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3. 25. 16:08ㆍ정치와 사회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창시자 - John Locke의 정치사상
1. 로크 사상의 역사적 배경
로크는 매우 활동적인 사상가였다. 학자로서 서재에 들어앉아 저술에만 몰두하지 않고 다른 어떤 사상가들도 그럴 수 없을 정도로 현실 정치에 깊게 뛰어들었다. 때로는 외교관으로서, 때로는 행정 관료로서, 때로는 당대 거물 정치가들의 개인 참모나 고문으로서 17세기 후반 영국의 정치적 격량을 직접 체험하였다.
이러한 로크의 행동은 자신의 인식론과도 그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경험이라는 것은 진리를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저서 <정부론>을 살펴보는 것도 그것이 집필된 당시의 시대 상황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정부론>의 대부분은 영국이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을 때 쓰였다. 영국 정계는 찰스 2세(Charles Ⅱ)의 치세 말기에 휘그와 토리의 두 정파가 형성되면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1768년에는 카톨릭 음모 사건이 터지면서 그 분열은 극에 달했다.
카톨릭 음모사건은 오우츠(Titus Oacts)라는 신구교를 넘나드는 한 변절자가 ‘카톨릭 교도들이 찰스를 살해하고 신교도들을 학살하여 프랑스의 도움으로 왕의 아우인 요크공 제임스(James)가 영도하는 카톨릭 정부를 세우려 한다’는 날조된 역모를 퍼트리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것은 민중들에게 카톨릭에 대한 분노와 반 교황적 열정을 심어주었으며, 정치에 민중적 요소를 공급하는 계기가 되었다.
휘그파는 이 열광을 그들의 정치적 명분에 이용하려 하였다. 이 무렵 국왕 찰스는 카톨릭에 대해 호의적임을 표명하고 제임스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는 방침을 확고히 했는데, 그의 반대파들을 이것을 상황 타개의 호기로 삼았다. 휘그파는 샤프츠베리(Sgaftesbury)의 영도 아래 제임스를 왕위 계승권에서 배제시키기 위한 입법운동을 전개하였다.
찰스도 이에 대한 응전을 적극적으로 감행했는데, 이후 2년 동안 의회가 네 차례의 소집과 해산을 반복하였고, 급기야 1681년에 해산된 의회는 찰스의 남은 재위 기간동안 다시는 소집되지 못했다. 휘그파의 운동은 결국 실패하여 샤프츠베리는 대륙으로 망명하였고, 이어 휘그파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 자행되었다.
이들의 격력한 대립은 이데올로기적 논쟁 또한 유발하였다. 왕당파는 절대주의와 세습적 권리를 훌륭하게 결집해 놓은 필머의 저작 <가부장론 Patriarcha>을 내세웠는데, 이는 당시 토리의 중추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홉스(Hobbes)의 <리바이어던>은 세습적 권리를 부정하고 주권은 누구든 권력을 잡는 자의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채택되지 못하였다. 군주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유래했으며 군주에게 가해질 수 있는 유일한 제한은 신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 <가부장론>이야말로 그들의 주장을 공고히 해주는 것이었다.
시드니(Algernon Sidney)를 위시한 많은 휘그 이론가들은 이에 응전했다. 샤프츠베리의 개인 주치의요 동료이자 고문이었던 로크(Locke)가 이 일에 뛰어들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로써 로크는 절대왕정을 부정하고 시민에 의한 정부야 말로 인류를 위해 마련해놓은 신의 설계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임을 입증하는 일 속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내놓게 된 것이 바로 <정부론>이었다.
이러한 영국 내부의 정치적 위기에 관한 것 이외에도, 보다 넓은 틀에서 로크 사상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크가 자신의 사상을 성숙시켜나가던 17세기 말엽은 근대 주권국가가 급속하게 확립되던 시기였다. 중앙정부는 관습에 의해 부과되었던 많은 제약들과 중세의 지배자들이 누리던 지역적 및 공동체적 특권들로부터 해방되고 있었다.
국민의 안전과 복지를 위한다는 구실 아래 이 새로운 주권국가는 점차 옛 특권들과 법률들을 개폐하면서 새로운 법률과 권리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신민들의 영혼을 위해 어떤 종교가 참된 종교인지를 선언할 수 있으며, 이전에는 교회가 수행하던 여러 업무들을 넘겨받았고, 보다 세련된 행정 및 제정적인 통제기술들과 관료집단을 확보함으로써 이러한 과업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진행해 나갔다. 그리하여 그것은 낡은 봉건국가의 틀을 벗어던지고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리바이어던이 되었다.
로크는 바로 이 리바이어던 앞에 서게 된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국가와 개인간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가? 국가는 얼마만큼의 복종을 그 국민에게 요구할 수 있으며, 또한 국민은 얼마만큼의 자유와 권리를 가지는가? 이것이 바로 로크가 해결하려 했던 문제였다. 이것은 또한 정치적 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명제이기도 하니, 로크의 작업은 자유주의의 기초를 놓는 일이기도 한 것이었다.
