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4. 12:06ㆍ쿠오바디스 행로난
ㆍ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힘은 무엇인가
‘생존’이 고파 돼지가 된 이들, 그들은 다시 인간으로 살기 위해 ‘영웅’ 오디세우스가 필요했다.
그러나 헤시오도스는 구원자가 아닌 노동이 ‘인간다움’을 만든다 말한다.
창을 든 전사가 아닌 땀 흘리는 농부에게 명예가 있다 . 그러니 “신들이 정해주신대로 일하라”
타인의 희생을 발판 삼지 않고 유익함을 가꾸는 일 ‘노동’…그것은 탁월한 것이다.
■배가 머리의 주인 노릇을 한다면?
배가 항상 머리의 주인 노릇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문명에서 철기문명으로 이행하던 때부터다. 여기에서 그들이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받은 민중을 말한다. 요즈음 회자되는 ‘개와 돼지’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호메로스의 말이다. “그녀는 지팡이로 때렸고 돼지우리에 그들을 가두어버렸소./ 그들은 돼지의 머리와 음성과 털과 생김새를 갖게 되었소. (…) 그녀는 땅바닥에서 뒹굴기 좋아하는 돼지들의 먹거리인/ 상수리와 도토리와 층층나무 열매를 그들에게 던져주었소.”(<오디세이> 제10권 237~243행)
배를 몸의 주인으로 섬겼던 ‘그들’, 오디세우스의 동료들이었다. 배가 고프면 어쩔 수 없다는 점을 십분 악용한 ‘그녀’는 바로 키르케(Circe)다. 상수리와 도토리만으로도 그들을 길들일 수 있었다고 한다. 흔히들 머리가 배의 주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실상은 배가 머리의 주인이고 그래야 한다. 오디세우스의 말이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괴롭더라도 지금은 밥을 먹게 해주시오./ 가증스러운 배보다 파렴치한 것은 달리 아무것도 없기에 하는 말이오./ 배란 놈은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이 슬픈 것처럼/ 사람들이 몹시 지쳐 있고 마음이 슬플 때에도/ 자기만 생각해 달라고 명령하고 강요하지요./ 배란 녀석은 나더러 먹고 마시라고 재촉하고 내가 겪은 모든 것을 잊게 하며 자기만 채워달라고 다그치지요.”(<오디세이> 제7권 215~221행)
머리가 배를 이겨서는 안된다.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하지만, 배가 머리를 항상 지배하는 것은 문제다. 사람의 성질과 기질마저 바꾸어 놓기에. 심지어 사람을 개와 돼지로 만들어 버린다고 하지 않는가. ‘생존’은 할지라도 ‘생활’이 없는 사람들을, 즉 배고픔 때문에 사람으로서의 성질 혹은 기질을 상실한 이들을 호메로스는 이렇게 묘사한다. “마치 주인이 배고픔을 달래주는 맛있는 음식을 늘 가져다주기 때문에 그가 잔치에서 돌아오면 개들이 주위에서 아양을 떠”(<오디세이> 제10권 216~217행)는 모습과 닮았다고 말이다. 이야기는 오디세우스가 헤르메스 신의 도움으로, 사람들을 돼지로 만들어 버린 키르케를 혼내주고 그들을 사람으로 되돌아오게 했다는 것으로 끝난다. 해피엔딩이다. 배가 머리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의 구원자로서 오디세우스의 활약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개와 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즉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오디세우스와 같은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땀과 노동,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힘
하지만 헤시오도스의 생각은 크게 다르다. 그에 따르면, 오디세우스와 같은 구원자는 필요 없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힘은 땀과 노동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다. “배고픔이 그대를 싫어하고/ (…)/ 배고픔은 게으름의 친구이다. 일하지 않고 사는 자는 인간은 물론 신들도 싫어한다./ 노동을 사랑하되, 때를 놓치지 마라./ (…)/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되고, 부자가 되는 것은 노동 덕분이다./ 일하는 자를 신들이 더 사랑하는 법이다./ 노동은 수치가 아니고, 일하지 않는 것이 수치이다./ (…)/ 부에는 위엄과 명예가 따른다.”(<일과 날> 299~313행)
