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첸중가 등정 의혹’에 관해 입 연 오은선

2010. 10. 13. 05:24건강과 여행

[김석종이 만난 사람]‘칸첸중가 등정 의혹’에 관해 입 연 오은선

 김석종| 문화에디터
ㆍ“산악인으로서 회의· 슬픔…그래도 산을 떠날 수는 없다”

오은선(44)은 ‘세계 여성 최초 히말라야 14좌 완등’이라는 새 역사를 쓴 산악인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난해 5월 10번째로 오른 칸첸중가(8586m) 등정에 대한 의혹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특히 두 달 전 SBS TV <그것이 알고 싶다>가 ‘오은선 칸첸중가 등정의 진실’을 방송하면서 그의 ‘14좌 완등’은 더욱 의심받는 상황이 됐다. 한국 산악계의 대표 기구인 대한산악연맹도 “정상에 올랐다고 보기 어렵다”고 발표했다.

오은선은 깃발, 정상 사진, 등정시간, 셰르파의 증언 등 모든 의혹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악천후 때문에 정상 5~8m 지점에서 정상 사진을 찍고 내려온 것이 ‘진실’ ”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오은선의 ‘칸첸중가 미스터리’는 오은선이 분실했다고 밝힌 모교(수원대) 깃발이 정상보다 훨씬 아래쪽에 돌로 눌려진 채 바위 위에 펼쳐져 있었다는 것, 오은선의 사진에 정상이라고 볼 만한 지형이 없다는 것, 정상에 너무 빨리 도착했다는 것, 동행한 셰르파 중 한 명이 정상에 오르지 않았다고 ‘고백’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동안 오은선은 공식적으로는 거의 ‘침묵’을 지켜왔다. 얼마 전 한 산악인이 친구인 엄홍길을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방송에 나온 깃발은 12일 동안 8500m 높이에 노출돼 있었던 것치고는 상태가 너무 깨끗하지 않아?” “듣고 보니 이상하네. 그곳에서는 강풍 때문에 깃발이 금방 날아가 버릴 텐데 어떻게 그대로 있었을까.”

‘깃발’ 이야기를 전해준 산악인이 지난 3일 오은선과 함께 북한산에 가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따라나섰다. 몇 차례 산행을 함께했음에도 오은선은 불편한 심사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매스컴에 대해 극도로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다. 인터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고 했다. 북한산 쪽두리봉을 오르는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지만 말끝마다 ‘기사화하지 말아달라’는 다짐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칸첸중가 정상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 할 말이 있을 것 아닌가.

“의혹이 부각되는 과정에 의혹이 있다. 진실을 밝히겠다는 사람들이 진실하지 못하다. 방송은 처음부터 ‘거짓’으로 방향을 정해놓고 취재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아무리 흠집을 내도 나는 변할 게 없다. 나는 목숨을 걸고 정상에 올랐고, 최악의 상황에서 살아 돌아오는 데 집중했다. 그게 내가 아는 ‘진실’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당하고만 있나.

“내가 나서지 않아도 모든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깃발, 등정시간, 정상 부근의 바위지대 의혹과 셰르파(체지 누르부)의 증언이 모두 잘못된 것으로 확인됐다. 나는 유명해지고 싶어서 산에 다닌 것이 아니다. 언론과 인터뷰하는 것이 등반비를 지원해 주는 후원사(블랙야크)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언론에 노출되는 것이 싫다.”

이 말을 끝으로 오은선은 입을 닫았다. 칸첸중가 의혹을 조목조목 따져보고 싶었지만 딱 잘라 거절했다. 지난 6일 저녁 몇몇 산악인과 오은선이 만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약속 장소인 서울 인사동의 한 식당으로 또 쫓아갔다. 그를 설득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칸첸중가 정상 사진 배경에 바위가 보인다. 눈으로만 덮여 있는 다른 정상 사진과 다르다. 어찌된 건가.

“나도 그곳에 가기 전에는 눈덮인 정상 사진만을 봤다. 그런데 정상 5m 정도부터 아래쪽으로는 바위가 노출돼 있었다. 우리가 올랐을 때는 화이트아웃(시야 상실) 상태였다. 일부러 사진 배경에 바위가 나오도록 자리를 잡았다. 내가 거기까지 가지 않았으면 바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나. 의식적으로 숨기려 했으면 바위가 없는 데서 찍었을 것 아닌가. 나는 사진을 찍는 셰르파(다와 옹추)에게 바위 배경과 몸의 전신이 다 나오게 찍으라고 ‘풀샷, 풀샷’이라고 외쳤다. 내 양심은 그 ‘풀샷’에 있다.”

-그동안 칸첸중가를 등반했던 사람들은 왜 바위가 없다고 단정짓나.

