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코라레 운동 창시, 끼아라 루빅

2009. 9. 2. 15:45정치와 사회

포콜라레운동 창설자 끼아라 루빅 회장은 1997년 10월 23일, 전세계 회원들에게 보낸 한 메시지에서 "이 달(18일)에 우리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Saint Therese de Lisieux)를 교회박사로 엄숙히 선포하시는것을 보았다."고 전제하고 "일부 사람들은 이 성녀가 대학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으며, 그녀가 남긴 글에는 '하느님에 관한 것을 학문적으로 다룬 내용'이 없고, 성녀의 사고방식이 어이없이 단순하다면서 교회박사 선포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젊은박사' 칭호를 붙이자는 이야기도 있었다."는 점을 상기 시켰다.
그러나 교회 는 항상 지혜를 지니고 있으므로 예수 아기의 데레사(Therese de l' enfant-Jesus)성녀를 교회의 서른 세 번째 박사로 결정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교황께서 담화를 통해 이 영혼이 지녔던 예외적인 점을 부각시켰다면서 데레사성녀가 "나의 어머니인 교회 안에서, 나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라고 깨달은 사실에서도 그녀의 위대함을 보셨다고 지적한 끼아라는 자신 역시 성녀가 짧은 생애를 통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랑의 행위를 한데 대한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도 그러했다고 말해준다.

한편 이보다 앞서 1921년 8월 14일 교황 베네딕도 15세(재임 1914-1922)는 이 `하느님의 여종'의 영웅적인 덕행을 반포하는 자리에서 아주 명백하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천명한 바 있다.
"교회박사라는 영광이 여성에게 주어지는 특권을 입은 수도회의 후예였던 데레사는 그 자신이 뛰어난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노력으로 엄청난 학문을 보유하였기에 진정한 구원의 길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박사라는 영광이 주어지는특권을 입은 수도회'는 아빌라의 데레사(1515-1582)성녀가 개혁한 `맨발의 가르멜'을 일컫는다. 아빌라의 데레사가 시에나의 가타리나(1347?-1380)성녀와 함께 정식으로 `교회박사', 즉 `교회학자'로 선포된 것은 그보다 훨씬 후인 1970년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서였지만, 그 전에도 로마에서는 이미 대 데레사의 학문적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이 작은 데레사는 아빌라의 데레사 이름을 땄을 뿐만 아니라 이 성녀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아홉 살 때 이미 리지외의 가르멜을 동경했고, 아이의 은밀한 소망을 전혀 모르는 원장 수녀가 데레사에게 "가르멜에서는 `예수 아기의 데레사'라는 이름을 갖게 될 것이에요." 하고 말해주었던 것이다. 결핵을 앓으면서 24년 아홉달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감하기까지, 예수 아기의 데레사는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특징짓는 영혼의 태도, 즉 `작은 길' 이라고 하는 영성의 길을 걸었다. 스스로 `작은 꽃'이기를 원한 데레사는 그래서 또한 `소화 데레사'라고도 불린다. 사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의 어린 딸'(자서전 A) 데레사에게 놀라운 일을 하셨고, 그 놀라운 일들은 바로 데레사의 가장 작은 모습에서 드러났다. 작은 것, 하찮게 보일지라도 그 작은 일은 하느님 앞에서 결코 작지가 않다는 사실을 이 성녀는 온몸으로, 한 생애를 다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적인 장점들이 때로는 영혼을 교만하게 만들 수 있다는 약점을 알고 있었기에, 데레사는 결코 자신의 장점에 의지하지 않았다. 데레사는 또 실수를 하드라도 낙담하지 말라고 깨우쳐 주었다. "어린아이들이 때로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그 실수가 끼치는 해악은 그리 큰 것이 아니질 않습니까?"라고 하면서 데레사는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또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면서 오직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임종을 두 달 가까이 앞둔 1897년 7월 3일, 병상을 지키던 둘째언니 예수의 아녜스 수녀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후 내 잘못을 스스로 책망하면서 실망을 느끼게 된다"고 고백하자 데레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결코 실망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무슨 잘못을 저질러 슬프게 되면, 그것은 제가 불충실한 탓인줄을 잘 압니다. 하지만 제가, 거기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아니, 저는 급히 달려가서 주님께 아룁니다. `주님, 이 슬픈 기분은 마땅히 제가 받을 것인줄을 모르질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사랑으로 보내주신 시련으로서 당신께 바치게 해 주십시오. 제가 한 행동에 대해서 저는 어디까지나 기뻐합니다.' 이렇게 주님께 아뢴답니다, 어머니."

데레사가 둘째 언니 폴리나(뽈리느 : Pauline)를 `어머니'라고 부른 것은 네 살반때 어머니 마리 젤리 게랭(Marie Zelie Guerin, 1831-1877)부인이 세상을 떠나면서부터였다. 네 살 손위 언니 마리 루이즈(Marie Louise)를 어머니로 삼을 때 자기는 폴리나를 어머니로 정하게 됐던 것이고 그 후 리지외의 가르멜에서 1893 년 부터 1896년 까지 원장으로 모셨기 때문에 수녀원에서도 어머니였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버림받으신 예수님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일깨워 준 끼아라의 묵상을 떠올리게 된다.

"버림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공허감을 채워 주시고, 모든 암흑을 비춰 주시고, 모든 외로움에 함께해 주시고, 모든 고통을 없애 주시고, 모든 죄를 지워 주셨음을 나는 세상 앞에서 증거하고자 한다."

"...비난이나 질책, 판단이나 비방 등이 우리에게 해당될 수 없습니다. 이런 것 들이 누구를 해칠 수 있을까요? 아무도 해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것들은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에게 좋게 이야기하는 칭찬도 우리를 자만하게 하지 못합니다. 누구를 자만하게 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의나 사랑의 의무 때문이 아닌 이상, 자신을 변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칭찬을 들으면서 자신을 낮추기 위한 말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10월 1일이면 전세계 가톨릭교회는 리지외의 이 작은 성녀를 기리는「포교사업의 수호자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동정 대축일」을 지낸다. 수녀원에 들어가기전 로마를 순례한 것 이외에는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고, 그후 9년동안 봉쇄수녀원 울타리 안에서만 생활하다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만 이 `작은 성녀'가 어째서 `포교사업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고 있는 것일까? 이는 한 평생 다른 영혼을 위해 보속하는 삶을 살았기에 교황 비오 12세(재임 1939-1958)가 그녀를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인과 더불어 `포교사업의 수호자'로 선포했기 때문이다. 어디 그 뿐인가. 1944년 5월 3일에는 잔다르크(요안나) 성녀에 이어 소화데레사를 프랑스 제2의 수호자로 선포했던 것이니, 이로써 `한알의모래'라고 부른 데레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성녀가 되었다.