간혹 로크는 재산을 중세의 도덕적 제약에서 해방시킴으로써 무제한의 자본 축적을 정당화해 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대변자라고 주장되기도 하고, 때로는 개인을 집단에 예속시킴으로써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를 예견하게 하는 루소(Rousseau)의 선구자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상가 또한 그 시대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고 따라서 당대의 상황을 고려해야 사상가의 진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봤을 때, 현대의 화두를 들이대기 보다는 그가 가진 지평 하에서 그의 사상을 이해하려 했을 때 보다 정확한 이해를 가져온다는 점은 자명하다.
2. 로크 정치사상의 이론적 장치 - 자연법과 자연상태
(1) 자연법
로크 정치철학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법사상은 서구 정치사상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관념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 자연법의 유구한 전통은 근대에 들어오면서 근본적인 변화와 단절을 겪게 된다. 전통적인 자연법사상은 주로 권리보다는 의무의 교의를 가르쳤고, 얼마간 권리에 관심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의무에서 파생된 것이 다름이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17~18세기를 거치는 동안 그것은 국가나 교회와 같은 기존의 권위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명분에 이바지하게 되었으며, 권리를 인간의 내제적인 재산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홉스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그런데 홉스는 자연법을 법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홉스에게 자연법은 어떤 것이 자신들의 안전에 도움이 될까하는 문제에 대한 결론이었으며, 자기보존에 관해 이성이 가르치는 일반 규칙이었다. 그에 비해 법이란 원래 권리로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 사람의 말이었다.
따라서 홉스는 이성의 명령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고 느꼈으며, 사람들이 법과 권리를 혼동하는 것을 비판했다. 비록 자연법이 있을 지라도 확립된 권력이 그것을 보장할 수 없으면 그것은 강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평, 정의와 같은 덕성들 속에 있는 자연법은 엄밀한 의미에서 법이 아니며, 일단 국가가 수립되면 그때야 비로소 법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홉스에게 있어서 근대 자연법 이론은 엄밀한 의미에서 법 이론이 아니며, 권리의 이론이었다.
그러나 사실 법 이론과 권리의 이론은 그렇게 엄격하게 구분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있기 마련이며, 겹치는 부분이 필연적으로 생기게 된다. 로크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에게 자연법은 인간에게 도덕적 계율을 부과할 뿐만 아니라 재산에 대한 권리를 포함한 많은 권리를 부여해 주고 시민정부에 그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이러한 권리들을 정치권력의 권위에 우선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언제나 의무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권리란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할 다른 사람의 의무를 전제로 할 때만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권리에 대한 논의는 결국 공론에 그치게 될 뿐이다. 절대적 자연권에 대한 홉스의 논의가 절대적 국가권력의 정당화로 이어진 것도 그런 연유에서인 것이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자연상태는 홉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회적이다. 사회 안의 개인들은 상호간에 긴밀한 관계를 맺고, 서로 권리와 의무에 의해 얽혀 있다. 로크는 자연법이 홉스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이성의 명령’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실제로 구속하는 진정한 법이라고 믿었다.
로크에게 있어서 자연법은 이성적인 피조물 누구에게나 인식 가능한 것이며, 자연상태가 스스로를 지배하는 법으로 갖고 있는 것으로서, 모든 사람들은 그에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상태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에서도 그 효력이 결코 소멸되지 않고 ‘영원한 규율’로 남아있는 ‘신의 의지’의 선언인 것이다. 그는 삼라만상이 각기 그들의 법칙의 지배 아래 움직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일정한 법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이렇듯 로크는 자연법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모든 구비요건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이라 보았다.
첫째, 그것은 인간보다 상급 존재인 신의 의지이다. 이것은 자연법의 형식적 명분에 기여한다.
둘째, 그것은 무엇이 행해져야 하며 무엇이 행해져서는 안 되는 가를 규정한다. 이것은 곧 법의 고유한 기능이다.
셋째, 그것은 의무를 창출하는데 필요한 모든 요건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구속력을 갖게 한다. 홉스가 자연법을 이성의 결론들로 규정한 것과는 달리, 로크는 그것을 신에 의해 제정되고 인간의 가슴 속에 심어진 것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이성은 단지 그것을 알아내고 발견할 뿐 그것을 수립하고 선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한편, 로크는 그의 사상을 개진하는데 있어서 논지의 일관성을 지키지 못한다는 비판을 자주 듣곤 하는데, 이 자연법사상에서 특히 그러하다고 지적되곤 한다. 이러한 비판에 의하면 그의 양대 저작인 <오성론>과 <정부론>은 상호 모순된다.
