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1. 20:01ㆍ경영과 경제
[전문] ‘민영화 만능주의’가 세계 공황의 씨앗 | |
[대전환의 시대] 도쿄대 교수 우자와 히로후미 대담 | |
‘특별기획 - 대전환의 시대’ 1부 세계 석학과의 대담 마지막 순서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진보적 경제학계와 비판적 지성을 대표하는 이정우 경북대 교수와 우자와 히로후미 도쿄대 명예교수의 대담으로 꾸며본다. 올해 나이 여든살의 우자와 교수는 ‘사회적 공통자본’이라는 독특한 분야를 경제학의 탐구영역으로 끌어들여 세계적 명성을 얻은 경제학자이다. 우리 주변에 사적으로 관리되고 시장에 의해 그 가치가 결정되는 일반 재화(사적 자본)와는 달리, 공동체의 건전한 유지·발전을 위해 반드시 사회적으로 관리되어야 할 ‘공통자본’이 있다는 게 우자와 교수의 문제의식이다. 환경·교육·의료와 같은 영역이 사회적 공통자본의 대표적인 예다. 그의 이론은, 이들 영역까지 자유로운 시장 메커니즘 아래 두려는 신자유주의적 전통과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두 학자의 대담은 지난달 16일 도쿄 시부야의 우자와 교수 자택에서 약 7시간동안 진행됐다. 이날 대담에서 우자와 교수는 과거 시카고대학 교수 시절의 생생한 에피소드들을 풍부하게 곁들여 가며, 세계경제의 어제와 오늘, 미래를 넘나드는 다양한 주제에 걸쳐 노학자의 생각을 열정적으로 쏟아냈다.
이정우 교수(이하 이정우) 지금 세상은 심각한 경제위기 속에 깊숙히 빠져들고 있다. 평생을 경제현상 연구에 매진해온 학자로서,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 느끼는 소회가 무엇보다 궁금하다. 우자와 히로후미 교수(이하 우자와) 현재의 위기상황을 논하기에 앞서 과거 얘기에서부터 실마리를 풀어보고 싶다. 20세기 경제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교황 칙어가 한가지 있다. 바로 1891년 교황 레오 13세가 발표한 ‘레룸노바룸’(Rerum Novarum·‘새로운 것’이란 뜻으로, ‘노동헌장’으로 번역된다)이란 칙어다. 교황 레오 13세는 지금부터 대략 한 세기 전에 이 칙어를 통해 ‘자본주의의 남용과 사회주의의 환상’을 동시에 경계했다. 먼저 자본주의를 보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 아래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19세기 영국 공업도시에서의 삶이란 지극히 불안정하고 빈곤한 것이었다. 특히 아동들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자 사회주의가 그 대안으로 등장했다. 사회주의는 얼핏 매력적으로 보이긴 했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종속시킬 위험이 컸다. 불행하게도, 당시 자본주의 나라들은 교황의 정당한 경고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잘 알다시피 1917년에 러시아에서 첫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그 뒤 여러 나라가 사회주의 체제로 넘어갔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사회주의 실험은 인류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주었을 뿐이다. 스탈린은 수백만명의 사람들을 학살하지 않았나. 자본주의 역시 대공황이라는 험난한 길을 걸어야 했다. 1929년 10월 뉴욕 증권시장에서 주가가 폭락한 것이 대공황의 시발점이었다. 당시 미국의 후버 대통령이 취한 정책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소득세율을 인상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정부지출을 삭감하는 것이었다. 둘 다 공황을 치유하기는 커녕 되레 더 악화시키는 엉터리 처방이었다. 이정우 잠깐 당시 얘기를 해보자. 당시 정통파 경제학에서는 균형예산을 선호했고, 경제가 어려울수록 정부가 허리끈을 졸라매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다. 적극적인 정부 재정정책의 역할에 대한 개념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을 때였다. 케인스 이론이 나옴으로써 비로소 현실에 대한 적절한 처방이 가능해졌다. 우자와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한 1933년에는 무렵에는 이미 미국에서 은행 1만여곳이 문을 닫았고, 농업부문을 빼고 실업률이 37%로 치솟았으며, 국민소득은 1929년에 견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첫 각료회의에서 ‘뉴딜 정책’을 채택했다. 뉴딜 정책이 정식으로 각료회의에서 통과됐다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다. 이 회의에서 검찰총장은 ‘적국통상법’(Trading with Enemy Act)을 제의했다. 이 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대통령령으로 무역을 통제하는 게 가능했다. 