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바디스와 행로난](3) ‘가슴의 언어’ 노래, ‘공동체’를 만들다

2017. 7. 4. 12:02쿠오바디스 행로난

ㆍ노래가 경전이 된 까닭

전국시대의 다양한 생활모습이 상감된 항아리인 ‘감착사회생활도화호’ 베이징 바오리박물관 소장

전국시대의 다양한 생활모습이 상감된 항아리인 ‘감착사회생활도화호’ 베이징 바오리박물관 소장

■누가 있어 그때의 일을 전해주었을까? 

사람은 유한하지만 영원을 사유할 줄 안다. 그저 관념의 유희를 위해서가 아니다. 진짜로 자기 삶의 중요한 근거로 자기 실존에 영원을 품는다. 영생을 믿고 내세를 확신하는 이만 그런 게 아니다. 사람은 꿈을 먹고살 줄 알기에, 영원에 대한 희구는 유한한 삶을 살아내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굴원이 존재의 근원을 읊은 이유다. 

“까마득한 옛날, 누가 있어 그때의 일을 전해주었습니까? 하늘과 땅이 나뉘기 전은 무얼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까? 어둠과 밝음이 어둑어둑 뭉쳐있었는데 누가 이를 다 규명했습니까?”

‘천문’의 첫머리다. 시인은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엔 무엇이 있었는지를 묻는다. 밝음과 어둠이 하나로 엉켜있던 혼돈의 상태를 궁금해한다. 이어지는 대목에선 하늘과 땅이 어떤 연유로 지금처럼 생기게 됐는지를 따진다. 겸하여 만물의 생성에도 질문을 던진다. “음과 양이 정반합처럼 섞여 만물을 낳았다고 하던데, 무엇이 근본이고 또 무엇이 변이된 것입니까?”

‘감착사회생활도화호’의 문양

‘감착사회생활도화호’의 문양

틀림없는 우주와 만물의 생성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다. 그런데 이 시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면 굴원의 또 다른 관심사를 발견할 수 있다. ‘누가’에 대한 궁금증이 그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천지와 만물의 생성에 대한 적잖은 얘기들을 접할 수 있는데, 이를 전한 이들은 누구로부터 그 얘기를 들었던 것일까. 그 누구는 또 누구로부터 들었던 것일까. 

‘감착사회생활도화호’에 새겨진 문양 중 음악 연주 부분 확대 이미지.

‘감착사회생활도화호’에 새겨진 문양 중 음악 연주 부분 확대 이미지.

그렇게 거듭 거슬러 올라가면 우주만물의 생성 순간과 함께한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가 목도한 바를 전해줘야 후세 사람들이 비로소 그에 대해 알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불가능함을 이미 알고 있다. 천지만물의 생성 이전에, 또 생성의 순간에 아무도 존재할 수 없음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주만물의 근원에 대한 적잖은 얘기들은 어디로부터 나온 것일까? 지난 글(7월9일자)에서 “이야기로 문명을 만들었다”는 안재원 선생의 통찰에는 그래서 아무런 이견이 없다. 우주만물의 생성이란 사건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게 아니라, 이야기가 그러한 문명의 기원을 만들어냈기에 그렇다. 

■노래, 가슴으로 쓰는 존재의 언어 

단적으로 이야기는 문명을 창출하고 갱신하며 종횡으로 전파하는 문명의 핵심 장치이다. 역사서는 물론 담론 구축을 지향한 제자백가의 책 상당수가 이야기로 채워진 것만 봐도 문명에서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해볼 수 있다. 

청나라 화가 초병정의 ‘공자성적도’ 채색본. ‘퇴수시서’(退修詩書·공자가 고향으로 물러나 시경과 서경을 편수하다)란 제목을 달고 있다.<br />미국 세인트루이스 미술관 소장

청나라 화가 초병정의 ‘공자성적도’ 채색본. ‘퇴수시서’(退修詩書·공자가 고향으로 물러나 시경과 서경을 편수하다)란 제목을 달고 있다. 미국 세인트루이스 미술관 소장

여기까지가 안재원 선생의 앞선 글에 대한 화답이자, 이야기의 역할에 대한 얘기다. 그런데 이야기는 왜 하필 노래의 형식을 띠게 되었을까? 지난 글에 소개된 오디세우스나 아킬레우스의 이야기는 모두 <오디세이>와 <일리아스>란 긴 노래의 일부다. 앞의 ‘천문’도 노래됐다. 그런가 하면 선조들의 찬란한 공적을 기린 이야기도 <시경>이란 노래집에 실려 있다. 왜일까?

