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바디스와 행로난](26) 법으로 세워진 국가, 정치로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다

2017. 7. 4. 12:22쿠오바디스 행로난

ㆍ정치와 법치의 차이

공사 구분의 원칙에 따라 자신의 딸 율리아를 추방하는 아우구스투스. 스카르펠리(Tancredi Scarpelli, 1866~1937)의 작품.

공사 구분의 원칙에 따라 자신의 딸 율리아를 추방하는 아우구스투스. 스카르펠리(Tancredi Scarpelli, 1866~1937)의 작품.

“리셋 코리아(Reset Korea)!” “리빌딩 코리아(Rebuilding Korea)!” 하자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이게 나라냐?”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들이다. 나라를 바로 세우자는 것이다.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영어로 표현해야 소위 ‘뽀다구’가 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라가 나라답게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요청되는 것들이 있다. 어떤 이는 정의, 어떤 이는 공정, 어떤 이는 진실, 어떤 이는 자유, 어떤 이는 평등을 외친다.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이것들 모두 나라가 나라다울 수 있으려면 기본적으로 요청되는 필요조건임을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나라가 나라처럼 작동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가가 어떤 원리에 근거하고 있고 어떤 방식에 의해서 작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단적으로 이 원리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한 원인이기에. 물론, 여러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만 이야기하겠다.

■국가의 성립 근거는? 

이렇다. 사람이 태어나면 부여되는 것들이 있다. 이름과 성이다. 성은 가족과 가문으로 연결되고, 가문은 씨족으로 확장된다. 씨족(tribus)은 종족(natio) 단위로 상승한다. 종족은 혈통과 지역적 경계의 같음을 바탕으로 한다. 세상사에는 혈통과 지역 범위 내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있고, 종족의 범위를 뛰어넘는 것도 있다. 이를테면 전쟁이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두의 이해관계와 관련된 공동의 문제이기에. 이런 공동의 문제를 담당하는 것이 국가(civitas)이다. 각설하고, 종족과 국가의 분리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로마의 정치가이자 법률가였던 키케로(기원전 106~43년)였다. 자신에게는 두 개의 조국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태어난 장소에 따라 ‘부여되는’ 조국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가 부여한’ 시민권의 획득으로 속하게 된 조국이다. 예를 들어 저 카토(Cato, 기원전 234~149년)는 비록 투스쿨룸 지역 출신이지만 로마 인민의 시민권을 받았다. 그래서 태생의 관점에서는 투스쿨룸 사람이었다. 하지만 시민의 관점에서는 로마인이었다. 따라서 장소의 조국과 법률의 조국이 다른 것이다. (…) 그러나 법률의 조국이 더 우선적이다. 법률의 조국에 기초해 국가 전체에,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해당하도록 ‘공동의 일(rei publicae)’이라는 이름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법률론> 제2권 2장 5절)

‘공동의 일’이란 곧 ‘공동의 이해관계를 공동으로 책임지고 다루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실은 ‘국가’이다. 이와 관련해서 키케로는 ‘태생의 조국(patria naturae)’보다 ‘법률의 조국(patria iuris)’을 상위에 놓는다. 그 이유로 키케로는 개인에 대하여 태생의 조국이 차지하는 영향력보다 법률의 조국이 미치는 영향력이 훨씬 넓고 보편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논리에 근거하여 ‘공동의 일’을 포괄하고, 보편의 지평에서 전체 구성원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조직인 ‘국가(universae civitati)’가 성립한다. 이에 따르면, 국가란 모두에게 해당하고 모두의 이해관계(res publicae)와 연관된 문제를 다루는 조직이다. 그런데,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를 공동의 관점에서 -하지만 강제력을 동원해서- 처리하고 해결할 수 있는 조직이 ‘법률의 조국’이라고 한다. 이런 이유를 들어 키케로는 법률이 결여된 조직은 국가(civitas)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법률이 결여된다면, 그 때문에 그것은 도저히 국가라고 간주될 수 없지 않나?”(<법률론> 제2권 5장 12절) 

