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부론, 아담 스미스

2012. 8. 10. 17:06경영과 경제

〈국부론 The Wealth of Nations〉으로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저서 〈국부(國富)의 성질과 원인에 관한 연구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1776)는 자유방임주의를 표방한 최초의 경제학 저서로 잘 알려져 있다.

스미스는 커콜디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1737년 글래스고대학교에서 도덕철학을 공부했다. 그뒤 옥스퍼드대학교 베일리얼 칼리지에서 연구를 계속하다가 1748년에는 케임스 경의 후원으로 에든버러에서 공개 강좌를 맡았다. 당시 강좌의 일부는 수사학과 순수 문학을 다룬 것이었으나 이후에는 '풍요로운 진보'를 주제로 삼았다. 스미스는 '단순·명백한 자연적 자유의 체계'라는 경제철학을 최초로 전개해 후일 전세계로 퍼져나가게 했는데, 그의 나이 20대 중반 이후의 일이었다. 1750년경 그는 가장 가까운 친분을 나누게 되는 데이비드 을 만났다. 1751년 다시 글래스고대학교에서 논리학과 도덕철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1759년에는 인간성을 다룬 〈도덕감정론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펴냈다.

1764~66년 가정교사로 젊은 버클루 공작과 함께 여행을 한 스미스는 1767년 커콜디로 돌아온 후 9년 동안 런던과 커콜디를 오가며 〈국부론〉을 집필하는 데 주력했다. 바로 이 저작에서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 '(invisible hand)의 명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손은 모든 개인이 각자의 이해에 따라 움직이는 경제체제를 이끄는 힘으로서 경쟁을 표현한 개념이었다. 1777년 스코틀랜드의 관세·소금세 위원으로 임명된 뒤 어머니와 함께 에든버러에서 지내던 중 중병을 앓고 1790년 죽었다. 스미스는 소득의 많은 부분을 남들이 모르게 자선 사업에 기부했다고 알려져 있다. 죽기 직전 스미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초고들을 거의 모두 없애버렸다. 말년에 그는 2가지 중요한 논문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중 하나는 법이론과 역사에 관한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과학과 예술에 관한 것이었다. 사후에 출판된 〈철학적 주제들에 관한 소론 Essays on Philosophical Subjects〉(1795)은 바로 그 2번째 논문에 담고자 했던 내용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스미스가 〈국부론〉을 저술하면서 그 사상체계의 수립에 몰두하고 있던 18세기 중엽의 영국은 중상주의 정책의 한계가 드러나고, 이 제도하에서 성장하여 자립의 힘을 축적한 산업자본가계급이 새로운 생산력의 담당자로 대두하는 역사의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신흥산업도시인 글래스고에서 산업혁명의 태동을 직접 감지한 스미스는 당시 확립되어가고 있던 자본제적 재생산 과정의 자율성의 인식 위에서 중상주의 정책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자유방임사상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할 것을 자신의 학문적 과제로 삼았다. 스미스는 불후의 명저 〈국부론〉에서 경제사회에서의 조화로운 자연질서의 지배를 객관적으로 논증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추구에만 여념이 없는 경제인의 주체적 행동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국부의 증진과 생산력 향상이라는 각자가 의도하지 않은 예상치 못한 사회적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밝히려고 했다.

〈국부론〉은 서론을 제외하고 모두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에서는 국부를 국민의 노동으로 매년 공급되는 모든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실질국민소득에 상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스미스는 그의 주된 관심이 1인당 실질국민소득의 크기와 그것을 결정하는 경제적 사정의 규명이라 밝히고 있다.

제1편에서는 화폐적 세계의 배후에 전개되는 사회적 분업의 메커니즘과 그 생산물이 각 계층에 분배되는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있다. 국부의 크기를 좌우하는 요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생산력이다. 스미스는 노동생산력 향상의 원인을 무엇보다도 상품교환에 매개된 광범위한 사회적 분업의 전개에서 구하고 생산력의 향상 정도는 분업의 침투의 정도, 즉 시장의 넓이에 의해 궁극적으로 규정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분업론의 일반적 기초를 상품의 교환관계를 규제하는 가격론과 가격의 구성요소를 논하는 분배론에 의해 설명하고 있다.