성녀의 축일은 10월 1일이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정확하게 1897년 9월 30일 저녁 7시 20분이었다.
9월 30일 목요일, 죽음의 그날. 둘째 언니 예수의 아녜스 수녀는 아침미사 동안 곁에 있었는데, 데레사는 한마 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힘이 진해서, 허덕이며 호흡이 곤란했다. 그 고통이 비길데 없다는 것을 언니도 알아보았다. 데레사는 잠시 손을 모아 침대 바로 맞은 편에 두었던 성모상을 바라보면서, "아아, 내가 얼마나 열심히 성모님께 기도했 던가! 그렇건만 약간의 위로조차 없고, 순전히 임종의 고통뿐입니다.."하는 것이 었다.

데레사는 온종일 쉴새없이 계속 고통을 겪고 있었다. 기운이 다 빠진 듯이 보이 더니, 갑자기 일어나 침대위에 앉는데, 주위 사람들이 놀랄 수밖에. "어머니, 보십시오. 오늘은 이렇게 기운이 납니다! 죽을 것 같지도 않아요. 어쩌면 몇 달 더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이제 제가 죽는다고는 믿지 않겠습니다. 그저 고생한다 는 것만 믿겠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보다 더하겠지요. 괜찮습니다. 더욱 좋아요."

"아아, 하느님!...저는 사랑합니다...당신을!....좋으신 성모님, 오셔서 저를 도와 주십시오. 만약 이것이 임종이라면, 죽음은 또 어떻겠습니까?!!..아아, 어머니, 고통의 잔은 가득 찼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저를 버리지 않으실 겁니다....주님은 저를 버리신 적은 여태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예, 하느님, 원하시는 대로 다 하소서. 하지만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언니, 언니! 저를 위해 빌어주세요! ...아아, 하느님! 하느님! 그토록 좋으신 분이시건만! 아! 정말 당신은 좋으신 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후 3시쯤 데레사는 팔을 십자형으로 벌렸다. 원장 수녀가 무릎 위에, 가르멜 산의 성모님 성화를 얹어주자, 그걸 잠간 바라보더니, "아아, 어머니, 저를 성모님께 바쳐 주십시오. 잘 죽도록 준비를 갖춰 주십시오"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원장이, "자매님은 항상 덕을 실천했으니, 준비가 다 돼 있어요" 하자, 데레사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겸손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말입니다. 저는 진리만을 찾았다고 생각합니다....그렇습니다. 저는 마음의 겸손을 깨쳤습니다!" 그러더니 다시 되풀이해서 말하기를, "제가 고생하고 싶어했다고 쓴 것은 다...아아! 그 건 다 정말니다!" 확신을 가지고 데레사는, "저는 `사랑'에 몸바친 것을 뉘우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잠시 후, "아아, 아닙니다. 저는 사랑에 몸바친 것을 뉘우치지 않습니다.되려..."하고는 말문을 닫았다가, 한참 후 다시, "이렇게까지 괴로워할 수 있을 줄이야 생각도 못했습니다. 결코! 결코! 이건 제가, 영혼을 구하고 싶은 열망이 간절했기에 그런가 봅니다.. 그 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고통중에서 데레사는,"저는 숨도 못 쉬겠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후 "저는 아직도 더 고생하고 싶어요." "저의, 가장 작은 원의까지도 다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니, 사랑으로 죽는다는, 제일 큰 소망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임종의 고통은 그로부터 두시간도 더 계속되었다.

예수 아기와 거룩한 얼굴의 데레사 성녀(Saint Therese de I'enfant-Jesus et de la face)는 1873년 1월 2일 프랑스 파리에서 서쪽으로 200㎞ 떨어진 알랑쏭에서 루이 마르텡(Louis Martin, 1823-1894)과 젤리 게랭의 아홉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비교적 유능한 시계공에 보석상이었던 아버지 루이 요셉 스타니슬라스 마르텡은 데레사가 태어날 때는 이미 현업에서 물러난 상태였다. 서른다섯 살에 스물일곱 살의 착실한 공예사 젤리를 만나 결혼했는데, 결혼 전 1845년 9월에 그는 수도자가 되려고 알프스산 꼭대기의 성 베르나르도 수도원을 찾아갔으나 라틴어 공부를 다 마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고, 젤리 역시 수녀가 되려고 성 바오로 빈첸시오 수녀원을 찾았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입회하지 못했다. 이 때 젤리 게랭은 "하느님, 저는 언니처럼 당신의 정배가 될 자격이 없은 즉 당신의 거룩한 뜻을 따라 결혼하겠습니다. 그러니 주님, 저에게 자녀를 많이 낳게 해주셔서 그들을 모두 당신께 바치게 해 주십시오"라며 그분께 매달렸다. 이들 두 사람은 1858년 7월 13일 알랑쏭성당에서 혼인성사를 받았다. 이들의 결혼생활은 마치 오 누이처럼 다정했다고 한다. 데레사의 가족들은 교회의 성사 생활에 열심했고, 특히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일에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 이러한 성가정의 화목한 분위기는 데레사의 성격과 신앙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데레사는 자서전 `한 영혼의 이야기'에서, 가르멜에 들어가기까지의 자신의 영혼의 내력을 세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첫 시기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의 행복했던 어린 아기 시절이고, 둘째 시기는 그녀의 자서전에서 `시련의 겨울' 이라고 묘사한 시기, 즉 리지외로 이사한 후 외롭고 쓸쓸한 가운데서 혹독한 세심증을 경험한 8년(1877-1885) 동안의 시기를 말하며, 그 마지막은 1886년에서 1888년 까지의 깊은 내적 회심의 경험을 통해 수녀원에 입회하게 되는 시기를 가르킨다.

