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바디스와 행로난](28) 설득의 힘, 상대를 미소짓게 할 유머와 기지에서 나온다

2017. 7. 4. 12:24쿠오바디스 행로난

ㆍ웃음의 정치에 대하여

키케로의 <연설가에 대하여> 제1권 시작 부분을 전하고 있는 15세기의 필사본.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키케로의 <연설가에 대하여> 제1권 시작 부분을 전하고 있는 15세기의 필사본.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 설득 능력은 신의 선물이다. 

헤시오도스(Hesiodos, 기원전 8세기)라는 시인의 이야기다. 

“무사 여신들 가운데 칼리오페(Kalliope)가 가장 뛰어났다. 존경받는 왕들을 동행한다. 위대한 제우스의 딸들은 제우스가 돌보는 왕들 가운데에서 어떤 이가 태어나면 그를 지켜보고 그에게 명예를 준다. 그녀들은 그의 혀에 달콤한 이슬을 부어준다. 그러면 그의 입에서는 부드러운 말들이 흘러나온다. 백성들은 왕을 우러러본다. 곧은 잣대로 다툼의 시비를 바로 잡는 왕을 모든 백성들은 우러러본다. 어떤 흔들림도 없이 단호한 연설을 통해서 큰 분쟁도 왕은 금세 멈추게 만든다. 따라서 왕들은 시비를 가리는 판단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시장에서 손해를 본 백성들이 원래 자신의 몫을 되찾을 수 있도록 사건을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말을 통한 설득을 통해서 말이다. 다툼이 있는 곳에 왕이 등장하면, 사람들은 그를 신처럼 예의를 갖추어 받든다. 그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에서 우뚝 떠오른다. 이것이 무사 여신들이 인간들에게 주는 신성한 선물이다.”(<신통기> 제79~93행) 

인용에 따르면, 왕이 지녀야 할 덕목은 말을 잘하는 설득 능력이다. 아직 교육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헤시오도스는 설득 능력을 천복으로 돌린다. 왕이 태어날 때 왕의 혀에 무사 여신들이 달콤한 이슬을 부어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달콤한 이슬”이 왕이 직면하는 상황과 수행해야 하는 일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우선 “어떤 흔들림도 없는 단호한 연설”이라는 언표와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곧은 잣대”라는 표현도 그렇다. 그렇다면, “달콤한 이슬”이라는 언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마도 그것은 듣는 청중의 관점에서 마음에 드는 말을 뜻한다. 왕의 연설이 강제가 아닌 자발성을 구하는 설득의 힘을 지녀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달콤함”이 수식어로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을 잘한다는 것, 즉 설득 능력이 있다는 것은 단지 귀에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적어도, 목소리가 감미로운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물론, 목소리의 달콤함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에 시비를 가릴 판단이 실려 있는지 그리고 말에 어긋나고 뒤틀린 것을 바로 잡고 그것을 원래의 자리에 되돌려줄 수 있는지의 여부다. 

‘아름다운 목소리’라는 뜻을 지닌 칼리오페는 정치와 철학을 관장하는 무사 여신이다. 오스트리아 빈의 쇤브룬 정원에 있는 칼리오페 동상.

‘아름다운 목소리’라는 뜻을 지닌 칼리오페는 정치와 철학을 관장하는 무사 여신이다. 오스트리아 빈의 쇤브룬 정원에 있는 칼리오페 동상.

실은 이것이 설득 능력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이 설득 능력이 아마도 사람들이 요즘 말하는 소통 내지 공감 리더십일 것이다. 설득 능력! 이는 예나 지금이나 공동체와 조직의 지도자라면 꼭 지녀야 할 자질임에 틀림없다. 회의를 주재하거나 협상을 할 때, 의견이 갈리어 있는 구성원을 하나로 이끌어서 문제와 갈등을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기에. 소위 소통의 리더십이 이것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야 되는 게 있다. 다름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하면서 혹은 손을 잡아주며 심지어 그 사람들이 입는 옷을 빌려 입고 물리적으로 그들과 잠시 마주 앉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이른바 서민 ‘코스프레(costume play)’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소통 능력은 아니다. 진정한 소통의 리더십이란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해결하는 능력을 보이는 것이기에. 정치인들이 시장에서 어묵을 먹는 장면을 이제는 그만 봤으면 한다.