은행과 증권회사를 서로 분리하는 ‘글래스-스티걸법’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은행 등 금융기관은 원래 사회적 공통자본의 하나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인데도 당시 은행들은 너나없이 각종 투기행위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래서 은행-증권회사를 분리하자는 분위기가 성숙됐다.연방준비은행이 중앙은행이 된 것도 이 때다. 이어 막대한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테네시강유역 개발사업을 통해 미국 남부지역에서 엄청난 규모의 개발사업이 펼쳐졌다. 댐, 도로, 발전, 신도시 건설 등 지역개발정책이 쏟아졌다. 말하자면 일종의 사회간접자본을 구축하는 내용이었다. 이 사업은 남부에서 시작해 점차 북부로 확산됐다. 그 뒤 2차 대전이 일어나 미국은 독일 및 일본과 잇따라 전쟁 상태에 들어갔다. 이정우 미국에서 경기가 회복된 게 뉴딜 정책 때문이 아니라 2차 대전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뉴딜 정책은 당시로서는 개혁적인 조처였지만 대법원에서 잇따라 위헌 판정을 받아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 아닌가? 그에 비해 2차 대전으로 군비 지출이 늘어나고, 정부가 경제영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덕분에 대공황에서 비로소 벗어났다는 평가가 있다. 우자와그런 측면이 분명히 있다. 실제로 뉴딜 정책의 효과를 측정하기란 어렵다. 미국 대법원은 잇따라 뉴딜 정책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테네시강유역 개발사업은 민간이 할 일이지 정부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게 그 근거였다. 그래서 루스벨트는 정책의 구조를 변경해 우회하는 전략을 썼다. 사업의 주체를 연방정부에서 지방정부로 바꾼 것이다. 이정우 그럼 이제 화제를 본격적으로 최근의 경제위기로 옮겨보자. 이번 경제위기의 원인을 무엇이라고 보나? 대체로 레이건 대통령 시절 시작돼 부시 정권 때 자리잡은 시장만능주의(market fundamentalism) 정책의 실패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인 듯한데, 이런 평가에 동의하나? 우자와크게 봐서 지난 40년 동안 시장만능주의에 기반을 둔 제도 및 정책이 누적된 결과다. 시장만능주의는 거의 종교적 광신에 가까울 정도로 강력한 신념체계다. 설령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연환경이 위협받는 일이 있을지라도 이에 개의치 않고 개인의 기업가적 활동의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고 사적 이윤을 최대한 획득할 수 있도록 경제적, 사회적 활동을 확대하는 데서 인간의 행복이 올 수 있다고 믿는 신념이다. 부시 정권 8년 동안 시장만능주의는 미국 정부가 경제적, 금융적,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채택한 편리한 정책수단이 돼 버렸다. 위기 자체만 놓고 본다면 첫째,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인한 막대한 경제적, 사회적 비용을 들 수 있다. 둘째, 부자를 위한 감세라든가 빈민들을 희생시킨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와 같은 정책적 미숙함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부시 정권이 채택한 경제정책 및 사회정책의 미숙함으로 인해 외국, 특히 후진국들의 경제적, 사회적 안정도 크게 저하됐다. 이정우 영국과 미국 두 나라에서 레이건과 대처가 각각 집권하면서 시장만능주의가 시작됐다고 보는 통설에 동의한다는 애기인가? 우자와1970년대 말에 이르러 경제사상의 대세는 이미 케인스주의에서 통화주의로 넘어갔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시카고대학의 밀턴 프리드먼 교수의 사상이야말로 시장만능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자유주의적 전통의 뿌리는 좀더 거슬러 올라간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1947년 4월 스위스의 몽페랑에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프랭크 나이트 일군의 자유주의자들이 회합을 가졌다. 나찌 정권과 같은 독재체제와 인간성 파괴, 전쟁과 혼란, 자유의 상실 등의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우려에서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들은 이른바 ‘몽페랑 운동’이라고 하는 새로운 운동을 제창했다. 그 운동의 목표는 한마디로 자유와 평화였다. 이 사상을 자유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이정우 몽페랑 운동의 목표는 맑스주의와 케인즈주의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고전적 자유주의를 지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시장만능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와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우자와밀턴 프리드먼의 사상은 이들과 분명 다르다. 