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바디스와 행로난](5) 목숨 바쳐 약속을 지키다…공동의 의로움이 곧 이로움이므로

2017. 7. 4. 12:04쿠오바디스 행로난

ㆍ묵가, ‘이의일체’(利義一體) 도모한 공동체

칼을 단조하고 수레바퀴를 만드는 등 중국의 다양한 기술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쇄물. 사진은 <그림으로 보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로버트 템플 지음·까치) 59쪽.

칼을 단조하고 수레바퀴를 만드는 등 중국의 다양한 기술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쇄물. 사진은 <그림으로 보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로버트 템플 지음·까치) 59쪽.

기원전 4세기 후반, 하루는 진(秦)나라의 궁정에서 미묘한 기류가 생성되고 있었다. 당시 진의 군주는 혜왕(惠王)이었다. 그는 선대 군주들의 치적을 이어받아 진을 중원 최고의 강대국으로 키워낸 참이었다. 하여 ‘2인자’를 뜻하는 제후의 호칭인 공(公)을 벗어던지고 스스로를 왕(王)이라 칭하고 있었다. 왕은 ‘No. 1’에게만 붙일 수 있는 호칭이었다. 

■국가보다 공동체의 약속을 앞세우다 

묵자 부조상

묵자 부조상

진나라가 이렇게 강성해진 데에는 묵가(墨家)라 불리는 공동체가 큰 몫을 했다. 이들은 소규모로 공동체를 이루며 살던 중원 최고의 전투력을 지닌 집단이었다. 다만 묵가 시조였던 묵자(墨子)가 공격용 전쟁을 단호하게 반대하였기에 그들은 방어용 전투력만을 키웠다.

그럼에도 그들의 전투력은 중원 최강이었다. 최선의 방어는 최고의 공격이기도 하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묵가 공동체의 일부가 딴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중원을 제패하기 위해 저마다 부국강병에 매진하던 시절, 고강한 전투력을 소유하고도 작은 공동체에 만족하는 삶에 불만을 품은 일파였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사주는 곳으로 이주했다. 진나라가 바로 그곳이었다.

명나라 때 간행된 <묵자>의 내용 일부

명나라 때 간행된 <묵자>의 내용 일부

당시 진나라에 들어간 묵가 공동체는 복돈이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혜왕이 중원 통일의 요충지를 차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들에 대한 대우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런데 하루는 복돈의 아들이 사람을 죽였다. 묵가의 법에 의하면 살인죄는 사형에 처해야 했다. 비록 전쟁에 대한 관점 차이로 딴 길로 나섰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이 묵가임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아들의 사형을 앞두고도 복돈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 소식이 혜왕에게 전해졌다. 그는 복돈이 세운 공을 감안하여 아들의 죄를 사면해주고자 했다. 다만 복돈의 체면을 배려하여 군주의 권세를 내세우는 대신 인지상정에 호소했다. 연세도 높고 아들이 또 있는 것도 아니니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복돈이 아뢰었다. “살인을 막음은 천하의 대의입니다. 왕께서 은덕을 베풀어 담당 관리에게 처형하지 말라 하셨을지라도, 저는 묵가의 법을 준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순간 묘한 기류가 흘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복돈은 아들을 사형에 처했다.

묵자를 비롯해 묵가의 일원들은 모두 각종 기술의 장인들로 알려져 있다. 묵자는 ‘수레바퀴 제조’의 달인으로 전해진다. 당시 전쟁의 형식은 전차전인데, 전차 성능의 핵심은 내구성 강한 수레바퀴였다. 곧 묵자는 전차 제작의 달인으로 최강의 수비용 전투력을 지닌 묵가 공동체의 이미지와도 어울린다. 사진은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청동 전차인 ‘동거마(銅車馬)’.     진시황병마용박물관 소장

묵자를 비롯해 묵가의 일원들은 모두 각종 기술의 장인들로 알려져 있다. 묵자는 ‘수레바퀴 제조’의 달인으로 전해진다. 당시 전쟁의 형식은 전차전인데, 전차 성능의 핵심은 내구성 강한 수레바퀴였다. 곧 묵자는 전차 제작의 달인으로 최강의 수비용 전투력을 지닌 묵가 공동체의 이미지와도 어울린다. 사진은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청동 전차인 ‘동거마(銅車馬)’. 진시황병마용박물관 소장

공동체의 법과 군주의 명령이 부딪치는 순간이었다. 소규모지만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공동체와 그저 그러한 군주가 아니라 중원 최강을 실현한 군주의 충돌. 아들을 사형에 처했으니 분명 복돈, 그러니까 묵가 ‘공동체의 법’이 이긴 셈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묵가 공동체’가 이겼다고 할 수 있을까. 역사를 보면, 묵가 공동체는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한 이후 급격하게 소멸됐기 때문이다. 혜왕 사후 100여년 만의 일이었다. 

