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바디스와 행로난](43) 벌과 나비가 식물을 번성시키듯 기술은 인문을 진화시켰다

2017. 7. 4. 12:37쿠오바디스 행로난

ㆍ학문에 공자가 있다면 기술엔 노반이 있다

노반이 제작했다는 운제(공성용 사다리차)를 당대와 송대에 재현한 모습. 출처 : www.novelforum.org

노반이 제작했다는 운제(공성용 사다리차)를 당대와 송대에 재현한 모습. 출처 : www.novelforum.org

“반문농부(班門弄斧)”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노반(魯班)의 집 앞에서 도끼 솜씨를 자랑한다는 뜻으로, 공자 앞에서 문자 쓴다는 말과 같은 용법이다. 학문 세계에 공자가 있었다면 기술 세계에는 노반이 있었다는 얘기다. 대패와 톱, 곱자, 먹줄 등의 목공용 도구부터 맷돌, 돌방아, 우산 같은 생활용구를 다수 제작했다고 하니 충분히 그럴 만도 싶다. 

■나무 솔개 타고 날아서 출퇴근한 노반 

단지 그러한 도구를 처음 제작했다는 이유만으로 공자급으로 추앙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제작한 기기의 성능은 당대 최강이었다. <묵자>에 보면 초나라가 노반이 제작한 수전용 병기로 늘 약세를 면치 못했던 월나라와의 수전에서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킨 후 붙는 족족 월나라를 무찔렀다는 일화가 나온다. 

수전용 병기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공성용 무기인 ‘운제(雲梯, 사다리차)’를 개발하자 초나라는 이를 믿고 송나라를 치려 했다. 비록 당대 최고의 전술가 묵자와의 가상 전투에서 져 침공을 포기했지만, 이는 노반이 전략전술에서 밀렸기 때문이지 기술력이 묵자보다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기술이 월등하게 빼어났음은 부인키 어렵기에 그렇다. 가령 <묵자>에는 3일간이나 하늘에 떠 있었다는 인공 까치 얘기가 전한다. 그건 노반이 대나무와 나무로 만든 까치였다.

<묵자>엔 사람을 태우는 연을 만들어 적진을 정탐했다는 일화도 실려 있다. 물론 당시 기술 수준을 감안하면 터무니없는 얘기들이다. <묵자>는 기원전 4세기경 문헌인데, 그때 장시간 작동하는 기관 장치나 사람이 탈 수 있는 비행체를 만들었다는 건 아무래도 난센스다. 그러나 이는 그런 상상이 가능할 정도로 노반의 기술이 신기에 가까웠음을 방증해주기도 한다. 꽤 오래전부터 그가 여러 분야의 장인들로부터 기술의 신으로 추앙된 것도, <회남자> 같은 고급 사상서에 그에 대한 믿기 어려운 얘기들이 실린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하늘을 나는 나무 솔개 얘기도 그러하다.

한번은 돈황에 살고 있던 노반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불탑 조성 공사를 총괄하게 됐다. 그런데 시공 기간이 제법 길었던 듯하다. 집에 있는 아내가 보고 싶어진 노반은 하늘을 빠른 속도로 나는 나무 솔개를 만들어 밤에는 그걸 타고 집으로 갔다가 날이 밝기 전에 공사 현장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요새로 치자면 고성능 전용 비행기를 타고 원거리 출퇴근을 감행한 셈이었다. 말 그대로 기술이 있어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아내가 임신을 하게 됐고 이를 수상히 여긴 시아버지께 아내는 자초지종을 털어놓게 되었다. 순간 시아버지, 그러니까 노반의 부친은 엄습하는 호기심에 휩싸여 바로 잠복에 들어갔다. 이윽고 나무 솔개가 착지하였다. 그는 아들이 내려 집으로 들어가자 냉큼 나무 솔개에 올라탔다. 그러곤 쐐기 같은 장치를 톡톡 치니 과연 나무 솔개가 공중으로 솟구쳐 오군이란 곳까지 날아갔다. 거기는 노반이 살던 돈황에서 지금도 비행기로 3시간가량 걸리는 곳이다. 아무튼 나무 솔개는 거기까지 날아간 후에야 비로소 땅에 내려앉았다. 

민간에서 기술의 신으로 추앙되는 노반의 초상화. 민화에 그려진 모습. 당대 문헌인 <유양잡조>에 따르면,  사람들은 정교하고 화려한 건물을 보면 한결같이 노반이 솜씨를 부려놓은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대만 세계종교박물관 소장품. 출처 : 한양대 동아시아건축역사 연구실 홈페이지

민간에서 기술의 신으로 추앙되는 노반의 초상화. 민화에 그려진 모습. 당대 문헌인 <유양잡조>에 따르면, 사람들은 정교하고 화려한 건물을 보면 한결같이 노반이 솜씨를 부려놓은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대만 세계종교박물관 소장품. 출처 : 한양대 동아시아건축역사 연구실 홈페이지

그런데 얘기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곳 사람들은 요괴가 요물을 타고 하늘에서 왔다고 여겨 나무 솔개를 부수고 부친을 때려죽였다. 9세기경 문헌인 <유양잡조>에 실려 전하는 고사다.