그의 사상은 자유주의를 넘어서 거의 시장만능주의에 가까운 것이다. 프리드만은 자본주의에서는 돈벌이가 중요하고, 사기업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그는 정부와 사회의 통제는 최소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원래부터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던 교육, 의료, 자연, 안전 등의 분야에서도 시장을 형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런 사상은 대략 1964년 무렵부터 시작됐다. 1964년 미국 대선에서는 민주당의 린든 존슨 후보와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후보가 맞붙었다. 이 때 밀턴 프리드먼은 골드워터의 경제참모였다. 원래 골드워터는 베트남 전쟁에서 원자탄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으나 비판이 거세지자 나중에는 그런 생각을 포기하기도 했다. 골드워터는 꾀가 많은 사람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프리드먼은 그 생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프리드먼은 “한 명의 공산주의자도 너무 많다”(One communist is too many)라고 말하면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또 프리드먼은 테네지강유역 개발공사(TVA)를 민영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골드워터도 그 생각에 동의했다. 남부 지방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민영화론이 차츰 인기를 잃자 골드워터는 민영화 주장을 접었지만, 프리드먼은 끝까지 그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시장만능주의자들은 또 은행과 금융의 자유화를 주장했다. 결국 지난 1999년 드디어 스티걸글래스법이 폐지됐는데, 그것이 바로 이번 금융위기의 직접적 원인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이 대목에서 재미있는 일화 한 토막을 들려주고 싶다. 지난 1965년 무렵으로 기억한다. 시카고 대학 식당에서 경과학과 교수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밀턴 프리드먼이 뒤늦게 격앙된 얼굴을 하고 나타나서는 합석을 했다. 그는 오전에 컨티넨탈일리노이뱅크에 갔다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은행을 찾아가 선물 거래 조건으로 1만파운드를 사겠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얘기를 우리들에게 들려줬다. 규칙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담당 은행직원이 그런 거래는 ‘신사적’이지 않다는 이유를 들며 거절하더란다. 그래서 화가 난 프리드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잘 버는 사람이 신사다”라고 응수해줬단다. 밀턴 프리드먼의 사상을 정확히 알기 위해선 그가 흑인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미국의 흑인 문제는 곧 빈곤 문제이다. 흑인들은 불황이 닥쳤을 때 가장 먼저 해고당할 운명에 놓여 있다. 한때 프리드먼이 어떤 강연 석상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누구에게나 10대 때 공부하느냐 노느냐의 선택이 주어지는데, 흑인들 가운데는 합리적 선택에 따라 노는 것을 선택한 사람이 많다고. 가난은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니 어쩔 수 없다는 게 그 강연의 메시지였다. 그러자 흑인 학생 한 명이 일어나 프리드먼에게 이렇게 말하더라. “내가 부모를 선택할 자유가 있었으냐? 나에게는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라고. 그럼에도 프리드먼은 각자 운명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끝내 굽히지 않았다. 이정우 실제로 프리드먼은 현실의 불평등은 각자 개인이 선택한 결과라는 이론 모델을 만들기도 했다. 이 이론대로라면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사적 영역에 개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인간의 선택과 의지를 넘어서는 불평등한 구조가 바로 문제다. 또 이런 불평등한 구조를 어떻게 제도적, 정책적으로 개선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게 경제학의 임무다. 프리드먼의 이론은 무엇이든 시장에만 맡기면 된다는 것이니,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냉혹하다. 무엇이든지 시장에 맡기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면, 사실 경제학을 공부할 필요조차 없는 게 아닐까? 우자와밀턴 프리드먼은 정부의 모든 규제를 반대했다. 