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바디스와 행로난](27) 국가 변혁의 처음이자 끝, 결국 ‘교육 개혁’이다

2017. 7. 4. 12:24쿠오바디스 행로난

ㆍ학교의 재구성

명(明) 주신(周臣·1460~1535)의 <유민도(流民圖)>. 왕안석은 이런 유민을 구제하고자 신법을 시행하였지만, 현장에서는 신법을 악용하여 부패와 부정이 더욱 심해져 오히려 유민이 증가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미국 클리블랜드 예술박물관 소장

명(明) 주신(周臣·1460~1535)의 <유민도(流民圖)>. 왕안석은 이런 유민을 구제하고자 신법을 시행하였지만, 현장에서는 신법을 악용하여 부패와 부정이 더욱 심해져 오히려 유민이 증가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미국 클리블랜드 예술박물관 소장

“지금은 모두가 (…) 정기가 소진되고 정신이 피폐되어도 온종일 과거 공부만 시킵니다. 그러다 등용되면 지금까지 한 공부를 죄다 버리게 하고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일을 맡깁니다. 해야 할 일을 완수할 줄 아는 인재가 적어진 까닭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람의 능력을 계발해주기는커녕 사람을 몹시 괴롭히고 파괴하여 무능력자가 되게 한다’고 아뢨던 것입니다.”

■ 막다른 시대들의 초상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는 교육이 아니라 죽이는 교육을 행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것도 중국, 그 넓은 땅덩이에 이러한 교육이 만연하다는 고발이다. 북송(北宋) 중엽 무렵 교육계 적폐에 대해 왕안석(1021~1086)이 황제에게 올린 상소의 한 대목이다. 천 년 전 중국에 있었던 얘기치고는 왠지 낯설지 않다. 과거공부를 대입이나 고시 등으로 바꾸면 영락없는 지금 여기의 우리네 자화상이기에 그렇다. 교육계뿐만이 아니다. 왕안석이 살았던 북송 중엽은 여러모로 데자뷔를 느끼게 한다. 역시 왕안석의 입을 통해 당시의 실정을 들여다보자. 그의 사회시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는 ‘민둥산’(禿山) 중의 일부이다. 

‘임지로 가는 길 바다에서/ 먼 산 보고는 배를 멈췄다./ 괴이하다, 저 민둥산! 어찌 저리 되었는가./ 마을사람들 이유를 일러준다./ 한 마리 원숭이 산 위에서 울자/ 또 한 마리 원숭이 따라 놀았습죠./ 서로 짝지어 새끼 낳고/ 그렇게 자손이 늘자 산은 비좁아졌습니다./ 산에는 초목 무성했고/ 뿌리, 열매 풍성했지만/(…)/ 뭇 원숭이 죄다 배부르고 살찌자/ 산은 이내 민둥산이 됐습지요./ 밀치고 다투어야 한번 배부를 수 있으니/ 거둬들여 저장할 일, 도모할 겨를이나 있었겠습니까.’

여기서 산과 원숭이는 각각 중국과 통치계층을 가리킨다. 이 시는 건국한 지 70년가량 흘렀을 즈음, 내정은 내정대로 외교는 외교대로 그야말로 총체적으로 난국에 빠졌던 북송 중엽의 상황을 단적으로 증언해준다. 그건 비정상이 정상 노릇 하던 시대, 원숭이가 살질수록 강토는 헐벗게 되는 사회, 그리하여 삶 자체가 오로지 다툼이고 싸움이게 된 세상, 우리의 오늘날과 몹시도 닮아 있는 형국이었다. 개념 있는 이라면, 보수·진보 할 것 없이 저마다 개혁을 꾀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마침 당시는 ‘대가들의 시대’였다. 북송을 대표하는 위인 대다수가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출현하였다. 생전에 이미 동아시아 일대에 문명을 떨쳤던 소동파와 그에 못지않은 명성을 누린 구양수, 경력신정이란 개혁을 주도했던 범중엄, 불세출의 사서 <자치통감>을 저술한 사마광, 성리학의 단초를 연 정호·정이 형제와 장재, 소옹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막다른 시대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은 북송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또 한 명의 대가 왕안석을 그 대열에 합류시켰다. 

■ 학교, 양사(養士)와 취사(取士) 그리고 논정(論政)의 장 

전근대 시기, 중국이란 관념이 고안된 이후 3천여 년 동안 참으로 많은 개혁이 있었건만, 체제 개혁 하면 사람들은 줄곧 북송의 신법(新法)을 꼽았다. 그만큼 강렬하고 혁신적이었다는 말인데, 그것을 설계하고 시공한 이가 바로 왕안석이었다. 

