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4. 12:21ㆍ쿠오바디스 행로난
ㆍ루쉰의 삶, 문명 짓기의 길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성인은 문명을 창출하거나 갱신한 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문명을 짓는 이가 성인이라는 뜻이다. 공자는 “술이부작(述而不作)”, 곧 전수받은 바를 풀어 전했을 뿐 결코 새로 짓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가 문명의 새로운 풍기를 진작하고 씨를 뿌림으로써 중국 전통문화의 골간이 됐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가 성인임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 고대에는 공자, 근대에는 루쉰
봉건문화의 척결을 내세웠던 마오쩌둥조차 공자가 지난 시절을 대표하는 성인임을 인정할 정도였다. 다만 어디까지나 ‘지난 시절’ 그러니까 봉건시대에 그러했다고 선을 그었다. 공자가 사회주의 신중국이란 새로운 문명을 빚어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신중국을 대표하는 성인으로 마오쩌둥은 루쉰(魯迅)을 꼽았다. 왜 그랬을까.
사상가이자 문인이고 학자였던, 또 정치가이자 교육자였던 루쉰에겐 곧잘 덧붙여지는 수식어가 있다. ‘근대 중국을 대표하는’ ‘근대 중국의 위대한’ 같은 표현이 그것이다. 근대 중국을 얘기하면서 그를 빼놓을 수 없기에 생긴 현상이었다. ‘현대 중국을 정초한’ 같은 표현도 종종 쓰인다. 근대 중국은 지금 중국의 머리니, 오늘날 중국을 얘기할 때도 그를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정치적, 이념적 차원에서 사회주의 신중국의 대표 아이콘이 필요해서 루쉰을 내밀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다방면에 걸쳐 근대중국의 핵심 자산이자 전범이었다. 가령 그가 지은 <광인일기>는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임에도 그 예술적 성취가 시대를 가로지르며 지금까지도 아롱지게 빛난다. 시대가 소설을 쓸 수 없게 한다며 소설 절필을 선언한 후 주로 쓴 잡문은 충일한 전투정신으로 부조리한 현실을 날카롭게 헤집었다. ‘정신계의 전사’라는 평가에서처럼, 고양된 정신으로 벼려낸 그의 잡문은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현대수필의 전범으로 꼽힌다.
번역과 연구에서도 루쉰은 눈부셨다. 그는 쥘 베른의 <달나라 탐험>을 필두로 100여편의 길고 짧은 작품과 글을 번역하였다. 이는 <논어> 분량의 책을 320권가량 쓴 양이다. 그중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도 꽤 된다. 동구와 북구 문학을 처음 소개한 <역외소설집>과 플레하노프의 <예술론>이 대표적 예다. 특히 후자는 마르크시즘 문예이론을 중국에 처음으로 소개한 것이다. 근대중국이 사회주의 중국으로 수렴됐음을 보건대, 번역 대상을 골라냈던 그의 ‘선구안’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는 ‘뻣뻣하게 번역하기(硬譯)’ 같은 독창적 번역이론을 세웠고, 역대의 서사를 근대적으로 연구한 <중국소설사략>을 집필하였다.
창작이나 번역, 연구 모두에 걸쳐 높고도 큰 성취를 일궈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삶 자체가 근대중국의 전형이었다. 그의 글은 몸과 마음의 상태, 그것의 가장 정확한 주석이 되었다는 루쉰 연구자의 단언처럼 번역, 창작, 연구 가릴 것 없이 그의 글 모두는 그의 삶 자체였다. 글을 지으면서 자신의 삶도 지어갔음이다. 루쉰이 스스로를 늘 작가, 곧 ‘짓는 이’라고 규정한 것이 허언이 아니었음이다. 그리고 그의 글과 삶은 이미 당시부터 큰 영향을 미쳐 근대 이래 중국을 짓는 데 초석이 되고 고전이 됐다. 글이 삶은 물론이고, 시대와 문명도 함께 지어갔던 것이다.
루쉰을 성인으로 규정한 마오쩌둥이 옳았다는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성리학에선 누구든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 사람은 우주적 존재라고 여겼다. 그렇듯 사람은 그 자체로 ‘문명적 존재’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누구나 새로운 문명을 지어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니지만, 누구나 문명 짓기에 동참할 수 있다는 뜻은 된다. 루쉰이 격변의 시대를 살면서도 자기 삶을 문명 짓기의 길로 이끌었듯이, 우리도 문명 짓기의 공동주역이 되는 길을 너끈히 걸을 수 있다는 얘기다.