청동기시대에 귀족들이 전유했던 명예가 땀이 생존의 수단이었던 농부들에게 주어지는 순간이다. ‘삽질하는’ 아킬레우스가 이제는 창피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 된다. 헤시오도스의 말이다. “경쟁은 한 종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지상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다른 하나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둘은 서로 기질이 다르다. 하나는 잔인하고/ 사악한 전쟁과 싸움을 부추긴다. 그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불사의 신들의 뜻에 따라 호전적인 경쟁을 존중한다./ 하지만, 다른 하나는 검은 밤이 먼저 그녀를 낳자/ 하늘의 높은 자리에 계시는 제우스께서 대지의 뿌리 속에 감추셨다./ 인간들에게 큰 유익함이 되게 하셨다./ 이 경쟁은 게으른 사람도 일을 하도록 부추긴다.”(<일과 날> 11~20행)
아킬레우스가 누렸던 불멸의 명성도 실은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사람에게 유익함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영웅의 명예는 전쟁과 싸움을 부추기는 것이고, 결국 나쁜 경쟁의 장식(decorum)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명예는 땅속에 숨어 있다
명예에 대한 헤시오도스의 생각은 독특하다. 좋은 경쟁, 곧 진정한 명예는 대지의 뿌리 속에 숨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욱과 둥굴레 속에 얼마나 큰 이익이 감춰져 있는지 모르고 있다./ 그게 다 신들께서 인간의 양식을 감춰두셨기 때문이다.”(<일과 날> 41~42행)
아욱과 둥굴레는 값싼 먹거리다. 하지만, 여기에 가장 큰 유익이 들어 있다고 한다. 귀족과 전쟁 영웅에게는 도무지 납득이 안될 것이다. 웃통 벗고 삽질하는 아가멤논의 모습이 말이다! 하지만, 헤시오도스는 땀이 진정한 멋이고, 노동이 고귀한 명예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한다. 부와 명예는 땀을 따라다니는 종자들이기 때문이다. 땀이 명예의 출발점이고, 노동 자체는 실은 명예의 필요조건(conditio honestatis)인 셈이다. 헤시오도스의 권고다. “옷을 벗고 씨를 뿌리고, 옷을 벗고 소를 몰며,/ 옷을 벗고 낫을 들라. 데메테르 여신의 일을 모두 제때에 맞추어 모든 것이 제때에 자라기를 바란다면./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나중에 궁핍해져서 남의 집을 돌며/ 구걸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 밀 한 톨도 주지 않을 것이다. 일하라! (…)/ 신들께서 인간에게 정해주신 대로 일하라!”(<일과 날> 391~398행)
땀을 흘려야 하는 이유가 단순히 부자가 되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 눈길이 간다. 일을 하는 것이 실은 신들이 정해준 법도를 따르는 것이기에. 아니, 단순하게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일을 ‘제때에 맞추어’ 수행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일을 해야 하는 진짜 이유
이쯤 되면, 일은 이제 단순히 힘만 쓰고 들이는 것이 아니다. 우주사(宇宙事)의 집행인 셈이다. 데메테르 여신의 일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 특히 농사를 매개로 한 노동은 자연질서에 참여하는 숭고한 실천이다. 또 우주 삼라만상의 한 중심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곧 노동인 셈이다. 문제는 이 우주사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다. 헤시오도스는 ‘제때’를 알아야 한다고 일갈한다. 제때! 그리스 말로는 카이로스(kairos)다. 대지의 뿌리에 새겨진 우주의 질서가 작동하는 순간이 카이로스다. 때를 놓치면 농사를 망치고 남에게 구걸을 해야 한다. 때를 바로 아는 것, 아니 때에 맞춰 일한다는 것, 비록 둥굴레 이파리를 돌보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모습이 청동갑옷을 두르고 전장을 달리는 모습보다 훨씬 멋있고 더 가치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신이 대지의 뿌리에 숨긴 유익함을 찾아 가꾸고 거둬들이는 것이 다른 인간의 이익과 몫을 폭력과 사기로 빼앗고 약탈하는 것보다는 훨씬 명예로운 것이기에. 약탈과 사기는 신들도 못마땅해하는 것이기에. 귀족의 전유물이던 명예가 농부들의 자랑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헤시오도스는 호메로스의 작품들에 그려진 가치체계의 전환과 전복도 서슴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서양 학문 역사에서 최초의 혁명적 사상가로 칭해질 수 있을지 모른다. 명예라는 귀족 시대의 가치를 전복한 현인으로서.