그는 심지어 마약에 대한 규제조차 반대했다. 그러니 그의 사상은 철저한 시장만능주의라고 부를 만하다. 닉슨 대통령은 미국의 군대 문제를 다루는 위원회를 만들고 밀턴 프리드먼을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그 위원회에서는 과거처럼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는 징병제를 폐기하고 봉급을 받는 직업 군인제도인 모병제로 바꾸자는 권고안을 내놓기도 했다. 이정우 시장만능주의의 원조라면 원래 영국이나 미국을 꼽을 수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 세력이 점차 다른 나라로 확장되어 가는 느낌을 준다. 당장 한국에서도 시장만능주의 세력은 막강하다. 이들이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교육, 의료 등 사회 모든 부문에 깊숙히 침투해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고 있어 더욱 걱정스럽다. 우자와시장만능주의는 전세계적으로 확산돼 왔다. 최근에 의료 문제를 연구중인데, 미국의 의료제도와 영국의 사회화된 의료제도(socialized medicine)는 정반대의 성격을 갖고 있다. 1941년 1월 영국의 처칠 수상은 전쟁이 끝난 뒤의 사회 변화를 연구·검토할 위원회를 하원에 설치했다. 당시엔 이미 영국군이 유럽 대륙에서 나찌군대에 패퇴하고 있던 시절이었는데도, 처칠은 먼 장래를 내다보는 탁견과 지혜를 갖고 있었다. 그는 전쟁의 승패와는 무관하게 전쟁이 끝난 뒤에 닥칠 파멸적 결과를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후 사회체제를 앞서 연구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베버리지를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는데, 베버리지는 케인스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 때 케인스가 베버리지에게 추천한 인물이 바로 훗날 노벨경제학상을 받기도 하는 경제학자 제임스 미드이다. 이 위원회에서 전후 사회보장 제도의 기본 틀이 마련됐고,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cradle to grave)라는 그 유명한 문장이 담긴 베버리지 보고서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 때 미드는 케인스의 승수이론을 적용해 의료부문에 백만파운드를 지출하면 총효과가 200만~300만파운드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영국 재무부는 균형예산을 지지하고 있던 상황인 탓에 재무부를 대표하는 헨더슨과 미드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는데, 결과는 미드의 승리였다. 이렇게 해서 그 유명한 베버리지 보고서가 1942년 11월에 세상에 발표됐다. 이 보고서는 출간된 지 두 시간 만에 6만부가 팔렸고, 1년 만에 60만부가 팔릴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보고서가 전쟁에 시달리는 영국 국민들을 단결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하지만 처칠 수상이 베버리지의 아이디어를 제도화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영국 정치 상황은 좌파로 노동당이, 중도파로는 케인스, 미드, 베버리지가 지지하는 자유당이, 그리고 우파로는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이 있었다. 1945년 8,9월 경에 총선이 열렸눈데, 거기서 노동당이 의석의 절대 다수를 획득하게 됐다. 그 결과 노동당 내에서도 좌파그룹에 속하는 애틀리가 수상 자리에 올랐다. 애틀리는 역시 좌파에 속하는 베빈을 복지부 장관에 임명했고, 베빈이 베버리지의 아이디어를 제도화하는데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병원을 국유화하고, 2년에 걸쳐 국민의료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NHS) 체제를 완성했다. 이것은 당시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 인민이 꿈꾸던 이상적인 의료제도였다. 그럼에도 병원의 국유화라는 다소 과격한 내용이 포함됨으로써 훗날 실패에 이르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과도한 정책으로 인해 의료서비스의 질이 저하되고, 의사들은 낮은 소득수준 탓에 사회적 지위도 낮아지고 불만도 쌓여갔다. 수많은 의사들이 영국을 떠나 캐나다, 호주, 미국으로 가버린 건 잘 알려진 일이다. 1979년 대처 수상이 집권하자마자 곧장 손을 댄 게 바로 민영화였다. 집권 첫 해부터 대처 총리는 철도, 우편, 전신전화 부문을 민영화했지만 국민의료서비스까지 민영화하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대처는 두번째 임기 들어 다시 의료부문 민영화를 시도했으나 또다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대처 총리가 추진했던 의료부문 개혁의 내용을 살펴보면, 의료 서비스를 완전히 시장의 손에 맡기자는 것이었다. 일본의 상황도 대처 총리의 개혁 시도와 비슷하다. 