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바디스와 행로난](31) 세상의 중심 ‘중국’은 문명의 표준을 장악했기에 가능했다

2017. 7. 4. 12:27쿠오바디스 행로난

ㆍ정조가 ‘사고전서’를 사모했던 까닭

지난 2009년 9월14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 동쪽에 중국 내 여러 민족 간 단합을 상징하는 기둥들이 세워져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09년 9월14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 동쪽에 중국 내 여러 민족 간 단합을 상징하는 기둥들이 세워져 있다. 연합뉴스

“무찌르자 오랑캐 몇백만이냐, 대한남아 가는데 초개로구나.” 어렸을 적, 곧잘 불렀던 군가의 한 대목이다. 어렸다면서 웬 군가냐 하겠지만, 온 국민이 반공 투사가 됐어야 했던 시절인지라, 이 곡뿐 아니라 몇몇 군가가 동요처럼 불리곤 했다. ‘오랑캐’가 ‘종북’이나 ‘좌빨’로 바뀌었을 뿐, 지금도 그래야 한다는 이들이 버젓이 목소리를 키우고 있지만 말이다. 

■ 오랑캐, 처음부터 교화와 무관한 존재 

이 노랫말 속 오랑캐가 ‘중공군’이었음은 성인이 되고도 한참 후에 알았다. 그전까진 북한의 남침 위협으로 군사독재를 정당화하던 시대 분위기 탓에 당연히 ‘북괴’(당시엔 북한을 이렇게 불렀다)라고 여겨졌다. 북한은 그렇게 온 국민이 어려서부터 ‘초개(草芥)’ 곧 잡풀과 티끌처럼 작신작신 짓이겨도 되는 존재로 각인됐다. 

<b>[오랑캐 이]</b> 주(周, BC 11~8C) 초기 청동기에 새겨져 있는 ‘이(夷)’의 형상. 이집트 상형문자 가운데 파라오 형상처럼, 사람을 감싸고 있는 뱀의 형상을 띠고 있다. 한편 이보다 1100여년쯤 후에 나온 현전 최고의 자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선 이(夷)를 대(大)와 궁(弓)의 합체자로 보아, 큰 활을 메고 다니는 족속이라고 풀었지만, 이는 100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거치면서 새로이 획득하게 된 뜻이었다.

[오랑캐 이] 주(周, BC 11~8C) 초기 청동기에 새겨져 있는 ‘이(夷)’의 형상. 이집트 상형문자 가운데 파라오 형상처럼, 사람을 감싸고 있는 뱀의 형상을 띠고 있다. 한편 이보다 1100여년쯤 후에 나온 현전 최고의 자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선 이(夷)를 대(大)와 궁(弓)의 합체자로 보아, 큰 활을 메고 다니는 족속이라고 풀었지만, 이는 100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거치면서 새로이 획득하게 된 뜻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무찔러야’ 마땅한 존재를 왜 오랑캐에 빗댔을까. 언제부터 오랑캐는 그런 처참한 운명에 놓였던 것일까. 공자는 “오랑캐 땅에 잘 다스리는 군주가 있어도 중원에 군주가 없는 것보다 못하다”(<논어>)고 잘라 말했다. 오랑캐가 아무리 잘 다스려봤자 중국이 혼란할 때보다 못하다는 뜻이다. 성인(聖人) 공자조차 아무렇지 않게 드러낼 정도로 오랑캐를 향한 차별적 시선이 깊게 내면화됐음이다. 그만큼 무척 오래전부터 오랑캐는 응당 없애야 하는 존재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들 눈에 오랑캐는 “여우와 살쾡이가 살고 승냥이와 이리가 울부짖는 곳같이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에 살며 자신들과 먹는 음식, 입는 복식이 다르고 재화도 통용하여 쓸 수 없으며 언어도 통하지 않는”(<춘추좌전>), 그렇기에 금수 같은 존재임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중원의 ‘예(禮)’로 대변되는 문명의 수준이 낮은 정도가 아니라 문명화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귀로 다섯 소리의 화음을 듣지 못함을 일러 귀먹었다 하고, 눈으로 다섯 빛깔의 문채를 분간하지 못함을 일러 눈멀었다고 한다. 마음으로 덕과 의로움이라는 근간을 본받지 못함을 일러 꽉 막혔다 하고, 입으로 정성스럽고 미더운 말을 하지 못함을 일러 말 못한다고 한다. 오랑캐들은 이 모두를 체화해 ‘네 가지 사악함’을 갖추고 있다.”(<춘추좌전>) 

