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4. 12:00ㆍ쿠오바디스 행로난
ㆍ‘춘추’라고 쓰고 ‘인문’이라 읽다
자못 긴 여정을 시작한다. 인문, 그러니까 사람다움의 무늬가 걸어온 길을 탐사하는 여정이다. 갈 길은 틀림없이 험하고 고될 것이다. 인문 자체가 사람의 타고난 욕망과 맞서며 일궈온 결실인지라 그것이 걸어온 길이 순탄할 순 없었다. 그러니 그것을 탐사하는 길이 평탄치 않음은 너무나 당연하리라.
■“갈림길마저 많은데,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이백이란 걸출한 시인이 있었다. 인간세상으로 귀양 온 신선이란 별호에 걸맞게 걸핏하면 자신의 근거를 하늘에서 끌어왔다. 이런 식이었다. “하늘이 나란 재목을 세상에 낳음은 반드시 쓸모가 있어서이다!”
자신을 세상에 보낸 존재가 하늘이다, 그러니 언젠가 하늘이 자신을 크게 쓸 것이란 강한 자존감의 거침없는 표출이었다. 유사 이래 공자 정도가 이에 필적했을까, 암튼 그는 거침없는 기세와 도저한 필치로 한 시절을 구가했다. 그의 삶이 형통했다는 말이 아니다. 자기보다 잘난 이에 대한 경계가 생존과 번식에 유리함은 사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의 우월함을 시도 때도 없이 드러낸 그의 삶이 순조로울 리는 만무했다.
그래서일까. 진수성찬과 상긋한 미주(美酒)를 눈앞에 두고도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아무것도 못 먹겠다/ 술잔도 젓가락도 다 던져놓고는 칼 뽑아든다/ 사방 둘러보니 마음만 아득해진다// 황하를 건너려 하나 얼음이 강을 막고/ 태항산 오르려 하나 폭설이 하늘을 뒤덮는다”(‘행로난(行路難)’). 중국에서 가장 큰 강인 황하를 건너고, 거대하기로 이름난 태항산을 오른다함은 천하 경영의 큰길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하늘이 낸 자라면 못되어도 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데, 문제는 앞길을 가득 메운 얼음과 폭설이다. 이어진 구절에선 천하의 이백조차 막막해하는 목소리가 울려온다. “갈 길 험난하다/ 갈 길 험난하다!/ 갈림길마저 많은데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당혹감에 깊이 탄식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하늘이 냈다고 해도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는 절규처럼 들린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이백은 “긴 바람 타고 파도 뚫고 나갈 때 반드시 오리니/ 구름 같은 돛 곧추세워 푸르른 대해를 건너리”하며 노래를 맺는다.
갈 길 험난하구나, 지금 나는 어디 서 있는가란 토로는 분명 아무리 하려 해도 결국은 안되더라는 한탄이었다. 그런 그를 다시 일으켜, 파도를 헤치며 대해를 가로지르겠다고 다짐케 한 힘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문명의 갈림길에서 역사를 쓰다
여기 또 한 명이 있다. 그는, 하늘이 천하의 인문을 수호케 하려고 자신을 세상에 보냈다고 자부했다. 때론 성문 지기로부터도 “안되는 줄 알면서도 굳이 이루려 애쓰는 이”란 비아냥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하늘이 그를 세상을 일깨우는 목탁으로 삼아서였을까, 하늘이 그에게 인문 부흥의 책무를 부여한 게 정말이어서 그랬을까. 그 길이 고되고 괴로울 줄 뻔히 알면서도 그는 뚜벅뚜벅 걸어갔다.
공자 얘기다. 그는 험난한 여정과 숱한 갈림길 앞에서 역사 서술이란 길에 올라섰다. 맹자의 말을 들어본다. “세상이 쇠락하여 도가 사라지자 사악한 학설과 패악한 행동이 발생했다.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는 일이 일어나고 자식이 아버지를 해치는 일이 생겨났다.” 공자가 살던 시절, 문명과 천하를 떠받드는 기축윤리는 충과 효였다. 맹자의 언급은 그런 기축윤리가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었다는 증언이다. 곧 당시는 지배 계층만이 아니라 문명 자체가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했던 때였다. 역사가 배태된 저간의 사정이다.
<춘추>는 이 상황에서 공자가 꺼내 든 필생의 카드였다. “노나라 242년 역사의 시비를 가려 천하의 본보기로 삼았다”는 ‘공자 키드’ 사마천의 분석처럼, 그것은 기존과는 사뭇 다른 성격의 역사였다. 사실의 기록보다는 그에 대한 평가가 역사 서술의 궁극적 목표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형식도 편년체라는, 사실을 연대기 순으로 나열하는 새로운 양식이었다. 역사의 잘잘못을 따질 때 붓끝에 자비를 두지 않은, 훗날 ‘춘추필법’이라 칭해진 공자의 정신도 오롯이 담겼다. 계속된 사마천의 증언이다. “천자라도 비판하였고 제후도 깎아내렸으며 대부를 공박하였다.”
절대지존인 천자를 비판하고 군주급인 제후를 폄훼함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공자는 왜 굳이 그런 위험을 무릅썼을까. 다시 사마천의 증언을 들어보자. “오로지 왕도를 실현하고자 했을 따름이다.” 왕도는 당시로선 최고의 진리였다. 천자라는 절대 권력 너머의 최고 진리를 바라보며 역사를 서술했기에, 눈앞의 최고 권력을 넘어설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마천이 읽어낸 공자 역사 서술의 고갱이였다. 역사를 통해 부조리한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찾아내는 그 정신 말이다.
