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4. 12:09ㆍ쿠오바디스 행로난
ㆍ중국 제국, ‘오랑캐’와 중화의 이중주
■오랑캐, 중원 역사의 공동주연
결과는 참패였다.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더니만, 흉노의 유인책에 빠져 7일 밤낮을 포위됐다가 굴욕적으로 빠져나왔다. 이후 그는 화친책을 구사했고, 이는 무제가 흉노 토벌에 나서기까지 무려 100년 가까이 지속됐다.
‘오랑캐’의 대명사 흉노와 중국 제국의 본격적 길항은 이렇게 전개되었다. 그렇다고 흉노가 등장하기 전에 오랑캐란 관념이나 실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오랑캐라 지목된 종족은 중국사의 여명기에 벌써 주역이 되고도 남을 만한 활약을 벌이고 있었다. 대표적 예가 기원전 11세기 무렵, 주나라가 천자의 나라인 상을 거꾸러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사건이었다. 이는, 주나라가 서융이라 불리던 서쪽 오랑캐들을 경영하며 실력을 키웠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만큼 오랑캐의 역량은 만만치 않았다. 하여 주나라는 건국 초의 혼란 속에서도 낙읍(지금의 낙양)이란 신도시를 건설하는 데 주력하기도 했다. 동쪽 오랑캐, 곧 동이의 방비가 왕조 유지의 관건이 됐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었다. 주나라가 유왕 대에 이르러 망하는 데도 견융이라 불리던 오랑캐의 역할이 컸다. 왕조의 개창부터 기틀 마련, 마감에 이르기까지 오랑캐는 중국사의 상수(常數)로 개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후들이 유왕의 후손을 동쪽으로 모셔가 재건한 동주, 그러니까 춘추시대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훗날 소동파가 결코 순수한 중국이라 할 수 없다며 비판했듯이, 춘추시대 초엽 양대 강국이었던 제나라와 진나라는 오랑캐의 장점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오랑캐의 힘이 여전히 셌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 시기 역사를 전하는 <춘추좌전>에는 오랑캐에 나라를 잃을까 노심초사하는 제후국들의 모습이 적잖이 나온다. 급기야 공자가 제환공을 보필한 관중을 두고, 그 덕분에 우리 중원이 오랑캐에 점령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서 그를 ‘어진 이(仁者)’라고 극찬하는 일마저 생겼다. 오랑캐의 존재감이 중원 제후국을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 역사까지 성형…‘우리’를 내놓다
관중에 대한 공자의 극찬은 <논어>에 나온다. 공자는 그리도 아꼈던 제자 안회에게도 아무 조건 없이 ‘어진 이’라고 칭찬한 적이 없다. 그만큼 오랑캐로부터 ‘우리(吾)’, 곧 중국을 수호한 공로를 높이 평가한 셈이다. 그런데 공자가 말한 ‘우리’는 누구였을까. 정말 공자 당시에 실재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 물음을 던진 이유는 간명하다. 당시 중국은 각지의 제후들이 중원의 패권을 놓고 줄곧 다투던 시절이었다. 물론 아무리 치고받아도 제후들 사이의 일이었다면, 우리라는 의식이 유지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는 꽤 달랐다. <춘추좌전>을 보면, 제후국들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오랑캐와 연합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중국의 상징인 천자마저 사적인 복수를 이루고자 서슴없이 오랑캐를 끌어들였을 정도다. 단적으로, 당시는 ‘주례(周禮)’, 곧 주나라의 사회제도로 대변되는 중국을 하나로 묶어내던 제도적·윤리적 장치가 급속하게 와해되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자는 우리를 멀쩡하게 실재하는 것처럼 당연시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 물음은 21세기 지금 우리에게도 무척 중요하다. ‘우리 남편’ ‘우리 아내’ 같은 표현도 아무렇지 않게 쓰듯이, 한국인만큼 우리라는 말을 많이 쓰는 언중은 드물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과연 누구일까. 단일민족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우리에게 북한은 우리일까 아닐까. 지역, 이념, 소득 등을 기준으로 ‘갑질’하는 이들의 우리 속에 수많은 ‘을’들은 정녕 들어 있는지. 대체 어디까지가 우리이고,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우리로 묶일 수 있을지…. 공자가 우리라고 말했다면, 그는 이와 같은 물음에 답을 지니고 있었던 것일까.
다행히 <논어>에는 공자가 제시한 ‘우리’의 조건이 비교적 명료하게 나와 있다. 그는 예식을 거행하거나 <시경> <서경> 같은 고전을 읽을 때면 천자의 조정에서 사용된 공용어인 아언(雅言)을 썼다고 한다. 당시 <시경> <서경> 등은 유가들만 봤던 텍스트가 아니라, 식자라면 꼭 봐야 했던 필독서였다. 지금으로 치면 교과서를 표준어로 가르친 셈이다. 또한 공자는 이전의 역사를 단일 계보로 묶어내고, 문왕·무왕·주공 같은 이를 전 중국이 본받아야 할 문화적 성왕으로 추숭했다. 그리고 주례를 표준적이고 합당한 사회제도이자 생활양식으로 제시했다.
같은 언어를 가르쳐 동질적 사유와 감성을 빚어내고, 현재의 서로 다름을 묶어내는 깊은 역사를 엮어내며, 장차 함께 닮아가야 할 문화적 영웅을 제시함으로써 공자는 분열 일로로 치닫는 중국을 하나의 우리로 묶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자신이 이상으로 내세운 주례를 주나라 초기에 주공 같은 성인이 직접 정초한 것처럼 말했다. 로타 폰 팔켄하우젠*에 의하면, 공자가 신봉한 주례는 기원전 9세기에 재정립된 사회제도였음에도 말이다.(<고고학 증거로 본 공자시대 중국사회>, 심재훈 역).