■기술이 너희를 자유롭게 했다! 

다시 봐도 허무맹랑한 얘기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는 ‘허구적 진실’을 담고 있다. 사람인 이상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 없기에 터무니없는 얘기조차 사실성(reality)과 무관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노반 얘기에는 기계와 기술에 대한 고대 중국인의 실제 사유와 감각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부친의 객사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나무 솔개는 흉기다. 반면에 노반에게 그것은 이로운 기계였고 이는 흉사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나무 솔개를 다시 만들어 타고 가서 부친의 시신을 수습해 돌아왔기에 하는 말이다. 게다가 노반은 자기가 만든 기계 탓에 소중한 이를 잃은 적이 이미 있었다.

1세기 문헌인 <논형>에는, 그가 어머니를 위해 목제 마부가 운전하는 목제 마차를 만들어 태워드렸는데 그만 마차가 돌아오지 않아 모친을 잃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요새로 치자면 ‘인공지능이 운전하는 자율주행차’란 첨단 기술이 사달을 낸 셈이다. 그럼에도 노반은 기술을 놓지 않았고 급기야 부친마저 그렇게 잃게 되었다. 대체 왜 그랬던 걸까. 

<유양잡조>에는 부친 객사 후 노반이 취한 조치가 마저 실려 있다. 이것이 힌트다. 그는 나무 신선을 만들어 손가락으로 오군을 가리키게 했다. 그러자 오군에는 3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기후마저 통제하는 가공할 기술을 부려 부친을 죽인 이들에게 복수한 것이다. 기술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여 노반 얘기는 이렇게도 읽힌다. 기술이 부모의 죽음이란 극단적 폐해를 야기했지만 그것 자체는 포기할 수 없는 것임을, 나아가 최악의 병폐를 수습하는 길도 그것으로 인해 열릴 수 있음을 말해주는 얘기로 말이다. 단적으로 인간은 기술과 결별한 채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이는 문명 발생 과정만 봐도 쉬이 수긍된다. 

“저 먼 옛날, 사람은 적고 날짐승과 들짐승이 많았다. 사람들은 날짐승과 들짐승, 벌레와 뱀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때 성인이 나와 나무를 엮어 집을 만들자 여러 해악에서 벗어나게 되니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여 천하의 왕으로 삼고는 유소씨(有巢氏)라 불렀다. 당시 사람들은 열매와 씨앗, 조개 따위를 먹었는데 비린내와 악취로 속이 상해 사람들 다수가 병을 앓았다. 이때 성인이 나와 부싯돌로 불을 일으켜 비린내를 제거하니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여 천하의 왕으로 삼고는 수인씨(燧人氏)라 불렀다.”(<한비자>) 

법가를 집대성한 한비자가 문명 발생 과정을 설명한 대목이다. 그뿐 아니라, 법가와 더불어 이른바 전국시대 4대 사상으로 꼽히는 유가와 도가, 묵가도 이와 거의 유사한 문명 발생론을 개진했다. 그런데 자못 의아하다. 선함이나 사랑 같은 정신적 가치가 문명을 일궈낸 게 아니라 기술이 들어감으로써 문명이 발생됐다는 그들의 증언 말이다. 정신적 가치의 발양이 문명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의 결점이나 약점을 극복하는 과정이 문명화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 주장할 수 있게 해준 인간다움(人文)은 그다음 단계에서나 본격적으로 도모됐다. 기술 덕택에 어느 정도 안정적 삶의 영위가 가능해지자 정신문명이 꽃 피기 시작했다고 한다.

공자가 정치의 제일 근본은 “족식(足食)”, 그러니까 너끈히 먹고 살 수 있게 해줌이라고 잘라 말한 까닭이다. 그렇게 족식이 가능한 기술이 발휘돼야 인간다움이 문명의 고갱이로 자리할 수 있었던 게다. 기술이 자연의 위해로부터, 생존이란 본능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자 인문적 가치도 제 몫을 하게 됐음이다. 창고가 가득해야 예의를 알게 된다는 관중의 통찰처럼 말이다.

■잘난 기계와 마주한 못난 인간 

이처럼 기술은 문명화 과정에서 결코 부차적이지 않았다. 정신문명 못지않게, 때론 그것보다 월등하게 문명의 태동과 갱신, 진보의 전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왔다. ‘호모 파베르’란 인간 정의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정도의 주장이 아니었던 셈이다. 