<오성론>은 데카르트(R. Descartes)류의 생득관념을 공격하면서 모든 지식은 긍극적으로 경험에서 도출되며 생득적 실천원리는 없다고 주장하는 저작인데, 그렇다면 이것은 <정부론>의 자연법에 대한 입장(생득적)과 배치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수학의 답이 경험에 의해서 도출되지 않는(이성에 의해서 도출되는) 유일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득적인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로크는 자연법이 이성의 인도를 받아 도출되는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했을 뿐이지 그것이 생득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로크의 비판자들이 ‘신에 의해 제정됐다’는 상징적인 말에 지나치게 얽매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자연법에 대한 인식은 이성의 도움으로써 ‘거친 길’과 ‘옆 길’을 잘 피함으로 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며, 그렇지 못했을 경우에는 어둠에 빠지게 된다고 로크는 주장했다. 자연법에 대한 견해가 모든 사람들 간에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2) 공리와 쾌락
로크는 쾌락을 주는 것은 선이며 고통을 주는 것은 악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로크는 “최대한의 행복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이며, 불행은 최고의 고통이다”라고 하면서, 인간은 행복에 대한 갈망과 불행에 대한 혐오를 타고났다고 말한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 로크를 공리주의자라고 하는 주장이 있기는 하나, 쾌락과 고통이 자연법에 대한 준수에 의존한다는 로크의 주장으로 미뤄봤을 때 완전한 공리주의자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로크에 의하면 선과 악, 쾌락과 고통은 이 법에 대한 준수 및 위반에 대한 상과 벌로서 따라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쾌락과 고통은 우리에게 자연법에 합치하려는 욕망을 부여하나, 그것은 어떤 도덕적 행위의 결과일 뿐이며 그것 자체가 도덕적 행위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것으로 인해 자연법의 객관적 지위가 손상되지는 않는다. 그는 “어떤 행동의 정당성은 그 공리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그 행동의 공리가 그 정당성의 결과인 것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공리가 자연법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즉, 그의 쾌락주의는 상당히 완화되고 제한된 성격의 것이며, 또한 그의 자연법은 공리와 쾌락의 원리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쾌락이나 공리는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하는데 있어서 그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의무를 지우는 일은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 의무를 지우는 것은 누구인가? 로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의무는 신에게 귀결된다.”
이러한 대답은 로크가 기독교도였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신이야 말로 인간보다 우월한 지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한 것이다. 또한 창조주는 피조물들에게 질서를 부여하려 하기 때문에 자연법에는 부당한 일이 없으며, 그 자체로서 옳은 것들만 포함한다.
(3) 자연상태와 인간의 본성
자연법사상이 오랜 전통을 가진 관념인데 비해, 자연상태는 17세기에 들어와서, 특히 홉스에 들어서야 비로소 정치철학의 본질적인 주제가 되었다. 홉스 이전에도 자연상태라는 용어가 쓰이기는 했지만 이것은 은총과 구별되는 세계로서, 순수 자연상태와 타락한 자연상태로 나뉜 것이었다.
홉스는 이러한 구분을 없애버리는 한편, 은총의 세계 대신에 시민사회 상태를 도입했다. 이러한 시도는 이전의 전통을 깨고 개인을 시민사회보다 우선하게 함으로써 의무보다 권리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개인은 사회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시민사회나 주권자의 모든 권리들은 원래 개인에게 속해있던 것이 파생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로크 또한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였다. 로크의 정치사상에서 자연상태에 관한 논의가 차지하는 의미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시민정부 바깥에 놓음으로써 그것을 정부의 자의적 침해로부터 보호하는 장치 구실을 한다는 점이다. 그가 옹호하려 했던 권리는 기본적으로 정부에 대한 국민의 권리였다. 그러나 이것을 개개인의 무제한적 권리를 옹호하려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자연권 또한 의무의 교의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의 일차적 관심사는 다른 이웃이나 인류 공동체에 대한 각 개인의 배타적인 권리 혹은 역으로 개인에 우선하는 집단이나 전체의 권리 그 어느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요컨대, 그는 무조건적인 복종이나 무제한적 자유가 아닌, 단지 정부의 목적을 규정하고 그 한계를 확장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시민사회 및 그 구성원들의 권리를 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자연적으로는 과연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인가? 로크는 무엇보다 그것을 자유와 평등의 상태로 규정하였다. 거기에서는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 자연적 권위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러한 인간의 지위는 근원적으로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로크에 의하면, “같은 종류와 등급의 피조물들은 자연의 해택을 똑같이 누리고, 또한 똑같은 재능을 사용하도록 태어났으며, 따라서 서로 간에 종속이나 복종을 시킴이 없이 평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과 인간의 이런 관계가 인간의 참된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을 인간의 절대적 권위에 예속시킴으로써, 로크는 그들 상호간에 어떠한 상급의 권위나 주권도 부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서로 간에 자유롭고 또한 평등하다. 그러나 자유는 일채의 제약의 부제가 아니라 단지 불필요한 제약의 부제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쨌거나 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에 “그가 그 지배 아래 있는 법이 허용하는 한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연적 자유는 자연법에 의해, 시민적 자유는 시민법에 의해 규정된다. 물론 이 법은 자유를 폐지하거나 억압하는데 그 목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로크는 “법 없는 곳에 자유 또한 없는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유를 보전하고 확대하는 법의 역할을 강조했다. 자연상태에서는 자연법에 따라 충실하게 살지 않는 사람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역할이 요구되는 것이다.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인간 이외의 다른 어떤 피조물도 갖지 못한 이성에 근거한다. 이성은 신이 우리에게 자연법을 공표하는 통로인 ‘신의 목소리’로서, 인간에게 자기가 쫓아야 할 법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준다. 그래서 이성과 자유는 로크의 사상 속에서 언제나 따라다닌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인 존재기도 하다. 흔히 로크의 인간은 원자화된 개인으로, 혹은 사회적 관계에서 단절된 자족적인 존재로 제시되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존재기도 하며 자연상태는 일종의 사회상태이다. 신의 뜻에 의해 인간은 생활상의 긴박한 필요에 의해 다른 사람과 사회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어떤 자연의 성향에 의해 사회 속으로 들어가도록 강요되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려 사회적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그러나 자연상태와 시민사회 상태는 구별될 필요가 있다. 자연상태는 비록 사회적이기는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재판할 공동의 상급자가 없다는 점에서 시민사회 상태와 구별된다. 즉, 시민사회 상태는 자연상태에서 파생되는 매우 특수한 한 형태인 것이다.