“정수리에 없다는 거다. 시시각각 변하는 히말라야 정상 주변 전체를 정확히 안다고 말하면 곤란하다. 안 믿겠다고 작정하고 달려들면 믿을 수가 없는 거다. 나는 정점에 섰다고 얘기한 적이 없다. ‘히말라야 데이터베이스’의 홀리 여사 비서인 지반과 인터뷰할 때도 내가 오른 곳이 정수리 포인트에서 5~10m 사이의 거리라고 말했다. 분명히. 나 다음으로 올라간 노르웨이팀 욘 갱달이 그 바위 사진을 찍었다. 갱달은 그 지점이 정상에서 5~10m 떨어진 곳이라고 증언했다. 그곳은 통상적으로 정상으로 인정되는 거리다.”

-해발 8000m 지점에서, 그것도 무산소로 다른 등반가들보다 훨씬 빠른 3시간40~3시간50분 만에 정상에 도착했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불신한다.

“해발 8000m 지점이 출발지가 아니었다. 베이스 캠프까지 동행한 방송(KBS) 카메라에 잡힌 마지막 지점은 손톱바위 근처다. 그 지점은 해발 8000m가 아니라 8450m 지점으로 밝혀졌다. 그곳에서 정상까지 고도 136m를 3시간50분 정도에 오른 것이다. 절대로 가능한 시간이고 오히려 넉넉한 시간이었다. 그후 부산의 한 원정대도 4시간 정도 걸렸다. 우리는 정상에 서고 다시 그 지점까지 하산하는 데 5시간 이상이 걸렸다. 8400m의 고도에서 그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어느 한 곳에 머물렀다면 우리 모두 그 자리에서 동사했을 것이다.”

-처음 왜 등정시간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나.

“당시 베이스 캠프에는 노르웨이의 갱달팀, 스페인의 파사반팀, 고미영팀의 김재수씨 등이 대기 중이었다. 내가 오르던 날 파사반팀의 등반가가 뒤따라오다 돌아갔다고 했다. 베이스 캠프에서 목격됐다는 8000m 지점의 등반대는 그 스페인팀이다. 그 시간에 우리는 이미 방송 카메라에 잡힌 8450m 지점을 지나갔다.”

-김재수팀이 올라갔을 때는 정상에 산소통이 있었는데, 당신은 ‘못봤다’고 한 것도 의혹이 됐다.

“나도 아래쪽에서 여러 개의 산소통을 봤다. 나 다음에 올라간 노르웨이팀이 아래에 있던 산소통을 옮겨놓은 것으로 확인돼 이미 해결된 문제다.”

-함께 등반한 셰르파 중 한 명인 누르부의 주장이 결정타가 됐다. 그가 해발고도 10m 위에서 앞장서 가는데 정상 150m 아래 지점에서 옹추가 내려오라고 했고, 그곳이 정상이라고 하며 사진을 찍었고, 누르부가 이의를 제기해 다투었다고 주장했다.

“산소를 쓰지 않아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날씨까지 급격히 악화돼 정상까지 안자일렌(줄을 한 사람씩 연결해서 묶고 오르는 방식)을 하고 올랐다. 옹추와 페르마가 앞에 서고 나, 누르부 순이었다. 상식적으로 정상 부위에서 제일 경험이 적은 셰르파를 앞장세우겠나. 막내인 누르부는 촬영 담당이었다. 항상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움직였다. 산소가 부족한 8500m 위에서 산소통 레귤레이터 마스크까지 쓰고 있는데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싸우나. 누르부를 인터뷰한 홀리 측도 그의 진술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했다.”

-정상에 올라 수원대 깃발을 잃어버린 사실을 알았다고 밝혔다. 그런데 정상에서 찍은 사진에 수원대 깃발이 품에 있어서 더욱 의문을 키웠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생각해봐라. 해발 8000m가 넘는 곳에서 산소 없이 20시간20분을 걸었다. 무슨 정신이 있었겠나. 그런 상태에서 치밀하게 무슨 일을 꾸미겠나. 방송을 보고 나서야 내 품속에 깃발이 있었던 것을 알았다. 정상 주변이거나 하산 중에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 깃발을 14좌 경쟁자였던 고미영팀의 김재수씨가 12일 후에 올라가 주웠다고 한다. 김씨는 “정상을 200m쯤 남겨놓은 지점 바위 위에 깃발이 네 군데에 돌로 고정돼 펼쳐져 있었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깃발에 대한 의혹은 내가 더 제기하고 싶은 부분이다. 그곳 바람은 상상을 초월한다. 텐트도 바람에 찢어져 날아가는 곳에 주먹만한 돌멩이 네 개로 눌러놓은 깃발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12일은커녕 12분도 못 버틴다. 깃발은 흠집도 없고 색깔이 너무 선명하다. 바람이 아니라 햇빛에 노출된 것만으로도 색이 변했어야 한다.”(다음날 오은선의 동생이 똑같은 수원대 깃발 두 개를 가져왔다. 방송국에서 돌려받았다는 문제의 깃발에는 담당 연출자의 사인이 돼 있었다. 사용하지 않은 깃발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오은선의 말대로 빨간 바탕색에 바랜 흔적이 없었고, 글씨도 선명했다.)