법치주의를 강조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한층 더 깊은 심급에서 이해해야 하는 말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국가 성립의 구성 조건으로서 법률의 역할에 대한 해명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법률의 유무 여부에 따라 국가와 종족은 구분된다는 것인데,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달리 묻자면, 키케로가 국가를 종족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실은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여러 종족으로 구성된 로마의 인적 구조 때문에 로마는 자체의 내적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종족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기준과 규칙의 확보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고 바로 이 필연성이 종족과 국가를 분리시켰다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고대 로마에서조차 국민이라는 개념은 특수성인 종족과 보편성인 국가의 분리를 전제로 해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키케로는 제도(institutio)로서의 국가를, 각 구성원의 합의와 동의에 의해 수립되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며 모두에게 통용될 수 있는 기준과 규칙 체계로 규정한다.

이탈리아의 한 농장에서 발견된 키케로 흉상

이탈리아의 한 농장에서 발견된 키케로 흉상

국민이란 키케로에 따르면 바로 이러한 기준과 규칙에 의해 규정된 자격과 신분을 가지고 있는 법적 인격체(persona)인 셈이다. 즉 법적 규칙이 정하는 바에 따라 개별적 개인과 국가 공동체와의 관계 규정이 발생하는데, 그런 관계 규정에 따라 국가와 국민 사이에 의무·권리 관계가 성립되고, 국민이란 그가 어떤 종족 혹은 어느 지역 출신인가와 무관하게 이 관계의 주체일 수 있는 자를 뜻할 뿐이다. 

■국민이라는 말에 대하여 

오해를 피하기 위해 “국민”에 대한 말에 대해 잠시 해명하겠다. 국민에 해당하는 라틴어 civis는 영어의 citizen이다. 후자가 우리말로 시민으로 번역되었다. 이런 사정 탓에 ‘국민’이란 말을 사용해야 할지 아니면 ‘시민’이란 말을 사용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내 생각으로는 civis는 ‘국민’으로 이해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근거는 세 가지다. 

1496년에 출판된 키케로의 <법률론> 초판본(editio princeps).

1496년에 출판된 키케로의 <법률론> 초판본(editio princeps).

하나는 시민이란 말은 규모에 있어서 도시국가였던 아테네의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할 때 그 이해가 명료해지는 개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규모에 있어서 도시국가의 단계를 넘어선 국가이다. 다른 말로 하면 도시라는 지리 공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개념이 요청되고, 그것이 국민이라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국민인가 시민인가를 놓고 벌이는 논쟁이 영어 citizen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시민’으로 옮기며 생겨난 문제이다. 그런데, 도시를 뜻하는 city의 어원은 civitas이다. 중세 유럽의 도시에서 city라고 불리는 지역은 중앙정부의 행정을 집행하는 관청이 있는 곳을 지칭했다. 그러니까 관청이 있는 곳이 city인 셈이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city는 국가의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civitas나 city는 읍내(邑內)를 지칭하는 작은 의미의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국민이 읍내 사람은 아니다. 물론, civitas의 공간적 특성은 읍성(邑城) 구조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civitas는 법적 용어이자 행정 용어였다. 마지막으로 서양 근세에 형성된 시민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부르주아(Bourgeois) 집단을 “시민”이라 부르는 전통이 있다. 하지만, 특정 신분에 속하는 세력을 지칭하는 의미로 자리 잡아 버린 말로 일반 국민을 지칭할 수는 없다. 일단 보편성이 확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근거를 바탕으로 나는 civis를 국민으로 이해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헌법 제1조 2항)는 문장의 국민이 지칭하는 대상이 불분명해지고, 헌법의 국민주권 조항의 실효적 의미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불일치에서 유래한다 

