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발] 박정희와 박근혜의 희비극 / 고명섭

2014. 12. 12. 15:49정치와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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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발] 박정희와 박근혜의 희비극 / 고명섭

등록 : 2014.12.11 18:46 수정 : 2014.12.11 20:27

고명섭 논설위원

“시종의 눈에 영웅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폴레옹이 썼다는 이 말을 자기 저작에 여러 차례 인용한 사람이 헤겔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과 <법철학>에서 이 말을 쓴 뒤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것은 시종의 주인이 영웅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시종이 시종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헤겔은 말년의 <역사철학강의>에서 이 말을 되풀이하면서 괴테가 자기 말을 가져다 써먹었다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헤겔의 요지는 역사적 인물을 시종의 눈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위대한 인간도 시종에게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범속한 인간일 뿐이다. 또 시종의 눈에 잘 보이는 건 무대 뒤 주인의 사생활이다. 헤겔은 칸트 식의 엄격한 도덕 잣대는 시종의 눈과 같아서 이런 척도로 재면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추락하고 만다고 지적한다. 윤리적 엄격성보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위업이다. 역사는 부도덕한 야망을 수단으로 삼아 전진한다. 악을 통해 선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헤겔이 말하는 ‘이성의 간계’다.

박정희 통치 시대를 긍정하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헤겔의 이런 사고방식에 의지하는 듯이 보인다. 박정희가 독재를 했고 폭력을 썼지만 결국은 ‘조국 근대화’라는 업적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독재와 폭력이라는 악을 수단으로 삼아 조국 근대화라는 선을 이루어냈으니 박정희 통치는 역사적 차원에서 정당성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적 절차를 거쳐 박정희는 단순히 나쁜 독재자가 아니라 산업화의 토대를 닦은 위인이 된다. 그렇게 박정희를 헤겔의 나폴레옹처럼 높이고 나면, 박정희의 부도덕성을 문제 삼는 건 시종이나 하는 짓거리가 되고 만다. 박근혜 대통령의 등장은 박정희 독재에 대한 이런 역사적 정당화 위에서 가능했다. 영웅이란 악을 무릅씀으로써 역사적 과업을 달성하는 사람이다. 박정희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박정희 신화가 만들어진다.

그 박정희를 자아이상으로 삼아 살아온 사람이 박근혜다. 박근혜에게 아버지는 삶의 모델이자 정치의 스승이다. 아버지의 통치행위에는 민주주의가 들어설 곳이 없었다. 대통령이 곧 국가였고, 권력은 대통령의 사유물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딸에게 민주주의를 익힐 기회가 있었을 리 없다.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대로다. 국가기관의 광범위한 선거개입으로 대통령이 되고도 그게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 표를 얻으려고 내놓은 수많은 공약을 파기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를 모르는 권력정치의 폐해다. 그리고 그런 통치의 밀실에서 측근·비선의 구더기들이 알을 까고 나온다.

영웅의 부도덕을 정당화한 헤겔의 역사철학은 뒷날 엄혹한 비판에 직면했다. 독일 역사가 프리드리히 마이네케는 비스마르크의 군국주의가 1차 세계대전으로 폭발해 독일 패망으로 이어진 뒤, 지난날 헤겔 역사관에 공감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을 감행했다. 이때 마이네케가 헤겔의 ‘이성의 간계’에 맞서 제시한 것이 ‘권력의 데모니(악마성)’이다. ‘이성의 간계’ 논리에 취하면 “도덕적 감각이 무디어지고 권력정치의 무절제를 가볍게 볼 위험에 빠진다.”(<국가권력의 이념사>) 권력의 악마적 성질을 두둔하면 결국 악이 선까지 잡아먹게 된다는 것이 마이네케의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박정희 강권통치 시절과 현재 사이에는 40년 가까운 시간의 간격이 있다. 이 간격을 무시하고 박정희 통치방식을 되풀이하는 것은 거의 희비극적인 반복이 되고 만다. 박근혜 대통령은 권력을 사적인 용도로 휘두르면서 아버지가 가르쳐준 정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과는 아버지의 희화화이고 자기 자신의 몰락이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