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바디스와 행로난](29) 학자 불러모은 위왕…‘앎의 힘’으로 국가 생존의 ‘개혁’ 이루다

2017. 7. 4. 12:25쿠오바디스 행로난

ㆍ개혁 군주, 그들이 학술을 진흥한 까닭

담론 중인 제자백가의 모습을 중국 전통화풍으로 재현한 그림. <제자백가 국풍화전(諸子百家國風畵傳)>에 수록.

담론 중인 제자백가의 모습을 중국 전통화풍으로 재현한 그림. <제자백가 국풍화전(諸子百家國風畵傳)>에 수록.

“궁전 뜰에 커다란 새가 묵고 있습니다. 그런데 3년간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습니다. 왕께서는 이 새가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기원전 4세기 경, 그러니까 ‘싸우는 나라들’의 시대인 전국시대 중엽, 순우곤이 제나라 위왕에게 낸 수수께끼이다. 

■ 군주를 각성시킨 수수께끼 

순우곤은 제나라 융성을 추동했던 학자였다. 그가 죽자 제자 3000여 명이 상복을 차려입고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그의 영향력이 얼마큼이었는지, 그에 대한 존경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일까, 신하가 대뜸 던진 물음임에도 위왕은 정중하게 답했다.

“그 새는 날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한번 날아오르면 하늘 끝까지 솟구칩니다. 또 울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일단 울어대면 사람을 놀라게 하고 두렵게 합니다.” 

그런데 답변이 흥미롭다. 위왕은 ‘무엇’으로 물은 질문에 ‘이것이다’ 식으로 답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새 이름을 대지 않았다. 대신 그 특징을 언급함으로써 자신이 그 새가 무언지 잘 알고 있음을 내비쳤다. 덕분에 위왕의 답변은 동시에 물음이 되었다. 새 이름이 제시되지 않은 까닭에 독자들은 그러그러한 특징을 지닌 새의 정체를 여전히 궁금해하게 된다. 

이 일화는 <사기> ‘골계열전’에 나온다. 골계란 해학과 비슷한 말로 풍자가 짙은 유머를 뜻한다. 순우곤과 위왕의 문답에도 농익은 풍자가 녹아들어 있다. 그 풍자의 내용을 저자 사마천은 독자의 호기심을 지속하게 하여 스스로 찾아가게 했던 셈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하늘을 나는 것과 우짖음은 새를 새답게 해주는 핵심 자질이다. 어마어마한 덩치라 해도 울지 않고 날지 않는다면 새다운 새라고 할 수 없는 이유다. 

순우곤은 이를 위왕에 비유했다. 왕더러 새 같다고 욕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왕을 커다란 새, 그러니까 고만고만한 뭇 새와는 차원이 다른 새에 빗댄 이유는 그의 눈에 위왕은 틀림없이 크게 될 군주였기 때문이다. 

한편 큰 새가 궁정 뜰에 내려앉은 지 3년이 됐다는 말은 이제 때가 됐다는 뜻이다. 마침 위왕은 즉위한 지 9년째였다. 한문에서 ‘3’이나 ‘9’는 어떤 조건이 충족됐음을 뜻하기도 한다. 순우곤은 수수께끼를 빌려 큰 새답게 날아오르고 우짖을 때가, 곧 왕다운 왕으로서 웅지를 펼칠 분위기가 무르익었음을 넌지시 아뢨던 것이다. 

순우곤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가 때가 됐다며 넌지시 ‘도발’하자 즉위 이래 줄곧 술과 여색에 빠져 있던 위왕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칼을 뽑아 들었다. 전통의 강호 제나라 부흥의 서곡이 장중하게 울리는 순간이었다. 

사마천은 이후의 일을 이렇게 증언했다. “군사를 떨쳐 일으켜 출정하자 뭇 제후들이 경기를 일으켰고, 모두 빼앗은 땅을 제나라에 돌려주었다. 그 위엄을 36년간 떨쳤다.”

■ 최초의 왕립 아카데미 ‘직하학궁’ 

예윈(1880~1960)의 ‘제 선왕이 안촉을 접견하다’. 직하학궁의 전성기를 연 제 선왕이 안촉이란 인재를 접견하는 모습을 중국 전통화풍으로 재현한 그림이다. 선왕은 1000명을 상회하는 일급 지식인들에게 대저택과 높은 명예직을 수여하는 등 대대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예윈(1880~1960)의 ‘제 선왕이 안촉을 접견하다’. 직하학궁의 전성기를 연 제 선왕이 안촉이란 인재를 접견하는 모습을 중국 전통화풍으로 재현한 그림이다. 선왕은 1000명을 상회하는 일급 지식인들에게 대저택과 높은 명예직을 수여하는 등 대대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위왕의 업적은 눈부셨다. 그의 공적은 아들 선왕이 중원의 대통일을 도모하는 데 기틀이 됐다. 선왕은 부친이 일군 자산을 바탕으로 여러 왕들 가운데 한 명의 왕이 아니라 ‘왕 중의 왕’ 곧 중국 최초로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 건설을 도모했다. 실제로 선왕은 ‘동제(東帝)’ 그러니까 동방의 황제를 자칭하며 제나라의 부강을 일궈냈다. 여기에는 위왕 때부터 번성한 직하학궁(稷下學宮)이란 학술기관이 큰 몫을 하였다. 