로크는 이러한 자연상태를 전쟁상태와 혼동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양자를 명확하게 구별하였다. 그에 의하면 전쟁상태란 곧 “적대·악의·폭력 및 상호 파괴의 상태”인데 반해, 자연상태는 “평화·신의·상부상조 및 보전의 상태”로서 양자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그러나 로크는 자신의 이러한 명시적인 구별에도 불구하고, 양자를 혼동해서 사용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그는 시민사회 수립 이전의 상태를 묘사하면서, 그것을 마치 전쟁상태의 특징으로 규정한 “적대·악의·폭력 및 상호 파괴”가 지배하는 곳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쉬트라우스는 이런 로크를 단지 가면을 쓴 홉스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으며, 그의 견해를 이어받은 콕스(R. H. Cox)에 의하면 로크는 <정부론>의 전반부에서는 자연상태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면서도 후반부에서는 논조를 바꾸어 부정적으로 묘사했는데, 이 부정적 묘사가 로크의 진정한 입장이라는 것이다.
로크에 대한 이런 비판은 일견 타당하다. 실제로 로크는 자연상태를 “자유롭기는 하지만 끊임없는 위험으로 가득 찬” 상황이라고 묘사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인간 권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침해 앞에 노출돼 있다”라고 말한다. 자연상태가 이렇게 되는 것은 세 가지 중요한 조건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거기에는 “옳고 그른 것의 표준, 그리고 그들간의 모든 분쟁을 해결해 줄 동통의 척도”가 될 “확립되고 정착되고 알려진 법”이 없다. 둘째로, 그러한 법에 따라 분쟁을 판결할 “알려지고 공명정대한 재판관”이 없다. 셋째로, 정당한 판결을 집행하고 뒷받침할 권력이 없다. 그 속에서 인간들은 할 수만 있다면 폭력을 사용하여 언제나 타인을 침해하려 할 것이라고 로크는 말한다.
그러나 로크에 대한 이런 비판은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 자연상태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본성과 그 능력에 관한 문제이다. 이성은 그 주인이 적절하게 활용해야만 그 구실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로크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며, 그로 인해 폭력상태가 발생할 수는 있지만 인간이 기본적으로 이성적 존재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
로크는 인간의 가능성과 역량을 언급한 것이다. 만약 로크에게 잘못 비판이 가해지는 대로 자연상태가 완전한 평화의 상태라면, 거기에는 시민사회로의 이행에 대한 어떠한 동기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자연상태에서는 사람들이 “편견에 치우치고”, “격정”에 사로잡혀 행동함으로써, “적대·악의·폭력 및 상호 파괴”의 양상이 나타나기도 하나, 이것이 자연상태의 전반을 특징짓는 양상은 아니며, 그것은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상태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일탈 현상인 것이다.
로크는 <정부론> 212절에서 시민사회를 평화의 상태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시민사회에서는 질서의 파괴나 범법행위가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닐 터이다. 그가 자연상태를 평화의 상태로 규정한 것도 같은 관련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3. 재산권
로크에게 있어서 재산권은 그의 전체 정치사상 가운데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로크가 말하는 재산은 금전적인 것뿐만 아니라 생명과 자유를 포함하는 보다 넓은 의미이다. 이러한 어법은 로크만의 독창적인 표현이 아니라 당시의 일반적인 관용어였다.
사람들이 자연상태를 버리고 정치상태로 들어가는 그 유일한 목적이며, 따라서 그 정치사회가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가 재산의 보전이라고 할 때, 이때의 재산은 생명과 자유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로크는 물질적인 의미의 재산 또한 큰 비중으로 다루고 있는 바, 이것에 대해 고찰해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이 장에서 사용되는 재산이라는 말은 모두 물질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다.
(1) 로크의 개인주의적 재산이론 - 전유화와 노동가치설
로크의 개인주의적 재산이론은, 이 세계는 원래 인류 공유의 것으로 주어졌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이것은 중세 이래로 생각돼 오던 적극적 의미의 공동체 소유와는 다른 개념으로 봐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바다나 공기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처럼 소유권의 부재, 즉 이 세계의 어느 것도 특정인에게 배타적으로 소유돼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소극적 소유이다. 로크에 의하면, 이렇듯 신은 “이 세계를 사람들에게 공유로 부여”하였다. “대지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존의 유지와 안락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전제 하에서는 사유재산이 생겨날 수 없다. 어떤 것이 사유재산이 되려면 그에 대한 다른 공유자의 권리를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로크는 그 해결을 노동에 의한 전유화라는 관념에서 찾았다.
인간에게 원래 자기 자신의 것으로는 인신(人身)이 있다. 인간은 이것에 관해서 만큼은 배타적인 권리를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신에서 나온 노동 또한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진데, 자연이 놓아둔 사물에 그의 노동을 가하는 것은 곧 그 자신의 것을 사물에 덧붙이는 것이 된다.