"사랑하는 원장 수녀님, 두 가지로 저의 어머니가 되시는 당신께 제 영혼의 내력을 숨김없이 말씀드립니다. 원장님이 이것을 하라고 제게 말씀하시던 그날 저는 이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게 되면 마음이 산란해질 것같이 생각되었습니다만, 그 후 예수님께서는 그저 순명만 하면 당신의 뜻에 맞으리라는 것을 때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럴뿐더러, 저는 길이 부르고 또 불러야 할 노래, 즉 `주님의 자비 하심'을 찬양하기 시작한다는 이 한가지 일만 할 작정입니다...."

1895년 1월 예수 아기의 데레사 수녀는 자신의 둘째 언니이자 리지외의 가르멜 수녀원장으로 있던 예수의 아녜스 수녀에게 보낼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쓸 당시 데레사는 마르탱 부인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엄마'로 선택했던 이 언니 폴리나 밑에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다.
데레사가 자신의 삶의 내력을 쓰게 된 동기를 예수의 아녜스 수녀가 1910년 8월 성녀의 시복ㆍ시성을 위한 법정에 출두해서 증언한 기록이 남아있다. 즉 1895년 겨울 저녁, 데레사가 임종하기 2년 반 전의 일로서, 아녜스 수녀는 마리아와 데레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데레사는 언니들에게 자신의 어릴적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다. 이 때 마리아 수녀가, "원장님, 우리가 그 말을 전부 글로 써서 보관해 두지 않는다면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에요. 만일 원장님이 예수 아기의 데레사 자매에게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어린시절의 추억을 쓰게 하시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되어요."라고 말했다.
원장 수녀는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인데요."라며 응수하고 나서, 그 말이 약간 농담이려니 생각하고 웃고 있던 데레사 자매를 보고, "내가 자매에게 명령하는 것이니, 어린 시절의 추억을 모두 기록하세요." 하고 말했다. 하느님의 여종 데레사는 그 당시 아녜스 수녀가 원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순명으로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데레사는 자유시간에 써서 1896년 1월 20일 아녜스 영명축일 전날 저녁 기도시간이 되어 아녜스 옆을 지나면서 그 공책을 전해 주었다.
성녀는 자서전을 세권 두고 떠났는데, 첫째는 위에서 말한 대로 폴리나 언니에게, 둘째는 마리아 언니에게, 그리고 셋째는 공사가의 마리아 원장 수녀께 각각 드렸던 것이다. 이 조각들은 성녀의 1주기에 맞춰서 <한 영혼의 이야기>란 이름으로 성 바오로 출판사에서 처음 세상에 소개했고, 그 후 1956년 <예수 아기의 성녀데레사의 자서전>이라는 제목으로 리지외에서 출판되었다.
이 밖에도 성녀는 편지와 시와 묵상, 그리고 연극 극본까지도 두고 갔는데, 이러한 저작들은 우리가 그를 아는데 필요한 1차적이고 핵심적인 원전임에 틀림없다.

"인생은 풀과 같은 것,

들에 핀 꽃처럼 한 번 피었다가도

스치는 바람결에도 이내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 수 없는 것,

그러나 아훼의 사랑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처음부터 영원히 한결같고

그의 정의는 후손 대대에 미치리라."

데레사의 부모님은 아홉 자녀를 두었는데, 9남매 모두 노르망디주 알랑쏭(Alencon)에서 태어났다.
첫째가 마리 루이즈, 1860년 2월 22일생이고 둘째는 마리 폴리나, 1861년 9월 7일생이며 셋째 마리 레오니가 1863년 6월 3일생, 그리고 넷째 마리 엘레느와 다섯째 마리 요셉 루이, 여섯째 요셉 요한세자가 1864년과 66년, 67년에 태어났으나 각각 네 살 반과 5개월,9개월만에 숨지고 일곱째 마리 셀리나가 1869년 4월 태어났으며 여덟째 마리 멜라니 데레사는 1870년에 태어났으나 3개월만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리 프랑수와즈 테레즈 마르탱(Marie Francoise There`se Martin)이 1873년에 태어났던 것이다.
다섯째와 여섯째는 아들이었는데, 그들 부모는 아들이 태어날 때마다 사제로 봉헌하고 싶었지만 하느님께서는 둘 다 일찍 데려가셨고, 다른 두 딸도 역시 아기 때 떠났으니 살아 남은 아이는 딸 다섯이었다. 딸들은 모두 수녀가 되었다. 그 중 셋은 리지외의 가르멜 (Carmel de Lisieux)의 수녀가 되었다.
아버지 마르탱씨는 데레사를 특별히 사랑했는데, 그러한 사랑이 아이를 약간이라도 비뚤어지게 하지는 않았느냐고, `악마의 대변자' 가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시성소송 청원자에 대칭이 되는 `신앙 변호인' 즉 검사의 집요한 태도가 때로는 소송에 반대한다는 인상을 주는 까닭에 비공식적으로 그를 가리켜 `악마의 대변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1910년 8월, 신앙변호인으로 나선 피에르 테오필 뒤보스크 신부의 물음에 아녜스 수녀가 증언한 대목을 보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이가 가정 어리고 영리하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특별히 사랑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버릇없이 만들지는 않으셨습니다. 아이가 세 살 되던 해의 어느날, 버릇없는 말로 아버지께 "아빠가 이리로 와요!" 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아이를 꾸짖어,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아이에겐 단 한 번의 꾸중으로 충분했으므로 그 이후부터 아이는 늘 대단히 공손했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언니들 중에서도 특별히 그의 어머니 노릇을 하게된 폴리나, 즉 아녜스 수녀는, 그 아이가 한 번도 불순종한 기억이 없다고 증언했다.

모든 일에 허락을 청해 왔습니다. 한가지 좋은 실례로, 아버지가 그 아이에게 산보를 가자고 하시면, 아이는 `폴리나에게 가서 물어보고 올께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산보를 가자고 계속 종용하시더라도 만일 내가 산보 갈 허락을 하지 않으면, 아이는 그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가끔, 그 아이는 아버지가 자기를 데리고 산보하러 나가시는 것이 어떠한 기쁨이 되는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울먹인 때도 있었습니다."

