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4. 12:11ㆍ쿠오바디스 행로난
ㆍ인간다움의 뿌리는 ‘몸 기술’
“문명의 사고와 근본적으로 다른 ‘미개의 사고’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문명인의 오만과 착각일 따름이다.”20세기를 빛냈던 고전 <야생의 사고>를 관통하는 핵심이다.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이 책을 통해 이른바 ‘문명인’의 오만과 허위에 무시 못할 경종을 울렸다.
■매뉴얼이 앞서지 않고 현장이 앞서다
‘브리콜뢰르(bricoleur)’는 레비-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에서 미개의 사고 따윈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 것 중 하나다. ‘손재주꾼’ 정도로 번역되는 이 말은 삶터에 주어진 재료와 공구로 그때그때 필요한 바를 뚝딱 만들어내는 자를 가리킨다.
비유컨대 척척박사가 있어 잡다한 지식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줬다면, 손재주꾼이 있어 잡다한 공작(工作)을 통해 이러저러한 생활의 필요를 해결해줬다. 하여 섬이나 밀림같이 닫힌 세계에 살면서도 그때그때의 문제를 해결해가며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곧 자기 문명을 창출하고 갱신할 수 있었다. 구조주의로 무장한 레비-스트로스는 이들의 활동을 ‘구체의 과학’이라 명명, 이것이 문명인의 ‘추상의 과학’에 대응된다고 보았다. 곧 문명이든, 이른바 ‘미개’이든 간에 과학이 공통적으로 삶의 영위와 문명 창출, 갱신에 관건이라는 증언이었다.
과학은 기술의 형식으로 삶터에서 개화된다. 문명이든, ‘미개’든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다양한 기술을 지닌 손재주꾼은 실은 ‘미개’의 세계에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언제 어디에든 있었고 지금도 존재한다. 그들은 전문적으로 수련을 쌓은 장인과는 다르다.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여러 작업을 두루 해낸다. 현장에 그렇게 주어진 도구와 재료만으로도 적당한 솜씨를 발휘해 현장의 결여를 충족한다.
매뉴얼 같은 것도 없다. 단지 현장의 여건과 필요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매뉴얼을 작성해 달라면 못한다며 손사래를 친다. 그러나 공작, 곧 짓기를 통해 삶터의 필요에 부응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은 ‘삶의 기술’을 지닌 삶의 전문가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모습에선 장자(莊子)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그들이 장인이 된 까닭-몸과 하나 된 기술
<장자>에는 ‘기술의 달인’이 다수 실려 있다. 수레바퀴 제조의 달인 윤편을 비롯하여, 동그라미와 네모를 그리면 그 자체로 완벽한 원이 되고 네모가 되는 공수, 만들어내는 악기마다 귀신 같다는 찬사를 받은 재경, 19년째 소를 잡았건만 한번도 칼을 갈 필요가 없었던 포정 등. 언뜻 그 경지를 가늠할 수 없어 보이는 장인이 여럿 등장한다.
그들에게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 그런 경지에 올랐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이렇게 답한다. “내 안의 모든 욕망과 생각을 비워낸다”, “재료의 있는 그대로를 바탕으로 삼는다”, “만들어낼 것과 하나가 된다”, “천리의 자연스러운 결대로 작업한다” 등. 그럼으로써 ‘나’와, 내가 지금 구사하고 있는 기술 사이에 아무런 틈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 나는 부지불식간에 기술을 부리며, 현장의 필요를 충족하는 활동을 벌이게 된다. 몸이 저절로 기술을 부리며 움직일 뿐, 곧 나조차도 그에 개입하지 않으면 자기처럼 된다는 뜻이다.
고차원적 경지를 얘기함이 아니다. 공수나 재경, 포정 같은 장인의 솜씨를 예컨대 해탈의 경지로 이끄는 기술로 이해할 필연적 이유는 하나도 없다. 부분적이지만, 우리도 일상에서 넘치도록 활용하는 기술임을 굳이 부인할 까닭도 없다. 저들이 말하는 기술을 우리는 걷기를 통해 이미 구현해왔다. 헤엄을 칠 때도, 자전거를 타거나 운전을 할 때도 우리는 그런 유형의 기술을 익히 발휘하고 있다. 머리로 매뉴얼을 참조하지 않아도 우리는 걷고 헤엄치고 타고 운전하는 데에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으며, 대부분의 경우 썩 잘해내기까지 한다.
이는 기술과 나 사이에 다른 것이 끼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올림픽에서처럼 다른 무언가를 위해 걷거나 헤엄치거나 운전하는 것이 아닌 한, 우리는 걸으면서 걷고 있음을 능히 잊으며, 헤엄치고 운전하면서 그런 활동을 하고 있음을 기꺼이 망각한다. 여기서 <장자>의 장인들과 레비-스트로스가 목격한 브리콜뢰르, 곧 손재주꾼이 만난다. 그들도 재경이나 포정처럼 기술을 사용한다는 말이 아니다. 현장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몸에 익은 기술이 저절로 발휘된다는 것, 여기서 둘 사이의 교집합이 형성된다는 뜻이다.
■기계의 기술이 아닌 ‘나’의 기술
단적으로, 작업의 결과가 훌륭하든 말든, 또 그 결과로 인해 내가 어떤 이익을 더 얻든 말든, 이들에겐 그러한 것들은 그저 부차적이거나 눈 밖의 일일 따름이다. 장자의 표현을 쓰자면 ‘기심(機心)’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기심은 ‘기계의 마음’이란 뜻이다. 기계를 진실하지 못한 존재로 보는 쪽에선 이를 ‘거짓된 마음’ 등으로 풀기도 한다. 장자 또한 당시 재테크와 구변으로 유명했던 자공을 내세워 부정적 맥락에서 이 말을 사용했다. 저간의 얘기는 이러하다.
