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8. 27. 10:25ㆍ정치와 사회
너무너무 가슴이 아프고, 슬픕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왜 마땅히 아프고 슬퍼해야하는지 이유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여러분들과 마음을 나누고 싶습니다.
구교형 올림
“김대중은 하나님이 우리 시대에 보내주신 큰 선물이다”
내가 왜 이 글을 쓰게 되었나? 난 그 분과 개인적 관계를 말할 만큼 대단한 민주투사도, 화려한 경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적어도 이 땅에서 김대중이라는 사람의 존재가 그 자체로 한국현대사요, 하나님이 우리 시대에 보내주신 큰 선물이라는 것은 믿고 있다. 그런데 의외로 그의 죽음을 담담하게 맞고 있는 국민 분위기를 보며, ‘김대중을 이렇게 빨리 잊어서는 안 된다’는 안타까움이 내 속에서 일어났다. 안 된다. 그를 이렇게 쉽게 잊어서는 안 된다. 그를 쉽게 잊으면 우리는 더 성숙할 수 없다. 86세라면 물론 그는 천수를 누렸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단지 나이나 화려한 경력만으로 간단히 지나쳐버릴 수 없는 우리시대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Ⅰ. 김대중은 한국현대사다. 단언컨대 김대중은 한국현대사다. 1924년 생으로 일제와 해방, 분단과 전쟁, 군부독재시대와 경제성장 등 한국현대사의 모든 사건들을 지나오면서 우리시대가 겪고 이겨내야만 했던 모든 모순점들과 가장 격렬하게, 가장 대표적으로 싸워야만 했다. 그게 도대체 무엇인가?
1. 김대중은 평생 빨갱이의 천형(天刑/천벌처럼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는 굴레)을 지고 살았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기성세대에게 ‘김대중은 곧 빨갱이’의 대명사다. 그가 40대 기수론으로 돌풍을 일으키던 70년대에도 그랬고, 80년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을 때의 죄목도 그랬고, 마침내 대한민국의 15대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빨갱이였다. 결국 목숨을 걸고 민족화해를 위해 마지막 헌신을 다하려는 순간까지 그는 끝내 ‘역시 빨갱이’ 소릴 들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기본모순이 바로 분단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의 일생 최대의 싸움으로 여겼다. 대한민국, 한민족이 발전하기 위해서 극복해야할 중요한 과제들이 많지만 분단과 냉전의 빨갱이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것보다 시급한 것은 없었다. 점잖게 법이니, 도덕이니, 윤리니, 종교의 문제까지 갈 것도 없다. 삶의 과제요, 생존의 문제다. 이걸 극복 못하면 우리민족은 도대체 발전할 수가 없다. 사람 구실을 못한다. 그래서 정치인 김대중은 87년 민주화가 한 단계 발전한 이후부터는 다른 어떤 주요과제들보다 거의 전적으로 민족화해, 평화와 통일문제에 집중했다. 대통령 김대중의 5년은 거의 남북관계 개선에 집중되었고, 퇴임 이후 남은 모든 여생도 이 과제만을 위해 끝까지 매달렸다. 1997년 10월 당시 대선 주요후보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사상검증토론회”라는 전무후무한 코메디가 TV를 통해 장장 7시간동안이나 생중계되었다. 이 코메디는 발행부수도 얼마 되지 않는 <한국논단>이라는 잡지가 주최한 대선후보 초청토론회였다. 이 자리에서 극우인사인 발행인 이도형은 “귀순한 황장엽씨는 ‘김정일이 김대중 총재를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다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를 설득해 보라.”는 말도 안 되는 억지주장도 했는데, 이 역시 TV를 통해 고스란히 방영되었다. 사실 김대중은 보수주의 대중정치가다. 그의 사상은 시대모순을 극복하려는 상식을 반영할 뿐, 조금도 급진적이지 않다. 그러나 정적들에게 정치인 김대중은 사상적으로 훨씬 급진적인 다른 많은 인물들보다 더 위험한 빨갱이로 남아야했다. 그는 우리시대를 위해 그런 수모를 겪었다.