송대의 <과거고시도(科擧考試圖)>. 송대 과거의 최종 단계인 전시(展試)를 치르는 모습. 왕안석은 과거 개혁을 체제 위기 극복의 요체 중 하나로 설정하여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송대의 <과거고시도(科擧考試圖)>. 송대 과거의 최종 단계인 전시(展試)를 치르는 모습. 왕안석은 과거 개혁을 체제 위기 극복의 요체 중 하나로 설정하여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는 지방관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지방 곳곳의 실정을 목도할 수 있었다. 22세의 젊은 나이로 급제한 이후에도 49세에 중앙 관계로 진출하기 전까지, 조정의 부름을 마다하고는 지방관으로 봉직하였다. 이때 그는 관계의 부정부패와 인민의 참혹한 실상을 외면하지 않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천하국가 차원의 개혁 청사진을 마련, 이를 ‘인종 황제께 올리는 시국보고서’(上仁宗皇帝言事書)에 담아 상주했다. 반대파조차 “마치 수십 만 대군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는 듯하다”며 상찬하고, 근대변혁운동의 아이콘 양계초가 진시황 이래 천하제일의 명문이라 극찬한, 일명 ‘만언서(萬言書)’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이었다.

한 편의 글자 수가 만 자에 육박하면 거의 <논어>에 가까운 분량이다. 그런데 왕안석은 그 긴 분량을 인재의 양성과 처우, 선발과 활용에 관한 내용으로 채웠다. 제반 영역에 걸쳐 심화된 체제위기는 결국 인재 부족에서 비롯됐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모여 사는 까닭은 사는 데 필요한 재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국가에 법이 있는 이유도 재화를 공평하게 조절하기 위함이라고 보았다. 관리는 이러한 법을 준행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이들이 법을 무시하면 재화를 다스릴 방도가 없게 되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곧 국가는 무너지게 된다. 그가 또 다른 시국보고서에서 “천하는 커다란 그릇으로, 법도를 널리 밝히지 못하면 유지될 수 없고, 유능한 인재를 많이 세우지 못하면 지탱할 수 없다”고 천명한 까닭이다. 

나아가 관리는 법에 의해 국가를 대신하고 그런 관리를 매개로 인민이 국가와 접하게 됨을 고려할 때, 또 법이 서 있어도 관리가 이를 무시하면 법의 순기능이 마비됨을 감안할 때, 관계가 개혁의 영순위가 됨은 당연하다. 결국 난국의 근본 해소는 ‘참관리’, 그러니까 관리의 본령을 온전히 수행할 줄 아는 관리로 관계를 채우는 것으로 수렴됐다. 

이를 위한 효율적 방도는 인재 양성 기관인 학교의 대대적 개혁, 바로 교육 개혁이었다. 교육은 무엇보다도 내용에 의해 크게 좌우되는 만큼, 그것의 개혁은 내용의 대대적 혁신이었다. 이에 왕안석이 내세운 바는 ‘경세(經世) 역량의 구비’, 곧 ‘자신을 수양하고 국가사회를 공평하게 다스릴 줄 앎’을 위한 교육이었다. 그의 눈길은 자연스레 과거제도로 쏠렸다. 대다수가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오르는 현실에서 과거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학교가 ‘과거 수험용 학원’으로 전락함은 그다지 이상할 바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과거에서 평가하는 역량이 된 사람, 든 사람 여부를 판정하는 것과 멀었다는 점이었다. 

당시 과거에선 주로 시 짓기와 경전 암기를 시험하고 있었다. 왕안석이 보기에 이것으로는 국가 대소사라는 공적 직분을 수행하는 데 요청되는 실무적, 도덕적 역량을 잴 수 없었다. 하여 수험자의 경세 역량을 측정하는 방향으로 과거를 개혁했다. 도덕적, 실무적 주제에 대한 논변인 논(論)과 책(策)의 작성을 과거의 핵심으로 삼았다. 다만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그는 관리가 되는 길을 다변화했다. 학교에서 교육만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소정의 평가체제를 통과한 이는 과거 급제에 준하여 임용케 했다. 교육 연구 기능만 수행했던 학교에 관리 임용 기능을 더한 것이다.

그런데 학교가 인재 양성(養士)과 관리 등용(取士)을 겸비한 형식은 먼 옛날에 이미 실현된 바였다. 적어도 춘추시대인 기원전 6세기경에는 확실히 그러했다. 당시 역사를 담은 <춘추좌전>엔 학교의 기능과 관련된 기록이 실려 있다. 기원전 542년 조의 기록으로, 정나라 국인(國人)들이 향교에 모여 집정인 자산의 정치에 대해 갑론을박했다는 기술이 그것이다. 국인은 지금의 시민에 해당되고 향교는 지방에 설치된 학교였으며 집정은 총리쯤 된다. 곧 시민이 학교에 모여 국정을 의론했다는 뜻이 되니, 학교가 지금으로 치면 의회 역할을 겸하는 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왕안석의 학교 개혁안에서도 목도된다. 그가 제시한 개혁의 핵심은 양사와 취사 모두 경세 역량을 중심으로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학교 교육의 목표가 국가 대소사를 제대로 처리하는 능력의 구비로 설정되었고, 평가도 관련 주제로 작성된 논, 책에 기초해 수행됐다. 관리는 이렇게 학교에서 검증된 인재로 충원되었다. 학교에서 ‘논정(論政)’, 곧 국정에 대한 의론을 상시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여지를 제도적으로 보장한 셈이었다. 이는 학교를 논정의 공간이자 여론의 장으로 본 전통적 관념의 복원이었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학교는 교육 연구 기능과 관리 등용 기능, 의회 기능을 겸한 유서 깊은 문명 장치로 다시금 우뚝 설 수 있었다. 

