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경제학자/ 이익과 이용휴
2016. 11. 22. 14:58ㆍ경영과 경제
[시인과 경제학자]성호 이익과 혜환 이용휴-세속에서 벗어나 민중의 삶을 살피다
역사는 끊임없이 돌고 돈다고 했다. 설령 과거가 똑같이 거듭되지는 않더라도 그 운율은 반복된다고 마크 트웨인은 말했다. 운율은 반복되는 소리의 길고 짧음이나 높고 낮음이 보이는 질서 있는 흐름이다.
17세기 후반 조선은 내부정치의 모순과 숱한 권력투쟁으로 그 기운을 다해가고 있었다.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주변국과의 비수평적 관계로 국력은 약해져갔다. 학문으로 묶인 붕당을 기초로 한 정치체제는 권력추구만을 위한 당쟁으로 변질되고 국기는 문란해졌다. 국고도 바닥났다. 빈민 구제방안으로서 보릿고개에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할 때 돌려받는 환곡제도는 모자란 세금을 충당하려는(?) 지방관청과 나라의 대민(對民) 고리대금사업이 되어버렸다. 군역 대신 세금을 내도록 한 영조의 정책은 홍보 반 정책 반으로 바뀌었고, 군역기피는 늘어만 갔다. 집이 없어 자진해서 노비가 되는 사람들도 늘었다. 지방세력가와 양반들이 가진 땅은 비등록 토지가 되었고, 세금을 부과받지 않았다.
조선에도 ‘경제학’은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국의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셜의 말마따나 ‘사람의 일상을 연구하는 학문’이 곧 경제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체계적으로 짜여진 학문적 성격보다는 교과서의 정의대로 나라의 자원을 가장 효과적으로 배분하는 도구로서의 성향-응용경제학으로 일컬어지는-이 강했을 것이다.
당대의 경제학자로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여럿 있겠지만, 성호 이익을 빼놓을 수는 없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알려져 있는 그는 이론체계가 탄탄한 경제학자였다. 이익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그러니까 마셜의 말대로 사람들이 살아가기 힘들었던 시기에 속한 학자로, 주변 백성들과 조화하며 경제정책들을 제언했다. 당쟁으로 인해 집안을 잃은 그는 학문에만 뜻을 두고 실학·경제학을 만들어나갔다.
<성호사설>은 중농주의자인 그의 경제학원론인 셈이다. 여기서 그는 ‘한전론’을 제안했다. 조선 후기의 토지와 관련된 고리대금이나 소작 착취와 같은 문제를 정확히 파악했다. 특히 고향 경기도 안산에서 거하며 농촌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직접 보았다. 생산요소로서뿐 아니라 체제 유지의 조건으로서 땅의 중요성을 이해했고, 지금의 ‘기본소득’을 주장했다. 백성에게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일정한’ 양의 토지 영업전(永業田)을 모두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썼다. 토지 소유 및 거래의 상한을 두어 점진적 분배를 유도하고자 했다.
자본이 가지는 자기증식적인 면을 지적하며 이를 가능케 하는 화폐 무용론도 주장했다. 이 점은 일상-시장-자본주의로 사회를 고찰한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페르낭 브로델의 시각에 닿기도 한다. 오랫동안 이어져오는 민중의 삶이 맨 위층의 자본주의에 의해 지배당할 수 있는 폐해를 지적한 것으로 생각된다. 화폐와 그 유통에 대해 비관적이었으므로 근검을 강조한 것은 도리없는 결론일 것이다.
“시골 아낙 두 마리 개를 딸리고/ 광주리에 점심밥을 담아 내간다/ 벌레가 국그릇에 뛰어들까봐/ 호박 잎 따다가 위를 덮었네.”(<혜환 이용휴 시전집>) 다른 지방의 관직에 부임하는 벗에게 정치를 바르게 행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시를 쓴 사람은 혜환 이용휴다. 연암 박지원과 비견될 정도로 유명한 시인·문인이다. 혜환은 이익의 조카이기도 하지만, 손꼽히는 그의 제자다. 그 역시 스승을 좇아 관직에 뜻을 두기보다는 세속에서 벗어나 학문에 진력했다.
거지와 같이 생활수준이 낮은 사람의 입장에서 소설을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여러 문학 교수들은 혜환을 당대에서 가장 참신하고 기발한 시인으로 평한다. 특히 시의 본령인 파격의 시인으로, 또 ‘지금’과 ‘여기’를 읊은 시인으로. “이 방안에서 몸을 돌리면 방위와 명암이 바뀐다네/ 구도란 생각을 바꾸는 것이네”(<낭송 18세기 소품문>)라고 한 데에서 보듯 말이다. 이들 시인과 경제학자의 사제지간은 흡사 ‘케인즈 학파’에서 불쑥 튀어나온 시인을 보는 느낌이 들게 한다. 이 놀라운 변주는 성호와 혜환을 포함한 그들 ‘학파’가 민중들과 함께 호흡하며 공부했기 때문에 생긴 당연한 선율이라고 믿는다.
