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vs 인간…'맹신'과 '거부' 사이에서 균형 잡기
2011. 3. 13. 02:47ㆍ자연과 과학
신 vs 인간…'맹신'과 '거부' 사이에서 균형 잡기
[프레시안 books] 칼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특히 세이건은 종교의 긍정적, 부정적 역할을 논하면서 그 동안 자연, 우주 속에서 신의 존재 증거를 찾으려는 시도를 강하게 비판한다. 특히 세이건이 수천 년 동안 제시된 신 존재 증명을 하나하나 논파하는 내용은 마치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한음 옮김, 김영사 펴냄)의 전주곡을 보는 듯하다.
이런 세이건의 입장을 염두에 두고 한국을 대표하는 천문학자 홍승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와 종교학자 김윤성 한신대학교 교수가 비판적 서평을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홍승수 교수는 세이건의 명저인 <코스모스>(사이언스북스 펴냄)를 완역해 국내에 소개하는 등 그와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과학자다. 홍 교수는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을 각 장별로 꼼꼼하게 해설하면서, 세이건의 입장을 비판한다. 세이건의 책과 홍 교수의 서평을 통해서 과학과 종교를 바라보는 과학자의 다양한 관점을 살피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종교학자인 김윤성 교수가 홍승수 교수에 비해서 세이건에 호의적인 것도 흥미롭다. 김 교수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거론하는 과학자 사이에서 세이건이 차지하는 위상을 소개하고 나서, 역시 책의 흐름을 따라가며 그의 주장에서 음미해볼 만한 지점을 짚었다. 김 교수는 세이건에 대한 논평을 통해서 종교에 대한 '맹신'과 '부정' 사이의 제3의 길을 제시한다.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높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과학과 종교에 대한 또렷한 관점을 제시하는 홍승수, 김윤성 교수의 서평을 전제한다. <편집자>
ⓒ사이언스북스 |
캐나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삶과 음악을 다룬 영화 <글렌 굴드에 관한 32개의 짧은 필름>에서 마지막 에피소드 두 편의 소재는 보이저 탐사선이다. 바흐의 짧고도 강렬한 '작은 푸가 라단조'를 배경으로 보이저 탐사선의 이륙 장면이 보인다. 이어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잔잔한 주제인 '아리아'가 흐르는 가운데 새하얀 눈밭 위에 서 있는 굴드가 보인다.
음악이 <평균율> 1권의 1번 '다장조 프렐류드'로 바뀌고 굴드는 뒤를 돌아 멀리 걸어가기 시작한다. 내레이터가 보이저 탐사선 이야기를 들려준다. 탐사선에 탑재된 골든 레코드에는 굴드가 연주한 이 프렐류드도 담겼다는 설명과 함께. 내레이션이 끝난 후 굴드의 뒷모습은 지평선 너머 아득한 소실점을 향해 더욱 멀어지고 프렐류드 선율도 끝난다.
이제 곧 태양계를 벗어나 더 먼 우주로 나아가게 될 보이저 탐사선, 피아노라는 기계적 악기와 집요하게 씨름하며 오롯이 외길을 걸은 굴드, 그리고 음악에 무한한 깊이를 부여한 바흐. 확실히 이들 사이에는 겹치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넓고 어두운 우주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고독한 존재인가 하는 주제다.
▲ 칼 세이건. ⓒ사이언스북스 |
우주를 탐구해 온 과학자는 많지만, 세이건만큼 일반 대중이 우주의 경이를 그토록 생생한 전율 속에 느끼게 해 준 과학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광대하고 어두운 우주에서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한 이 지구란 얼마나 작고 이례적인 별인지, 또 그 별의 표면에서 사는 우리 인간이란 얼마나 작고 고독한 존재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물론 이 느낌은 열패감이나 우월감, 그리고 고립감이나 절망감과는 거리가 멀다. 우주 저 멀리 어딘가에 또 다른 지적 존재가 있든 없든, 생명의 기미를 지닌 또 다른 별이 있든 없든, 지구의 형성이 우주의 기나긴 역사에서 벌어진 기적적인 사건이고, 생명의 출현과 인간의 진화가 사실상 불가능이나 다름없던 확률이 현실화된 또 다른 기적적 사건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지구는 비록 작지만 우주가 무의미한 사건의 연속에 그치지 않게 해주는 중요한 별이며, 인간은 비록 외롭지만 텅 빈 우주에서 어쩌다 우연히 나타났다 사라질 부산물 이상의 의미를 지닌 존재다. 넓고 어두운 우주의 경이를 대면하며 느끼게 되는 짧은 감탄과 긴 고독은 인간과 지구에 더욱 깊은 존재의 근거를 선사한다.