처음으로 돌아가 도대체 국가의 존립 근거는 무엇일까? 여러 논의를 해야겠지만, 적어도 국가는 인간적인 목적의 실현을 위해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인간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키케로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답게 사는 것(humaniter vivere)”의 실현이다. 키케로에 따르면, 그 실현이 후마니타스(humanitas)다. 그렇다면, 후마니타스와 국가는 어떤 사이일까? 내 생각에, 후마니타스는 “인간 안에 있는 국가(civitas in homine)”를 포함한다. 해명은 다음과 같다. 즉 “국가에 대하여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몫과 권리(ius in civitate)”가 국민의 권리(ius civile)인데, 예컨대 고대 로마에서의 권리 문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의 핵심 조건이었다. 단적으로 로마법에서 “권리 없음(nullum ius)”이라는 말은 “생명의 권리가 없음(nullum caput)”과 같은 말이기에. 그런데 “생명의 권리가 없음(nullum caput)”은 노예나 극형을 받은 자를 호칭할 때 쓰는 표현이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국가로부터 그리고 국가에 대해서 권리를 가져야 한다. 생명에 대한 권리다. 이 권리를 가진 자만이 인간이다. 이 권리를 가진 자(persona)가 국민이다. 결론적으로 국민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인격성 혹은 자격(personae) 중에서 국가성을 표지하는 개념이라는 소리다. 바로 이 권리에 입각해서 국민은 자신의 생명을 지켜줄 것을 요구할 수 있고 국가는 이를 수행할 의무가 생겨난다. 또한 이 권리 때문에 개인으로서 국민은 그 어느 누구도 함부로 타인을 폭행하거나 타인의 몫을 침범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권리를 지켜주는 국가의 개입이 요청되는데, 만약 어떤 이가 타인의 몫, 곧 권리에 개입하고자 한다면 국가를 매개로 할 때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본성 안에 있는 국가성이라는 속성이 매개해준다. 이러한 국가라는 매개 구조를 통해서, 혹은 그 매개 구조가 제도적으로 실현된 장치가 법정인데, 이 법정을 통해서 타인의 권리에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국가라는 존재도 인간의 본성 중의 하나인, 다시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인간은 정치적 존재라는 성격에 그 존립 근거를 두고 있다. 인간 안에 있는 국가성도 기본적으로는 인간이 사회적 혹은 정치적 존재라는 속성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가성도 결국은 인간성(humanitas) 개념의 하위 범주에 속하는 한 속성에 불과하다. 이 대목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인간성 영역(humanitas)과 국가의 영역이 근본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불일치(disagreement)에서 성립하는 것이 정치(政治)이다. 도대체 정치가 불일치에서 성립한다는 것은 어떻게 해명될 수 있을까? 만약 일치한다면, 정치는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법치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 사례로 우리는 서구의 중세시대를 들 수 있다. <성경>이라는 카논에 입각해 통치가 이루어졌던 소위 신정-법치의 시대가 중세였기에. 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법률에 의해 포섭되지 않는 영역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실정법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요청되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정치가 요청된다는 말이다. 만약 법치만으로 인간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설득과 토론과 세력 간의 경쟁을 투표를 통해서 결정하는 선거 그리고 자신의 운명과 미래를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결정하는 민주주의의 역사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결국은 정치의 성립 근거가 국민 개념인 셈이다. 여기에 국민 개념의 정립을 통해서 공동의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사족(蛇足)도 달겠다. 

참고로, 공(公)은 공(公)이고, 사(私)는 사(私)라는 점을, 즉 공사(公私)의 구분을 정치가의 제일 덕목으로 여겼던 사람들이 로마인이었다. 이는 심지어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사연인즉 이렇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 재위 기원전 27~서기 14년)에게는 직계 자식으로 외동딸 율리아(Julia)만 있었다. 딸의 혼인을 통해서 후계자를 확보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하다 결국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는다. 서기 14년 그의 죽음과 함께 티베리우스를 시작으로 네로 황제에 이르기까지 이후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통치가 반세기가량 유지될 수 있게 된다. 이도 실은 아우구스투스 가족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 희생양이 율리아였다. 말 그대로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정략결혼의 희생자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간통법 위반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추방되었다. 죽을 때까지, 죽어서도 로마로 돌아오지 못했다. 공과 사의 철저한 구분 때문이었다. 어설픈 용서는 안된다는 소리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701061908005#csidx96a5ac33cc314b3b6e669232a439c4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