의미 전복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생각 하나를 덧붙이고자 한다. 바로 아레테(arete)이다. ‘덕’으로 옮기기는 좀 그렇다. 처음부터 덕은 아니었기에. 뛰어남, 탁월함이 맞는 번역이다. 탁월함은 어떤 부분 혹은 능력에서 기능적으로 뛰어남을 뜻한다. 예컨대, 전쟁에서 뛰어남이 아레테이다. 그런데 이 아레테는 땀과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능력이 아니라 타고난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발 빠름, 오디세우스의 머리 좋음 등은 노력을 통해서 획득된 것들일까? 어쩌면 ‘금수저’들이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는 세상이 바뀌면서 생겨난다. 상추와 쑥갓을 돌보는 데에는 발 빠름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콩밭을 매는 데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노력과 인내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헤시오도스는 이 노력을 ‘아레테’, 웃통 벗고 삽질하는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아레테라고 부른다. 단적으로, 대지의 뿌리에 감춰진 유익함을 찾아내기 위해 요청되는 탁월함은 노력과 인내이기에. 영웅은 타인과 공동체를 위해 이익을 가져다주기에 명예와 아레테를 가지고 있다는 찬사를 듣지만, 그것은 다른 나라나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다. 반면 땀과 노력은 다른 이의 희생 없이 신이 제공한 유익함을 찾아서 가꾸고 돌보는 일이고, 그 일이 실은 우주의 역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세계를 만들어 가는 탁월한 일이란 얘기다. “열등한 것은 힘들이지 않고 많이 얻을 수 있다./ 길은 평탄하고, 그것은 늘 가까이에 있다./ 하지만 탁월한 것은 그 앞에 불사의 신들께서 땀을 가져다 놓으셨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하며 거칠다. 그러나 정상에 도달하면/ 처음은 힘들지만, 나아가기 쉬워지는 법이다./ 가장 훌륭한 사람은 나중에 그리고 최종적으로 무엇이 최고인지를/ 따지며 스스로 모든 것을 깨닫는 사람이다.”(<일과 날> 287~294행)
■헤시오도스에게 일자리 문제 묻는다면
이쯤 되면, 구원자 오디세우스는 더 이상 필요 없다. 물론 문명사적 관점에서 서양 역사에서 스스로 모든 것을 깨닫는 사람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18세기 이후 계몽주의 시대부터다. 개·돼지 취급을 받던 민중이 개·돼지가 아님을 증명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까지 대략 2500년,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흐른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난제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이 가진 탁월함을 깨닫기까지는 땀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탁월함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노력이 요청된다. 어떤 능력이 내면화를 거쳐, 즉 지속적 노력을 통해 하나의 버릇(hexis)으로 자리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능력이 하나의 버릇으로 자리 잡은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라고 불렀다. 물론 웃통 벗고 쟁기질하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덕이라고 부를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헤시오도스는 다르다. 그는 이를 아레테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타고난 탁월함에서 땀과 노력을 통해서 올라가는 아레테로 가는 길은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콩밭을 매는 일에 익숙해지려면 상당한 땀과 기다림과 제때를 아는 능력이 요청된다.
이 대목에서 지금, 여기를 둘러보며 헤시오도스에게 묻고자 한다. 제때도 알고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땀과 노력을 다 바칠 각오가 되어 있음에도 일의 세계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그저 “일하라!”라는 말로 충분할까? 이런 말은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욱 뿌리 하나에도 우주의 원리가 작동하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그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아주 큰 죄악이다. 일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는 것은 우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짓이다. 일은 그저 단순히 돈 버는 짓이 아니라 우주사의 한 활동이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우주사의 집행자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해서 그냥 명령한다. 일을 나누어라! 일을 나누는 것이 우주사에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것이므로. 그런데, 이를 방해하는 것이 있다. 돈이다. 돈아! 사람들을 우주사에 참여시키는 일을 방해 말라. 돈아! 우주와 신은 특히 너에게는 아욱 뿌리에게 나눠 주었던 우주의 이익을 숨겨 둔 적이 없기 때문이다.”
'쿠오바디스 행로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쿠오바디스와 행로난](8) 각자의 차이 아우르는 보편 이념 ‘시민’이 있어 로마가 가능했다 (0) | 2017.07.04 |
---|---|
[쿠오바디스와 행로난](7) 여불위, 다름이 한데 섞인 ‘잡(雜)’으로 제국을 설계하다 (0) | 2017.07.04 |
[쿠오바디스와 행로난](5) 목숨 바쳐 약속을 지키다…공동의 의로움이 곧 이로움이므로 (0) | 2017.07.04 |
[쿠오바디스와 행로난](4) 약속과 맹세, 혼돈의 시대에 새로운 질서를 낳다 (0) | 2017.07.04 |
[쿠오바디스와 행로난](3) ‘가슴의 언어’ 노래, ‘공동체’를 만들다 (0) | 2017.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