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4. 12:07ㆍ쿠오바디스 행로난
ㆍ제국은 무엇으로 빚어지는가
시대의 이름이 ‘싸우는 나라’인 때가 있었다. 전국(戰國)시대 얘기다. 기원전 4세기 초엽 20여개의 나라로 시작된 전국시대는 얼마 후 7개 강대국 중심으로 재편되었다가, 기원전 221년 진시황에 의해 중원 최초의 대제국으로 통일되었다.
■‘싸우는 나라’들의 시대가 된 까닭
대략 250여년 사이에 20여개 나라가 하나로 통합됐다. 이 시대는 싸우지 않으면 결국 망하게 되는 시대였다. 대규모 살육전이 자행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이 시기 역사를 전하는 <사기>에 “갱십만(坑十萬)”, 그러니까 “10만명을 파묻었다” 같은 표현이 종종 출현하는 이유다.
그렇다보니 민초의 삶은 개, 돼지만도 못했다. “국토를 늘린다며 전쟁하고는 사람을 죽여 온 들판을 가득 채운다. 성을 늘린다며 전쟁하고는 사람을 죽여 온 성에 가득 메운다. 이는 땅에게 사람 고기를 바친 셈이니, 그 죄는 죽음으로도 용서될 수 없다.” 맹자의 절규다. 인민 없는 나라는 존재할 수 없기에 나라를 지키는 주된 까닭은 인민의 안위를 위해서다. 그래서 전쟁도 불사한다는 게 치자의 논리인데, 그로 인해 결과는 인민을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땅에 바치는 것이다.
오죽하면 어린 진시황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여불위(呂不韋, 292~235 BC)조차 “지금 천하는 갈수록 망해가고 성왕의 도는 끊긴 지 오래다. 제후들 대다수는 자신만의 성대한 환락을 위해 인민의 재산을 갈취하고 있다”며 통탄할 지경이었다. 싸우지 않으면 망하게 되는 환경을 야기한 게 바로 치자의 탐욕과 환락이라는 진단이다. 양식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이 상황의 타개를 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는 제자백가들이 활약하던 시기로, 저마다 나름의 처방을 내놓았다. 그런데 실현 방안 등은 달랐지만 궁극적 도달점은 역량 있는 군주에 의한 통일천하의 구현이었다. 다만 이것은 언제라도 독재로 흐를 수 있었기에 상당히 위험한 대안이었다. 역으로 그 위험성을 제거한다면 꽤 유용한 방안일 수 있었다. 이에 노자는 군주에게 무위(無爲)할 것을 요구했다. 묵자는 만물을 낳고 기르느라 쉼 없이 노동하는 하늘처럼 천자도 그러해야 한다고 주문했고, 맹자는 성선설에 기초하여 군주는 도덕 그 자체여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법가를 집대성한 한비자는 천자라 할지라도 법에 규정된 직분만을 수행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비어 있는 중심’으로서의 군주
여불위도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뛰어난 상인이었던 그는 타국에 볼모로 잡혀 있던 진(秦)나라의 공자 영정을 후원하여 그를 진나라 제후로 앉혔던 인물이다. 그리고 영정, 곧 훗날의 진시황에게 제거되기 전까지 실질적 일인자로서 천하를 호령하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재상 시절, 천하의 지식인을 모아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편찬하였다. 제목은 ‘여불위의 춘추’라는 뜻이다. 전통적으로 ‘춘추’란 말은 역사서에 주로 붙지만, <여씨춘추>는 차차 구축해갈 통일천하에 대한 구상을 체계적으로 담아낸 정론서이다. 그럼에도 춘추라 명명한 데서, 새 시대의 역사를 정초하고자 하는 그의 당찬 욕망을 읽을 수 있게 된다.
각설하고, 이 책에 표방된 통일천하 군주관의 핵심은 ‘무위’다. 여불위는 군주가 군주다운 도를 구비하면 백관이 절로 다스려지고 만민은 절로 이롭게 된다고 전제했다. 그런 후 무위가 바로 군주다운 도의 요체임을 설파했다. 겸하여 타인과 지혜나 능력, 작위 따위를 다퉈서는 안된다는 점에서, 군주는 무지해야 하고 무능해야 하며 무욕해야 한다고도 했다. 단적으로, 군주는 천하의 권력이 집중된 자리의 주인이지만 동시에 무력(無力)해야 한다고 요구한 셈이다.
여기서 무위함으로써 무력하게 된 최고 권력자 ‘군주’란 아이디어는 여불위에 앞서 노자가 제시한 바 있었다. 다만 여불위가 구상한 새 시대는 노자의 시대와 사뭇 달랐기에 똑같을 수만은 없었다. 가령 노자의 군주론은 “소국과민(小國寡民)”, 곧 크지 않은 영토와 적은 수의 인민으로 구성된 소박한 국가용이었다. 통일된 대제국에 걸맞을 수는 없었다. 하여 여불위는 그것을 이렇게 개조했다.
무위를 군주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요구한 노자와 달리, 여불위는 그것을 군주에게만 요구했고 신하에겐 근면과 역행을 강조했다. 그가 말한 무위의 군주론은 “군주의 무위를 위한 신하들의 유위”라는 구도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는, 예로부터 천하에 망한 국가들이 꽤 많았음에도 군주가 사라지지 않음은, 그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군주가 무위를 행하는 목적도 그렇기에 민생의 안정 같은 인민의 이로움 구현에 있어야 했다.