-그 깃발이 있었다는 지점까지만 올라간 것 아니냐고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정상이 아닌 줄 뻔히 아는 곳에 왜 깃발을 펼쳐놓겠나. 정상에 가지 않았다는 것을 ‘인증’받으려고?”

-그렇다면 방영된 깃발은 뭔가.

“추측을 말하면 안 되지만 아마도 내가 흘린 수원대 깃발을 제일 뒤에 섰던 누르부가 주웠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깨끗한 깃발 상태로 봐서 가지고 내려와서 누군가에게 전달했을지도 모른다. 누르부, 파사반, 김재수씨 중에 정확한 내용을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후속 등정자도 깃발을 보았다고 한다.

“12일 후 갱달팀에 이어 김재수팀, 파사반팀이 올라갔다. 그들은 모두 우리가 설치한 로프를 이용했다. 가장 먼저 오른 갱달팀은 깃발에 대한 기억이 전부 다르다. 매티어스는 깃발을 봤지만 돌에 눌려 있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셰르파들은 사각형이 아닌 삼각형 깃발이 큰 돌에 눌려 있었다고 했다. 혹시 삼각형의 다른 깃발을 보고 누군가 만들어낸 시나리오일 가능성도 있다. 갱달은 깃발이든, 바위든 나의 등반을 의심하지 않는다. 갱달은 ‘오은선은 등정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 다음의 첫 등정자가 현장 정황을 가장 잘 알 것이다.”

-등정 후 공개한 소속사(블랙야크) 깃발이 조작되지 않았나.

“그것은 깃발 의혹이 제기되기 훨씬 전의 일이다. 나는 등정을 끝낸 직후 늘 하던 대로 모든 사진을 회사에 전달했다. 소속사에서 광고와 홍보에 쓰기 위해 회사 로고를 강조하려고 손을 댔다고 한다. 상표를 돋보이게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의도적인 것이 아니다.”

-칸첸중가 등반 경험이 있는 국내 산악인 7명이 모인 대한산악연맹 ‘서밋미팅(summit meeting)’의 결론은 의혹에 쐐기를 박는 격이 됐다. 그 중요한 자리에 왜 참석하지 않았나.

“줄곧 의혹을 제기해온 산악인들이 주도한 자리였다. 심지어 연맹 관계자는 나에게 ‘이제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사실을 떠나 대세의 문제다’라는 말까지 했다. 산악계 공식단체가 진실과 관계 없이 대세를 따르겠다는 것이 말이 되나. 이게 무슨 투표로, 과반수로 결정할 일인가. 그들에게 해명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 자리에 참석한 엄홍길씨는 그후 공개적으로 ‘그런 결론에 동의한 적 없다. 오은선의 말을 믿는다’고 했다. 또 다른 대표 산악단체인 한국산악회도 ‘칸첸중가 등반을 인정한다’는 입장이다.”

-셰르파 옹추의 매수설도 제기되고 있다.

“옹추는 칸첸중가를 네 번이나 오른 베테랑이다. 한왕용, 김웅식과도 칸첸중가에 올랐다. 그는 한 번도 등반 의혹이나 시비에 휘말린 적이 없다. 왜 누르부의 말은 ‘양심선언’이고, 옹추의 말은 ‘조작’이라고 단정짓나.”

-또 한 명의 셰르파인 페르마는 왜 침묵을 지켰나.

“당시 페르마는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한 김재수씨 팀에서 두 달 동안 가셰르브룸 1, 2봉 등반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송은 페르마가 잠적한 것처럼 처리했다. 페르마는 카트만두에 돌아와 ‘우리는 분명히 정상에 올랐다. 왜 그런 소리들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등반 당시 누르부와의 관계는 어땠나.

“칸첸중가에 이어 안나푸르나, 낭가파르바트에도 같이 가기로 했었다. 그런데 그의 손가락, 발가락에 동상이 걸려 다음 등산에는 데려갈 수 없었다. 정상 사진을 제대로 못찍은 것은 누르부의 동상도 이유가 됐다. 그들에게 등반은 가족의 생계가 걸린 문제다. 치료비 외에 보상에 대한 기대도 했던 것 같다. 나는 이런 경우가 처음이어서 보상에 대해 생각지 못했다. 에이전시로부터 뒤늦게 이야기를 전해듣고 회사와 의논해서 조치해 주겠다고 했다. 그랬는데 다음 등산을 준비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고 그 시기가 늦어졌다.”