인간이 존재의 근거를 이해해 온 가장 오래되고 가장 주요한 원천은 종교였고,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하늘 너머의 신적 존재나 삼라만상에 가득한 우주적 법칙에서 존재의 근거를 찾는 종교적 상상력은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적어도 근대 이후로는 과학이 단순히 자연을 파악하고 조작하는 지식과 기술의 차원을 넘어 존재의 근거를 성찰하는 새롭고 강력한 원천으로 떠올랐다. 이후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놓고 다양한 견해들이 각축을 벌여 왔다. 종교계의 견해나 신앙과 과학을 조화시키려는 종교인 과학자들의 견해는 일단 접고 무신론 과학자들의 견해만 보면, 과학과 종교는 같은 진리를 놓고 다투기에 양립 불가능하며 결국은 과학이 종교를 밀어낼 것이라고 보는 반종교주의, 과학과 종교란 서로 다른 영역에 관여하기에 구태여 싸울 필요도 애써 접붙일 필요도 없다고 보는 분리주의, 생태계 보전 같은 절박한 과제를 위해 과학과 종교가 손을 잡아야 한다고 보는 협력주의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각 진영을 대변하는 기라성 같은 과학자들이 있지만, 대표적 인물을 들자면, 위의 순서대로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제이 굴드, 그리고 에드워드 윌슨을 꼽을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세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과학자가 있다. 흔히 무신론자로 간주되지만 정작 본인은 스스로를 불가지론자로 여긴 사람, 우주를 탐구하고 우주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일에 평생을 바친 사람, 인류가 종교라 불리는 것을 통해 묻고 답해온 궁극적 물음을 판에 박힌 종교적 언어가 아닌 과학과 상식의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새로운 언어로 바꾸어 제기한 사람. 바로 칼 세이건이다. 우주 탐구를 향한 그의 헌신과 열정은 우리로 하여금 우주를 바라보는 인간-지구 중심적 관점을 벗어나게 해 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을 역사책 속의 죽은 지식이 아닌 생생한 경험으로 실감하게 해 주었으며, 광대한 우주 안에서 지구와 인간의 고독이라는 근원적 존재 조건과 대면하게 해 주었고, 이로써 종교가 주도해 온 궁극적 물음의 향연에 과학이라는 막강한 레퍼토리를 추가하여 존재의 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욱 풍성하게 해 주었다.
세이건의 입장은 과학과 종교의 협력을 말한다는 점에서 윌슨의 협력주의와도 상통한다. 하지만 무신론자인 윌슨이 당장의 급선무를 위해서라면 신념의 차이는 잠시 접어두자며 유신론자들에게 전략적 타협을 제안하는 것과 달리, 불가지론자인 세이건은 이런 전략적 타협을 넘어서서 과학과 종교, 특히 유신론보다 더 넓은 맥락의 종교가 좀 더 진지한 대화와 협력을 도모하자고 제안한다. 그는 종교가 우주와 생명과 인간에 대한 이해와 성찰에 기여해온 바를 인정하면서, 비록 과학이 종교가 수행했던 많은 부분을 대체해 왔고 앞으로 더 많은 부분을 대체하게 될 것이기는 해도, 또 종교가 과학적 오류나 윤리적 죄악을 저지른 경우가 많기는 해도, 종교에는 (물론 그는 바람직한 종교와 그렇지 않은 맹신을 구분한다) 앞으로도 계속 우주와 생명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고 인간을 포함한 뭇 생명과 그 터전인 지구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담당하는 역할을 할 것이며, 바로 이러한 공동의 목표 안에서 종교와 과학이 얼마든지 대화하고 협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앤 드루얀이 남편 세이건의 유작인 1985년 기퍼드 강연 녹음을 정리하고 편집해 2006년에 간행한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은 그야말로 보석 같은 책이다. 세이건 필생의 과학적 성취와 주요 저작의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1995년)이나 <에필로그>(1997년, 유작) 같은 책에서 감질나게만 다루었던 종교 이야기가 '자연 신학', 즉 신이라 불려온 궁극적인 무엇에 관한 생각을 계시나 경전이 아닌 자연에 대한 경험적 관찰과 합리적 추론을 통해 풀어내는 작업으로 본격적으로 시도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드루얀이 편집자 서문에서 밝혔듯이,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이라는 제목은 본래의 세이건의 본래 강연 제목이 아니라 그가 애독했던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1902년)을 차용해 그녀가 붙인 것이다. 세이건이 좋아했다는 제임스의 종교 정의, 즉 "(종교란) 우주 속에서 도리어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라는 명제는 세이건의 지향과 이 책의 성격을 잘 말해 준다.