소통 능력! 그것은 말로 사람을 구하고 나라를 구한다는 능력이다. 어쩌면, 이는 우리에게는 낯선 무엇일 수도 있다. 문어 전통에 익숙해 있는 동양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공자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대체로 말 잘하는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직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교언영색선의인(巧言令色鮮矣仁·말 잘하고 표정을 잘 짓는 사람치고 어진 이가 드물다)”이라는 말이 지닌 위세는 지금도 여전하기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역사를 둘러보건대, 나라를 구한 영웅이나 위인이나 학자들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들이 단지 말만 잘한다는 이유로 예찬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말을 잘하고 설득 능력이 뛰어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조직을 이끌 수가 없었을 것이기에. 이런 이유에서 나는 소통 능력을 개인 차원의 무엇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문명 차원의 무엇이라고 본다. 

요컨대, 선거에서 표를 많이 얻는 것에 의해서 권력이 결정되는 정치 구조에서는 말의 힘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결국은 말이기에 하는 말이다. 또한 자본주의 시대에서 상품들도 말과 이야기의 힘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강조하고자 한다. 말과 이야기로 된 포장의 옷을 입지 않은 상품이 어디에 있는가. 이렇게 문명의 차원에서 접근해보면, 설득 능력은 단순하게 한 개인의 말재주나 글솜씨 정도로 작게 취급할 수 있는 무엇은 결코 아님이 분명하다. 단적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이 말로 자신의 무고함을 해명하고자 할 때 그 억울함을 호소하는 수단이 오로지 말밖에 없을 때, 그 말을 바탕으로 그가 무고한지 아닌지를 법정에 모인 배심원들이 결정하는 판결 구조에서 말의 힘은 당연히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설득 능력 혹은 소통 능력을 지금의 서양 문명을 가능케 한 토대 조건이자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을 결정하고 진실을 가르며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말의 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 서양 문명의 특징이기에. 

이를 잘 보여주는 증인을 초대하겠다. 말로 나라를 구했다 해서 ‘국부(pater civitatis)’ 칭호를 부여받은 키케로(Cicero, 기원전 106~43년)다. 예컨대 그는 친구를 위해서 심지어는 산천초목이 떨었다던 독재자 술라(Sulla)와 맞섰고 법정에서 승리했다. 돈이나 무력으로 덤비었다면 백전백패했을 것이다. 말의 힘이 위력을 떨칠 수밖에 없는 서양 문명의 특성 덕분이었다. 물론 말로 인해 정치적 박해를 받기도 했다. 독재자의 분노를 사게 되어 조국 로마를 떠나 아테네와 로도스 섬으로 망명 유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변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유와 정의를 위해 법정과 광장에 나섰는데, 물론 이것이 그를 로마의 최고 권력자로 만들어주었다.

■ 성공의 비결은 웃음이었다. 

키케로의 말에는 힘이 넘쳤다고 한다. 하지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때론 사자후를 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키케로가 행한 연설의 대부분은 재치와 기지로 넘치는 것들이었다. 웃음이 그의 필살기였던 셈이다. 당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나 듣는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 웃음이기에. 아닌 게 아니라 공공장소에서 혹은 토론장에서 상대방 혹은 정치적인 적수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최고의 무기가 웃음인 것은 굳이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욕과 공격을 당하고 있음이 분명함에도 얼굴이 붉어지는 반응 이외에 달리 어찌 대처할 수 없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 웃음이고, 유세장에서 표를 주는 청중의 지지와 인기를 자기편으로 끌어올 수 있는 최고의 효과를 내는 것이 웃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른바 가성비가 가장 높은 무기가 웃음인 셈이다. 물론, 물어뜯기 식의 비난이나 폭로 위주의 깎아내리기 공격이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공격하는 사람의 표를 깎아내릴 수는 있지만 그 표가 자신에게 곧바로 오지는 않는다는 점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 실은 키케로였다. 웃음에 대해서 단독 저서는 아니지만, 단행본 분량의 저술을 남긴 이가 바로 키케로였기 때문이다. <연설가에 대하여>에 적힌 웃음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웃게 만드는 일이 연설가(정치가)의 소임이다.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호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사람들은 종종 특히 답변을 하는 사람이 내놓는 한 단어에 담긴 예리함에 감탄한다. 심지어 때때로 신랄하게 공격하는 사람의 한 마디도 그렇다. 혹은 ‘웃음은’ 적을 깨버리고, 적을 저지하며, 적을 가볍게 만들어 버리고, 적을 두렵게 만들며, 적을 반박하기 때문이다. 혹은 ‘웃음은’ 연설가(정치가)를 세련되고 교육을 잘 받았고 기지가 넘치는 사람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엄하고 썰렁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며, 종종 아주 곤란한 상황을, 이는 말만의 논리로는 쉽게 풀 수가 없는데, 이런 상황마저도 유머와 기지는 부드럽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제2권 236장) 