다시 말해 공자는, 자기가 내세운 전범의 기원을 실제보다 훨씬 과거에, 그것도 이상화된 과거로 소급함으로써 그 정당성과 합법성을 확보하려 했다. 그럼으로써 그가 말한 우리는 중국에 사는 이라면 마땅히 자신과 동일시해야 하는 것으로 강제될 수 있었다. 여기서 공자의 절실함과 치열함이 목도된다. 역사를 성형해서라도 중국을 보위해야 할 우리를 만들어내야 했음이니, 오랑캐의 힘은 그만큼 녹록지 않았던 것이다.
■흉노, 차원이 다른 오랑캐
오랑캐를 이용한 공자의 ‘우리 만들기’ 기획은 사마천에 이르러 색다르게 전개된다. 그가 처한 시대 여건은 공자의 시대와 매우 달랐다. 당시는 유방이 중원을 크게 통일하여 제국이 이미 구현된 상태였다. 이에 시대정신은 제국을 어떻게 존속시켜 갈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그런 시대정신에 부응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대표적 예가 동중서란 유생이다. 그는 공자 학설에 음양오행설과 법가의 학설을 섞어 제국의 이념적 기틀을 주조해냈다. 한 세대쯤 지나자 사마천이 나와 제국에 역사적 깊이를 더해 제국이 영속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코자 했다. 공자의 기획에서도 확인됐듯이, 통시적 깊이를 더하면 공시적 넓이를 더욱 광범위하게 담아낼 수 있었다. 사마천이 자신의 역사서술에 대통일된 중국은 물론, 주변 오랑캐의 역사를 담아낼 수 있었던 까닭이다.
당시 한 제국의 주위에는 흉노를 비롯하여 남월, 동월, 서남이, 조선 등의 오랑캐가 포진해 있었다. 사마천은 이들의 역사를 <사기> 열전 부분에서 다뤘다. 그런데 실제 서술을 보면 흉노 서술전략과 나머지에 대한 그것이 사뭇 다름을 알게 된다. 남월이나 동월, 서남이, 조선에 대한 서술은 이들 오랑캐가 어떻게 한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됐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에 비해 흉노에 대한 서술은 기원전 21세기경인 하나라 때부터 사마천 당대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그들 사이에 벌어졌던 엮임과 길항의 역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앞서 소개한 유방의 굴욕적 패배마저 숨기지 않고 서술됐을 정도이다.
또한 다른 열전과는 달리, 중국과는 사뭇 다른 흉노의 역사와 문화, 풍습, 기질 등에 대한 언급도 적잖게 수록됐다. 아니, 사마천은 이를 부각시키겠다고 작정이나 한 듯이 흉노의 입장을 대변하는 중항열이란 인물과 한 제국 사신 간의 논쟁을 상세히 기술했다. 한 제국의 사신이 깔끔하게 패하는 서사를 중심으로 말이다. 한마디로, 흉노에 대한 서술은 다른 오랑캐에 대한 서술과 달리 중국이 오랑캐를 이렇게 순치했다는 차원에서 수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마천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통찰
사마천의 태도는 ‘우리’ 중국이 오랑캐로 야만시했던 그들에게 사실은 중국과 맞먹을 수 있는 그들만의 문화가 있다는 고백이었다. 나아가 중국은 그들을 중국의 예(禮)로써 복종케 할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대원(大宛) 같이, 흉노보다 더 서쪽에 있는 나라들을 서술할 때도 일관되게 적용된 중화주의가 유독 흉노에 대해서만 비켜나간 셈이다. 왜 그랬을까.
타자가 우리의 관심영역에 들어와 있는 한, 달리 말해 우리 실존의 한 구성인자로 설정된 한, 우리는 그것을 우리 식대로 규정하곤 한다. 그래야 우리가 주도하는 세상이 비로소 질서가 잡혔다고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지상정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데 우리가 부여한 질서에 편입시킨 타자가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흉노들처럼 분명 오랑캐여야 하고, 그래서 남월이나 동월, 서남이, 조선 같은 오랑캐들처럼 길들여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사마천은 ‘흉노열전’을 갈무리하는 대목에서, 흉노에 대해 말하는 이들이 중국을 과신한 채, 어떡하면 황제의 눈에 들까 하며 임시방편을 구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흉노뿐 아니라 중국 곧 ‘우리’ 자신조차 객관적으로 인지하지 못한 채, 요행과 그로 인한 이익만 바란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렇게 오랜 세월 흉노와 겨뤘지만, 실효가 별로 크지 않았던 이유라고 봤다. 그리고는 아무리 요임금 같은 성군이라도 장군과 대신을 잘 선택해야 한다며 ‘흉노열전’을 마무리했다.
결국 사마천은 타자와 그들을 오랑캐로 지목하는 우리 모두를 정확하게 인지할 때 비로소 ‘우리’ 중국 제국도 잘 돌아갈 수 있음을 갈파한 것이다. 타자에 대한 일방적 규정이 아니라, 그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때 비로소 우리 자신도 정확히 알 수 있게 되고, 국가 사회도 제대로 운영할 수 있다는 통찰을 던졌던 셈이다. 누구보다도 우리라는 말을 많이 쓰는 우리 한국인이 곱씹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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