다섯 가지 소리나 빛깔, 덕과 의로움 그리고 정성스러움과 미더움은 ‘문명함’의 대표적 표지들이다. 따라서 이 넷이 없다는 말은 문명과는 도무지 상관이 없다는 뜻이 된다. 문명화는커녕 애초부터 사악함만 갖춘 존재가 바로 오랑캐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자신들이 줄곧 당하고 있었다. 하루 이틀 그랬음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대체로 그래왔다. 동이(東夷)·남만(南蠻)·북적(北狄)·서융(西戎), 그러니까 ‘동쪽의 뱀 같은 족속’ ‘남쪽의 벌레 같은 족속’ ‘북쪽의 개 같은 족속’ ‘서쪽의 사납기만 한 족속’이라 부르며 일상적으로 오랑캐를 무시하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그런 ‘말도 안 되는’ 족속에게 당하는 자신이 더욱 초라해질 뿐이었다.

■ 진 쪽은 사람, 이긴 쪽은 귀신·오랑캐 

사정은 2천 수백여 년이나 흐른 근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을 필두로 서양과 본격적으로 조우했다. 불행히도 만남에는 폭력이 수반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지라, 이후로도 중국은 서양과 수차례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붙는 족족 어찌 됐든 졌다. 그럼에도 중국인에게 서양인은 여전히 ‘양귀(洋鬼)’거나 ‘양이(洋夷)’였다. 서쪽에서 ‘바다를 건너온 귀신’ 아니면 기껏해야 ‘바다를 건너온 오랑캐’였다는 것이다. 서양은 무척 당혹스러웠다. 전쟁의 승자는 자신들이었는데 패자가 오히려 자신들을 야만으로 규정하며 인간 이하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급기야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1856년 애로우호 사건을 빌미로 전쟁을 일으킨 영국과 프랑스는 수도 베이징을 단숨에 점령하였다. 청조는 강화를 도모했고 톈진에서 두 나라와 각각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그런데 두 조약 모두에 청 조정은 자신들의 예를 존중해야 한다는 취지의 조문이 담겼다.

단적으로 서양의 예가 중국의 그것과 같은 급임을 인정하라는 뜻이었다. 근대라는 문명의 압도적 우위를 앞세워 이긴 만큼 패자를 맘껏 무시하며 우쭐댔을 성도 싶은데, 거꾸로 패자인 중국에 승자인 자신들이 문명인임을, 또 서양이 문명세계임을 긍정하라고 압박한 셈이었다. 이런 아이러니는 자신들을 더는 서양 오랑캐란 뜻의 ‘양이(洋夷)’로 부르지 말고 ‘양인(洋人)’ 곧 ‘서양사람’이라 부르라고 요구하는 대목에서 절정에 달했다. 양이뿐 아니라 자신들을 오랑캐로 설정한 모든 표현의 사용을 금하라고 다그쳤다. 서양 오랑캐 관련 업무라는 뜻의 ‘이무(夷務)’ 대신에 서양 관련 업무라는 뜻의 ‘양무(洋務)’를 사용하라는 식이었다. 

3500년도 훨씬 더 된 옛날, 상나라의 성군 탕왕이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정벌을 떠나니 서쪽 오랑캐들이 그를 원망했고, 남쪽 정벌에 나서니 북쪽 오랑캐들이 원망했다고 한다. 이유는 그들 모두 탕왕의 조속한 강림을 간절히 바랐던지라, 그가 자기들을 후순위로 미루자 원망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들은 탕왕이 강림한 날을 자신들이 다시 살아나는 날로 여겼다고도 한다. 당시 역사를 전하는 <서경>에 실려 있는 기사다. 오랑캐에겐 중국의 침략을 구원이자 은혜라고 당연시했을 정도로 수천년간 이어온 중국의 콧대는 이처럼 높았다. 