-그후 누르부를 만난 적이 있나.

“없다. 누르부는 홀리에게 내가 정상을 오르지 않았다는 증거 사진을 제출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아직까지 내놓지 않고 있다. 최근에 대한산악연맹 경기연맹 전무가 네팔에서 누르부를 만났다고 한다. 누르부는 이 자리에서 ‘옹추 말이 맞다. 내가 착각한 것 같다’고 시인했다. 세 명의 셰르파가 함께 홀리의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말도 했다고 전해들었다.”

-네팔에서 50년 가까이 히말라야 등반에 관련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온 엘리자베스 홀리도 당신의 등정을 ‘논쟁 중’으로 기록했다. 인정을 못 받은 것 아닌가.

“홀리는 스스로 말하듯 기록자일 뿐 판단자는 아니다. 의혹이 제기되면 그대로 기록한다. 홀리는 ‘논쟁 중’이라고 기록된 등정도 모두 성공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밝혔다. 아니라는 확증이 나오지 않는 한 등정한 것으로, 지금의 기록을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그는 ‘오은선의 말을 100% 믿는다’고 했다. 홀리는 의혹을 제기한 한국 산악계에서 해결할 문제라고 했다.”

-정상이 아닌 곳을 정상이라고 착각했을 가능성은 없나.

“눈보라가 너무 심해 딱 정수리 포인트에는 설 수가 없었다. 정상 주변에 돌멩이, 바위가 있었고 거기서 사진을 찍었다. 그것이 진실이다. 그 위치, 지점에 대해서 정상이냐, 아니냐 문제삼는다면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곳은 정상으로 기록된다.”

-솔직히 고미영씨와의 14좌 완등 레이스에서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있었을 것 아닌가.

“물론이다. 세계 여성 최초 완등자가 되고 싶었다. 최근에 김재수씨와 통화했다. 오히려 기자들이 자기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하소연했다. 의혹 제기를 한 적이 없다고도 했다. 그랬는데 최근에 또 홀리를 찾아가 한국에서 제기된 등정 의혹을 브리핑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홀리가 ‘오은선 참 힘들겠다’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 같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산악인으로서 깊은 회의와 슬픔을 느꼈다. 처음에는 너무나 충격이 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몇몇 강의나 행사도 취소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처음부터 짚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내가 산을 떠날 수는 없다. 그러나 산악계는 떠나고 싶은 마음이다. 지금은 담담하려고 애쓰고 있다.”

오은선의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그는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 인터뷰를 안하려 했는데… 울지 않으려 했는데…”라며 눈가를 훔쳤다.

-‘경쟁자’였던 파사반은 자신이 14좌를 완등한 최초의 여성으로 인정받기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같은 산악인이자 선의의 경쟁자였던 그의 마음은 이해한다. 내가 칸첸중가 등정을 마치고 베이스 캠프에 돌아왔을 때 눈물을 글썽이며 축하한다고 말했다. 내가 잘못될까봐 걱정했다고도 했다. 같은 산악인으로서 진심이 통하는 것 같았고 그런 파사반을 보고 감동했다. 그 모습이 진실이었기를 바란다.”

-최초가 아니더라도, 히말라야 14좌 완등만으로도 대단한 일 아닌가. 기왕 의혹이 불거졌으니 칸첸중가를 재등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요즘 가장 많이 듣는 얘기다. 그러나 이미 끝난 등반에 대해 재등정할 필요를 못느낀다. 문제 제기를 한 사람들이 다 같이 가서 한 번 검증을 해보자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목숨을 거는 일이다. 다시 갈 생각이 없다.”

그는 세 시간 가까운 인터뷰를 끝내며 물었다. “내가 나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이 많은 얘기들을 꾸며내는 것 같은가요? ‘아니면 말고’ 식으로 근거도 없이 ‘거짓’으로 몰아가면 ‘진실’은 어디서 찾을 수 있나요?”

◇ 오은선 누구인가

전북 남원 출생. 1985년 수원대 전산학과 1년 때부터 산과 인연을 맺었다. 93년 봄 서울과학교육원 전산직 공무원을 그만두고 에베레스트 여성원정대에 합류해 베이스캠프에 갔다. 97년 가셰르브룸2(8035m)에 올랐다.

2002년 유럽 최고봉 엘부르즈(5742m) 등정을 시작으로 2004년 남극 최고봉인 빈슨매시프(4897m)까지 올라 한국 여성 최초로 7대륙 최고봉을 등정했다. 지난 4월 안나푸르나(8091m) 정상에 오르면서 히말라야 8000m 이상 14좌 등정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