■ ‘내파(內破)’하기 그리고 버텨내기
루쉰은 평생 낙담이나 절망, 고독 따위를 멀리했다고 한다. 혹자는 그를 비관주의자라고도 평가하지만, 그의 글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회의하는 정신이 삶을 주도했다는 평가가 더욱 타당하다. 그가 한 이 말, “사람이 자기가 자기 입을 때릴 정도로 망가졌다면, 다른 사람이 와서 자기 입을 때리지 않으리라 보장하기도 어렵다”는 언급은 그가 결코 비관적일 수 없었음을 말해준다. 비관에서는 긍정조차 긍정하기 버겁다. 그러나 회의하는 정신은 부정마저도 자기 강화의 계기로 변주해내는 힘을 품고 있다. 반성은 주저앉으려 하는 게 아니라 나아가기 위해 하는 것처럼, 루쉰은 비관을 비판하게끔 자기 정신을 주조해갔다. 동시에 “즐거워하되 과해서는 안된다(樂而不淫)”는 공자의 경계처럼, 그는 근거 없는 낙관도 회의하도록 정신을 벼렸다. 그가 온통 적으로 둘러싸였을 때조차 꿋꿋하게 살아낼 수 있었던 연유다. 또한 그가 평생 계몽과 혁명을 드높이 외치는 자신을 늘 회의하며 객관화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 결과 무비판적 맹종이나 동일시, 좌절 따위는 그와는 관계없는 말이 되었다.
이는, 그가 새로운 것과 조우할 때면 그것을 늘 자신이 지녀왔던 기존의 것과 철저하게 마주 세웠기에 가능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1920년대 중엽에 들어 공화주의에 대한 기대가 꺾이자 루쉰 주위에는 사회주의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남들보다 먼저 공화주의를 회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사회주의로 금방 옮겨가지 않았다. 대신 자기 이념을 구성했던 공화주의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불러내 사회주의의 그것과 치밀하게 대조했다. 그렇게 현재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바를 철저하게 성찰하며, 그것과의 비교 검증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받아들였다.
하여 루쉰은 서너 발자국가량 늦곤 했다. 늦은 결심 탓에 주위로부터 기회주의자라고 비난받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그는 그러한 ‘내파(內破)’, 곧 ‘안으로부터 스스로를 깨고 나오는’ 길을 고수했다. 시대에 뒤처진 채 골방에 숨은 늙은이라는 인신공격마저 받았지만, 내파 덕분에 그는 온갖 이해관계가 부딪히고 갖은 욕망이 충돌하는 현장에서 이탈하지 않을 수 있었다.
“계급사회에 살면서 초계급적 작가가 되고자 하고, 전투의 시대에 살면서 전투에서 벗어나 홀로 살고자 하는…. 그런 인간은 실은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일 뿐, 현실세계에선 있을 수 없다. 그런 인간이 되려 함은 자기 손으로 자기 머리칼을 잡아당겨 지구에서 벗어나려는 것과 같을 뿐이다.”(<별종 인간>(第三種人))
한마디로 계급사회에 살면서 자신의 계급성을 부정하는 삶은 지구에 살면서 지구 바깥으로 자기 자신을 끌어냄과 같은 주관적 환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객관적이기 위해서는, 또 현실적이기 위해서는 자기 안의 계급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요구다. 그렇게 장점, 결점 가리지 않고 자기를 구성하는 모든 것과 담담히 마주하게 될 때 비로소 생활이 이어지는 현장에서 벗어나지 않게 된다는 통찰이다.
루쉰에 의하면, 그랬을 때 ‘버텨내기’가 가능해진다. 속상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못난이가 다스리던 때가 된 사람이 다스리는 때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점이다. 격변의 시대는 더욱더 그러하여, 양식 있는 이가 살아가기 위해선 고된 싸움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하여 그것은 온갖 부조리와 못된 욕망에 맞서 삶터에서 벌이는 어려운 싸움이 된다. 달리 말해 생업에 종사하고 일상을 꾸려가면서 수행하는 힘든 싸움이다. 그 결과 개인의 삶은 물론 사회도 멸절되지 않고 갱신되며 거듭되게 된다. 개인이 행하는 버텨내기가 그 자체로 문명 짓기가 되는 까닭이자, 그것이 뭔가를 끊임없이 생성해내게 되는 이유다.