현실에선 오랑캐에게 늘 시달려도 머리와 가슴으론 자신을 문명의 중심에서 끌어내린 적이 없었다. 중원을 통째로 오랑캐에게 내줬을 때조차 그들은 중화의 높은 문명으로 그들을 교화한다고 여겼다. “북극성은 제자리에 가만히 있고 뭇별들이 그것을 떠받들며 돈다”(<논어>)는 공자의 말처럼, 그들은 천체의 중심 북극성처럼 중국이 천하의 독존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 문명의 표준과 최고 수준을 장악하라 

그런데 고대 중국의 이러한 높은 자존감은 결코 과대망상이 아니었다. 아니, 자존심 상해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참된 강자도 또 대인도 될 수 있는 법, 그들의 문명은 참으로 중화(中華) 곧 ‘천하의 유일하게 빛나는 문명 중심’이라 자부할 만큼 고상했고 심원했으며 광대했다.

당연히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3000여년 전쯤, ‘나라들의 중심’ 곧 중국(中國)이 상상되고 모색됐던 주나라 초엽에 이미 주변에 대한 문화적 우위를 점하려는 의식적 활동이 전개됐다. 500여년쯤 흐른 뒤, 공자가 오랑캐 땅의 치세보단 중원의 혼란이 차라리 낫다고 단언하자 이는 중원의 도도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수백 년이 또 흐른 후, 진시황의 진을 이은 한이 ‘문화 제국’으로서의 기틀을 다지자 중국은 중원과 주변을 통틀어 최고 문명국으로 우뚝 섰다. 달리 말해 한자권 유일의 보편문명이 됐다. 

관념적으로만 그렇게 주장됐음이 아니다. 물론 말로 오랑캐를 비하하던 관습은 여전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자신이 하늘 아래 유일한 보편문명임을 명실상부하게 구현하자는 활동이 적극적으로 수행됐다. 가령 한 무제 시절, <춘추번로>의 저자 동중서는 제국 경영의 이념적 청사진을 마련하면서 중원뿐 아니라 주변 종족의 문화를 중국 중심으로 변주해냈다. 같은 시대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은 제국의 역사를 지으며 중국 주위에 포진해있던 흉노, 남월, 조선 같은 이민족의 문화를 중국 중심의 세계관으로 포착해냈다. 그렇게 그들은 타자들의 문화를 중국의 하위문화로 편입시키며 보편문명에 걸맞은 넓이를 확보해갔다. 

동시에 학술 진흥과 문헌의 정비, 편찬을 통해 문명 표준과 꼭대기를 독점하려는 움직임도 취해졌다. 이런 활동은 특히 통일 제국을 일군 왕조에서는 어김없이 수행되었다. 한 무제는 오경박사를 설치하여 문명의 텍스트와 해석의 표준을 장악하고자 했다. 당 태종은 같은 맥락에서 <오경정의>를 간행했고, 지금의 국정교과서쯤 되는 석경(石經), 그러니까 조정이 공인한 판본의 유교 경전 원문과 주석을 새긴 비석을 제작하여 보급했다. 북송 초엽에는 <태평광기> <태평어람> 같은 방대한 규모의 전서를 다수 편찬하여 문명의 제반 층위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관리하고자 했고, 같은 취지로 명대엔 엄청난 분량의 <영락대전>을 간행했다. 

<사고전서(四庫全書)>는 1773년(건륭 38년) 중국 청나라 건륭제의 명으로 1781년(건륭 46년)에 편찬·완성된 중국 최대의 총서다. 정조는 애초 <사고전서>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대신 1776년 청에 갔다 온 사신을 통해 <고금도서집성>을 손에 넣고 뛸 듯이 기뻐했다.

<사고전서(四庫全書)>는 1773년(건륭 38년) 중국 청나라 건륭제의 명으로 1781년(건륭 46년)에 편찬·완성된 중국 최대의 총서다. 정조는 애초 <사고전서>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대신 1776년 청에 갔다 온 사신을 통해 <고금도서집성>을 손에 넣고 뛸 듯이 기뻐했다.