하루는 자공이 길을 가다 밭일을 하는 노인을 우연히 목격했다. 노인은 저 밑에 있는 샘물에서 물을 길어 날라 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보다 못한 자공이 용두레 사용을 권했다. 용두레는 낮은 곳의 물을 손쉽게 퍼 올릴 수 있는 농기계였다. 그런데 노인의 반응이 의외였다. 처음엔 화난 기색을 띠더니만 웃음 지으며 말했다. “기계를 쓰면 마음에 ‘기계의 일(機事)’이 생기고, 그것이 생기면 ‘기계의 마음’이 생겨날 수밖에 없소이다. 기계의 마음이 심중에 있으면 순수함과 깨끗함이 갖춰지지 못하고, 그렇게 되면 정신과 품성이 안정을 이루지 못하여 결국 도가 깃들지 않게 되지요.”
한마디로 기계를 쓸 줄 몰라서 ‘못’ 쓴 게 아니라 마음이 오염되고 정신의 평정이 깨져, 그래서 진리와 무관한 삶을 살게 될까봐 ‘안’ 쓴다는 것이었다. 장자는 다른 곳에서 “있는 그대로의 바탕을 해쳐 기구를 만든 것이 장인의 죄”라고 논단한 적이 있다. 장자가, 기계는 사용자를 변이시키는 존재임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계를 사용함으로써 자연을 닮은 삶에 다가설 수 있다면, 사람의 도덕 역량이 증진되어 인간다운 삶의 실현이 더욱 가능해진다면 기계 사용을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기계가 그 역으로도 사람을 이끈다는 점이다. 기술 탓에? 아니다. 장자는 사람과 기술 사이에 ‘기계의 일’이 끼어듦으로써 그런 일이 발생된다고 보았다. 그 순간 사람과 기술 사이에 틈이 생기게 되어, 기계를 부릴 줄은 알지만 기계가 하는 일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초래된다. 그럴수록 나와 기술 사이엔 기계의 마음이 더욱 차올라 기술은 나와 괴리되고, 나는 누군가가 만든 기계의 단순 사용자로 전락한다. 나의 몸은 무능력해지고, 그 결과 우리는 나의 기술이 아닌 기계의 기술을 사용하며 일상을 살아간다.
■‘순돌이 아빠’ 또는 ‘유해진’ 되기
그러다 기술의 주체인 나, 곧 인간이 기계에 종속되기도 한다. 이는 인간이면서 인간이기를 멈춘 것이다. 묵자는, 사람이 날짐승이나 들짐승, 벌레 등과 구분되는 근거는 ‘힘씀’, 곧 문명 창출로 이어지는 작위적 노동에 의해 생존해야 하는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으로 보았다. 우주의 신령함이 깃들었기에, 하늘의 선함을 부여받았기에 뭇 생명과 다른 특권적 지위를 점하게 됐다는 사유와는 전혀 딴판인 견해다.
묵자가 얼마 전 중국에서 세계 최초로 쏘아 올린 양자위성의 이름 므어쯔(墨子)로 활용된 데서 보이듯, 제자백가 가운데 최고의 과학기술자이기 때문에 그런 사유를 개진했던 것은 아니다. 유학자인 정약용은 ‘기예론’에서, 하늘이 금수에게 발톱과 뿔을 주고 단단한 발굽과 날카로운 이를 준 것처럼 사람에겐 지혜와 사유능력을 줘서 기예를 익혀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했다고 하였다. 그 역시 묵자처럼 동물과 사람의 변별점을 도덕 등에서 찾지 않고 기술의 구비에서 찾은 셈이다.
더구나 그는 “아무리 성인(聖人)이라도 천 명, 만 명이 함께 의논한 것을 당해낼 수 없다.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기예가 더욱 정밀해지고, 세대가 거듭될수록 기예는 더욱 훌륭하게 된다”는, 당시로선 꽤나 혁신적 주장을 내놓았다. 성인들이 문명의 이기를 만들어준 덕분에 인간이 문명을 일구며 살게 됐음은 부인키 어렵지만, 그렇다고 그들만이 문명의 주체는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이 문명을 일구고 갱신하는 데에 성인의 역할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민중의 ‘집단지성’이 큰 역할을 했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다산이 보기에 사람이고자 하는 한, 사람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기술을 익혀야 했기 때문이다.
곧 내가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에 기술의 습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얘기다. 나를 인간으로서 살도록 해주는 ‘삶의 기술’을 반드시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방송 프로그램 <삼시세끼>의 유해진이 될 필요가 있다. 1980년대로 치자면, <한 지붕 세 가족>이란 드라마 속 ‘순돌이 아빠’ 같은 존재가 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극중에서 또 ‘리얼한’ 현장에서 필요한 바를 주어진 여건에서 뚝딱뚝딱 해결해가는 능력의 소유자들이다. 다른 무엇의 기술이 아닌, ‘나의 기술’을 자기 몸에 붙인 우리 사회의 브리콜뢰르들이다.
이를 위해선 우리 교육이 초등단계부터 고등단계에 이르기까지 ‘짓기’ 활동을 중심으로 재편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삶의 기술을 나의 몸에 ‘나의 기술’로 아로새길 수 있게 된다. 9월3일자 ‘쿠오바디스와 행로난’에서 안재원 선생께서 논파하셨듯이, 사람의 몸이 집의 설계도였고 그래서 도시 문명의 뿌리였듯이, 문명을 일궈내 사람이란 생물이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해준 기술 또한 그 뿌리는 사람의 몸, 곧 우리의 몸이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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