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사법부, '인혁당 무죄' 50년 걸렸다

사형집행 이미 끝나, '사법살인' 결과로…"반공법 위반 무죄 선고한 것은 정당"아시아경제 | 류정민 | 입력 2015.05.31. 16:17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사법부 최대 치욕사건이라는 '인혁당' 사건의 재심 결과는 무죄였다. 대법원이 1965년 유죄를 선고한지 50년만인 2015년 '무죄'가 최종 확정됐다. 사건 관련자는 이미 사형이 집행된지 오래됐고, 사법부는 '사법살인'이라는 부끄러운 기록만 남기게 됐다.

대법원 3부(주심 대법관 권순일)는 고(故) 도예종씨 등 '1차 인민혁명당' 사건에 연루된 9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31일 밝혔다.

인혁당 사건은 굴곡의 현대사 한복판에서 사법부가 어떻게 '권력의 도우미' 역할을 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 대법원

1964년 박정희 정부가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1차 인혁당 사건'이 터졌다.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1964년 8월 북한 노동당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기획한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해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중이라고 발표했다.

정치적 위기국면을 돌파하는데 '색깔론'을 꺼내들었다. 담당 검사들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할 수 없다고 하자 검찰 지휘부가 중앙정보부의 기소송치의견서를 그대로 옮겨 기소를 감행했다. 담당 검사들이 일제히 사표를 낼 정도로 논란의 대상이 됐던 선택이었다.

법원은 검찰 지휘부의 무리수를 걸러내기는커녕 동조했다. 1심은 일부 유죄 판결이 나왔지만, 2심은 전원 유죄 판결로 뒤집혔다. 대법원도 1965년 9월 2심 판결을 받아들여 유죄를 확정했다.

인혁당 관련자들은 박정희 정부가 정치적 위기에 몰렸을 때 다시 뉴스의 중심에 섰다. 1974년 유신 반대 움직임이 거세지자 중앙정보부는 이른바 '2차 인혁당 사건'을 터뜨렸다. 이번에도 도모씨 등 관련자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도씨 등 8명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도씨는 판결이 내려진지 18시간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인혁당 피해자 가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까지는 수십년이 걸렸다. 2차 인혁당 사건 피해자와 유족들은 2007~2008년 법원에서 재심 끝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1차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2011년 재심을 청구했고, 서울고법은 2013년 11월 무죄를 선고했다.

서울고법은 "피고인들은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에 의해 가혹행위를 당하거나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임의성 없는 자백을 했고, 검사 앞에서의 자백도 특별히 임의성이 있었다고 볼 자료가 없으므로, 피고인들에 대한 검사 작성의 각 피의자신문조서 또는 피고인들 작성의 진술서 등의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2015년 5월29일 원심을 확정됐다. 대법원이 이들에게 '유죄'를 선고한지 50년만이다.

대법원은 "원심이 그 판시와 같은 이유를 들어 위 피고인에 대한 구 반공법(1980. 12. 31. 법률 제3318호로 폐지되기 전의 것) 위반의 공소사실에 대하여 범죄의 증명이 없다고 보아 이를 유죄로 판단한 제1심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한 것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