이는, ‘오랑캐’가 중국을 통치할 때도 동일하게 수행되었다. 청대에는 거대 규모의 <고금도서집성>과 <사고전서>가 연이어 제작되었고, 석경과 사전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는 건륭석경과 <강희자전>이 제작되어 보급됐다. 보편문명으로서 갖춰야 할 문명 표준과 최고 높이, 넓이를 확보하려는 시도는 중원을 차지한 족속이 누구든, 그와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 ‘21세기 한국인문대전’ 편찬 나설 때 

이 모두는 조정이 주축이 되어 방대한 재정을 중장기적으로 쏟아부어 이룩해낸 문명의 성과들이었다. 보편문명을 창출하고 보급하는 제국 노릇을 실효적으로 수행하는 데는 그만큼 커다란 대가를 치러 마땅함을 전근대기 중국의 지배층들은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과거에만 그랬음이 아니다. 21세기 전환기에 들어 중국에선 학술 진흥과 문화 융성에 국가 재정이 대대적으로 투입되고 있다. 20여년째 지속 중인 ‘유장(儒藏) 사업’은 대표적 사례다. 중국은 물론 한국, 일본, 서구 등 각지에서 생산된 유학 관련 텍스트를 디지털화하고 해제를 달아 전 세계에 보급한다는 이 사업이 가시적 성과를 내면, 고려와 조선시대 우리 지성사를 수놓았던 조상들의 빛나는 업적은 중국의 방계로 그 위상이 재편되고 만다. 문제는 유사한 성격의 사업이 현재 다수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보편문명으로서 문명 표준과 최고 높이, 넓이를 거머쥐어 왔던 전통은 이처럼 사회주의 현대중국에서도 싱싱하게 작동되고 있다. 

단지 중국의 국제적 위상 제고와 경제적 성장에 발맞춰 제출된 문화입국, 사회주의 문화강국 등의 국정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조치에 불과한 게 아니다. ‘신성장 동력으로서의 문화산업’, ‘국가안보로서의 문화안보’, ‘평화적 도약을 위한 대외정책으로서의 문화전파’ 등등, 중국이 내세운 문화 기반 국가발전전략은 문화를 부강한 중국 건설의 핵심 자산으로 삼겠다는 정책적 판단임과 동시에 ‘G2’ 급의 위상에 걸맞은 존재형식, 곧 제국으로 거듭나기 위해 과거 ‘문화 제국’의 유산을 적극 수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문화는 역대 중국제국을 있게 하고 갱신을 통해 거듭될 수 있게 해준 고갱이 가운데 고갱이였기 때문이다. 

정조는 1776년 청에 갔다 온 사신을 통해 <고금도서집성>을 손에 넣었다. 이는 1726년 간행되기까지 50년 가까운 기간에 걸쳐 제작된 대단한 규모의 백과전서였다. 정조는 주지하듯 조선 안팎에서 전개된 격변하는 시세에 능동적으로 부응하고자 문예부흥에 심혈을 기울였던 문명 군주였다. 건륭제가 <사고전서>를 편찬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것을 구하고자 그리 원했지만, 당시 지구를 통틀어 가장 부유했던 청조차 7질밖에 못 찍은 <사고전서>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미증유의 백과전서라 평가됐던 <고금도서집성>을 우여곡절 끝에 직접 보게 된 정조는 날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왜 그리도 사모하고 또 손에 넣자 환호작약했을까. <고금도서집성>이나 <사고전서>는 문명 표준과 최고 수준의 독점을 가능케 하는 무엇보다도 확실한 토대였다. 당시 문명의 작동방식은 문화적 역량이 바로 국력으로 직결되는 패러다임이었다. 이를 지금 세상의 그것으로 바꿔 읽으면 <고금도서집성>이나 <사고전서>는 세상의 갖은 첨단 과학기술을 그러 모아놓은 총서에 해당된다. 역사에서 가정은 참으로 공허하다지만, 정조의 문예부흥이 성공하여 그 높이와 넓이에서 중국의 그것에 못지않은 ‘조선형 문명’이 구축되고 실현됐다면 역사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우리 사회에서 선진국 진입이 운운된 지는 적어도 20여년은 족히 된다. 실제로 경제력과 군사력만큼은 세계 10위권을 넘나드니, 이 방면에선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선진국은 문화의 뒷받침 없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가령 ‘한국형 문화’가 창출되고 이것이 국제적으로 수용돼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문화가 지구촌 곳곳에서 평화롭고 자율적이며 창의적 삶에 실질적으로 이바지하게 될 때 비로소 떳떳하고도 뿌듯하게 우리가 선진국임을 내세울 수 있게 된다.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채 지구촌에 이미 널리 발신된 중국문명, 일본문명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한글문명’을 구축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서는 동서고금의 문명 성과를 우리의 언어인 한글에 담아내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21세기 한국인문대전(韓國人文大典)’ 간행 사업이 절실한 까닭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702241905005#csidx92cb17d5918c18b965c85052bbba77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