 선비 김정희로부터 '솥 정'자가 품은 의미를 듣고 권세에의 꿈을 접게 된다.

옛 친구 이희저의 홍경래 난 가담과 관련해 멸문지화의 세번째 위기에 처한 임상옥은 계영배가 던진 화두로 위기를 물리친 뒤,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가객으로 여생을 보낸다. 그가 깨달은 상업의 철리가 바로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이었다. 김정희는 임상옥의 이 게송을 보고 필생의 대작 '상업지도'를 그려준다. 임상옥이 진실로 사랑하였던 여인, 이희저의 딸 송이는 천주교로 귀의해 순교한다.

나는 김기섭 회장을 기려 건립된 여수기념관에 일본에서 되찾아온 그림 '상업지도'가 걸리는 것을 보며 임상옥이야말로 이(利)뿐 아니라 의(義)를 추구했던 상불(商佛)이었으며 그의 게송은 오늘의 우리를 향해 외치는 사자후라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