이렇게 버텨내기를 통해 ‘생성의 회로’를 돌리는 이를 일컬어 루쉰은 ‘살아내는 이’ 곧 ‘활인(活人)’이라고 하였다. 그가 “본디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오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이다”라고 했을 때, 없는 곳에서 길을 만들어낸 이들이 바로 이러한 활인이었던 것이다.
■ 비스듬히 서서 즐거워하기
격변하는 시대일수록 인간의 밑바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가뜩이나 힘겨운 살아내기는 더욱더 버거워진다. 아무리 루쉰처럼 회의하는 정신으로 무장하고, 내파하며 버텨내도 결코 쉽지 않다.
게다가 악은 앞에만 있는 게 아니라 항상 등 뒤에도 존재한다. 동지 안에, 우리 안에, ‘나’ 안에 악은 늘 잠재해 있다. 인간은 악하게 마련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생존과 번영에 유리함을 좇는 인간 본성이 악으로 발현될 수 있는 기제가 적진에서만 발동되는 게 아니라 아군에게서도 작동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버텨내며 살아내는 삶이 더욱 힘겹게 된다.
“가장 두려운 건 무엇보다도 입으론 ‘네’ 하면서 속으론 ‘아니요’ 하는, 이른바 ‘전우’라는 자들로, 아무리 방비를 해도 방비할 수가 없습니다.(…)제 후방을 지키기 위해 저는 비스듬히 서 있어야 하기에 적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앞뒤를 다 살피는 일은 몹시도 힘듭니다.”(루쉰, <양쥐윈에게>(致楊霽雲))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격변의 시대를 살아낸다는 것의 어려움이 절절히 전해진다. 그래서 살아내려면 무엇보다도 ‘나’ 안에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물질적 이익이나 말초적 쾌락이 유발하는 즐거움을 말함이 아니다. 공자가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했을 때의 그런 즐거움을 말한다. 내 안에 간직할 즐거움은 공부하여 얻게 된 좋은 결과 덕분에 생기는 그런 즐거움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건 공부라는 활동 자체가 기쁨의 원천이기에 비롯되는 즐거움이다. 사회가 나를 버겁게 해도 공부함으로써 기쁘게 되고, 시대가 나를 속여도 공부함으로써 기껍게 되는 즐거움이다. 그런 즐거움은 권력의 유무나 재력의 과다, 생로병사 등과 무관하다. 이런 즐거움을 ‘나’ 안에 갖추자는 제언이다. 그것이 비스듬히 서서도 지치지 않고서 버텨내며 살아냄의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두 달 넘게 자발적 참여를 통해 일궈낸,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촛불혁명’도 완수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익히 경험했듯이, 국가를 사유화했던 저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뭐든 다 할 것이다. 최순실 일파로부터 기득권을 회수했다고 여겼는지, 그들은 벌써 예전처럼 민주주의를 팽개치는 언행을 일삼고 있다.
한편 대선 국면이 진전될수록, “박근혜 퇴진, 탄핵, 구속”이란 한목소리를 냈던 시민들은 각자의 이념과 지향에 의거하여 나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우려할 필요는 없다. 민주주의 사회란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계다. 오히려 촛불을 든 사람들이 늘 한목소리를 낸다면 두려워할 일이다. 전제국가가 아닌 한, 저마다 다른 조건에서 살아온 이들이 어떻게 늘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단 말인가. 화이부동(和而不同), 그러니까 큰 틀에서 일궈내는 조화 속에 서로 다름을 인정하듯, 공공선의 구현과 진보를 위해 ‘따로 또 같이’ 힘을 모으면 된다.
다만 저들은 이를 기화로 삼아 이념과 지역, 세대와 일자리 등으로 또다시 분열 책동을 집요하고도 교묘하게 전개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치면 안된다. 일상에서 그들을 감시하고 비판하여 악이 선을 구박하고 축출하는 일이 반복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곪고 곪을 때까지 참고 또 참는 일도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 생업에 종사하고 여가를 보내는 그런 삶터에서 고양된 시민의식이 일상적으로 실천돼야 한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선 ‘나’ 안에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안팎의 부조리와 맞서며 기어코 살아내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꼭 지녀야 한다. ‘나’가 즐거워야지 세상도 바꿀 수 있기에 더욱더 그러하다. 마침 섣달그믐이다. 우리가 품는 즐거움은 새해 내내 이루어갈, 해방 이후 70년 넘게 지속된 친일로 대변되는 구체제를 혁신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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