데레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가족들을 매우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성인들을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어요."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같은 가족애에 대한 집착이 `하느님 사랑' 과 대립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곤란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아버지와 언니들에게 오랫동안 기대어 살아왔던 의존상태로부터 그가 어떻게 풀려나게 되었는지, 이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데레사는 생후 몇 개월 동안 생명에 위태로울만큼 심한 위장장애로 고생했다.
이것은 신체발육 뿐만 아니라 아이의 성격형성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아기는 세상과의 첫 접촉을 입 또는 말로써 갖게 되는데, 데레사는 이것이 별로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런 아이들은 감수성이 훨씬 더 예민하게 마련인데, 데레사는 유년기에 극단적인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1877년 8월 27일, 통증이 대단한 골수암을 앓던 어머니의 죽음은 그 때 네 살 반이었던 어린 데레사의 마음에 크나큰 심리적 충격을 일으키게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좋았던 내 성격이 일변했어요. 그렇게도 활발하고, 그렇게도 마음에 있는 것을 잘 드러내던 내가 수줍고 조요한 아이가 되었고, 극도로 예민해졌어요. 누가 조금 쳐다보기만 해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서전 A)

어머니를 여의고 지나치게 애정의 갈증을 느끼게 된 데레사는 가족의 분위기 속에 묻히는 것이 편안했고, 그 속에서 아버지와 언니들의 사랑에 감싸여 있는 것이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아버지 마르탱씨는 딸아이들을 외가 가까이서 지내게 하려고 1877년 11월 15일 리지외(Lisieux)로 옮겨 살았다. 데레사의 외삼촌인 게랭씨는 이곳 성바오로 광장 곁에서 약방을 내고 있었는데, 그들 부부에게는 아이가 둘 있었다. 아홉 살짜리 요안나와 일곱 살의 마리아였는데, 마리아는 나중에 리지외의 가르멜에서 데레사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 다음 날부터 마르탱씨 가족은 뷔소네에서 살았다. 뷔소네는 리지외에 있는 그들의 집을 말한다.

마르탱씨의 맏이와 둘째 딸은 르망의 방문회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았고, 아래로 세 딸은 베네딕도 수녀원의 학교 기숙사에서 공부했는데, 데레사는 셀리나 언니가 함께 있었기 때문에 기숙사 생활을 해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셀리나가 학업을 마치고 기숙사를 떠나게 되자 데레사는 더 이상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언니없이 홀로 그곳에 머물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기질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곧 이어 데레사는 두 번째 시련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때의 충격은 정신질환의 형태로 나타났다. 어느 날 데레사가 폴리나 언니에게 가르멜에 들어가고 싶다는 소망을 고백하자, 폴리나는 자기도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서 "그렇지만 데레사가 나와 함께 가기는 아직 어리니까 네가 길을 떠날만큼 클 때를 언니가 기다려 줄께."하고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폴리나는 어린 아이에게 한 이 약속을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어느 날 데레사는 폴리나가 곧 가르멜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 게 되었다. 이 새로운 애정박탈은 데레사를 완전히 혼란속으로 몰아넣었다. "저는 가르멜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만, 폴리나가 저를 떠나 수녀원에 간다는 것과 그가 저를 기다리지 않으리라는 것, 두 번째 엄마를 잃어 버리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의 제 마음의 근심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서전 A)

이 때문에 데레사는 자신의 표현대로 `이상한 병' 을 앓게 되었는데, 애정박탈로 인한 일종의 신경증이었다. 이 병이 겉을 드러난 것은 폴리나가 `예수의 아녜스'수녀로 착복 하던 날이었다. 데레사는 이날 예식에 참석했고, 수도복을 입은 폴리나가 데레사를 안아 주기까지 했지만 결국에는 아픈 어린이를 업고 와야 했고 곧바로 침대에 눕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 시련을 겪는 동안 데레사는 자기의 혼란상태를 완전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벽에다 자기 머리를 짓찧었고, 얼굴이 일그러진 유령을 보기도 했다. 데레사로서는 자기 자신을 더 이상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괴로운 일이었다.

"제가 걸린 병은, 폴리나가 첫 번째로 가르멜에 들어간 데 성이 나 마귀의 장난이었던 것이 분명했습니다. 마귀는 장차 우리 집안으로부터 받을 손해에 대해서 제게 앙갚음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인자하신 하늘의 모후께서 가날픈 당신 작은 꽃을 지키고 계시고 하늘의 옥좌에서 그 꽃을 내려다 보고 웃으시며, 그 꽃이 아주 부러지려는 그 순간에 폭풍우를 멎게하시려고 등대하고 계신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자서전 A)

가족들은 데레사가 앓고 있는 병을 이해할 수 없었고, 병세가 몹시 악화되자 아버지는 파리에 있는 `승리의 성모' 성당에 미사를 청하는 편지를 보내 9일기도를 시작한다. 그 9일 미사 동안의 어떤 주일, 1883년의 성령강림 대축일에 `미소의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던 중 데레사는 성모께서 미소지으시면서 나타나신 것 을 뵐 수 있었다.

"....성모님의 지극히 아름다운 미소였습니다. 그때 제 모든 근심과 괴로움이 사라져 버리고 두줄기 굵은 눈물이 눈시울을 적시며 뺨으로 고요히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수한 즐거움에서 우러나는 눈물이었습니다. `아! 동정녀 마리아께서 저보고 웃으셨다.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제가 성모상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것을 보고 마리아는 `데레사가 나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과연 소화는 다시 살아나, 그를 부드럽게 품어주던 부드러운 `태양' 이 영원히 그에게 은혜를 내려주셨습니다. 한꺼번에 하시지 않고 부드럽게 즐겁게 꽃을 일으켜 세우시고 강하게 만들어서 5년 후에는 기름진 가르멜산 위에서 활짝피도록 해 주셨습니다.."(자서전 A)