이를 태면 자기 자신을 외적 물체에 확장시켜 그것을 자신의 인성 안으로 포용시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그의 일부가 되며, 그것에 관한 배타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이제 이 노동이 가해진 물건을 누가 빼앗으려 하는 것은 인신을 침해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며 자연법에 대한 명백한 위반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로크는 이런 자연산물에 대한 소유권보다도 토지에 대한 재산권이 어떻게 생기나 하는 것에 주된 관심을 두었는데, 그에 의하면, “땅 그 자체”에 대한 소유권도 동일한 방법에 의해 생겨난다. 누군가 토지에 울타리를 치고 경작을 하면 이는 그의 노동을 토지에 투입한 것이 되며, 따라서 토지는 그의 것이 된다.
이러한 로크의 주장은 노동가치설에 대한 주장이기도 하다. 자연산물이든 토지이든 간에 그것을 소유할 정당한 자격을 얻는 방법은 자기의 노동에 의존하는 길 뿐이다. 로크는 “모든 것에 가치의 차이를 낳게 하는 것은 참으로 노동”뿐이고, “토지에 그 가치의 가장 큰 부분을 제공해 주는 것도 노동이며, 이것 없이는 토지는 거의 아무런 가치도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로크의 노동은 어느 한 계급의 경제적 활동으로서가 아니라 인간 일반의 가치창조라는 점에서 사회주의자들의 그것과는 구별된다.
이러한 주장에서 우리는 재산권의 기초를 개인에게서 찾는 로크의 분명한 태도를 볼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이기적인 동기에서만 연유하는 것은 아니다. “신은 세계를 모든 인류에게 공유로 부여하였을 때, 그는 또한 인간에게 노동할 것도 명령”했기 때문에, 그리하여 대지를 개량하여 인간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만들 것을 명령했기 때문에 그것은 의무이기도 하다.
또 하나 경계해야 할 것은, 로크의 개인주의적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다. 비록 완전하게 소유했다 할지라도 그것의 사용은 자연법에 합치돼야 하기 때문에, 재산 사용의 사회적·도덕적 의무를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사실 로크의 노동이론은 일관되지 못한 면이 있어 많은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노동과 소유권은 일치한다고 말하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노동이 부를 만들어내는 근원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대한 소유권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태면, 내 하인의 노동이 생산한 가치는 내 것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생명과는 달리 노동은 타인에게 양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으로서, 여기서 우리는 로크가 노동의 상품화를 인정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로크의 사상에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인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노동관계는 자본주의의 시장관계이기에 앞서 훨씬 더 복잡한 인간관계를 포함(하인은 주인 가족의 한 구성원이 되며 그 가족의 일상적 규율에 얽매인다)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그것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로크의 이런 이론이 전통적 장원의 공유지를 사유화해가는 농업인클로저 현상을 염두에 두고 나온 글임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질서의 시초라기보다는 중세적 사회질서의 잔존이라고 보아야 한다. 때문에 로크는 임금노동자라는 말을 쓰지 않고 노예와 비교하는 문맥에서 "Servant"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2) 전유화의 한계와 그 사회화
전유화는 자연법에 의해 몇 가지 제약을 받는다. 첫째, 남에게 충분하게 그리고 똑같이 좋은 것을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충분 한계(sufficiency limitation)”라고 불린다. 둘째, 누구든지 그 재화가 손상되어 못쓰게 되기 전에 생활에 소용이 되도록 모두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손상 한계(spoilage limitation)”이라고 불린다. 맥퍼슨은, 로크의 이론에는 이것 외에도 한 가지가 더 내포돼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노동 한계(labor limitation)”이다. 즉 자기가 노동할 수 있는 만큼만 가져야 하며 그 외의 부분은 자기의 정당한 재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재산은 자기 보전을 위한 필요 및 그 사용능력의 확대에 따라, 그리고 노동능력의 향상에 따라 그에 비례하여 얼마든지 증대될 수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자기 보전의 권리뿐만 아니라 “안락한 보전”의 권리도 갖고 있으며, 이 세계는 또한 “생활의 최대의 편익”을 도모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또한 내 재산을 만들어주는 노동은 내가 고용한 사람의 노동도 포함하기 때문에 단순한 나의 노동의 범위를 넘어서 훨씬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안락한 보전”을 위한 “최대 편익”의 한계는 자꾸 늘어날 수밖에 없으며, 어느새 ‘한계’가 아니게 된다.
로크는 재화의 사용을 단순히 소유자가 직접 자기의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소비하는 것에만 한정하지 않고, 양도나 교환도 “사용”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렇게 “사용”의 의미가 넓어질 때, 쉬 손상될 제화는 더 오래 견디는 것과 교환함으로써 더 많은 재산을 정당하게 간직할 수 있게 된다. 단지 손상되지 않도록 주의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사용”이 아닌 “손상”이 제화의 한계를 규정해주는 것이 되며, 손상의 염려가 없는 귀금속과 같은 제화일 경우에는 마음껏 소유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화폐의 발명은 그것의 기술적인 수단을 보충해줬다.