세이건이나 드루얀이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제임스의 책에 있는 좀 더 긴 종교 정의를 읽어보자. "(종교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의 지고선은 그 질서에 우리 자신을 조화롭게 맞추는 데 있다." 제임스는 특정 종교의 은어는 물론 그 어떤 종교적 색채의 어휘도 일체 배제한 채 지극히 일반적인 언어로 종교를 정의하는데, 세이건이 생각한 종교 정의도 바로 이런 것이다.
저토록 넓고 어두운 우주에는 보이지 않는 분명한 질서가 있으며, 우리 인간은 합리적 사고와 경험적 지식으로 그 질서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고, 우주적 질서의 일부이자 (적어도 지구에서는 유일하게) 그 질서를 이해하게 된 존재로서 우리 인간은 지구와 생명에 대한 책임을 감당해야 하고 감당할 수 있다는 것. 이런 세이건의 생각은 서양의 유신론 주류 종교 전통들을 기준으로 한 인격적 신 중심의 종교 이해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그의 종교 이해는 오히려 궁극적 실재를 비인격적인 우주적 법칙으로 이해하는 대부분의 동양 종교들 및 서양의 비주류 유신론 종교 전통들의 신비주의와 상통하며, 현대 유신론 종교들이 범신론과 고전적 유신론이라는 두 뿌리로부터 새롭게 발견해낸 유력한 신 개념인 만유재신론과 일맥상통한다.
세이건의 종교 이해 자체는 종교사의 다채로운 견해들 중 특정한 견해와 맞닿아 있기에 그 자체로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세이건은 적어도 서양이라는 맥락에서 (심지어 서양 바깥에서조차 지배적이 되어 버린) 유신론 종교, 특히 유일신교 중심주의를 벗어난 폭넓은 종교 이해를 견지했고, 무엇보다 여기에 자신과 선후배 과학자들의 엄밀한 과학적 지식과 논증을 결합했다는 점에서 새롭다. 그가 우주의 광대한 깊이와 그 이면의 질서가 선사하는 경이로움에 전율하면서 그 깊이를 헤아리고 질서를 탐구하는 과학이 일종의 "지적 예배"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세이건은 과학 이전 시대에 종교들이 약간의 경험적 관찰에 감정과 직관을 섞어 각자 나름대로 (물론 파편적으로) 제시했던 우주와 생명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과학을 통해 더욱 깊어졌고 앞으로도 더욱 깊어질 것이라고 보았으며, 이 점에서 그는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 국한된 좁은 의미의 '종교를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좀 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넓은 의미에서 '종교적 추구'에 전념했다고도 할 수 있다. 아니, 이런 표현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좀 바꿔서, 이렇게 말해 보자. 우주와 생명과 인간에 대한 단순한 과학적 지식을 획득하는 차원을 넘어 이 모든 존재의 궁극적 기원과 미래 그리고 근원적 의미를 추구한 세이건의 진지한 모색에는 상당한 심오함이 깃들어 있다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어쩔 수 없이, 역사적 태생과 변화를 겪어 온 우리의 언어에서 이런 심오한 추구를 지칭하는 데 가장 유용하게 또 가장 널리 사용되어 온 어휘 중의 하나가 바로 '릴리지온' 아니던가!