여불위가 기획한 새로운 시대는 소국과민의 시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복잡다단한 세계임은 명약관화했다. 아무리 영명한 군주라 할지라도 혼자서 모든 것을 다 알 수도, 잘할 수도 없다는 얘기다. 군주 혼자서는 결코 세상 사람들을 이롭게 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군주는 유능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하고 이들을 제대로 관리할 줄 알아야 했다. 그러고는 그들에게 정사를 일임한 채 무위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군주는 아무것도 안 하지만 세상은 이롭게 되는 형국이 구현된다. 그렇게 군주의 힘은 소거되고 중심은 비워진다. 통일제국이 독재로 치달을 위험성은 이렇게 제거된다.
■잡스러울 수밖에 없는 제국
나아가 여불위의 ‘무위-무력 군주론’은, 천하는 어느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천하의 것이라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의 정신과 만남으로써 더욱 빛을 발한다. 그는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천하의 천하” 곧 천하 사람들의 천하라고 단언했다. 아무리 군주라 할지라도 천하를 사적으로 소유할 순 없다는 뜻이다.
지금 보기엔 지극히 당연한 공리지만 당시로선 가히 혁명적인 사고였다. 이 점 때문에 강력한 중앙집권을 꾀했던 진시황에게 제거됐다는 견해가 있을 정도다. 그만큼 천하위공에 대한 그의 지향은 확고했다. 그는, 옛적 성왕들이 천하를 태평케 한 것도 이를 정사의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의지하면 천하를 얻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이는 천하를 잃게 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군주더러 무위하라는 요구는 결국 천하위공의 실현을 위한 포석이었던 셈이다.
‘무위하는 무력한 군주’라는 아이디어는 이처럼 여불위에 와서 통일제국에 걸맞은 군주론으로 거듭난다. 이 과정에서 여불위는 ‘공적 천하’라는 정신을 입론의 근거로 끌어온 다음, 유능한 관리가 널리 인민을 이롭게 하는 정사를 펼친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군주론뿐만이 아니었다. <여씨춘추>에는 여불위가 꿈꾼 새 시대에 대한 다양한 구상이 담겨 있고, 이들도 앞선 시대의 관련 의론을 통일제국이란 새로운 형식에 걸맞도록 개조한 논의였다. 군주론처럼 이론적 높이도 낮지 않았다.
이는, 여불위가 ‘잡(雜)’의 장점을 잘 구현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전통적으로 <여씨춘추>는 잡가(雜家)로 분류되었다. 그것은 여러 학설을 잡다하게 섞어 놓았다는 뜻에서 부여된 명칭이었다. 그렇다보니 <여씨춘추>를 주편한 여불위의 사유도 체계적이지 못하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는 근자의 연구가 말해주듯, ‘잡’에 대한 편견의 소산일 따름이었다.
게다가 잡스럽지 않은 것, 곧 단일하거나 순수한 것으로 감당할 수 있는 국가의 규모는 사실 크지 않았다. 노자는 소국과민을 이상으로 여겼고, 공자와 맹자의 논의는 실은 제후국용이었다. 묵가는 소규모 공동체를 전제했다. 이들의 논의만으로 통일제국이란 거대 규모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순자가 공자의 논의를 바탕으로 여러 학설을 통합해 통일제국을 기획하고, 한비자가 선배 법가들의 논의를 종합해 통일제국을 기획한 까닭이다. 더구나 천하 사람들의 것인 천하가, 또 천하 사람들 자체가 단일하거나 균질적이지 않다. 그러니 그들을 포괄하는 통일제국이 어떻게 잡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존이 아닌 생활을 위해 존재하는 국가
잡스러움은 달리 표현하면 ‘서로 다름이 한데 섞여 있음’이다. 물론 다름이 한데 섞여 있다는 것만으로 잡의 구현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잡스럽다는 표현이 부정적으로 소비되는 이유다. 따라서 왜 그렇게 섞여 있게 됐는지, 다름의 섞음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등이 해명될 필요가 있다.
여불위가 도모한 통일제국은 잡스러움을 기본값으로 포용할 수밖에 없었다. 7개 강대국 각각이 처한 자연환경, 인문 지리적 배경 등이 사뭇 다르기에 그렇다. 진시황의 실패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삶터의 조건을 무시하고 단일한 이념과 생활방식을 강제하는 건 제국의 명을 단축시킨다. 그래서 다름의 공존이 가능한 틀을 짜는 것이 통일제국 구축과 유지의 관건이 된다. 이를 위해선 잡스러움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것을 개인과 국가의 일상 차원에서 기본으로 수용하고 제도적으로 구현해내는 정신이 요청된다.
이런 점에서 <여씨춘추>의 잡스러움은 오늘날 우리에게 만만찮은 도전이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양한 다름을 공존할 수 있게 했을 때 비로소 생활이 가능해지기에 그렇다. 다름을 지역으로 나누고 이념으로 가르며 세대로 쪼개고 직업으로 찢는다면, 생활은 사라지고 생존을 위한 투쟁이 삶의 기본이 된다. 생존이 삶의 기본이 되는 국가는 문명국가라 할 수 없다. 아니, 국가라고 볼 수 있는지부터 검토해야 한다.
<여씨춘추>가 군주의 존재 이유를 “이민(利民)”, 곧 민을 이롭게 한 데서 찾았듯이, 이미 2000년도 더 되는 그 옛날에 국가는 생활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규정되었다.
이민은, 민이 개나 돼지가 아닌 한 단지 ‘배’만이 충족됨을 뜻하지 않는다. 배의 주인인 머리가 충족됐을 때 사람은 비로소 이롭다고 판단하기에 그렇다. 배를 위한 생존이 아닌 머리를 위한 생활을 가능케 하는 국가, 잡스러움은 이를 가능케 하는 필수 불가결한 조건의 하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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