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바디스와 행로난](46) 전쟁에서 평화로의 전환을 위해선 ‘한마음’이 필요

2017. 7. 4. 12:39쿠오바디스 행로난

ㆍ다시 일상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ㆍ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건 몸이 매여 있어서가 아니다
ㆍ공감에 기초한 공통기억 간직한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 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475년에 제작된 도자기 그림. 세이렌의 노래에 몸부림치는 오디세우스.

기원전 475년에 제작된 도자기 그림. 세이렌의 노래에 몸부림치는 오디세우스.

떠돌이 아무개가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아무개”는 오디세우스가 폴리페모스에게 자신을 “아무도 아닌 자”를 뜻하는 “우데이스(oudeis)”로 부르는 데에서 따왔다. 오디세우스는 <오디세이아>의 시작부터 아무개로 등장한다. 칼립소에게 오디세우스는 함께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무방한 잉여인간에 불과했기에. 칼립소의 섬을 나와 망망대해에서 떠도는 오디세우스는 말 그대로 아무개였다.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쓸려 다닐 수밖에 없는 아무개가 바로 오디세우스였다. 오디세우스라는 이름은 자연의 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인간(homo)’을 가리키는 제유였다. 원래는 “미움받는 자”를 뜻한다. 자연이 인간을 사랑해야 할 이유도 딱히 없다. 오디세우스가 아무개로 행세해야 하는 사정은 고향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다. 그토록 바라던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를 알아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들도 부인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20년 동안을 밖으로 떠돌다 온 이를 단박에 알아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향으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집으로 오디세우스가 그 숱한 고난을 뚫고 돌아간다.

■이해와 공감은 다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오디세우스를 가장 괴롭힌 이는 자연의 힘을 표상하는 포세이돈이었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막는 더 강력한 방해자는 따로 있었다. 이를테면 세이렌 자매를 들 수 있다. 자매는 달콤한 목소리로 남자들을 파멸로 몰아넣는 여신들이었다. 호메로스는 자매의 곁을 지나가는 일을 오디세우스가 겪은 여러 모험 중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으로 묘사한다. 오디세우스를 유혹하는 대목이다. 

“이리 오세요. (…) 우리의 이야기에 흠뻑 빠질 거예요. 많은 것을 배우고 고향으로 돌아갈 거예요. 드넓은 트로이에서 아르고스인과 트로이인이 신들의 뜻에 따라 겪어야 했던 모든 고통을 잘 알고 있지요.”(<오디세이아> 제12권 184~190행) 

자매가 오디세우스를 유혹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육체적인 쾌락과 관련해서 오디세우스만큼 달콤함을 경험한 사람은 없다. 칼립소가 제안하는 신적인 조건인 불로불사의 삶과 원하는 모든 쾌락을 누리게 해주겠다는 제안도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적인 삶이 보장된 칼립소와의 동거를 거부하고 오디세우스가 달랑 뗏목 하나에 의지해 집으로 돌아가려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학자들은 대체로 향수심(nostalgia) 때문이라 해명한다. 그러나 해명이 그리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물론 칼립소의 제안이 신적임에도 뭔가 2%는 부족했다. 그 2%에 대한 흔적이 남아 있는 대목이 세이렌 자매와의 조우다. 칼립소도 세이렌 자매 못지않은 미녀다. 하지만 칼립소의 제안까지 거부했던 오디세우스가 세이렌 자매의 노래를 듣고서는 몸부림을 친다. 2%의 뭔가가 세이렌 자매에게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2%의 뭔가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약간은 돌아가야 한다. 오디세우스와 나우시카의 만남에서부터 그 실마리가 풀리기에. 뜻밖에도 이 만남에서 오디세우스는 나우시카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미리 선을 그어버린다. 호메로스가 아예 처음부터 오디세우스를 성인군자로 설정해 놓아버렸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각설하고, 칼립소와 세이렌보다도 나우시카가 더 강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공통의 겪음에 뿌리를 둔 이야기의 힘 때문이다. 오디세우스는 칼립소와 거의 10여년을 함께 보냈다. 하지만 둘만의 고유한 공통 경험이 없다. 둘만이 공유하는 이야기가 작품에 언급되지 않기에. 그런데, 인간인 나우시카와의 만남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연인들에게만 고유한 공통 경험의 인연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까닭에 호메로스는 처음부터 그 인연의 실줄을 싹둑 잘라버린다. 이를 방증해주는 것이 실은 세이렌 자매와의 조우다. 자매의 무기가 육체적인 유혹이었다면 오디세우스도 얼마든지 견뎠을 것이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몸부림을 친다. 그 유혹의 무기는 무엇일까? 바로 칼립소에게 없지만 세이렌 자매에게 있는 이야기의 힘이다.