고이즈미 총리는 집권 5년 동안 의료비 지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의사가 부족해지고 병원들은 운영난에 빠졌다. 자민당이 2년 전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한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의료제도 실패였다. 이정우 이번 위기를 계기로 시장만능주의가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케인스주의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다. 케인스주의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위기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보나? 우자와현재로서는 다른 선택이 없다. 경기가 워낙 나쁘기 때문에 재정과 금융부문에서 케인스주의적 경기부양정책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장기적으로는 케인스주의에도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시야를 보다 넓혀, 경제의 구조변화, 제도 개혁, 사회적 공통자본의 확충 등을 도모해야 한다. 건전한 이성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풍토가 마련되어야 하고, 문화 발전과 상호협력, 자연에 대한 존중을 분명하게 지향해야할 가치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돈이 인생의 절대적인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돈이란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대학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정우 ‘녹색성장’(Green Growth)이라는 용어가 한창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녹색성장이 위기에 처한 세계경제에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당신은 지구온난화 문제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고, 이 문제의 전문가로 손꼽히고 있는데, 녹색성장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우자와올해 말 코펜하겐에서 열릴 제15차 기후변화당사국 총회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덴마크 경제학자 비욘 젠슨(Bjone Jensen)은 내가 1990년 로마 회의에서 제안했던 탄소세 인상을 주장하고 있더라. 세계 최초로 지구온난화 문제를 다루는 국제회의가 지난 90년에 로마에서 열렸다. 이 때 나는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내용은 각국의 1인당 소득수준에 비례하는 탄소세를 부과하자는 것과, 숲 조성에 대한 보조금 지급, 그리고 지구의 환경 안정을 위해서 국제기금을 조성하자는 것 등이었다. 각국은 소득에 비례하는 탄소세에서 숲 조성 보조금을 뺀 차액을 납부하면 되는데, 이 돈을 모아서 국제기금을 만들어 비례세를 납부할 능력이 없는 가난한 후진국들을 도와주자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이 안에 대해 스웨덴, 독일 등 유럽에서는 찬성하는 분위기였고, 상당한 지지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교토의정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당시 일본 총리 무라야마에게 만일 탄소세를 의제로 다룬다면 미국은 협상에서 탈퇴할 것이라고 위협할 정도로 비협조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요즘 거론되는 이른바 ‘녹색성장’이란 매우 중요한 이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환경이야말로 바로 내가 말하는 ‘사회적 공통자본’(Social Common Capital)의 핵심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통화주의에 기댄 신자유주의자들은 이같은 사회적 공통자본을 모두 민영화할 것을 주장하는데, 현재의 경제위기를 가져온 진짜 이유는 바로 이같은 무모한 시도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금융위기를 일으킨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는 서브프라임보기지 사태만해도 시장만능주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지 않나. 주택담보대출에서 두 차례 계약을 위반하면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상이 되고, 그 뒤 한번이라도 더 계약을 이행하지 않으면 전과자가 되고, 주택을 포기해야 하며,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된다. 지금 미국에서 수백만명이 이런 처지에 놓여 있다. 1930년대 대공황 때는 도시에서 살기 어려워진 사람들이 농촌으로 이사를 가는 해결책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나마 그런 해결책도 사라졌다. 