강연의 첫마디는 세이건을 20세기의 지도적 무신론자로 떠받들어 온 이들을 당혹케 만든다. 그는 플루타르코스를 인용한다.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이라면 무신론의 낭떠러지와 미신의 늪 사이에서 아주 힘든 길을 나아가게 마련이다." 강연의 방향은 정해졌다. 불가지론자이자 회의론자이며 자연주의자인 이 과학자는 증거 없는 맹신에 불과한 미신도 피해야 하지만 과학으로 무장한 무신론도 피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합리적인 건 분명하고, 또 세이건이 동료 과학자들의 무신론적 신념을 비난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가 우주의 광대함과 질서에서 형언할 수 없는 압도적인 경이를 느꼈고, 그 경이로운 우주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자신의 과학적 추구가 종교적 경건과 어딘지 상통한다고 여겼으며, 비록 진리에 접근하는 방식과 진리라고 주장된 것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방식은 달라도 "과학과 종교의 목표는 결국 동일하다"고 생각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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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로 운을 떼며 시작한 첫 강의와 계속 이어지는 나머지 여덟 편의 강의는 세이건의 다른 책들을 읽은 적이 있는 독자에게 묘한 데자뷔를 일으킨다. 이 강연이 종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추가하고 있기는 해도 대개 강연 이전과 이후의 다른 저작들에서 펼쳤던 과학적 논의들을 압축적으로 요약하고 있기에 드는 느낌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감각이 뇌 속에서 일순간 뒤엉키며 벌어지는 데자뷔는 무어라 말로 형언하기 힘든 묘한 감정을 유발한다. (묘하기는 해도 그것은 종교적 경험은 아니다. 나는 데자뷔가 얼마나 쉽게 종교적 경험으로 착각되는지에 관한 회의주의자들의 견해에 동의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지구에서 시작해, 우리 태양계를 거치고, 그 태양계를 회전 원판 날개 한쪽 끝에 거느린 우리 은하를 거쳐, 우리 은하를 포함한 무수한 은하들이 가득한 거대한 우주로 차츰 확장해 가면서 광대한 우주의 경이와 그 안의 작디작은 거주민인 우리 자신에 대한 겸손을 느끼게 해주는 첫 강의(1강 자연과 경이)의 내러티브는 내 기억 속의 온갖 경험과 겹친다.
가깝게는 <콘택트>의 영화 판본에서 어린 앨리의 까만 눈동자 속으로 온 우주가 한순간에 녹아들던 첫 장면과 소설 원작에서 어린 앨리가 밤하늘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아찔한 경험을 하던 장면, 그리고 SETI 과학자가 된 앨리가 웜홀을 지나며 목격한 아름답고 경이로운 은하의 모습에 경탄하여 "(과학자가 아니라) 시인이 왔어야 했어!" 하며 울먹이듯 탄식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좀 더 멀게는 대학 시절 <코스모스> 읽기에 처음 도전하던 때가 생각나고 (과감히 도전은 했지만 이내 포기했고, 비로소 일독에 성공한 건 10년도 더 지나서의 일이다), 더 멀게는 30년 전인 중학생 시절 흑백 TV로 방영된 <코스모스> 다큐멘터리 시간을 알지 못할 흥분과 호기심에 매주 기다렸던 때 (1980년 12월 KBS에서 방영했다. 미국에서의 첫 방영과 같은 해 불과 몇 달 후의 일이니 지금 생각해도 참 빠른 수입 방영이었던 셈이다.
여담이지만, 몇 년 전 총천연색 DVD로 이 다큐멘터리를 비로소 다시 볼 기회가 있었으니, 사실 이게 가장 최근의 기억이기는 하다. 안타깝게도 이 고전적 다큐멘터리는 우리나라에서 VHS로만 출시되었을 뿐 DVD로는 출시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멀게는 굳이 시골에 가지 않아도 등화관제 훈련 때면 마당의 평상에 누워 짙은 밤하늘의 빼곡한 별들과 뽀얗게 흐르는 은하수의 장관에 넋을 잃곤 하던 때가 떠오른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데자뷔가 계속되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는다. 데자뷔의 감흥에만 젖어 있기에는 세이건이 펼치는 이야기가 무척이나 새롭고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과학적 지식의 축적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주와 생명을 대하면서 왜 대상을 인격화하는 사고 습성을 버리지 못하며, 이는 종교의 본질에 관해 무얼 말해주는지(2강 코페르니쿠스로부터의 후퇴), 우주가 온통 유기 물질로 가득한데도 우리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에 생명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현재의 관찰 결과와 다른 천체의 생명 존재 가능성을 추론할 수는 있어도 당분간은 그 증거를 발견하지는 못하리라는 전망이 말해주는 바는 무엇인지(3강 유기 우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한 과학적 추론에 따라 우리보다 발전된 문명을 지닌 지적 존재를 상정하고 그들이 보냈을지도 모를 전파를 수신하려는 SETI 프로젝트가 어떤 과학적 가치와 인간학적 의미를 지니는지(4강 외계의 지적 생명체), UFO와 외계인에 대한 대중적 증거와 신념이 왜 단 하나의 경험적 증거도 없는 한낱 망상일 뿐이고, 이런 망상이 기적이나 유물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과거(와 현재)의 사기 행각이나 종교 산업과 얼마나 많이 닮아있는지(5강 외계인 민간전승)에 관해 과학과 종교의 온갖 역사적, 현재적 지식을 엮어 이야기를 풀어내는 세이건의 말재주는 실로 감탄스럽다.