자매는 이렇게 유혹한다. “우리는 넓은 트로이에서 아르고스인과 트로이인이 신들의 뜻으로 겪어야 했던 모든 고통들을 잘 알고 있”다고. 오디세우스 아니 인간을 유혹하는 진짜 강력한 힘이 여기에서 그 비밀을 드러낸다. 다름 아닌 “모든 고통들”이다. 귀를 즐겁게 하는 달콤함만으로는 인간을 유혹할 수 없으므로. 칼립소의 달콤한 제안이 거절되었던 것도 실은 그녀의 제안에 달콤함만 있지 고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통에는 공감(sympatheia)이 함께한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노래한다는 점에서 세이렌 자매의 유혹은 치명적이었다. 여기에서 칼립소에게는 없지만 세이렌 자매에게는 있는 힘의 실체가 드러난다.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의 힘이 바로 그것이다.

■집은 정체성의 관계로 이뤄진 공간이다 

오디세우스를 알아보는 페넬로페. 스튀커(Jan Styka, 1858~1925)의 작품.

오디세우스를 알아보는 페넬로페. 스튀커(Jan Styka, 1858~1925)의 작품.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세이렌 자매의 유혹을 물리친다.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물론 몸을 돛대에 꽁꽁 묶은 밧줄 덕분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무엇이 있다. 그것은 세이렌이 부르는 노래가 오디세우스의 공감을 살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것이 오디세우스 자신의 고유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직진해서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의 조우 장면으로 바로 가자.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가 진짜 오디세우스인지를 시험한다. 오디세우스를 떠보기 위해 그들만이 알고 있는 침상에 대해 묻는다. 오디세우스의 반응이다. “여보, 당신은 정말로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구려. 누가 내 침상을 다른 데로 옮겼단 말이오? 아무리 솜씨 좋은 자라도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이오. 신이 친히 오신다면 몰라도. (…) 이것이 내가 그대에게 제시하는 침상의 특징이오. (…)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무릎과 심장이 풀렸다.”(<오디세이아> 제23권, 183~205행)

재미를 위한 설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극적 반전을 위한 설정은 아니다. <오디세이아> 작품의 전체 이해와 관련해서 핵심적인 비밀이 담겨 있는 장면이기에. 오디세우스가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게 만든 힘의 비밀이 마침내 풀어지는 자리이기에 그렇다.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만이 알고 있는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그 증거물이 침상이다. 침상에 대한 비밀은 오직 둘만이 알고 있으므로. 이런 비밀은 예컨대 오디세우스와 칼립소 사이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오디세우스와 세이렌 사이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여기에서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의 사랑과 오디세우스와 칼립소의 그것 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전자에는 에로스와 이야기가 있지만, 후자에는 에로스는 있지만 이야기가 없다. 공감이 없는 에로스만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세이렌의 노래에는 에로스도 있고, 이야기도 있고, 공감도 있다. 그래서 치명적이다.

하지만 세이렌의 노래에는 자신의 겪음이 없다. 공감을 넘어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것이 오디세우스가 세이렌 자매의 유혹을 물리친 비밀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이 오디세우스를 집으로 돌아가게 만든 힘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오디세우스로 하여금 집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었을까? 그것은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따라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곳, 바로 집이었다. 오디세우스를 ‘아무개’가 아니라 자신에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로 알아주는 어떤 증인이 있는 곳이 집이었기에. 그 어떤 증인의 자리에 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후보로 호메로스는 페넬로페를 추천한다. 이것이 오디세우스가 갖은 고난을 뚫고서 집으로 돌아가려 한 이유였다. 자신을 알아보고 자신을 알아주며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집이므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잉여 존재가 아닌 자신을 꼭 있어야 할 존재로 알아주는 곳이 집이기에. 

오디세우스가 전우들과 함께 나눈 사랑이 필리아(philia·전우애)다. 여신들과 나눈 사랑이 에로스(eros)다. 페넬로페와의 사랑은 무엇으로 불러야 할까? 적어도 그리스어에는 이런 종류의 사랑을 지칭하는 단어가 딱히 없다. 기독교의 아가페(agape)도 아니다. 우리말의 “애정(愛情)”에 가깝다. 딱히 애정도 아니다. 아내에 대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사랑과 연인에 대한 사랑이, 더 나아가 인간으로서 오디세우스 자신과 자신이 살았던 삶에 대한 정체성을 인증해줄 수 있는 증인에 대한 사랑이 아울러져 있는 무엇이기에. 적어도 남녀가 만나 가정을 만들고 사는 행위에는 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있다. 이 비밀을 공통으로 그 둘이 하나의 인연으로 맺어진다. 그 인연을 구성하는 날줄과 씨줄을 구성하는 한 실을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장치로 놓는다는 점에서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의 사랑은 독특하다.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치게 하는 힘이어서 그렇다. 이 힘은 물론 에로스를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에로스의 관계만으로는 해명이 안된다. 공감에 기초한 공통의 경험과 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뿌리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가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만든 힘이었을 텐데, 적어도 오디세우스와 칼립소의 관계에서는 공통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이것이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간 이유였을 것이다.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시켜주는 증인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말이다. 

