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거상 2인

2009. 6. 21. 22:06경영과 경제

 

항주의 호설암

노신, 봉건시대의 마지막 위대한 상인

중국의 거상 호설암(胡雪巖). 호설암은 14억 중국인들이 가장 숭배하는 상성(商聖)으로 통하는데, 이는 고대의 인물 중 상성이라 불리는 도주공에 견줄 인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호설암은 이름은 광용, 자가 설암이다. 1823년 휘주 적계현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예로부터 상인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휘주 출신 상인들은 중국 전역에 퍼져 있었다. 호설암은 가난하고 비천한 집안 출신이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집안이 몹시 어렵게 돼, 열두 살의 나이에 홀어머니를 떠나 항주로 가서 신화 전장(청나라 시대의 금융기관)의 도제가 된다.

 

호설암이 살았던 시대는 중국에서도 자본주의의 싹이 막 자라나던 때이다. 농업생산력의 발전, 상공업과 도시가 서서히 체계를 잡아갔다. 모든 것이 급격하게 변해갔고, 특히 경제는 더욱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태평천국의 난, 양무운동 등이 당시의 시대상황을 잘 대변해 준다. 이러한 와중에 서양상인이 중국에 들어와 활발한 무역관계를 맺었고, 지역시장은 대도시와 연결되고, 대자본을 소유한 대상인들이 생겨났다.

 

그는 독학으로 문필을 조금 익혔을 뿐인데, 상인으로서의 공을 인정받아 청대 상인으로서는 전무후무한 1품 관직을 받아 홍정상인이라 불렸다. 호설암은 정치적 활동에 뛰어난 상인이었으며, 금융업에서도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한때 그의 전장은 스물여섯 곳에 점포가 개설되었고, 그 이익을 토대로 새로운 업종을 늘리며 확장해갔다.

 

그렇다면 호설암이 상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그의 경영철학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한다면 인간의 도리를 중시한 경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고객들과의 신용을 제1의 가치로 여겼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는 시대와 권력의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을 지녔으며, 이를 잘 활용했다고 한다. 호설암은 죽음을 앞두고 유언으로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나의 귀중한 경험과 경상의 원리를 후대 사람들에게 책으로 정리하여 남겨주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도주공

도주공이란 말은 중국 민속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중국사람들의 재물의 신은 도주공이다. 도주공은 도라는 곳에서 수만냥의 재물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범려이었으니 그 아리따운 서시를 유혹하여 오나라 부차에게 보내, 멸망시킨 후 다시 서시와 함께 '도'라는 곳에서 장사꾼으로 한평생을 보낸 분이다. 그의 장사 솜씨가 뛰어났기에 많은 재물을 모았지만 그의 우뚝함은 재물을 모으는 것보다 그 쓰임에 있었으니 많은 재무을 모아서는 모두 사회에 환원을 하여 빈민구제에 힘썼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워렌 버핏이란 대 부호는 돈을 사회에 환원하여 세계적인 빈민구호활동과 자선사업을 벌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대재벌은 오히려 이런 면에서 인색할 뿐이다. 오히려 가난 속에서 한푼 두푼 모은 돈을 죽을 때에 사회에 환원하는 '청빈 재벌'들을 볼 때엔 그 인품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범려는 월나라 구천이 오나라에게 패하자 구천과 함께 오나라에 가서 3년 동안 부차의 똥 시중을 든 사람이다. 구천은 부차가 병이 났을 때 그의 대변을 손가락으로 찍어먹어 보기까지 하였다. 범려는 나중에 미인 서시를 부차에게 헌납하여 나라를 무너지게 한 후에 구천을 춘추 오패의 최후의 패자로 만든 인물이다.

  그러나 구천이 오를 멸망한 후에 범려는 정치에서 손을 떼고 제나라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으며 수만냥의 돈을 모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또다시 도라는 곳으로 갔다. 그 전에 범려와 쌍벽을 이루는 신하 문종은 구천의 밑에 있다가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

 

 범려는 문종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어려울 때에는 같이 고생할 수 있는 사람이나 잘 나갈 때에는 공존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하였다. 토사구팽이란 말이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범려는 정치를 하면서 세상의 깊은 이치를 통달하였는데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한결같이 도량을 보이기에 인색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를 하든 돈을 모으든 범려같은 인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범려가 제나라에서 농사를 지을 때의 일이다.

 

  제나라 임금이 범려의 사람됨을 보고 직접 범려가 사는 곳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범려는 깨끗이 사양하였다. 그는 부귀영화가 오래가면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미 그때 남긴 유명한 '벽' 선생의 말이 있으니

'끝이 뾰족하면 드러내기를 삼가야 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