신 존재 증명의 시도들을 반박하면서 이런 논증들은 단지 "우리가 사실이기를 바라는 것을 정당화하고, (…) 감정을 추스르는 것에 불과하며, (…) 설득력이 전혀 없다"고 논박하는 대목은 좀 밋밋한데, 이는 이 논박이 대개 이미 오래전에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충분히 반론을 완수했던 낡은 논쟁을 약간의 과학적 자료를 곁들여 재연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6강 하느님에 대한 가설들).
하지만 동양의 서양과는 사뭇 다른 신 관념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신 존재 증명을 소개하고, 신을 '큰 덩치에 흰 수염을 하고 하늘 위 보좌에 앉아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까지 일일이 세고 있는 백인 할아버지'로 간주해 온 서양적 신 이미지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를 지적하며(이 표현은 '한낱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일일이 아시는 하느님이 하물며 소중히 여기시는 인간을 나 몰라라 하시겠느냐'고 한 성경 속 예수의 말을 패러디한 것이다. 마태복음 10:31~32; 누가복음 12:6-8), 스피노자와 아인슈타인처럼 "우주의 물리 법칙의 총합으로서 (비인격적인) 신"을 생각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소개하는 대목은 그야말로 혜안으로 번득인다.
특히 이 마지막 대목은 인격적 신 개념을 넘어서고자 하는 세이건의 종교관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은 같은 해인 2006년에 약간의 시차를 두고 출간되었다. 먼저 책을 낸 도킨스가 대서양 건너에서 드루얀이 세이건의 21년 전 기퍼드 강연록을 출간하려는 중이라는 소식을 알았는지, 또 이 강연 자체를 알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본래 순서에 따라 세이건의 강연을 먼저 듣고 도킨스의 책을 나중에 읽었더라면 가뜩이나 진부한 도킨스의 신 존재 증명 반박은 세이건의 아류처럼 보여 더욱 맥이 빠졌을지도 모르겠다.)
잠시 쉰 셈 치고 (중반을 넘었으니 쉴 만하긴 했다) 책장을 계속 넘겨보자. 문화인류학과 신경생리학을 통해 종교적 심성이나 경험의 기원을 추론한 성과들이 소개된다. 많은 이들이 수긍하듯, 이런 성과들이 종교의 기원에 관한 결정적 증거를 제시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종교의 핵심에 관해 중요한 무엇인가를 알려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핵심이란, 인간은 권위에 굴복하는 성향과 평등을 지향하는 성향, 그리고 폭력 지향성과 평화 지향성의 상반된 기질을 동시에 타고났으며, 어느 쪽 기질이 발휘되느냐는 전적으로 사회적 조건과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종교 역시 인간의 이 부정적 성향과 긍정적 성향이 동시에 발현되어 온 사회 문화적 산물이며, 따라서 온갖 병폐에도 불구하고 인류 사회에 일정한 기여도 해 왔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세이건의 결론이다(7강 종교적 경험).
마지막 두 편의 강연은 모든 생물 종의 불가피한 운명인 멸종이 오직 인간에 의해서만큼은 자연적 과정이 아닌 인간 자신의 선택에 의해 초래되어 급기야 인류라는 종의 멸종은 물론 대다수의 생물 종마저 덩달아 멸종시킬 암울하고도 명백한 가능성, 즉 "창조에 반하는 범죄"인 핵전쟁이 야기하는 일련의 성찰적 과제와 윤리적 결단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도 세이건의 생각은 명확하다. 종교들이 비록 파괴적 권력 앞에서 비겁한 침묵을 지키거나 심지어 그러한 권력에 신성한 후광을 덧씌우는 질을 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지혜와 덕목을 통해 핵전쟁으로 인한 궁극적 파괴를 막아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종교란 인류가 겪어 온 기나긴 생물학적, 사회문화적 진화 과정에서 생겨나고 펼쳐져 온 유산으로서, 과학과 마찬가지로, 지구의 미래에 드리워진 불확실성의 그림자 걷어내고 인류와 뭇 생명의 생존을 지켜내기 위해 동원해야 하는 능력과 지식의 값진 보고다. 물론 어디까지나 종교들이 인습적 신념에 얽매이거나 과학을 거부하지 않고, 신념의 혁신을 도모하고 과학과 기꺼이 소통하는 한에서 말이다(8장 창조에 반하는 범죄; 9강 탐색).