물론 문명이 무너져 갈 때, 역사에서 삶의 동력을 길어오는 활동은 지금 보기엔 특출나다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공자의 시대, 시절을 우려하고 천하를 걱정하는 지식인이 공자 하나였을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역사 서술을 통해 “일가의 진리를 구축하고자(成一家之言)” 한 이는 공자뿐이었다. 그는 명실상부한 사상 최초의 ‘호모 히스토리쿠스(homo historicus, 역사 쓰는 인간)’였던 것이다.
■해석하는 정신의 탄생
한편 <춘추>는 중국 최초의 ‘해석하는 역사’였다. 이 점에서 <춘추>는 그 이전의 사서인 <서경>과는 확연하게 구분되었다. <시경> <역경> 등의 경전과도 그러했다. 경전은 전승되는 그대로 현실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적용의 원천이었지, 분석과 평가 등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춘추>는 이러한 전통을 다변화하여 경전 해석이란 새로운 전통을 정초한 첫걸음이었다.
이는 문명사적 일대 사건이었다. <춘추>의 언어가 해석을 위한 도구였기에 그렇다. 그전까지 언어는, 성인이 밝힌 신성한 가르침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역할에 집중되었다. 자신에게 담기는 콘텐츠를 수동적으로 설명하는 도구였다. <춘추>의 출현은 이러한 설명의 언어에 해석의 언어란 새로운 기능이 장착됐음을 알리는 표지였다. 그 결과 인간은 언어를 주동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아무리 신성한 가르침일지라도, 그것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언어가 인간을 해명하는 데에 집중됐기 때문이다. 곧 진정한 의미에서의 ‘언어의 인문화’가 전에 비해 획기적으로 진척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춘추>는 시간도 인문화했다. 공자는 노나라 군주의 재위 기간을 연대순으로 나열한 후 주요 사건을 계절과 달별로 간략하게 언급하였다. “은공 원년은 주 천자의 봄 정월이다(隱元年春 王周正月)”식이다. 이는 우주의 시간적 흐름을 인간 군주의 재위 연도를 기본단위로 재편한 결과다. 별로 특별하다 할 것 없는, 밋밋한 서술처럼 보인다. 그런데 우주적 현상인 사계절과 열두 달이 군주 재위 연도 다음에 위치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주의 봄이 아니라 천자의 봄이라 했으니, 우주의 시간적 흐름을 인간 군주에게 귀속시킨 셈이다. 곧 시간도 명실상부하게 인문화된 것이다.
이렇듯 <춘추>에서 역사를 삶과 사회의 중심에 놓을 줄 아는 양식, 해석하고자 하는 욕망, 단호하게 논단하는 비판정신, 언어를 주동적으로 서술할 줄 아는 역량 등과 마주하게 된다. 험난한 행로를 살아내는 힘의 원천을 섭취하는 영혼도 목도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인문의 총화와 접속하게 된다. 결국 인문의 험난한 길은 인문의 힘으로 꿋꿋하게 걸어갈 수 있었음이다.
■인문의 돛을 곧추세우고
공자 그리고 <춘추>는, 인문이 걸어온 궤적을 탐사할 때 고전, 그러니까 문명을 만든 텍스트를 벗 삼아야 하는 이유를 또렷이 말해준다. ‘지금-여기’의 우리와는 여러모로 격절된 먼 과거의 유산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인문이란 행로는 여전히 험난하고 삶터 또한 켜켜이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내가, 또 우리가 공자같이 살아낼 수 있는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공자가 유사 이래 그와 같은 이는 없었던, 영원한 사표로 치켜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그의 어록인 <논어>를 들춰보자. 그러한 이름과 상찬에 걸맞을 법한 심오하고 드높은 내용은 과연 얼마나 될까? 내친김에 살아생전 그의 행적도 짚어보자. 과연 위대하기만 했던가. <논어>는 평범하고 친근한 말들로 그득하고, 그가 신처럼 ‘무(無) 오류’한 삶을 펼쳤던 것도 아니다. 그의 실제 삶과 앎은 대단한 수식어가 들러붙은 성인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는 얘기다.
다만 그는 자각을 바탕으로 삶과 사회의 인문화를 향해 꾸준히 노력한, 주변에 늘 있을 법한 ‘좋은 어른’이었음은 분명하다. 바로 이것이 “공자같이 살아낼 수 있는가”란 물음이 향해야 할 실상이다. 그건 개인과 사회의 인문적 진보를 도모하는 삶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점검이지, 큰 성인으로 미화된 공자 삶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검토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21세기 우리 사회에서 삶과 사회의 인문화를 향한 노력, 곧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한 노력을 개인 윤리로 치부함은 무책임한 처사일 수 있다. 자본주의가 창의성, 자율성, 생명현상 등 인간의 고유성마저 자신의 고정자산으로 포섭한 지금, 좋은 삶과 사회의 구현을 위한 노력을 개인에게 일임한다는 것은 지독한 독선이다. 인문적 삶과 사회를 견인해낼 수 있는 좋은 정책과 제도가 절실한 까닭이다. 좋은 어른, 곧 인문적 시민과 그들의 집합체로서의 인문적 시민사회의 보편적 구현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보장하는, 그런 정책과 제도의 마련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못되어도 국가 전체를 포괄하는, 그리고 더 절실하게는 전 지구촌을 훑어내는 시야를 갖춰야 한다. 세계화는 당위나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이자 기본값이 된 지 꽤 되었기 때문이다. 인문이 걸어온 족적 탐사는 이렇게 좋은 삶과 인문적 시민사회 창출을 위한 인문 정책과 제도의 마련이란 화두를 노자 삼아 그 첫걸음을 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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