각설하고, 웃음이 이토록 중요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한편으로 정치 세력 간의 힘겨루기가 민주주의의 근간 규칙인 다수결의 원리를 바탕으로 함에도, 흔히 의사당에서 볼 수 있듯이, 세력 간의 물리적인 충돌을 극복함에 있어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 웃음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도시 생활의 긴장과 갈등을 완화시키는 힘이 웃음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도시의 생기가 웃음이고, 도시의 윤활유가 웃음인 셈이다. 아무튼 키케로가 도시문명에서 발생되는 인간문제와 사회문제들의 해결책 가운데에 하나로 웃음을 제안한다는 사실에 눈길이 가는데, 우리 식으로 따지면 중인 신분의 기사 가문에서 태어났던 키케로를 로마의 최고 수장인 콘술로 만들어 준 힘이 실은 명민한 머리와 예리한 혀가 만들어 낸 웃음이었기 때문이다. 

■ 용기도 중요하다 

키케로의 필살기가 고작 웃음이라는 점에 실망할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가 글로 밝혀놓은 것은 여기까지이기에. 키케로의 말대로 “웃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사태를 꿰뚫어 보는 통찰 능력과 현장을 세밀하게 파악할 줄 아는 관찰 능력과 표현의 디테일에 능한 조절 능력이 바로 그것들이다. 추가할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용기(fortitudo)다. 물론 키케로는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의무로 여긴다. 하지만 권력암투의 정치공학에 의해서 좌우되는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정치가에게 의무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현실 정치에서는 용기가 요청되는데, ‘정치가’라는 이름의 갑옷과 홀(忽)을 방패 삼아 자신을 지키면서 적들이 던지는 창과 화살 사이를 유유히 누빌 수 있는 자로 살아야 하고, 말이라는 무기를 통해서 사악한 자들의 기만과 범죄가 만천하에 공개되어 시민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도록 해야 하고 이를 통해서 그들을 단죄하는 것이 정치가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키케로의 말이다.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은 어떤 법정에서 같은 소리만 맴맴 대는 자도 아니고 목청만 돋우는 자도 아니며 돈만 챙기는 삼류 변호사가 아니네. 내가 진실로 갈구하는 이는 이런 사람이네. (…) 그는 ‘연설가’라는 이름의 갑옷과 홀(忽)을 방패 삼아 자신을 무사히 지키면서 적들이 던지는 창과 화살 사이를 유유히 누빌 수 있는 자이어야만 한다네. 그는 말이라는 무기를 통해 사악한 자들의 기만과 범죄가 만천하에 공개되어 시민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이를 통해 그들을 단죄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여야 하네.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지성의 힘을 방패삼아 무구한 사람을 재판에서 구원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자이어야 하네. 또한 그는 삶의 무기력에 빠져 흐느적거리는 인민들과 갈팡질팡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인민들을 제정신이 번쩍 들도록 만들고 원래 있어야 할 자리와 원래 갈 길로 되돌리는 한편, 간악한 무리들에게는 분노의 불길을 타오르게 할 줄 알며, 그러나 선량한 사람에게 타오른 분노는 부드럽게 다스릴 줄 아는 능력의 소유자이네. 결론적으로 그는 삶에서 부딪히는 혹은 발생하는 사건 사고가 사람들의 마음을 어디로 이끌고 가든지 간에, 그 마음을 격양시키고 싶으면 격양시키고, 부드럽게 가라앉히고 싶으면 가라앉힐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어야 하네.”(<연설가에 대하여> 제1권 202장) 

키케로를 지켜준 방패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웃음이었다. 저 살벌한 전투 현장에서 키케로의 생명을 지켜준 비결이 웃음이었다는 점에서 헤시오도스의 “달콤한 이슬”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웃음이 어쨌든 부드러운 무기이기에. 한데, 요즘 우리가 찾는 사람이 어쩌면 이런 연설가가 아닐는지 싶다. 적어도 웃게는 만들어 줄지도 모르기에.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701201952005#csidx88cdd855c1258d387d2ceb36d13594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