<김연(시인·경제학자)>
17세기 후반 조선은 내부정치의 모순과 숱한 권력투쟁으로 그 기운을 다해가고 있었다.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주변국과의 비수평적 관계로 국력은 약해져갔다. 학문으로 묶인 붕당을 기초로 한 정치체제는 권력추구만을 위한 당쟁으로 변질되고 국기는 문란해졌다. 국고도 바닥났다. 빈민 구제방안으로서 보릿고개에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할 때 돌려받는 환곡제도는 모자란 세금을 충당하려는(?) 지방관청과 나라의 대민(對民) 고리대금사업이 되어버렸다. 군역 대신 세금을 내도록 한 영조의 정책은 홍보 반 정책 반으로 바뀌었고, 군역기피는 늘어만 갔다. 집이 없어 자진해서 노비가 되는 사람들도 늘었다. 지방세력가와 양반들이 가진 땅은 비등록 토지가 되었고, 세금을 부과받지 않았다.
조선에도 ‘경제학’은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국의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셜의 말마따나 ‘사람의 일상을 연구하는 학문’이 곧 경제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체계적으로 짜여진 학문적 성격보다는 교과서의 정의대로 나라의 자원을 가장 효과적으로 배분하는 도구로서의 성향-응용경제학으로 일컬어지는-이 강했을 것이다.
성호 이익, 혜환 이용휴
당대의 경제학자로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여럿 있겠지만, 성호 이익을 빼놓을 수는 없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알려져 있는 그는 이론체계가 탄탄한 경제학자였다. 이익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그러니까 마셜의 말대로 사람들이 살아가기 힘들었던 시기에 속한 학자로, 주변 백성들과 조화하며 경제정책들을 제언했다. 당쟁으로 인해 집안을 잃은 그는 학문에만 뜻을 두고 실학·경제학을 만들어나갔다.
<성호사설>은 중농주의자인 그의 경제학원론인 셈이다. 여기서 그는 ‘한전론’을 제안했다. 조선 후기의 토지와 관련된 고리대금이나 소작 착취와 같은 문제를 정확히 파악했다. 특히 고향 경기도 안산에서 거하며 농촌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직접 보았다. 생산요소로서뿐 아니라 체제 유지의 조건으로서 땅의 중요성을 이해했고, 지금의 ‘기본소득’을 주장했다. 백성에게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일정한’ 양의 토지 영업전(永業田)을 모두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썼다. 토지 소유 및 거래의 상한을 두어 점진적 분배를 유도하고자 했다.
자본이 가지는 자기증식적인 면을 지적하며 이를 가능케 하는 화폐 무용론도 주장했다. 이 점은 일상-시장-자본주의로 사회를 고찰한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페르낭 브로델의 시각에 닿기도 한다. 오랫동안 이어져오는 민중의 삶이 맨 위층의 자본주의에 의해 지배당할 수 있는 폐해를 지적한 것으로 생각된다. 화폐와 그 유통에 대해 비관적이었으므로 근검을 강조한 것은 도리없는 결론일 것이다.
“시골 아낙 두 마리 개를 딸리고/ 광주리에 점심밥을 담아 내간다/ 벌레가 국그릇에 뛰어들까봐/ 호박 잎 따다가 위를 덮었네.”(<혜환 이용휴 시전집>) 다른 지방의 관직에 부임하는 벗에게 정치를 바르게 행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시를 쓴 사람은 혜환 이용휴다. 연암 박지원과 비견될 정도로 유명한 시인·문인이다. 혜환은 이익의 조카이기도 하지만, 손꼽히는 그의 제자다. 그 역시 스승을 좇아 관직에 뜻을 두기보다는 세속에서 벗어나 학문에 진력했다.
거지와 같이 생활수준이 낮은 사람의 입장에서 소설을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여러 문학 교수들은 혜환을 당대에서 가장 참신하고 기발한 시인으로 평한다. 특히 시의 본령인 파격의 시인으로, 또 ‘지금’과 ‘여기’를 읊은 시인으로. “이 방안에서 몸을 돌리면 방위와 명암이 바뀐다네/ 구도란 생각을 바꾸는 것이네”(<낭송 18세기 소품문>)라고 한 데에서 보듯 말이다. 이들 시인과 경제학자의 사제지간은 흡사 ‘케인즈 학파’에서 불쑥 튀어나온 시인을 보는 느낌이 들게 한다. 이 놀라운 변주는 성호와 혜환을 포함한 그들 ‘학파’가 민중들과 함께 호흡하며 공부했기 때문에 생긴 당연한 선율이라고 믿는다.
<김연(시인·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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