2. 김대중은 평생 ‘전라도사람’의 천형을 지고 살았다. 아는 사람은 또 다 안다. 우리사회, 특히 기성세대에게 ‘전라도사람’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양친 모두 경기도 출신이시고, 역시 서울에서 출생한 나도 잘 안다. 어려서부터 나도 어른들끼리 “전라도사람은 절대 믿지 마라.”고 하시는 말씀을 자주 듣고 자랐다. 그런 호남 따돌리기가 상당히 오랜 역사적 뿌리를 갖고 내려왔으며, 특히 박정희시대 이후 한국현대사에 크게 증폭되었다는 사실을 그 때는 몰랐지만 나도 그렇게 알고 자랐다. ‘빨갱이에 전라도’ 이 정도면 ‘그가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이냐’와 전혀 상관없이 우리사회에서는 완전 매장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의 고향이 전라도라서 그가 당한 시련보다, 김대중이 ‘빨갱이에 전라도’였기에 전라도 사람들이 우리사회에서 더 가혹한 차별을 받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니 전라도사람들은 자신들이 우리사회에서 받는 차별이 가혹할수록 더더욱 김대중에 매달려왔고, 그럴수록 전라도와 김대중은 우리사회에서 더욱 더 따돌림을 받아야 했다. 전라도와 김대중은 이미 한국현대사에서 ‘괜히 밉고, 싫은 종자들’이었으며, 대한민국 안에서 또 다른 나라가 되어 갔다. 전라도사람의 천형을 안고 있는 김대중은 무슨 짓을 다해서도 결코 경상도를 이길 수 없었고, 결국 충청도 김종필과 정책연합을 해서야만 드디어 40년 한을 풀고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김대중은 평생 학벌 없는 고졸 출신의 천형을 지고 살았다. 우리사회에서 제법 큰 소리쯤 칠 수 있기 위해 갖춰야할 기본조건 중에 출생의 비밀로서 TK(대구-경북)가 있다면, 학력으로는 KS(경기고-서울대)가 있다. 그가 정치를 하려하든, 기업을 하려하든, 법조계의 주요인사가 되려하든 TK와 KS는 출세의 기본조건이었다. 하물며 대통령이 되려하는 자가 TK는 물론 KS와도 관계가 없다면 그는 일찌감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런데 김대중은 TK는커녕 ‘전라도사람’에다가, KS는커녕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상고출신이었다. 우리사회에 ‘내로라’하는 점잖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경력의 대통령 밑에서 국민으로 산다는 것은 굴욕이요, 치욕이다. 정치인 김대중은 육사도, 경기고도, 서울대도 아닌 천출로서 학력중심의 여론주도층들의 멸시와 적대를 항상 당해야 했다. ‘못 배웠다’는 손가락질을 이겨내기 위해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책을 읽었고, 항상 공부했지만, 한번 학력이 영원한 이름표로 따라붙는 우리사회에서 그런 노력은 더욱 경멸을 당했다. 사실 1924년생인 그의 연령대에서 고졸은 대단한 고학력이다. 당시에 대학까지 나왔다는 것은 서민들은 생각할 수도 없는 큰 특혜였다. 1934년생인 우리 어머니는 초등학교를 중퇴하셨고, 60세가 넘어서도 몇 번씩이나 검정고시를 생각해 보기까지 하셨다. 가난했던 장인의 강압으로 끝내 대학을 포기해야했던 아내는 4녀 끝에 귀한 아들로 태어난 덕분에 신학대학원까지(?) 졸업한 나보다 열 배는 똑똑하지만, 고졸 학력 때문에 지금도 사이버대학의 미련을 갖고 산다. 그 시대에 사실상 저학력도 아닌 그가 우리사회에 지도층인물이 되기 위해 치려야했던 학벌의 검증은 그만큼 가혹한 것이었다. 이처럼 김대중은 우리 어머니시대를 대표하여 수모를 겪었다.
바로 이러한 한국현대사, 한국사회, 우리시대를 잘 알기에 이 모든 모순들을 조금이라도 절감하는 사람들에게 김대중은 민주화의 코드였고, 시대발전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1997년 마침내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우리는 죽도록 기뻤던 것이다. 그의 의미를 조금 알았기에 민주투사도 아닌 내게도 김대중은 특별한 기억으로 새겨져 있다. 3당 야합의 배신 속에 외톨이로 출마한 92년 대선을 앞둔 서울교대 유세현장의 김대중을 멀찌감치에서 바라보았고, “이번에는 바꿉시다”는 구호를 들었을 때 나는 마구 눈물이 솟았다. 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찍기 위해’ 첫 아이 몸조리 위해 친정에 가 있던 아내는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귀가했고, 관절염으로 걷지도 못하던 어머니는 업혀서까지 투표장에 가서 기도하며 한 표를 찍었다. 성서한국대회로 분주했던 나는 이번에 일어나시기만 하면 동료들과 함께 꼭 직접 찾아뵙겠다는 소망을 품고 있었는데, 기다려지지 않은 시간이 한없이 아쉽기만 하다.