이정우 그렇다면, 이번 위기를 거치면서 자본주의는 앞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바뀔 것으로 보나? 자본주의가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나? 우자와자본주의의 각종 제도장치를 시장만능주의 손에 맡기지 말고 조심스럽게 관리해야 한다. 사회적 공통자본의 주요 요소인 자연자원, 병원, 학교, 사법제도 및 경찰·행정서비스, 금융제도 등을 신중하게 관리해,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성이 존중되고 각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될 수 있는 그런 경제체제를 지향해야 한다고 본다. 이정우 이번 위기 속에 다시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바로 이른바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다. 자칫 세계경제가 과거 일본이 경험했던 것처럼 기나긴 기간 동안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큰 것이다. 우자와일본의 1990년대를 일러 ‘잃어버린 10년’이라고들 부른다. 하지만 당시와 지금의 모습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당시에는 일본이 수출을 통해서 경제위기를 벗어날 최후 수단이라도 갖고 있었는데 반해, 지금은 세계경제 전체가 한꺼번에 불황에 빠져 있다. 과거와 같은 수단도 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앞으로 세계경제는 더욱 심각한 불황을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정우 마침 일본의 경험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게 있다. 과거 일본 경제는 10년 이상 저성장을 경험했을 뿐 아니라 이른바 ‘격차사회’라 불리는 양극화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한 것 같다. (이 대담을 갖기 며칠 전) 오사카에서 이 엄동설한에 길바닥에 자고 있는 집없는 빈민들을 봤다. 일본과 한국 두 나라는 그런 점에서 비슷한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우자와나는 비판에는 익숙하지만 처방은 자신있게 이야기하기 어렵다. 그러나 일본의 문제를 놓고 본다면, 실업자들을 농촌에서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물론 효과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농촌에는 병원도 부족하고 의사도 모자란다. 이들을 훈련하는 데 적어도 10년 이상 소요될 것이다. 지방정부도 뚜렷한 비전을 갖고 있지 못하다. 과거 나카소네 정부는 미국 정부와 각종 정책을 의논해서 결정하는 공조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국이 일본에 요구한 것은 1년에 120억달러씩 5년간 공공지출을 하되, 단 그것이 생산성을 높이는 데 투입되어서는 안 되고, 생산성을 높이지 않는 분야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하면, 미국은 전후 점령 시기부터 일본의 젊은 공무원들을 훈련시켜 온 탓에 그들의 정신세계가 온통 미국에 편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중앙정부는 균형예산을 회복해야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이런 지출 부담을 지방정부에 전가했고, 지방정부들이 적자와 부채를 떠안게 되었다. 중앙정부는 지방정부에 대해서 단지 미래에 발생할 부채의 이자만 부담해주었을 뿐이다. 지방정부에 부담을 전가하는 이런 구조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고이즈미 정부 때 이른바 개혁을 한답시고 종전의 이자 부담마저 거부하는 바람에 지방의 재정 사정은 더 나빠졌다. 지방 병원들은 비용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의사 수를 줄이고 있다. 그 대신 미국의 압력하에 변호사 숫자는 3배로 늘어났고, 미군의 주둔비용마저 일본이 부담하고 있다. 오키나와에서 괌으로 미군기지를 이동하는 데 드는 비용의 100%를 일본이 부담하고 있다. 미국의 일본 점령정책은 영국의 인도 점령정책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영국은 과거 인도의 젊은 관료들을 영국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에 유학시켜서 훈련을 했다. 영국은 인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영국의 군사비를 인도에 부담시키고 있었다. 영국 공무원들은 인도에서 2,3년 정도 근무하면서 훈련을 받았는데 그 비용도 인도가 부담하고 있었다. 그것과 비슷한 상황이 지금도 미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지고 있다. 고이즈미는 대단히 친미적인 사람이었다. 고이즈미 밑에서 오랫 동안 장관을 지낸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의 개혁은 미국식이다. 교육, 의료 등 시장이 성립하지 않는 분야에까지 시장원리를 적용하려고 하는 것이고, 일종의 시장만능주의일뿐이다. 