이렇게 해서 이 병이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고 한다. 이때 데레사가 `마리아' 라고 적은 이는 큰언니 마리 루이즈인데, 그도 또한 가르멜에 입회하게 된다. 폴리나 언니가 준 `감실 안에 계신 하느님의 작은 꽃'이란 상본을 즐겨 들여다 보던 데레사는 자기도 그분의 작은 꽃이 되고자 에수님께 자신을 바치고 싶었다 고 자서전에서 쓰고 있다. 이 글을 쓸 때는 이미 수도생활을 7년 동안 하고 있었는데, 그는 `큰 성녀' 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 소원은 망령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전는, 항상 `큰 성녀'가 되겠다는 한결같이 대담한 자신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아무 공로도 없으니까, 제 공로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오직 덕과 거룩함 바로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 바라는 것입니다. 홀로 하느님께서 제 약한 노력을 만족히 여기시어 저를 당신께까지 끌어올리시고, 저를 당신 공로로 덮어주셔서 성녀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성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것도 큰 성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자기 주변에서 보고 느끼게 되는 현상과는 정반대의 마음가짐이었다. 사람들은 하느님과 흥정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사의 은혜를 많이 받아놓았고 공로도 많이 쌓았으니 영원하신 아버지 앞에 나아가 심판을 받게 될 때, 하느님께서 자기들의 업적을 보시고 자기들을 위해 마련해 두신 자리를 주실 것이라고 믿거나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데레사는 달랐다.
"나는 내 공로를 내세우지 않겠습니다. 내놓을 것이 있다면 오직 주님의 공로 뿐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내세우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좋으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날 사랑하시도록 내어드릴 뿐입니다." 이 말에 덧붙이기를, "이렇게 해서 아주 많이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데레사가 가르치는 내용의 핵심이라고, 가르멜 영성의 대가로서 프랑스 가르멜 회원이었던 예수 아기의 마리 외젠 신부는 말한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어머니를 대신한 폴리나 언니마저 봉쇄 수도원으로 들어가 버리자 애정박탈감으로 인한 일종의 신경증세로 고생한 데레사는 동정 성모의 미소를 통해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은총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3년 후 큰언니 마리아가 가르멜에 들어갔을 때 데레사는 "아직도 세심증에 사로잡혀 있다."고 자서전에 쓰고 있다. 자신의 마음을 언니에게 말할 수 없게 되자 그는 하늘 쪽으로 몸을 돌이켰다.
"저는 저보다 한 걸음 앞서 천국에 올라간 네 명의 작은 천사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때 이미 세상을 떠난 오빠 둘과 언니 둘을 일컫는 말이다.
"그 무죄한 영혼들은 겁이나 불안을 조금도 몰랐으니까, 세상에서 괴로워하는 자신들의 가엾은 작은 동생을
불쌍히 여기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저는 집안의 막내둥이인 까닭에 언제나 언니들의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해왔고, 그들도 세상에 살아 있었더라면 똑같은 애정을 저에게 보여주었으리라는 것을 환기시키면서,어린애 모양 천진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천국에 들어갔다고 해서 저를 잊을 리가 없으며, 도리어 그들은 하느님의 보물집에서 은혜를얻어낼 수 있는 처지에 있으니까 저를 위해서 거기서 평화를 집어주고, 이리해서천국에서도 또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자서전 A)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영혼들과의 통공, 이는 그리스도교의 전통관습이기도하다. "그리스도 평화 속에 고이 잠들어 있는 형제들과 여정의 형제들 사이의 결합이 죽음으로서 중단되지 않고, 오히려 영신적 보화와 교류로 말미암아 더욱 강해진다는 것이 교회의 변함없는 신앙"이라고, 공의회 문헌은 기록하고 있다.
(교회헌장 49 : 가톨릭 교회 교리서 955) 그러니까 지상에서 순례자로 살아가는 이들과 남은 정화과정을 거치고 있는 죽은 이들 그리고 하늘나라에 도달한 복된 이들 모두가 일치해서 오직 하나의 교회를 이룬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하늘 나라에 도달한 이들께 전구로써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도미니코(1170-1221) 성인이 임종 때 형제들에게 남긴 유언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힘을 준다.

"울지들 마시오. 죽은 후에 나는 여러분에게 더 유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을 때보다 더 효과적으로 여러분을 도울 수 있을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그 생애를 조명하고 있는 작은 꽃 예수 아기의 데레사 성녀도 죽음 직전에 언니 수녀에게 "저는 하늘로 올라가서 땅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가 천국 낙원에 든 것이 확실한 영혼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잠시, 데레사 성녀의 부모에 관한 증언을 들어볼 필요가 있겠다. 셀리나 마르탱, 즉 `성녀 데레사의 즈느비에브'란 이름으로 서원한 이 수녀가 1910년9월 14일에서 28일 까지 증언한 내용인데, 그녀가 데레사와 떨어져 지낸 것은 데레사가 가르멜에 들어간 1888년 4월부터 셀리나 자신이 가르멜에 들어간 1894년 9월 까지 꼭 6년간 뿐이었다고 한다. 이 기간을 제외하고는 집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지냈고, 1894년부터 데레사가 임종할 때까지는 가르멜에서 함께 살았던 것이다. 이 수녀는 특히 가르멜에 들어갈 때 카메라를 가지고 감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다른 어떤 성인들한테서보다도 데레사에 대해서는 더욱더 확실한 사진을보게 해 준 공로자인 것이다.

"영원한 삶은 우리 부모님의 지배적인 관심사였습니다. 어머니께서 한 번은 폴리나에게 `나는 천국을 위해 기르고자 많은 자녀들을 두고 싶었다.'(1877. 3. 4.)라는 편지를 쓰셨습니다. 나의 어린 오빠, 언니들이 숨질 때마다, 어머니의 신앙정신은 자신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고, 이들 어린 천사들이 천국에 있다는 생각으로 위로를 받게 해주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마르탱씨 부인을 가엾게 볼 필요가 없어요. 그 부인은 자녀들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하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증언한 셀리나는 또 "저희 부모님은 매일 미사에 나가셔서, 가능한 한 자주 성체를 모셨고, 두 분 다 사순절 동안 내내 단식과 금육재를 지키셨습니다."라고 했다. 아버지는 이웃 사람들에게 지극히 친절했고, 이웃의 모든 잘못에 대해서는 변명을 해주었으며, 무엇보다도 사제들에게 큰 존경심을 갖고 계셨다고 덧붙였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성인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훌륭한 부모님 슬하에서 성녀가 태어난 것이라고 한다면, 이들 가정을 지나치게 영웅시하는 것이 될까?