중국 웨양(岳陽)에 서 있는 전국시대의 시인 굴원(기원전 343~278년·추정)의 동상.

중국 웨양(岳陽)에 서 있는 전국시대의 시인 굴원(기원전 343~278년·추정)의 동상.

실은 이야기뿐 아니라 담론조차도 노래의 형식을 띠고 있었다. <역경>이 그러하고 사변적 철리로 이름 높은 <노자>도 그러하다. 이야기뿐 아니라 담론도 노래처럼 읊조려졌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노래가 문명을 일구고 가꾼 주된 장치였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물론 이는 문명의 패러다임이 구두전승이었기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생존과 번식에 한결 유리한 조건을 창출하기 위해선, 살아내면서 얻은 갖은 인문적 소산, 곧 문명의 내용을 효율적으로 전해야 했다. 아직 문자가 고안되기 이전, 이에 가장 적합한 장치로 고안해낸 것이 노래였다는 것이다. 사람은 그 가슴에서 박동이 쉼 없이 울리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자(莊子)가 논파했듯이, 천지만물도 저마다 자기의 소리를 내는 피리 같은 존재였다. 삶터에 늘 함께하는 자연의 가락에 인문적 소산을 연동시켜 놓으면, 자기 신체에서 울리는 리듬에 문명 내용을 엮어 놓으면, 자연이 지속되고 내 생명이 다하지 않는 한, 그들은 언제든지 환기될 수 있다. 머리로 기억하는 경로가 아닌 가슴에 새기는 경로를 취한 까닭이다. 하여 상고시대부터 문명을 일구는 데 노래는 매우 중요한 장치로 활용되었다. 요 임금이 ‘대장(大章)’이란 악곡을, 순 임금이 ‘소(韶)’라는 악곡을 지어 인문을 빛냈다는 믿음은 그래서 신봉될 수 있었다. 관리를 파견하여 각 지역의 민요를 채집하고 이를 통해 통치의 잘잘못을 파악, 이를 정사에 반영하는 전통도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었다. 한(漢·기원전 206년~기원후 220년)이 음악을 관장하는 악부(樂府)란 부서만 유독 둔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노래의 장악이 문명화의 관건이었던 셈이니, 사서오경 가운데 <시경>을 으뜸으로 삼음은 우연이 아니었다. 

■‘머리의 언어’ 해석으로 ‘가슴의 언어’ 노래를 장악하다 

시는 노래의 다른 이름이었다. <시경>이라 불리는 노래집은 애초엔 그냥 <시>라고만 불렸다. 여기엔 기원전 11세기 무렵부터 기원전 6세기 무렵까지 민간이나 조정에서 불리던 노래 305수가 실려 있다.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司馬遷)의 증언에 의하면, 공자는 앞선 시대의 시 3000여수 가운데서 성현이 제시한 도덕준칙에 합당한 것만 가려 뽑아 <시경>을 엮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시경> 305편을 한마디로 개괄하여 “사무사(思無邪)”, 곧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고 단언했다. <시경>이 경전 중의 경전이 되기에 어떠한 흠결도 없었다는 얘기다. 다만 실상은 사뭇 달랐다. 훗날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가 <시경> 시의 대다수를 남녀 사이의 음란함을 노래한 ‘음시(淫詩)’로 규정했을 정도였다. 예컨대 이러했다. <시경>에 실린 ‘들판의 죽은 사슴’이란 뜻의 ‘야유사균’이란 시다. 

“들에 죽은 노루/ 흰 띠풀로 포장하였지요./ 봄을 품은 아가씨/ 꽃미남이 유혹하네.// 숲속 땔나무/ 들판의 죽은 사슴을/ 흰 띠풀로 묶었지요./ 백옥 같은 아가씨여./ “가만가만 천천히/ 앞치마 건드리지 마시고/ 삽살개 짖지 않게 해주세요.” 