Ⅱ. 김대중은 참된 신앙인이다. 자신있게 나는 그가 참된 신앙인이라고 믿는다. 그에게 만약 참된 신앙의 힘이 없었다면 그런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는 가톨릭 신자다. 그러나 그저 종교 난에 ‘가톨릭’을 적어 넣을 수 있는 정도의 형식적 신앙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공사석의 많은 기회를 통해 자신의 삶과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 신앙으로부터 근거한 것임을 밝히고 있고, 그 말은 그의 일관된 진정성을 통해 충분히 증명되었다. 가장 무섭게 그를 죽이려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용서하고 사면할 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값싼 정치적 제스처라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그는 신앙의 힘으로 이미 용서했고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민족화해의 기본 틀인 햇볕정책이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0, 21)는 말씀을 믿는 믿음과 확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햇볕정책의 공동입안자인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피스메이커, 임동원’ 참조). 지난 6월 25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요즘 밤에 잘 때 내 아내와 손을 잡고 기도를 한다. '예수님!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민생경제와 남북관계가 모두 위기입니다. 이제 나는 늙었습니다. 힘도 없습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루아침에 이렇게 됐습니다. 걱정이 많지만 저는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힘이 있으니 제가 최대한 일할 수 있도록 저희 내외를 도와주십시오.' (뒤는 생략)” 우리 시대에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유명목사, 부흥사들이 수없이 많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참 신앙인이 얼마나 될까? 그는 그리스도의 참된 길을 믿었기에 그렇게 살았다.
그런 면에서 조금 앞서 간 노무현은 김대중의 정치적 자식임이 틀림없었다. 그 역시 부산상고 출신으로 못 배운(?) 천형을 안고 살아왔으며, ‘사람은 똑똑한 데 하필 전라도 당으로 나와서’ 고향에서조차 번번이 낙선해야 했다. 결국 경상도 사람인데도 전라도의 지지를 안고 당선되는 감동을 이루었지만, 경상도로부터는 끝끝내 ‘배신자’로 남아야 했다. 또한 사상적 진보와는 거리가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임 내내 ‘좌빨’(좌파-빨갱이)의 낙인을 벗지 못했다. 결국 다시 야만의 시대로 돌아온 우리 앞에서 김대중의 자식인 노무현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고, 젊은 아들을 먼저 앞세워 가슴에 묻은 늙은 아버지도 겨우 석 달을 넘기지 못하고 아들 뒤를 이은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정말 이명박과 그의 정신적 배후인 김진홍을 용서하기 힘들다. 그러나 김대중이 전두환을 용서했듯이 나도 이명박의 회심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려 한다. 이명박의 실패를 그냥 두기에는 우리민족의 손실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회심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자. 그리고 뉴라이트를 반드시 이겨내자. 지난 10년의 성과를 이어 남과 북이 화해와 평화의 공동번영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버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아까운 시간들을 욕설과 저주, 전쟁의 위협 속에 보내야하는 지금 현실을 생각하고, 그 분이 할 수 있었던 남은 일들을 생각하면 김대중을 이대로 보내는 게 너무나 안타깝다. 운다고 돌아올 수 없는 김대중을 벌써 보낸다는 게 너무 한스럽다. 흔히 ‘고인의 유지를 받들자’는 말을 하지만, 우리는 정말 김대중의 못다한 일을 해야 한다. 특히 죽음을 통해 끊어졌던 남북의 관계회복으로 발전할 수 있는 이 기회를 잘 살려낼 수 있도록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 뿐 아니라, 우리가 정신차려 노력해야 한다. 어머니가 김구 선생님과 한 때를 겹쳐 사셨다는 게 가끔 신화처럼 느껴졌다. 이젠 내가 한 때나마 큰 인물 김대중과 함께 겹쳐 살았다는 사실이 자부심으로 남을 것 같다. 그러나 그를 쉽게 잊기에는 큰 인물 김대중이 너무 아깝고, 그의 역할이 너무 그리운 시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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