직(稷)은 제나라 도성에 나 있던 성문의 하나로 직하는 그 문밖을 가리켰다. 직하학궁은 이곳에 위왕의 부친이었던 환공이 설치한 중국사 최초의 왕실 부설 학술기관이었다. 이는 지금으로 치자면 ‘종합대학+고등학술연구기관’의 복합체에 해당된다. 다만 규모나 대우는 소박했던 듯하다. 이를 대대적으로 정비한 이는 순우곤의 수수께끼를 계기로 각성하게 된 위왕이었다. 그는 제나라 부강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직하학궁을 활성화했고, 이를 이어받아 선왕은 시설과 대우 면에서 한층 제고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선왕은 순우곤을 비롯하여 추연, 신도 같은 저명 학자 76명에게 대저택을 하사했고, 상대부에 준하는 높은 명예직과 봉록을 제공하였다. 또한 학식과 덕망이 높아 직하선생이라 불린 인사 1000여 명을 학파 불문하고 후원하였다. 사통팔달한 거리에 높은 문이 달린 커다란 집을 주고 존대하였던 덕분에 그들은 생계 걱정에서 벗어나 상호 담론하고 저술하며, 운집한 학생 수천 명에게 강학할 수 있었다. 당시 직하학궁에 모인 학생들은 직하학사로 불렸는데, 이들은 직하선생의 추천이 있으면 관직 임용이 가능했다. 그렇다고 직하선생이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직하학궁의 원칙이 “세상에 대한 저술과 담론은 생성하지만 정사를 직접 맡지는 않는다”였기 때문이다.

대신 통치자의 자문과 정책 건의 등에는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었다. 현실 정치에 관여하는 관직을 허여하진 않았지만 사회적, 재정적으론 최상급으로 대우하면서 나라 대소사를 맘껏 의론할 수 있도록 한 셈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순우곤의 예처럼 직하학궁에서 나와 현실 정치에 참여할 수도 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는 지식인에겐 엄청나게 매력 있는 조건이었다. 그렇다 보니 직하학궁은 순자와 송견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가 모이는 공간이 되었고, 맹자와 장자 같은 대학자와도 긴밀하게 연동될 수 있었다. 

덕분에 “다양한 학파의 수많은 학자가 맘껏 쟁론하여 온갖 학술이 활짝 개화됐다”. 이를 뜻하는 “백가쟁명, 백화제방(百家爭鳴, 百花齊放)”은 듣기 좋으라고 붙인 과장된 수사가 아니라, 직하학궁에서 실질적으로 벌어졌던 사실이었다. 

■ 학술 융성으로 거머쥔 국제적 헤게모니 

여기서 위왕과 선왕이 인문학을 몹시 사랑하여 정책적, 제도적, 재정적으로 직하학궁을 크게 키웠다고 하기는 어렵다. 순수하게 학문 발전을 위해 그리한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보다는 부국강병을 위해 했다고 함이 훨씬 사실에 가깝다. 

당시는 싸우는 나라들의 시대 한복판이었다. 중원의 패권을 놓고 벌인 각축이 한층 격화됐다. 그 결과 전국시대 초 13개 나라였던 제후국이 불과 수십 년 만에 7대 강국으로 정리되고 있었다. 단적으로 도덕적, 문화적 가치 등을 국정 운영에 앞세울 수 없었던 시절이자, 개혁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싸우는 나라들’의 실제는 그래서 ‘개혁하는 나라들’이기도 했다. 서방의 황제 곧 서제(西帝)라 자칭했던 진나라가 대표적 예였다. 그들은 남들보다 몇 걸음 앞서, 몇 대에 걸쳐 꾸준히 제도개혁을 단행했다. 그 결과 진시황 대에 이르러 드디어 천하를 통일하여 중국 최초의 제국을 수립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천하통일을 꾀하지 않으면 개혁을 안 해도 되는 상황도 아니었다. 망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개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士) 곧 전문 지식인 확보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급기야 사 확보의 성패에 따라 국운이 좌우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사들이 “초나라로 들어가면 초나라가 강해졌고 제나라를 떠나면 제나라가 약해졌으며, 조나라를 위해 일하면 조나라가 보전되었고 위나라를 버리면 위나라가 해를 입었다.”(<논형(論衡)>) 이는 직전 시대와는 상전벽해 같은 변화였다. 공자는 냉대와 모멸을 감수하며 열국을 돌아다니며 제후 설득에 나섰다. 어떨 때는 굶주리기도 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해 “집 잃은 개” 같다고 자조할 정도였다. 