■의로우려면 이로워야 하므로 

공동체의 법을 준수한 까닭은 공동체의 지속을 위해서였는데 결국 그리 되지 못한 셈이다. 진시황이 폭군이어서 그리 된 것만은 아니다. 그가 폭군이었는지도 따져볼 여지가 있지만, 강력한 전투력을 소유한 집단이 군주보다는 공동체 고유의 법을 따른다는 것 자체가 국가엔 잠재적 위협이었다. 그러니 진시황더러 뭐라 할 바는 아닌 듯도 싶다. 궁금한 건, 이를 모를 리 없을 터임에도 묵가들이 그렇게 하도록 유도한 힘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작은 규모의 공동체라 해도 그것 역시 사회임은 부인할 수 없다. 묵가 공동체 또한 문명의 한 양태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들이 강대국의 법보다 자기들의 법을 앞세웠음은 자기 문명에 대한 충성도가 무척 높았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복돈만 그러했던 게 아니었다. 묵가들은 공동체의 법을 목숨보다 중하게 여겼다. 복돈보다 앞선 시대에 맹승(孟勝)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 또한 묵가의 한 무리를 이끌던 지도자였다. 그는 초나라의 양성군에게 영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자 약속 불이행의 죄를 스스로에게 물어 자결했다. 이에 그의 제자 180여명도 따라 죽었다. 묵가의 법에 의하면, 지도자로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는 그 책임을 목숨으로 다해야 했고, 그를 좇는 이들은 지도자를 따라야만 했다. 지도자든 제자든 묵가의 법을 철저히 따랐음이다. 

이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 이롭다는 판단이 앞섰기 때문이다. 내 아들이 죽고, 내가 죽는데 대체 무엇이 이롭다는 것인지, 쉬이 납득되는 건 아니다. 더구나 한 집단의 지도자가 그렇게 사유한다는 것은, 도무지 오늘날 같지 않아 낯설기만 하다. 그러나 자결을 만류하는 제자에게 맹승이 했던 말을 들어보자. 

“나와 양성군의 관계는 스승이 아니면 벗이거나 신하이다. 죽지 않는다면 앞으론 엄한 스승을 찾는 이도, 현명한 벗을 찾는 이도, 좋은 신하를 찾는 이도 결코 묵가에서 구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으로써만 묵가의 의를 실천하고 사업을 이을 수 있다.” 

한마디로 자신의 죽음이 묵가 전체에 이익이 된다는 주장이다. 전체에 이롭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은 의로운 것이고, 의롭기에 묵가의 사업을 지속해갈 수 있다는 논리다. 다시 말해 묵가 공동체의 법, 곧 약속의 체계를 목숨과 바꿔서라도 지키는 까닭은, 그것이 이롭기 때문이며 그래서 의롭기 때문이라는 사유다. 

약속이 공동체를, 사회를 또 문명을 일궈내고 재건하는 데의 고갱이가 되는 까닭은, 이처럼 그것의 준수가 공동체 자체에 또 문명 자체에 이롭고 의롭기 때문이었다.

■‘함께함(兼)’, 이로움을 빚어내는 풀무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는 ‘나’의 설자리가 희미하다. 묵자는 아예 타인 한 사람을 죽여 천하를 이롭게 하는 건 결코 천하를 이롭게 함이 아니지만, 자신을 죽여 천하를 이롭게 함은 진정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전체를 위해 희생하는 나의 자리는 있지만, 아무래도 개체로서의 나의 자리는 없어 보인다. 

묵자는 이렇게도 말했다. “남을 사랑함은 자기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그 사랑 속에 있는 것이다. 자신이 사랑 속에 있으니 자신이 사랑받는 것이다. 이렇게 차등이 없게 되면, 나를 사랑함이 곧 남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곧 남을 사랑함을 나를 사랑함과 똑같이 할 수 있다면, 남을 사랑함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되고 나를 사랑함이 남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이때 남에는 천하도 들어 있다. 