이정우 이번 위기를 통해 유일 패권국가이던 미국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새롭게 주목을 받는 주인공이 바로 중국이다. 중국에 대해선 미국을 대체하는 새로운 초강대국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중국의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라는 개혁노선의 미래는 어떻게 보고 있나? 우자와글쎄. 중국에 대해선 지난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것으로 대답에 대신하고 싶다. 1980년대 초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덩샤오핑의 농업개혁 정책을 평가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심양에 체류했다. 그곳은 거의 대부분 빈농이 살고 있었는데, 일곱 농가만은 부농이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모두 공산당 당원이었다. 당에서 각종 특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고서를 쓰면서 “자본주의의 착취에는 한계가 있으나 사회주의의 착취에는 한계가 없다”면서 덩샤오핑의 자유화 정책을 비판했더니 곧이어 베이징으로 소환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 당시 정치국원이던 조자양 부총리가 내 말을 “일리 있다”고 두둔해줘 그나마 문제를 수습할 수 있었다. 훗날 1989년 천안문 사태가 나기 직전에 베이징에 머물고 있었는데, 베이징대 학생들이 몰려와서 건물을 포위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자 조자양이 혼자 나가서 학생들과 조용히 대화하는가 싶더니, 30분 만에 학생들은 모두 해산해 버리더라. 천안문 사태가 벌어지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조자양은 천안문 사태 때 학생들에게 유화적 태도를 취했다는 이유로 총리직에서 해임되고 가택연금 상태에 놓이게 됐다. 훌륭한 인물이었는데, 애석하게도 오랜 연금 상태 속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정우 대담도 차츰 마무리할 겸, 자연스레 화제를 다시 미국으로 돌리고 싶다. 지난 대선에서 오바마의 승리를 어떻게 생각하나? 우자와오바마의 승리는 2차대전 후 최고의 사건이다. 레이건과 부시로 이어지는 시장만능주의 경제정책의 실패에 대한 국민들의 민심이반이요, 응징이다. 오바마는 흑인으로서 최초로 대통령이 되었으므로 그것만 해도 위대한 일이다. 그럼에도 오바마가 개혁적인 인물이기는 하지만 미국 민주주의는 타협이 곧 운명이다. 그러므로 대통령이 되고 난 뒤 그의 선택은 제한될 것이다. 각료 임명 과정을 보면 이미 그런 타협이 드러난다. 특히 로렌스 서머스의 임명은 잘못됐다고 본다. 나는 1993~4년 무렵 세계은행 비상임 자문역으로 일했는데, 그 때 수석경제학자 겸 부총재가 바로 서머스였다. 그는 당시 ‘내부 지침’이란 것을 쓴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선진국에서 공해를 일으키는 공장을 후진국으로 이전하면 선후진국 모두에 이득이 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사람 한 명의 경제적 가치가 3만 달러이지만 필리핀에서는 500달러밖에 안 되기 때문에 이런 경우 공해시설을 후진국으로 이전하면 쌍방이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전형적인 시장만능주의 사고방식으로서, 당시 환경단체에서 크게 반발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미국 정부는 서머스를 세계은행 부총재에서 해임한 뒤에 재무부 차관에 임명했다. 세계은행은 예산이나 인사문제 모두 미국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처지다. 이번에 오바마로서는 스티글리츠 교수를 선택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카드였을 것이다. 서머스는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애로우와 샤무엘슨을 삼촌으로 두고 있는 좋은 집안 출신인데다, 머리는 좋지만 너무 공격적이고 시장만능주의자라서 걱정이다. 국무장관에 힐러리를 임명한 것도 다소 걱정스럽다. 그가 중동 사태에 잘 대처할 지 의문이다. 이번에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은 부시의 책임이며, 특히 부통령 체니의 책임이 크다. 오바마가 임명한 새 각료가 과거 클린턴팀을 많이 승계해서 걱정스럽다. 이정우 장시간 대담에 응해주어 대단히 고맙다. 아주 유익하고 흥미 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어 한국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자와고맙다. 한국에 대해서는 늘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다. 정리 최우성 기자 morgen@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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