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이 94살을 일기로 지난주 타계했다. 그는 열역학의 개념과 수학을 도입해 경제학의 분석 방법을 정밀하게 만들었고, 분야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새 이론을 만들어냈다. 그가 미국인 경제학자 중 최초로 1970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새뮤얼슨은 시카고대학을 조기입학, 졸업한 뒤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하버드 동창생 중에는 존 갤브레이스, 폴 스위지, 리처드 머스그레이브, 쓰루 시게토 등 쟁쟁한 인물이 즐비하다. 그는 하버드대학 교수가 되기를 바랐지만 1930년대만 해도 유대인 차별이 심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같은 도시 케임브리지에 있는 유명한 공과대학 엠아이티(MIT)에 가서 경제학과를 개척해 세계 굴지의 학과로 만듦으로써 한을 풀었다. 그는 박사논문 ‘경제분석의 기초’로 명예를 얻었고, 경제원론을 써서 돈방석에 앉았다. 그가 1948년에 쓴 경제원론은 40개국에서 번역돼 세계에서 제일 많이 읽힌 경제학 교과서다.
이 책은 처음 나왔을 때 좌파 교과서로 매도당했다고 하니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있다. 그의 경제철학은 케인스주의로서 전혀 과격할 게 없는 사상인데, 당시는 미국의 이데올로기가 워낙 보수적이었고, 게다가 매카시즘이란 반공주의 광풍이 몰아칠 때였다(윤진호, <보스턴 일기> 참조).
그는 국가 개입을 옹호하는 대표적 케인스주의자였다. 시장만능을 신봉하는 시카고학파의 대부 밀턴 프리드먼은 그의 평생 라이벌이었다. 한때 프리드먼은 공화당 대통령 후보 골드워터의 경제참모로 일했고, 새뮤얼슨은 민주당의 케네디, 존슨 대통령 밑에서 경제참모로 일했다. 두 사람은 <뉴스위크>지에 매주 칼럼을 쓰면서 서로 대립했다.
필자는 30년 전 유학 시절에 그의 경제사상사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왕년의 수리경제학자가 수학과 거리가 먼 사상사를 강의하는 게 이색적이었다. 기력이 모자라는지 앉아서 강의하다가 가끔 칠판에 글씨를 쓸 때만 일어섰다. 그는 수업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일일이 어느 나라, 어느 대학에서 왔는지를 물었는데, 특히 일본 학생들에 대해서는 아무개 교수는 잘 계시느냐고 물어보며 애정을 표시했다.
그가 돈 문제에 철저했음을 보여주는 두 개의 에피소드가 있다. 1970년대 초 엠아이티 도서관의 복사기는 가끔 고장을 일으켰다. 동전을 넣어도 복사가 안 되는 경우 옆의 장부에 사인을 하면 직원이 동전을 내주었다. 하루는 노신사가 와서 새뮤얼슨이라고 사인을 하기에 “혹시 당신이 그 유명한 경제학자냐?”고 물어보니 맞다고 하더란다. 두번째 이야기는 1970년대 말, 한국의 어느 신문사가 새뮤얼슨을 인터뷰하러 갔다.
사례금을 봉투에 넣고 약속 시각에 연구실로 갔다. 새뮤얼슨은 인터뷰 전에 돈을 달라고 했고, 돈을 세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시계를 보면서 인터뷰를 시작했다고 한다. 석학과는 어울리지 않는 독특한 면모다.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