■부부지간이 부자지간에 우선한다 

결론적으로 서양 문학사에서 사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생겨났다. 사랑이 단순하게 혈통 계승을 위한 성교 행위도 아니고 그렇다고 육체적 탐닉도 아니라는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실은 관계이다. 이 관계는 공통의 기억과 이를 공유하는 이야기로 엮인 것이다. 단적으로 헬레네의 가정 파괴 사건을 보라. 연애는 있었지만 파리스와의 사랑 이야기는 별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호메로스가 헬레네를 단순하게 바람난 애인으로 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디세이아>에서는 남녀 관계를, 특히 부부지간을 오디세우스의 정체성을 발견해주는 장치로 설정하고 있다. 이 점에서 호메로스는 아주 세련된 전략을 취하고 있다. 부부지간의 사랑을 자신의 정체성의 바탕을 마련하는 일에서 시작해서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과정으로 마무리하기에. 이렇게 부부지간을 사랑의 강력한 끈으로 묶고 또한 부부지간을 정체성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게 해주는 인식은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서양 문학사에 등장한다. 이 인식을 기반으로 가족이라는 공동체 혹은 가정이라는 생활 공간의 발견도 촉발된다. 이와 관련해서 <오디세이아>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가 가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의 비교에서 잘 드러난다. 부자지간보다 부부지간에 더 큰 무게를 둔 작품이 <오디세이아>이다. 베르길리우스가 인간 관계의 기본을 부자지간의 효도(pietas)에 두었다면, 호메로스는 부부지간의 사랑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메로스의 부부지간은 전사 사회의 덕목인 ‘필리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부부지간이 에로스를 바탕으로 하는 한에서 그 관계만큼은 평등을 전제로 하기에. 참고로 전사 사회의 덕목인 필리아는 평등에 기초한 것이다. ‘트로이 목마’ 작전이 필리아를 강조하는 대표적인 경우다. 대오를 유지하고, 진지를 사수할 때, 그러니까 어떤 한 사람의 뛰어남(eris)보다는 조직이 강조되는 최초의 전술이 엿보이는 사건이 트로이의 목마 작전이다. 목마에 들어간 그리스 군인들에게 중요한 덕목은 용맹이 아니라 인내다. 목마 안에서 참지 못하고 날뛰면, 목마 안에 들어간 군인 전체가 발각되어 몰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개인의 탁월함이 아니라 조직 안에서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따라서 조직 전체를 위해서는 용맹보다는 인내가 강조된다. 이런 인내와 관련해서 요청되는 덕목이 필리아다. 곧 전우애이다. 나만 잘나서는 안된다. 동료와 함께해야 한다. 그런데, 전우애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전제로 요구되는 조건이 있다. 다름 아닌 평등이다. 그런데 이 평등이 요구되는 공간이 실은 일상 공간이고, 특히 가정에서다. 특히 부부지간이 한 사람의 탁월함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므로. 오디세우스가 나우시카에게 성인군자 행세를 하면서 “한마음(homophrosy

ne)”을 강조하는 것도 이쯤에서 해명될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말이다.

“신들께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베풀어주시길, 남편, 집, 한마음도 함께 있게 해주시길, 그것보다 좋은 것, 그것보다 강력하고, 그것보다 훌륭한 것은 없으니, 남편과 아내 둘이 한마음으로 집을 지키면, 이는 적에게는 큰 고통이고 친구에게는 즐거움이오. 그 명예는 오로지 그들 자신만이 누리는 법이오.”(<오디세이아> 제6권 180~185행) 

전쟁에서 일상으로의 전환은 이렇게 이루어졌다는 얘기다. 명예 숭배가 전사 사회의 특징이다. <일리아스>가 그 증거다. 하지만 <오디세이아>에서는 명예가 아니라 실질이 중시된다. “그 명예는 오직 그들 자신만이 누리는 법”이라는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전쟁에서 평화로의 전환을 위해서 요청되는 것은 아킬레우스가 추구했던 불멸의 명예가 아니라 그냥 ‘아무개’의 사랑임을 노래하는 작품이 <오디세이아>다. 이런 종류의 사랑을 부르는 이름이 있을 텐데, 당장 떠오르지 않는다. 호메로스는 ‘한마음’이라 불렀다. ‘쿠오바디스와 행로난’을 연재하는 동안에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어디로 다시 나가야 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희망한다. 다시 일상으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로 연재를 마친다. 많은 분들께 감사드린다. 

<시리즈 끝>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706162056005#csidxdedd2824caee7aeab8293b7449e4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