도킨스 이후 반종교적 무신론 과학자, 철학자, 저술가들의 종교 관련 저술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오고, 이에 질세라 무신론과 반종교주의의 도전에 대응하는 종교계의 저술도 홍수를 이루고 있다. 이런 와중에 무신론과 맹신의 양극단을 피하면서 우주의 경이로움에 대한 심오하고 경건한 감각을 견지하는 가운데 자신과 선후배 과학자들의 과학적 탐구를 종교를 포함한 인류 문화에 대한 성찰과 결합한 세이건의 강연록이 출간된 것은 매우 뜻 깊다.
특정 종교와 무관한 불가지론자이자 회의주의자이자 자연주의자인 한 과학자가 좁은 의미의 종교를 넘어서서 보여 준 훨씬 더 깊은 차원의 경건한 추구, 그리고 우주와 생명과 인간의 궁극적인 존재 근거를 성찰하고 그 토대 위에서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인류가 쌓아 온 모든 지식과 실천을 끌어안고자 한 진지한 모색은, 과학과 종교는 물론 인류 역사와 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생각하며 또 다른 미래를 꿈꾸는 이들에게 선명한 한 줄기 빛을 선사해 줄 것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적어 본다. 세이건의 논지에 관해서는 그다지 토를 달고 싶지 않다. 그러기에는 독서의 여운이 여전히 강렬해서다. 한 걸음 물러서서 이 책을 다시 읽을 수 있으려면 좀 더 시간이 흘러야 할 것 같다. 다만 세이건이 사고와 신념의 특정한 양태인 '애니미즘'을 좀 더 포괄적인 사고 경향인 '인격화(또는 신인동형화 : anthropomorphism)'와 혼동한 것이나 애니미즘을 말하기 위해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를 끌어들인 것은 좀 문제가 있다. '애니미즘'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이론화를 시도한 사람은 프레이저가 아니라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로서, 타일러의 <원시문화론>(1871년)은 프레이저의 <황금가지>(2권짜리 초판본은 1890년에 간행되었고, 13권짜리 최종판은 1915년에 완간되었다)보다 한참 앞서 나왔다. 게다가 프레이저가 애니미즘을 단지 자연의 가공할 힘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과 관련짓는 단순한 이해에 그친 것과 달리 타일러의 애니미즘 이론은 '원시인'이 현대인 못지않은 복잡한 사고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왜 자연에 대한 오인된 추론에 이르게 되는지에 관한 길고도 정교하게 논의를 제시한다('원시인'에 작은따옴표를 친 것은 '프리미티브'를 '원시'나 '미개'로 번역해 온 관행이 뜨거운 논쟁의 도마에 올라 있기 때문이다). '애니미즘'을 말하려 했다면, 당연히 프레이저가 아닌 타일러를 끌어왔어야 한다. 하긴 지금도 프레이저의 명성이 타일러를 압도하고 있고, 인류학자나 종교학자들조차도 거의 읽지 않는 <원시문화론>에 비해 <황금가지>가 여전히 꽤 중요한 교양 필독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이건이 프레이저를 과신한 것이 꼭 세이건 자신 탓만은 아닐 수도 있기는 하겠다.
▲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칼 세이건 강연, 앤 드루얀 편집, 박중서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프레시안 |
또한, 'God'을 대개 '하느님'으로 번역했는데, 영어와 한국어의 뉘앙스 차이를 생각하면, 차라리 '신'으로 번역하는 것이 나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하느님'('하나님'도 같이, 아니 더 많이 쓰이고 있으니 번역의 곤란함은 더욱 가중된다)은 신의 인격성이 부각된 용어다. '님'이라는 어휘소 자체가 인격적 대상을 지칭하거나 사물을 인격화하는 데 쓰이기 때문이다. 반면 'God'은 주로 인격적 신을 지칭하는 데 쓰이기는 해도, 역사적으로 엄연히 신의 비인격적(법칙적) 측면도 포괄해 온 용어다. 서양의 신비주의 전통들은 궁극적 실재를 인격적 존재뿐 아니라 비인격적 법칙으로도 이해하는데, 이러한 종교사적 함의를 내포한 복합적 용어인 'God'의 번역어로는 인격성에 경도된 '하느님/하나님'보다는 인격성과 비인격성을 아우르는 면이 강한 '신(神)', 또는 문맥에 따라 적절하게 '신격(神格)'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큰 무리 없이 잘 읽히는 편이다. 세이건의 귀한 강연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해 준 역자의 노고에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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