제2편의 가치론에서는 교환가치와 사용가치를 구별하고 교환가치의 척도를 노동에서 구하고 있다. 그의 이론적 설명에서는 지배노동과 투하노동의 개념이 명확히 구별되지 않고 혼재한다. 즉 자본제상품의 시장가격을 논할 때는 사실상 노동을 가치측정의 단위로 하는 지배노동가치설을 취하는 반면, 자연가격은 임금·이윤·지대 등 비용의 합계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생산비설(투하노동가치설)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이 2개의 가치론이 혼재하고 있는 스미스의 이론에서 투하노동가치설은 리카도와 마르크스에 의해, 지배노동가치설은 맬서스에 의해 분화·계승되었다. 또한 자연가격과 시장가격의 구별, 재화가격과 요소가격의 상호의존관계에 대한 인식, 재화·요소 시장에서 관철되는 수요공급설 등은 근대가격이론에 계승되었다. 스미스는 그의 분배론에서 이윤을 처음으로 독립된 범주로 확립하고 이윤율과 임금률의 동향을 발전적·정체적·후퇴적 등의 사회상태에 따라 파악했다. 국부의 크기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생산적인 노동인구의 비율이다. 생산적인 노동의 유지·증대는 자본축적에 의해 가능하므로 자본의 보전과 확대를 주로하는 재생산기구에 대한 분석이 불가피하다.

제3편에서 스미스는 스톡을 소비재·고정자본·유동자본으로 분류하고 연간생산물에 대한 총수입과 순수입을 구별한 후 이것을 기초로 하여 재생산관계를 분석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국민소득분석의 기초가 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무형의 용역을 비생산적이라고 간주하여 연간생산물에서 제외하고 있는 점이 오늘날의 것과 크게 다르다. 스미스의 자본축적론은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구별하고, 자본축적을 비생산적 노동의 생산적 노동으로의 전화라고 파악한다. 또한 자본축적에서의 자발적 저축의 역할이 투자와 결부되어 강조되게 되었는데 이것은 후에 더욱 세련되어져서 유효수요이론을 압도하고 오랫동안 정통적 학설의 지위를 차지했다. 스미스는 투자의 자연적 질서로 농·공·상(국내상업·외국무역·중계무역)의 순위를 생각하고 이러한 순서로 투자가 이루어질 때 자본은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되어 급속한 경제성장을 가져온다고 설명했다. 자본축적은 생산적 노동을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분업의 확대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조건으로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자본축적과 생산적 노동의 증대가 급속히 진전되는 사회에서는 자본증가가 인구증가를 앞서 노동자는 노동수요의 증가에 따라 고임금을 받게 된다. 한편 이로인한 국내시장의 확대는 분업의 진전과 생산력 향상을 가져와 전체적인 이윤을 증가시킴으로써 대규모의 자본축적이 가능해진다. 생산성의 향상을 시장확대와 결부시켜 이해하려고 하는 이러한 스미스의 구상은 규모의 경제와 경제발전론 등 이후의 경제학에 귀중한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 제3편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스미스의 이론을 적용하여 근대 유럽의 정치기구와 정책이 경제에 미친 교란적 영향이 분석된다. 즉 봉건제도의 존재로 인해 자본축적이 저해되고 농업에의 자본투하가 저지되어, 왜곡되고 전도된 재생산구조가 초래된 역사적 사실이 비판적으로 검출된다.

제4편에서는 각종의 독점적 특권과 제한적 규제를 수반하는 중상주의 경제정책이 가장 효율적인 자본의 자연적 배분을 왜곡시켜 자본을 외국무역과 식민지무역에 집중시키고 부의 축적을 저해하며 국제간의 불화를 초래한다는 사실이 비판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5편에서는 자유주의 사상에 상응하는 국가의 경제적 기능의 전환과 축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스미스는 자유주의 재정을 원리적으로 고찰하고 국가의 역할을 국방·사법·경찰·공공사업의 4가지로 한정하고 있다.

〈국부론〉은 경제과정의 본질에 대한 투철한 인식과 조화로운 경제진보에 대한 구상을 기초로 전5편이 유기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웅대한 경제학체계를 이루었다. 스미스의 이론은 개개의 개념과 분석장치에 있어서 독창성을 자랑할 만한 것이 많다고는 할 수 없으나, 후에 분화·대립하는 수많은 이론들의 기초가 되었으며, 포괄적이고 다채로운 내용은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의 출발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