반면에 맹자는 수레 수십 대에 수백명의 수행원을 동반한 채로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후하게 대접받았다. 그가 “사가 지위를 잃음은 제후가 나라를 잃음과 같다”고 했을 때, 이는 자기 가치를 높이기 위한 허언이 아니라 사가 국력의 요체였던 실제에 대한 담담한 개괄이었다. 사가 중원 정세를 쥐락펴락하는 핵심 역량으로 발돋움했던 것이다. 위왕이 각성과 함께 직하학궁을 활성화하고 천하 인재를 그러모아 후하게 대우한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 

설사 그 많은 인재 모두가 당장 도움이 되진 않는다고 해도, 제나라로의 인재 집중은 타국에선 인재 유출이기에 적어도 본전은 됐다. 위왕과 선왕 시절, 제나라가 중흥을 구가했던 시기는 직하학궁의 전성기였고, 선왕 사후 민왕 이래 제가 몰락하기까지의 시기는 직하학궁의 쇠퇴기였음은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가 ‘싸우는 나라들’의 시대였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제나라만 해도 200여년 전에 이미 인재 확보가 가장 확실하고도 빠른 국력 신장 방도였음을 경험한 바 있었다. 당시 중원 최초로 패자가 됐던 제 환공은 천하 인재를 확보하는 데 진력했다. 세객 80명에게 많은 물자를 주어 사방으로 파견, 각지의 현사들을 불러들이도록 하였다. 재야에 묻힌 인재를 모실 때면 삼고초려에 그치지 않고 기꺼이 “오고초려”하였고, 빼어나기만 하면 출신 배경을 따지지 않고 바로 재상급으로 임용하기도 했다. 전국시대에 종종 목도되는, 아침에는 평민이었지만 저녁 때엔 경상(卿相)이 됐던 현상이 그보다 수백 년 앞서 이미 벌어졌던 셈이다. 

게다가 재상 중의 재상 관중은 환공에게 깨끗하고 편안한 거처를 사인들에게 제공하고 함께 거처케 하라고 진언했다. 그러면 그들은 서로 의론하면서 가치 있는 일을 도모할 것이며, 이런 환경에서 자란 그들의 자손들도 자연스레 쓸모 있는 인재로 자라날 것이라고 아뢨다. 제환공이 40년 가까이 중원 최고의 강국으로 군림한 바탕에는 이런 정책적 노력이 있었다. 유독 제나라만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월나라 왕 구천은 현사를 모으면서 곳곳에서 찾아온 사들을 극진하게 대접하였고, 뛰어난 이들에겐 깨끗한 처소와 좋은 옷, 넉넉한 음식을 제공하여 인재가 6000명에 달하기도 했다. 이는, 그가 패자가 되는 데 튼실한 밑천이 됐다. 

■ “인력이 고스란히 국력”, 우리에겐 너무나 절실한… 

천하를 호령한 이의 곁에는 이렇듯 많은 수의 뛰어난 인재가 함께하였다. 인재 확보와 양성으로 귀결되는 학술 융성은 이렇듯 언제 어디서든 유효하고 값진 이치였다. 친숙해지면 아무렇지도 않게 망각하는 것들이 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모두 위태롭지 않게 된다는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란 격언도 그러하다. 

이 말에는 안다는 것의 대단한 힘이 강조되어 있다. 손자의 말이라고 하니, 못돼도 2500여년 간 그 가치가 인정돼온 오래된 이치다. 혹 백 번 싸워, 달리 말해 싸울 때마다 다 이기는(百戰百勝) 정도는 돼야 앎의 힘이 대단하다고 여겨지는가. 그러나 이는 평균적 시민을 부당하게 옥죄는 성공신화에 불과하다. 실패하지 않는 삶은 일상적으로 실현 가능하면서도 매우 좋은 삶이기에, 그것만으로도 너끈히 아는 것의 힘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나라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꼭 강대국이 되고 제국이 되기 위해서만 학술을 융성해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실패한 나라가 되지 않기 위해 국가 안팎으로 앎의 힘을 비축하고 발휘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개인과 달리 나라 차원에선 한 번이라도 실패하지 않아야 한다. ‘이명박근혜 정부’를 통해 익히 경험했듯이, 국정에 실패하면 시민은 물론 자연까지도 깊은 도탄에서 신음하기 때문이다. 

하여 몹시도 익숙한 명제이지만, 개인이든 나라든 간에, 덩치의 크고 작음과 무관하게 아는 것이 힘이고 인력은 고스란히 국력임은 여전히 유효하고 소중한 이치다. 정계나 관계, 재계 할 것 없이 학문 융성에 열심이어야 함이 선택이나 시혜가 아니라, 필수이자 당위인 까닭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702032056005#csidx5b7a82fcbe65dad97a1febf9082fc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