그러나 여기서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자연법의 존재이다. 그의 자연법은 인간이 평등하게 가지고 있는 권리를 정당한 조정 없이 어느 일부만이 극단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지는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권리는 언제나 의무와 표리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가 허용하는 재산은 언제나 그 재산으로 인해 타인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는다는 도덕적 정당성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충분한계”에 대해서도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로크의 자연상태에서는, 전유화란 남에게 전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 보전의 위해 타인의 권리를 무시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의식, 고려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재산의 주된 대상은 이 땅의 과실이나 그 위에서 살아가는 짐승들이 아니라 … 땅 그 자체”인데, 이 땅은 너무나 충분하게 있어서 토지의 전유화는 “인류 공동의 재산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증대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원래 자연상태가 궁핍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땅이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상태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며, 노동을 통한 전유화는 곧 궁핍을 풍족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다. 요컨대, 땅의 “충분”이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상태를 이루면서는 이러한 “충분”조건이 소멸될 수 있는데, 여기서 로크는 다시 “동의”의 개념을 도입한다. 즉, 충분한 여지가 있었을 때에는 상호간에 아무런 제약도 없이 자유롭게 그들의 목장을 차지할 수 있었던 사람들도, 각자의 재산이 증대하여 한 곳에서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는 합의에 의해 서로의 재산에 대한 규제를 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이 “동의”에 의한 규제가 자연법에 위배되지 말아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렇게 해서 로크는 사회로부터 독립된 자연권으로 확립된 재산권을 이제 다시 사회적 제약 속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인 것이다.
로크는 시민사회의 기능을 단순히 재산의 보전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그것을 조정하는 역할까지 맡기고 있다. 그리고 그는 개인 재산의 신성불가침성을 옹호하여 비록 국가 권력일 지라도 개인으로부터 그의 동의 없이는 재산의 일부라도 뺏을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또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동의에 의한 과세를 주장했을 뿐 결코 납세의 의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또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을 상속권을 자연권이라고 말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국가에의 복종 의무를 상속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등 여러 가지로 재산에 대한 국가의 간섭·통제권을 인정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로크가 사유재산을 옹호하기는 했지만 그 구도는 언제나 자본가 대 무산자가 아닌 권력 대 시민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로크의 사상을 자본주의 제도를 위한 적극적 주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4. 사회계약과 권력의 형성
로크는 권력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는, “부권”이다. 이것은 아버지가 그 자식들에 대하여 갖는 권력인데, 그것은 그에게 부과된 의무, 말하자면 자식들이 아직 미성숙한 상태에 있는 동안 그들을 돌봐주어야 할 의무에서 생기는 것이다. 만일 아버지가 그들을 돌보는 일을 내팽개친다면 그들에 대한 권력도 함께 상실하게 된다. 이것은 자식이 성년이 된 이후에는 소멸되며, 또한 그것은 사형이나 형벌권까지도 포함한 정치권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둘째는 “전제권력”이다. 이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마음만 내키면 언제라도 그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절대적이고 자의적인 권력”이다. 이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부연한 권력이 아니다. 또한 계약에 의해 보장될 수 있는 권력도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과 자유, 평등의 원칙은 인간이 아닌 신에게 귀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두 권력에 비해, 정치권력은 제약과 합의에 의해 생겨난 권력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원래 자연상태에서 가지고 있던 권력을 정치사회의 수중에 넘겨준 것이며, 그 유일한 목적은 그 사회 구성원의 생명과 자유 및 자산, 즉 재산(로크는 자주 재산이라는 단어를 이 모든 것이 뭉뚱그려져 있는 의미로 표현했다)을 보전하는데 있다. 이것에 비한다면 부권은 재산을 처리할 능력이 없는 미성년자에게, 그리고 전제권력은 전혀 아무런 재산도 갖지 못한 사람에게 행사되는 권력인 것이다.
이와 같이 로크에게 정치적이라는 의미는 특수하고 한정된 것이었다. 시민정부는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이며, 따라서 모든 정부가 시민정부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전제정부는 시민정부가 아니다. 비록 전제정부도 신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해결하는 등의 긍정적인 일을 수행한다는 점을 인정하기는 했으나, 로크에게 있어서 그것은 주인이 가축을 돌보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그러므로, 로크가 인정한 정통성있는 정부는 오직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정부이며, 이 정치권력은 오직 그 정부의 지배를 받아들이기를 동의하는 구성원들의 계약에 의해서만 창출될 수 있는 권력이다. 로크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원래 자연적으로는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며 독립해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동의 없이는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정치권력에 예속될 수 없다.
누구든 자기의 자연적 자유를 버리고 시민사회의 구속을 받게 되는 유일한 길은 다른 사람들과 결합하여, 하나의 공동체 속으로 통합해 들어갈 것을 합의함으로써이다.” 그런데, 일단 사회계약을 통해서 시민사회를 수립하고 난 후에는 그들의 동의에 의해 권력을 소수자나 일인에게 맡기는 것도 가능하다.