물론 왕안석의 학교 개혁은 중도에서 좌절됐다. 그렇다고 학교에 대한 그의 관점도 덩달아 추락된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었다. 그의 학교관이 유교에서 진리로 받드는 옛 성군의 뜻에 부합되었기에 그렇다. 더구나 학교는 늘 국가사회와 문화, 인민의 연결고리였고 교육은 항상 미래를 만들어가는 활동이었다. 하여 어두운 시대나 격변기가 펼쳐지면 그의 학교관은 시의에 맞춰 변주되며 제반 개혁의 요체로 제출되곤 했다. 중국이 ‘오랑캐’인 만주족 치하로 들어갔을 때 황종희란 큰 학자나 근대 변혁기 국학계의 큰 스승이라 불렸던 장병린이 제출한 학교론이 대표적 예다.

이들은 왕안석보다 몇 걸음씩 더 나아가 학교의 사회교육적 기능, 여론 기능 등을 강화함으로써 학교를 근대적 의미의 교육 민주화와 교육 자치, 향촌 자치 등의 중추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매개로 국가를 일신하고자 했다. 학교 개혁은 언제나처럼 체제변혁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작동됐던 것이다. 

■ ‘평균적 사람’들이 일궈내는 혁신 

왕안석이 피력했던 학교관은 상술했듯이 적어도 정나라 자산 때부터, <예기>가 써지던 시대와 황종희가 살던 17세기를 거쳐, 20세기 전환기 장병린에 이르기까지 그 고갱이가 유전됐다. 적어도 2500여 년간 꾸준히 반복된 셈이다. 

왕안석의 학교 개혁안이 그래서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다. 이는 양날의 칼이기에 그렇다. 그런 괜찮은 학교관이 그 오랜 세월 동안 반복적으로 제시됐음은 그만큼 학교가 제대로 서지 못했던 때도 반복됐음을 방증해준다. 

한편으론 신이 아닌 사람이 고안해낸 방안인데 어떻게 오랜 세월 변질되지 않고 지속될 수 있을까 싶다. 고대 중국인의 시간관이라는 나선형적 순환론처럼 “한 번은 다스려지고 한 번은 어지러워지는(一治一亂)” 것이 사람으로선 넘을 수 없는 섭리일 수도 있다. 

다만 사람에게 자율적 의지가 천부적으로 내재함도 부인할 수 없는 섭리임을 잊어선 안된다. “일치일란”의 섭리에서 못 벗어난다고 해도, 다스림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고 혼란의 시간을 줄이려는 노력은 필요하고 사뭇 값지다. 왕안석을 호되게 비판했던 사마광, 그의 “사람이 근본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충분하게 빠른 시점에서 행동한다면 역사적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통찰도 의미 깊다. 

같은 맥락에서 왕안석이 ‘평균적 사람’(中人)을 개혁의 전제로 삼은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중인’은 교육에 따라 군자가 될 수도 있고 소인이 될 수도 있는 존재다. 달리 말해 왕안석은 군자가 아닌 중인에게 눈높이를 맞추고서 개혁을 설계했다는 얘기다. 이를테면, 넉넉한 생계를 꾀하고 자손들의 윤택한 삶을 희구하는 인지상정을 긍정하고, 이를 충족하기 위한 방안으로 관리의 임금을 현실화하고, 관리 사후 자손에게 세록(世祿·일종의 연금)을 지급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한 사회의 다수를 점하는 평균적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개혁안이라면, 한층 오래 지속되어 그만큼 혼란의 시간을 줄일 가능성도 키울 수 있게 된다. 

그의 학교 개혁도 그래서 이상 지향적이 아니라 다분히 현실 지향적이었다. 평균적 사람이 공적 소임을 바르게 다할 수 있도록 길러내자는 기획이었다. 도덕적, 실무적으로 빼어난 인재를 배출하자는 것이 주된 목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를 오늘날로 바꿔 읽으면, 학교 개혁을 통해 ‘평균적 시민’을 양성해내는 일이 된다. 

그렇게 평균적 시민이 국가사회의 중추가 됐을 때, 사람을 황폐케 하고 삶터가 그대로 싸움터가 되어 사람을 죽이는 그런 시절은 줄이며, 상식과 양식이 우선되고 공정과 평화가 실현되어 사람을 살리는 그런 시기는 늘려갈 수 있게 된다. 체제 개혁을 넘어, 지난 70여 년간 지속된 친일과 독재, 재벌 등으로 대변되는 시대를 일신해야 하는 지금, 왕안석의 변혁 설계가 자못 빛나는 이유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701131910005#csidxf47d1fb8ab0cf6e991c69bcc665f7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