죽은 오빠와 언니들에게 청한 데레사의 기도는 지체없이 응답을 받았다. 그의 마음에는 곧 평화의 달콤한 물결이 넘쳤고, 세상 사람들뿐만아니라 천국에 있는이들로 부터도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데레사는 알 게 되었다. "그때부터 오빠와 언니들에 대한 제 신심이 커졌고, 그들과 더불어 자주 대화를 하고 귀양살이의 슬픔과 오래지 않아 저도 그들을 따라 영원한 본향에 가고 싶은 제 소원을그들에게 말하기를 좋아했습니다."(자서A) 세상살이를 `귀양살이'라고 한 것은 19세기 당시의 시각이었고, 데레사가 오늘우리 시대에 살고 있다면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도들의 기쁨과 회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사목헌장1)을 익히 알아보고, 이웃 안에서 천국으로 가는 길을 찾아 나섰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데레사는 이 때, 1886년 성탄날 밤에 기적과도 같은 큰 은총을 입게 되었다. 큰언니 마리아가 가르멜에 들어간 뒤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어쩌다 잠시라도 정원을 손질하고, 또는 셀리나 언니가 없을 적에는 저녁에 화분을들여놓는 일도 있었는데, 이런 일은 다만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었기에 사람들의 감사를 받을 생각을 말았어야 마땅했다. 그것을 데레사는 잘 알 고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를 못했다. 조그마한 봉사를 받고 셀리나가 좋아하거나 깜짝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면 데레사는 마음이 흡족하지 않아서 눈물을흘리며 불만을 드러내고는 했던 것이다.

데레사는 또 사랑하는 어떤 사람에게 무심코 걱정을 끼치는 일이 있으면 그것을 이겨나가거나 울음을 참지 못하고 막달레나 처럼 울음을 터뜨려서 잘못을 작게 하기는커녕 더 크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잘못에 대한 걱정이 지날 때쯤이면, 이번에는 운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는 하는 것이었다. 옆에서 아무리 타일러도 그는 이 결점을 고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 해, 만 열네살 생일을 앞둔 성탄 날 성삼위의 환희로 비추는 빛나는 밤에, 사랑스러운 갓난아기 예수님께서 데레사 영혼의 어둠을 찬란한 빛으로 바꿔주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12월 25일이었다.

데레사는 자정미사에서 성체를 영하고 `뷔소네'로 일컬어진 리지외의 집에 돌아와서 벽난로 안에 구두를 가지러 갈 생각을 하니 마냥 기쁘기만 했다. 이 옛적 관습은 데레사 형제들이 어렸을 때 그토록이나 그들을 즐겁게했기 때문에 셀리나는 데레사가 식구들 가운데 가장 어리다고 해서 그를 어린애로 대접하느라고 이 관습을 계속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버지도 막내가 그 `요술쟁이 구두'에서 한가지씩 꺼내는 크리스마스 선물마다 깜짝깜짝 놀라며 아이들과 함께 기뻐해 주시고는 했던 것이다.그런데 아버지는 이날따라 몹시 피로한 기색으로 벽난로 안의 데레사 구두를 보시더니 퍽 귀찮은 듯한 말투로, "자, 이제 다행히 금년으로 마감이로구나!" 하시는 것이었다. 데레사는 이제 더 이상 어린애처럼 성탄을 함께 놀아줄 필요가 없을 만큼 자란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그러나 이 때 모자를 벗으려고 이층으로 올라가고 있던 데레사의 눈가엔 금세 물기가 고이는 것이 아닌가. 이층에 있던 셀리나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아이고, 하느님! 또 얼마만한 눈물의 홍수가 쏟아질런지요!" 하는 마음에서 겁이 덜컹 났다. 데레사는 이 순간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셀리나는 제 감수성을 잘 아는 까닭에 제눈에 눈물이 글썽해졌습니다. 셀리나는 그토록 저를 사랑했고, 제 설움을 이해했으니까요."셀리나는 실제로, "오, 데레사야! 내려가지마. 네가 지금 구두를 보는 것이 너무괴로울테니까." 하고 벽난로가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을 말렸던 것이다."그러나 데레사는 이미 이전의 데레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 마음을 바꿔주셨던 것입니다. 눈물을 참고 빨리 층계를 내려가서 울렁거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구두를 집어 아버지 앞에 놓고 여왕과 같이 행복한 태도로 모든 물건을 기쁘게 꺼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기쁜 현실이었으니, 어린데레사는 전에 네 살 반적에 잃어 버렸던 마음의 힘을 다시 찾아 영원히 잃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서전 A)

 

그 해 성탄날 밤이 데레사를 송두리째 바꿔놓았고 그 영혼을 단 한 순간에 성숙시켜 주었다. 훗날 즈느비에브 수녀는 데레사가 그날 밤에 자기 안에서 일어던 변화의 배경을 자세히 설명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데레사의 갑작스런 변화를 직접 목격했고, 또 난생 처음으로 그녀가 그전 같으면 몹시 처량해 했을 실망스러운 상황 중에서도 자신을 완전히 다스리고, 그러면서도 아버지께로 가서 그렇듯 사랑을 가지고 격려해 드리는 것을 보았을 때, 마치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그이후로 다시는 변하는 일이 없이 항구하여, 데레사는 결코 자기의 감수성의 지배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데레사의 침착성에만 국한 된 것이 아 니라, 밖에서도 활짝 피어나 열정과 애덕을 실제로 표현하는데 관심을 쏟게 되었습니다.
데레사는 영혼 구하기를 열망했습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관대하고도 열렬하게 자신을 봉헌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에 하느님께서는 그녀로하여금 지금껏 살아오던 좁은 세계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데레사는 더 이상 소심증이라든가 세심증, 과민성 등에 속박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적으로 성숙했고, 학문에 대한 것을 열렬히 갈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은 벌써 하느님께 바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갈망들이 데레사의 관심을 독점하지는 못했다. 영성서적들이 그녀가 취하는 매일의 양식이 되었는데 특히 `준주 성범'은 외우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스도를 본받자고 하는 주제를 담고 15세기에 토마스 아켐피아가 라틴어로 쓴 이 책(Imitatio Christ ; Imitation of Christ遵主聖範)은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리스도인 생활의 기본 원리를 명백히 밝힌 영신지도서로서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기도 하다.그 후 아버지께 가르멜에 들어가고 싶다는 원의를 말씀드렸을 때 아버지가 울면서 작은 백합의 흰꽃을 따주셨는데, 이 작은 꽃을 `준주성범' 제2편 제7장의 `예수님을 만유위에 사랑해야 하느니라.'라고 적힌 페이지에 넣어두었다면서 자서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아직도 거기에 있습니다만, 꽃줄기가 뿌리 근처에서부러졌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오래지 않아 당신 작은 꽃의 뿌리를 잘라서, 그것이 땅에서 시들 게 버려두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이렇게 제게 보여주시는 것같았습니다." 작은 꽃(小花) 데레사는 이 자서전을 1895년에 썼는데, 그 이듬해부활절 때 병이 들어 다시 그 이듬해 1897년 9월 30에 세상을 떠났으니, 과연 오래지 않아 하느님께서는 당신 `작은 꽃'의 뿌리를 자르신 것이었다. 아버지가따주신 백합꽃을 넣어둔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사랑하는 이를 버릴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홀로 모든 것 위에 사랑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영성체는 데레사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 "예수님께서 데레사의 영신 지도자이셨다."고 말한 셀리나는 다시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 언니들인 마리아와 폴리나는 가르멜에 있었으므로, 데레사와 나는 더욱더 친밀 해졌습니다. 저녁마다 우리는 여름 별장 창가에서 서로의 생각을 주고 받으며, 또 `영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주님, 고통과 멸시를 받게해주소서'라는 십자가의 요한 성인 말씀을 거듭 이야기하며 우리의 마음을 불타오르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유일하게 우리 마음을 이끄는 것은 경멸뿐이며, 바랄 가치가 있다고 여기게 되는 것은 오직 고통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버림받으신 예수님, 당신만이 저의 유일한 행복이십니다."라는 점을 일깨워준 끼아라 루빅의 메시지를 연상케된다.