다시 말해 나와 남, 그리고 천하는 차등 없는 사랑 속에서 일체를 이룰 수 있게 된다. 곧 나는 전체를 위해 존재하거나 남과 차별 없이 섞여야 비로소 그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

문제는 나를 그러한 존재로 설정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동서고금의 역사가 밝히 말해주듯 말처럼 쉽지 않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와 연관된 주장이 집중적으로 전개된 <묵자> ‘겸애’편을 보면, 묵자의 주장을 실천하는 건 “태산을 옆에 끼고 황하와 장강을 건너뛰는 것”과 같다는 당시 사람들의 비아냥이 실려 있다. 이에 묵자는 ‘함께함(兼)’, 곧 가림 없는 연대가 일상적으로 실현되면 서로에게 두루 이롭게 됨을 역설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눈 밝은 귀머거리가 귀 밝은 장님’과 함께하면 서로가 눈 밝고 귀 밝을 수 있으며, 다리는 힘세지만 팔 없는 이가 팔은 날래지만 다리가 없는 이와 함께하면 둘 다 거동이 한결 나아진다는 것이다. 

이를 사회적 일상으로 확대하면, 처자식이 없는 노인도 의지하고 봉양을 받아 천수를 다할 수 있게 되고, 부모가 없는 어리고 약한 아이들도 의지하여 살 곳이 생겨 온전히 성장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나는 공동체 전체의 이로움 창출을 위해 ‘함께하는’ 행위자가 될 때 비로소 존재의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래서 이로움의 추구는 그 자체로 의로움의 실현이 된다.

묵가 공동체는 바로 이러한 행위자들로 구성됐다. 하여 ‘함께하는’ 이로움은 공동체의 정의를 무엇보다도 앞세울 수 있는 높은 충성도를 빚어낼 수 있었다. 나의 역량을 함께하고 기술을 함께하며, 사랑과 이익도 함께하는 ‘겸애교리(兼愛交利)’를 실천함으로써 빚어낸 이로움은 곧바로 ‘우리’의 의로움이었기 때문이다. 

■성장 대신 성숙을 택한 공동체 

이는, 묵자가 나를 독립된 개체로 정립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하여 묵자의 입론 아래서는 사람이 자율적 존재임이 부정될 여지가 넓어진다. 또한 사람은 본성적으로 이익을 탐하는 존재이기에 전체 이익의 실현이란 당위로 이를 제한했을 때, 공동체는 정체되고 퇴보될 수도 있다.

묵자도 이 점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 정반대로 사람의 이러한 속성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이를 토대로 묵가 공동체를 운영하고자 했다. 가령 그는 사람이 이익추구적 존재임을 자기 입론의 근거로 삼았다. 신분 간, 직종 간 차등처럼 공동체 내 제반 차별은 배제했지만, 역량에 따른 상이한 직분과 권한은 긍정했다. 이에 ‘한번 지도자면 영원한 지도자’ 식의 기득권은 부정되었고, 다른 직분을 감당할 역량을 쌓으면 그리로 옮겨갈 수도 있었다. 

공동체의 ‘파이’를 무작정 키우지도 않았다. 이익은 서로를 이롭게 하는 방식으로 공유했다. 사람의 이익추구적 본성은 더욱 유능해지고 현명해지는 방향에서 작동되도록 유도했다. 자기보다 나은 자에게 자신을 동화시켜 감으로써, 이전보다 뭔가를 더 할 수 있는 내가 되도록 했다. 그렇게 역량을 많이 쌓은 이는 공동체의 지도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고, 지도자는 하늘을 닮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다. 곧 물질적 성장을 통한 이익의 극대화가 아닌 도덕적 역량의 증대를 통한 전체의 성숙을, 공동체의 진보를 견인하는 핵으로 삼았던 것이다. 

2000년도 더 된 옛날의 시도임에도 묵가의 이러한 실험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적어도 <묵자>가 문명을 만들고 갱신하는 데 기여한 고전임은 부인키 어렵기에, 우리는 묵자의 이러한 실험에 대해 자기 입장을 세울 의무가 있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음에 한해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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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607292047005#csidxd95fecb399a405d8219a3e5ba02aa7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