꼭 다수자가 권력을 잡고 있을 필요는 없다. 모든 군주정이 절대군주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서 충분히 언급했듯이,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불안정한 자연상태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이다. 사회상태로 들어가고 나면 사람들은 자연법의 아래 있던 권리들의 일부를 시민법에게 양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로크는 공동체를 수립하는 것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분리시켜서 생각하였다. 이른바 사회계약과 통치계약을 구분한 것이다. 통치계약은 국가 지배자와 그 신민들 사이에서 맺어지는 것인데, 이것은 논리상으로 사회계약을 그 선행조건으로 가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통치계약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계약의 당사자로서 공통의 사회적 의지에 의해 결합된 잠재적인 신민집단과 통치의 과업을 수임하는 지배자가 먼저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 두 과정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것은 명백히 구별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로크는 통치계약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에 의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계약이 일어나는 것은 사회계약이며 뒤의 과정에서는 계약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는 통치계약의 관념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것을 신탁 관념으로 대치시켰다. 즉 사회계약을 통해 형성된 공동체는 각 구성원들이 그 공동체에 양도한 자연적 권력을 그들의 통치자에게 신탁하는 것이다. 통치자는 시민들의 이익 또는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권력을 잠시 맡아두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신탁개념은 통치계약의 관념보다 훨씬 더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이었다. 상호 합의 없이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있는 계약과는 달리, 신탁관계에서는 수탁자인 정부는 일방적인 의무만을 지는 반면, 신탁자로서의 국민은 그 의무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때에는 자유로이 그 신탁을 철회할 수 있다.
수탁자가 신탁을 위반했는지의 여부, 그리고 언제·어떻게 위반했는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은 위탁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정치적 신탁의 이론은 제한된 의미로서의 주권과 통치자를 갈아치우고 정부를 재구성할 권리를 국민에게 확보해 준다. 로크의 생각으로는 통치계약은 정부에게 너무 유리한 것이었다. 그는 그것 대신에 영국 특유의 것인 신탁의 관념을 받아들여 그의 사상 속에 체계화함으로써, 입헌적 변혁과 나아가 혁명까지도 정당화할 논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5. 저항의 권리
(1) 저항권
정부가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 때, 만일 정부가 압제적이면 국민은 거기에 저항할 수 있다고 보는 것에는 하등의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로크는 이것을 좀 더 확실하게 결부시키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당시에도 사람들은, 예를 들어 절대왕정의 대변자인 필머(R. Filmer)조차도 정부가 신민의 이익과 복지를 위해 존재한다는 점은 인정하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신민은 압제적인 정부를 타도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모두 다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머는 국왕이 신민의 복지를 위해 통치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책임은 신에게만 진다고 주장하였다. 로크는 이런 주장에 맞설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로크의 이론 속에서 저항의 권리는 전쟁상태의 개념에서 도출되는데, 전쟁상태는 “아무런 권리도 없으면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에서 야기된다. 이것은 “권위를 가진 공통의 재판관”이 없는 곳, 즉 자연상태의 큰 틀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특수한 상황이다. 그것은 실제의 폭력의 행사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사하겠다는 의도를 선언하는 것까지도 포함된다.
폭력에 의해 침해를 당하고도 그것을 구제할 법과 공통의 재판관이 없을 때, 그것에 대항하는 길은 하늘에 호소하는 것, 즉 자신의 힘에 의존하여 폭력에 대항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폭력으로 남의 생명을 해치려는 자는 그 전쟁상태를 야기함으로써 자신의 목숨 또한 상대방의 힘에 의해 빼앗길 위험 앞에 위험 앞에 드러내놓게 되는 것이며, 이럴 경우 마땅히 공격을 당한 자가 공격자를 쳐부술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자연의 순리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공통의 법인 이성의 법의 구속을 받지 않고, 폭력과 폭행의 규율 이외에는 아무런 규율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 맹수와 마찬가지로 취급되어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사회상태에서도 매한가지이다. “사회상태에 있어서도 그 사회 또는 국가 성원들의 자유를 박탈하려는 사람은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도 빼앗아 버리려 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전쟁상태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법이 그 이름과 형태를 갖추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성실하게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곳에서는 피해자에 대한 전쟁이 도발되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땅 위에서 구제를 호소할 길을 전혀 갖지 못한 사람에게 남은 길은 “하늘에 대한 호소”뿐이다.
이것은 정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말이다. “법이 종말을 고하는 데에서” 시작된 폭정은, “자유인에게가 아니라 노예에게 행사되는 무제한의 절대적이고 자의적인 권력”으로서, 이것은 전제정치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전제적이고 자의적인 권력은 “자연이 부여한 것도 아니며 … 계약이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권리를 넘어선 권력, 어느 누구도 그럴 권리를 가질 수 없는 권력”을 행사하는 위정자는 이미 위정자이기를 그친 것이며, 따라서 그의 행위는 아무런 권한도 없이 행한 것이 됨으로써, 그는 폭력으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자가 받기 마련인 저항을 신민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다.
“열등한 자는 우월한 자를 처벌할 수 없다”는 군주권 옹호론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로크는, 전쟁상태에 빠진다는 것은 그 이전의 우열관계가 해소되고 대등한 관계에 놓인다는 것을 의미하며, 오히려 “부당한 공격자에 맞서 대항하는 자는 그 공격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우월성, 즉 그는 … 평화의 파괴 및 그에 뒤따라 일어나는 온갖 죄악에 대해 그 범죄자를 처벌하는 권리를 가진다고 하는 그런 우월성을 가지는 것이다”라고 대응했다.