"우리의 유일한 행복, 이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프게 할 수 있는 것들을 우리 생각의 첫 자리와 우리의 마음 한가운데 두는 것을 말합니다. 즉 덕(德)을 살면서 자신을 절제하고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끼아라 루빅,`완전한 기쁨'이라는 묵상 중에서)

다시 예수 아기의 데레사 이야기로 돌아가자. 어느 주일에 데레사는 미사경본에서 빠져나온 상본(象本) 한 장을 보게 된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한쪽 손에서 흐르는 피에 눈길이 멎자 그만 큰 충격을 받고 만다. 그 피가 땅에 떨어지는데, 그것을 서둘러 받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데레사의마음은 쪼개지는 듯 아팠다.

"저는 마음 속으로 언제나 십자가 밑에 지켜서서, 거기서 흘러나오는 하느님의 이슬을 받아 가지고 영혼들 위에 쏟아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 `목마르다!' (요한 19:28)고 하시는 부르짖음이 쉴새없이 제 마음에 울려왔습니다. 이 말씀이 제 마음 속에 알지 못할 치열한 열정을 불질러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께 마실 것을 드리고 싶었고, 저 자신도 영혼의 갈증으로 목 이 타는 것을 느꼈습니다."데레사는 자기를 끈 것은 성직자들의 영혼이 아니라 대 죄인들의 영혼이어서,영원한 불꽃에서 죄인들의 영혼을 빼내고 싶은 욕망에 몸이 달아올랐다고 썼다.

"그 열정을 북돋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제 소원을 어여삐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데레사는 한 사람의 큰 죄인, 즉 살인죄를 세 번 범하고 사형집행을 기다리는프란지니가 회개하지 않고 죽을 것 같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데레사는 어떤 일을 해서라도 그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썼다.

"주님, 불쌍한 프란지니를 당신께서 용서해 주시리라는 것을 저는 확실히 믿고있사오니, 만일 그가 고백을 하지 않고, 또 아무런 통회의 표시도 보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을 만큼 저는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믿습니다. 그러나 주님, 저를 위로 해 주시기 위하서 그가 통회했다는 징표 하나만이라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데레사의 기도는 그대로 이루어졌다. 마르탱씨는 아이들에게 신문을 읽히지않았지만, 사형집행이 있은 다음날, 데레사는 `라 크루아'(십자가)신문을 집어들었다. 부리나케 펼쳐 보니, 이게 왠일일까? 데레사는 감격한 나머지 눈물이 새어나와 어쩔 줄을 몰랐다. 프란지니는 고백도 하지 않고 교수대에 올라가서 그 처참한 구멍에 목을 들이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영감의 충동을 받아, 몸을 돌이키더니 사제가 내미는 `십자가'를 빼앗아 들고서는 그 거룩한 상처에 세 차례나입을 맞추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 다음에 그의 영혼은 천국에 올라가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義人)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 더 기뻐하실 것'(루가 15:7)이라고 선언하신 하느님의 자애 깊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데레사는 청한 표를 받았고, 이 표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도록하신 은혜의 충실한 표지였다고 그는 적고 있다. 이로써 그의 확신은 결정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데, 데레사는 사랑의 하느님을 발견했고,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증거를 갖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데레사를 온통 뒤바꾸어 놓으심으로써 당신 사랑을 보여 주셨고, 데레사는 이 개인적인 체험에 더해서 자신의 기도로써 프란지니의 회개까지 얻어낸 것이다.

회개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 죄수를 일컬어서 데레사는 생애의 말년에, 자신의 `첫 아들'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겨우 열 네 살에 죄인의 회개를 불러일으킨 이 때부터 한층 더 하느님을 위해 고통 당하고, 죄인의 회개를 위해 헌신하고 싶은 열망을 지니게 된 데레사는 리지외의 맨발의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는 길을 찾아 나섰다. 한 때는 선교사가 되어 자신의 삶을 선교 사업에 투신하고 싶어 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관상 수도원에 입회해서 이교도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이 수녀원에는 이미 데레사의 두 언니 마리아와 폴리나가 입회해 있었다.
그러나 데레사가 가르멜에 들어가기까지는 많은 고통을 바쳐드려야 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총장 신부가 입회를 유보하면서 21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통보해 주었고, 데레사와 그녀의 아버지는 교구 주교님께 입회를 도와달라고 청하기도 했으나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마침내 아버지는 데레사와 그 언니 셀리나를 대동하고 로마 순례길에 올라 1887년 11월 20일 교황 레오 13세를 알현했다. 데레사가 개인적으로 수도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사고 청하자 교황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받아들여지겠지."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 어려움을 겪은 끝에 12월 28일 위고냉 주교가 리지외의 가르멜회 곤자가의 마리아 원장 수녀에게 입회를 허가하는 회답을 보내왔다. 그러나 데레사는 사순절이 지나서 1888년 4월 9일 부활 8일 축제 때에야 봉쇄 수녀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15세 3개월 때였다.