이 시에서 경전에 걸맞은 도덕적, 이념적 의미를 길어내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다. 문면엔 구애와 이에 응하는 선남선녀의 모습이 선연하기에 그렇다. 지금이야 남녀 간 욕정을 진솔하게 읊은 시라 해도 무방하지만, 저 옛날엔 결코 그럴 수 없었다. 성인 공자의 손을 거친 경전 중의 경전에 이런 야릇한 시가 있어서는 안됐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마천이 성현의 도덕준칙에 맞는 것만 가려 뽑았다고 증언했으니 더욱 난감했다. 그렇다고 공자의 손을 거친 경전 원문을 고칠 수는 없었다.

남은 방도의 하나는 해석을 장악하는 길이었다. 특히 한대에 들어 제국적 질서의 구축과 안정적 지속이 시대적 과제가 되자, 이 일은 한층 체계적으로 수행되었다.

그 결과 ‘야유사균’에는 다음과 같은 표준적 해석이 붙었다. “이 시는 무례함을 싫어한 것이다. 천하가 큰 혼란에 빠지고 폭력이 횡행하게 되자 음란한 풍조가 생겼다. 그러나 문왕(文王)의 교화를 입게 되어, 비록 난세에 처했지만 무례함을 싫어하게 된 것이다.” 예물을 갖춰 구애를 하였고 단정하게 사랑을 나누고자 했으니, 이는 되는 대로 야합(野合)하던 야만이 문명의 옷을 입은 증좌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음란함으로 읽었다면, 그 음란함은 시가 아니라 읽는 이의 가슴에서 발원한 것이 된다. 문제 삼아야 할 바가 텍스트에서 사람으로 옮겨진 셈이다. 

‘머리의 언어’인 해석으로 ‘가슴의 언어’인 노래를 장악함으로써 국가가 원하는 제도화된 사람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됐음이다. 

■국가의 노래 장악, 문명화의 다른 이름 

그렇게 노래에 담긴 감성이 문명화를 앞세운 현실권력의 표준적 해석에 의해 제도화됐다. 국가는 제도화된 감성으로 노래를 공유하게 함으로써 사람의 심성을 자신들이 내건 문명에 걸맞게 조정하고자 했다. 

이는 근대 이후처럼 방방곡곡에 의무교육기관을 설치하여 국민을 양성할 수 없었던 시절, 중국이라는 공동체를 상상하고 신봉하는 데에 쓸 만한 꽤 신통한 방도였다. 제국이 들어서기 한참 전 사람인 공자가 다른 경전보다도 <시경>을 교육 현장서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그는 지식의 요체와 자연의 섭리를 전할 때면 줄곧 <시경>의 시구를 활용하였고, <시경> 교육을 통해 중국이란 공동체의 질서를 바로잡고 치세를 구현하고자 했다. 제자들이 선생님께서 평소 <시경>을 말씀하실 때는 ‘아언(雅言)’ 곧 조정에서 사용하는 표준음을 쓰셨다고 증언했듯이, 그는 시를 통해 중원을 하나로 묶어내고자 애썼다. 노래는 본디 율동하는 가슴을 지닌 사람 모두가 쉬이 공명할 수 있는 문명 장치이니, 같은 소리로 읊어지는 노래를 공유함으로써 중국이라는 공동체와 문명을 반석 위에 올려놓고자 했음이다. 

이야기와 더불어 문명을 만드는 핵심 장치인 노래는 이렇듯 국가가 필요로 하는 제도화된 감성을 창출하고 보급하는 핵심 매체(media)로 활용되었다. 국가는 가슴의 언어인 노래에 머리의 언어인 해석을 덧씌우고, 이를 문명화 과정이라 규정함으로써 가슴 쓰는 존재인 사람을 효과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다. 

이는 21세기 첨단 과학문명을 구가하는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던져준다.

생산력과 관련 인프라가 충분하지 못했던 시절이라 해도, 국가의 욕망을 문명의 이름으로 사람에게 내면화시키려는 노력이 꽤 실효를 거뒀기 때문이다. 인문화가 개인 차원에서만 요청되는 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가를 인문화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국가가 인문화됐을 때, 살아내는 개개인의 삶은 그 자체로 정립될 수 있게 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210100&artid=201607151936005#csidx818bb7f906c70ce9137a71355df552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