(2) 저항권의 한계
한편, 로크는 폭정에 대한 저항의 권리를 강조한 것에 못지않게 다른 한편으로는 합법적인 정부에 대한 복종의 의무 또한 강조했다. 정부가 그 신탁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는 한 국민은 마음대로 정부를 변경할 수 없다. 그는 사회의 보전을 개인의 보전보다 우선시하였다.
사람들이 국가를 수립하는 목적은 그들의 “생명과 자유 및 재산”을 보다 안전하게 보호받기 위해서인데, 만일 국가가 “그 자체 안에 재산을 보전해 줄 수 있는 권력과, 또한 그러기 위하여 그 사회의 모든 사람들의 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갖지 못한다면 존재할 수도, 존속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지배하는데 필요한 모든 권력을 가지며, 그것을 가진 목적에 위배되지 않게 행동하는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태면, “의무와 저항은 같은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로크는 합법적인 정부가 존속하고 법에 호소하는 것이 가능한 곳에서는 권위에 저항할 어떤 권리도 부정하였다.
이러한 로크의 이론은 오늘날의 국민주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국민이 최고의 권력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국가가 정상적인 상태에 있을 때에는 결코 발동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확립된 국가 내에서는 어디까지나 입법부가 최고 권력이며, 그러므로 국민의 권력은 정부가 해체될 때 까지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각 개인이 사회에 들어가면서 그것에 부여한 권력은 그 사회가 존속하는 한 결코 개인들에게 다시 되돌아갈 수 없고, 항상 그 공동체에 남아 있다.”
(3) 정부의 해체
로크는 정부의 해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과 사회 자체의 해체를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사람은 주권자의 구속의 손길이 제거되면 사람들은 자연상태의 혼란으로 되돌아간다’는 홉스의 주장을 염두에 둔 언급일 수 있을 것이다.
로크에 의하면 사회 자체가 해체되는 “통상적이고 거의 유일한 길”은 외국의 정복에 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정복되는 경우에는 스스로를 온전하고 독립적인 조직체로 유지할 수 없게 됨으로써, 조직체의 결합이 소멸되고 각자는 자연상태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회가 해체되어 버리면, 그 정부 또한 해체되어 버린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러한 밖으로부터의 전복 이외에 정부는 또한 안으로부터 해체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로크는 그것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는 입법부가 변경되어지는 경우이다. 로크에 의하면, 입법부는 “국가에 형태, 생명 및 통일성을 부여해주는 혼”이며, 따라서 그것을 구성하는 일은 “사회의 으뜸가는 기본적인 행위이다.” 그런데 만일 그것이 국민의 동의에 의해 그럴 권위가 부여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 의해 행사된다면, 입법부는 파괴되는 것이며 따라서 정부는 사멸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입법부나 혹은 군주가 신탁에 위배하여 행동하는 경우이다. 즉, 입법부가 국민의 제산, 곧 생명과 자유 및 자산에 대한 자의적이고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여 그 주인이 되려고 하거나, 아니면 군주가 그와 같은 권력을 획득하려고 할 때이다. 이때 국민은 저항의 권리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로크가 안으로부터 정부가 해체되는 두 가지 경우를 구분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 양자가 별개의 것으로 엄격히 구분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것들은 서로 어느 정도 연관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크가 그 두 가지를 구별한 보다 분명한 이유는 폭정으로의 전락이 현재 기도되고 있는 단계인가, 아니면 이미 일어난 일인가를 구분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만일 사람들이 전제의 지배 아래 완전히 떨어질 때 까지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아무런 수단도 없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결국 전제로부터 결코 안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단순히 전제로부터 벗어날 권리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미리 예방할 권리 역시 갖고 있는 것”이라고 로크는 믿었다.
정부가 해체되는 두 번째 길인 신탁의 파기에 관한 논의는 바로 이런 예방의 경우를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로크는 이것이 없다면 기껏해야 노예가 되고 난 다음에 자유를 지키라거나, 쇠사슬에 얽매이고 난 후에 자유인으로 행동해도 좋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였다.
* 마치며
거의 모든 사상가들이 그렇듯이, 로크 또한 여러 비판들에 직면한다. 로크를 “개인주의의 왕자”로 이해한 대표적인 인물인 보간(C. E. Vaughan)은 그를 국가의 기능을 최소화하고 개인에게 무제한의 활동영역을 제공해 줌으로써 결국 강자에 대한 약자의, 그리고 부자에 대한 빈자의 실질적인 노예화를 가져오게 했다고 비난한다.
또한, 람프레히트(K. G. Lamprecht)같은 학자는 로크가 혁명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거의 혁명주의자라고 불릴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의 관심은 명백히 안정된 정부를 공급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혁명의 권리에 관한 로크의 논의의 배경에는 비혁명적인 동기”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어느 정도 온당하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상가는 그 시대와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로크의 시대는 중앙집권적 근대 국가가 절대왕정의 형태로 대두해 있던 때였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리바이어던이었다. 이 막강한 권력 앞에 선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구제는 당대 가장 시급한 사안이었으며 미룰 수 없는 과제였다.
동시에 로크는 리바이어던의 등장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임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그 속에서 찾으려 애썼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감안한다면, 로크의 작업이 자유의 확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보고서의 제목을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창시자’라고 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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