"제가 가르멜에 온 것은 허원 전 심사 때 예수님의 성체 앞에서 선언한 것처럼 `영혼들을 구하고 특히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라고 자서전에서 쓴 데레사는 관상을 통해서 인간이 받기를 거부하는 자비로우신 사랑을 발견하고, 이 사랑에 자신을 봉헌하기에 이른다.

기도할 때도 메마름만을 체험한 데레사는 파리 가르멜 수녀들이 번역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책들을 읽고 거기에 완전히 빠져들 게 되었다. 십자가의 요한이 16,17세의 데레사에게 준 것은, 데레사가 자기 영혼 안에서 느끼고 있던 직관,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사랑이시라는 직관에 대한 확증이었다.

`가르멜의 산길'과 `영혼의 노래'를 양식으로 하면서 `사랑의 산 불꽃'을 읽은 데사는 십자가의 성 요한을 살았고, 또한 동시에 깊은 고뇌 속으로 들어갔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온갖 좋은 것을 아낌없이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요한의 묘사가 데레사의 체험에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가난을 체험하고 배운 것이다. 영혼이 절대적으로 가난할 때, 절대적인 `무'(無)가 될 때만 하느님과 일치하게 된다는 것을 십자가의 요한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 것이다.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는 두 가지 빛, 즉 하느님 사랑의 빛과 자기 자신의 가난을 인식하는 빛이 계속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 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 아기의 데레사 성녀가 받은 가장 큰 은총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깨달음이었다고, 예수 아기의 마리 외젠 신부는 말한다. 데레사 성녀가 세상을 떠난 지 몇 해가 지난 후 교황 비오 10세는 자주 영성체하기를 권장했고,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긍정적인 성화의 길로 이끌어 준다는 점을 상기시킨 외젠 신부는 "19세기의 성덕과 고행은 부정적인 것이었다."면서 여기에 반해 우리 시대의 영성은 긍정적이며, 바로 이것이 성공을 가져온 요인으로서 이미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희생을 크게 강조했으나 오늘날에는 현존과 접촉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는 지적이다. 과거에는 희생에 어떤 숭고한 위엄이 깃들여 있었으나 사랑과 자비에 대해서는 그 만큼의 이해를 갖고 있지 못했는데, 옛날 사람들의 영성은 대다수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했으며, 그러한 요 구대로 살아갈 만큼 강한 사람이 극히 적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비에 대한 인식이 부각되면서 아주 큰 영향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신비생활의 길을 터 주게 된 것이고, 이렇게 구분되는 두 시기 중에 새로운 시대의 선구자가 예수 아기의 데레사 성녀라는 것이 성녀를 깊이 연구한 신학자의 설명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이시고 자비로우신 까닭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사랑하시는 데서 기쁨을 느끼시는 까닭에 데레사가 내린 첫 번째 결론은 단 한순간도 하느님을 홀로 버려두지 말아야 하며, 언제든지 하느님 앞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기 어린 딸을 곁에 두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으로 알고 있었던 데레사는 영성체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우리는 수도자나, 열심한 신도들이 매일 영성체하기를 열화같이 바라고 실행하는 것을 보고 얼른 수긍이 가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데레사의 다음 말이 그 해답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영성체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위해섭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보고자 하시고, 또 보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분을 만족스럽게 해 드리려고 그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자서전 A)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하느님 앞에 머물러 있는 것! 그것도 아이처럼.

"내가 천국에 갔을 때 그곳이 생각했던 것만큼 놀랍지 않다고 하더라도 나는 놀란 척하겠어요. 하느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서는 안될테니까요."라고 말할 정도였던 데레사는 성안(聖顔) 또는 성면(聖面) 즉 예수님의 거룩한 얼굴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분의 얼굴은 나의 빛이요 숭배의 대상입니다."

데세사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통해 하느님을 바라보았는데, 바로 그 모습 속에 그분의 고통의 흔적과 더불어 그 분의 신성(神性)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데레사 연구자는 말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 그를 바라볼 때, 그의 어깨나 등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사랑을 확인하는 것과 같이 데레사도 사랑하는 하느님의 거룩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분을 사랑했고, 인간의 모습을 한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봄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니, 이것이 곧 관상이며, 관상은 진리에 대한 단순한 눈길로도 표현된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한 것이었다. 데레사는 복음을 읽는 것도 사랑하는 그분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니 복음을 실행하는 것 역시 사랑하는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길이 아니고 무엇이랴!

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를 `현대의 성녀'라고 하는 것은 그가 단순히 현대에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인에게 완덕에 도달하는 길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완덕에 이르는 길, 다시 말해서 성인이 되는 것은 기적이나 예언을 한다든지, 혹은 탈혼(脫魂)에 빠지거나 세상의 명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매일 당하는 고통이나 어려운 일들을 통해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데레사는 보여 주었던 것이다.

`작은 꽃' 데레사는 또한 작은 것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저를 하늘까지 올려줄 승강기는 오! 예수님, 당신 팔입니다. 당신 팔을 타고 올라가려면 저는 커질 필요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작은 채로 있어야 하고, 점점 더 작아져야 합니다.."

데레사는 또 사랑하며 고통을 겪는 것이 행복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행복이라고 단언한다. 그가 남긴 마지막 시에 이런 진주가 박혀 있다. "사랑하며 고통을 겪는 것은 가장 순수한 행복입니다." 이 시는 `데레사의 사도신경' 이라고 까지 말하는 이가 있는데, 성모님의 고통을 관상하고, 이 관상에서 자기 고통의 정당성과 이 고통을 기쁨으로 튀어오르게 하는 발판을 데레사는 발견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고통, 회망없는 고뇌, 부조리한 혼돈상태 같은 것, 불의 앞에서 겪는 고초, 냉혹한 인간생활의 율법 앞에서의 저항,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뎌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데레사는 차분하게, 그러면서도 담대하게 노래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추천 합니다.

 

 

내용출처 : 갈메 수도회 실로암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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