기술과 그것이 물화(物化)된 기기는 말 그대로 인간으로서의 삶과 한 몸이었다.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란 말처럼 목축문명, 농경문명 할 것 없이 삶과 사회의 존속이란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기술과 기기가 뒷받침돼야 했다. 신화 속 성왕들이 정신문명의 정초자라기보다는 문명의 이기를 제작, 보급한 ‘기술 영웅’이었음은 그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후한 최고의 과학자 장형(張衡, 78-139)이 제작한 지동의(地動儀·최초의 지진계)를 복원한 모습. 출처 :  image.baidu.com

후한 최고의 과학자 장형(張衡, 78-139)이 제작한 지동의(地動儀·최초의 지진계)를 복원한 모습. 출처 : image.baidu.com

문명을 이루는 한, 인간은 처음부터 ‘신체+기술’이었고 사회도 ‘인간+기술’이었다. 조금이라도 여의치 않을 때도, 인간의 힘으로는 풀지 못할 법한 난관에 부딪혔을 때도 사람은 기술의 손을 잡아왔다. 땅이 흔들리고 갈라지자 지진계를 만들었고, 홍수나 가뭄이 문제 되자 측우기를 제작했다.

정확한 역법이 필요하자 천문 관측기구를 제조하였고, 더 나은 효율을 위해 각종 생활용구를 부지런히 개량했다. 기술은 그렇게 인간을 이롭게 했고 사람도 자연스럽게 기술의 이로움에 젖어 들었다. 사람을 능가하는 기기를 상상한 것도 이러한 흐름의 자연스러운 발로였다.

옛적 흉노의 포위에 빠진 한 고조 유방 측은 흉노 군장의 애첩에게 사람보다 훨씬 요염하게 춤을 추는 인조인간을 보여줌으로써 포위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고조의 군대가 지면 남편이 그 여인을 차지할 것을 질투한 애첩이 포위를 터준 덕분이었다. 제갈량은 험한 산지를 뚫고 신속하게 군량미를 운반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 맞닥뜨리자 목우유마(木牛流馬)란 인공 수송기계를 만들어 위기를 극복하였다고 한다. 수 양제는 정원에 사람처럼 정확하고도 아름답게 움직이는 60㎝가량의 각종 인형을 만들어 연극을 공연케 하고 춤을 추게 했으며, 갖은 재주를 부리고 악기를 연주하며 술을 따르고 요리하게 했다고 한다.(이상의 사례는 홍상훈, <하늘을 나는 수레>(솔, 2003)를 참조했음.)

그런 탁월한 기기를 상상하고 때론 실제로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사람은 분명 놀라운 존재다. 문제는, 사람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기기 앞에선 적이 초라해하고 심란해한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사람은 “못 먹는 포도는 신 포도일 따름”이라며 실상을 가뿐하게 날조하기도 하는 존재다. 하여 자신을 능가하는 기기도 기꺼이 그런 식으로 왜곡할 수 있었다. 그럴듯한 명분도 적지 않았다. 공자는 “군자불기” 운운하며 군자는 기술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주문했고, 묵자는 실용적이지 않은 기술은 아무리 빼어나도 쓸모없다며 노반을 비판했다. 장자도 기계에 의존하면 타고난 본성이 기계에 잠식돼 사악해진다며 경고했다. 

열등하고 무용하며 요망하다면서 기술을 질시하고 폄하했음이다. 그런데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쫓아내듯”, 이러한 태도와 관점이 그만 주류가 됐다. 기술 탓에 부모를 잃었음에도 기술과의 우정은 변치 않았던 노반의 태도는 전근대기 한자권에선 줄곧 비주류였다. 기술에 대한 비판이 실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오용하고 악용해 이익을 보자는 인간 욕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애써 모른 체한 결과였다. 기술 비판이 고스란히 인간 비판이 됨을 자각하지 못했던 소치였다.

■인간, 기계의 생식기 

기술을 장악한 노반은 기술과 한 몸을 이뤘고, 그래서 일상에서 그것과 더불어 노닐 수 있었다. 반면에 기술을 장악하지 못하거나 멀리한 이들은 짐짓 그것을 하대하면서도 자못 두려워했다. 나를 기술과 결합시켜 ‘나+기술’이라는, 달리 말해 인간과 기술이 상호 삼투된 새로운 신체를 갖춘 노반 같은 이에게 기술은 이로움이요 축복이었지만, 노반의 부모처럼 그렇지 못했던 이들에게 기술은 재앙이 되기도 했다. 

기기 또한 마찬가지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나는 ‘나+컴퓨터’란 신체를 이루어 문서 파일을 생성한다. 이는 컴퓨터와 분리된 ‘나’라는 신체 단독으론 해내지 못하는 일이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머리로 생성하고 머리에 저장할 수는 있어도 컴퓨터용 문서 파일로 만들어내진 못하기에 그렇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곧 ‘자동차+나’란 신체는 한 시간 만에 100㎞ 떨어진 곳도 편히 갈 수 있지만 자동차와 분리된 나란 신체로는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걸어가도 될 곳에 습관적으로 차를 몰고 가는 양상은 그래서 당연하기까지 하다. 편리함의 추구는 지금의 인류 문명을 있게 한 중요한 동기이자 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술을 냉대해온 사적 흐름과 별도로 인간은 기술을 끊임없이 갱신하고 진보시켜 온 당사자였다. 꽃 사이를 날아다니며 꽃가루를 퍼 날라 열매를 맺게 하는 벌과 나비처럼, 인간도 이 기술 저 기술을 부지런히 넘나들면서 더 나은 기술을 끊임없이 잉태시켜왔다. 벌과 나비가 식물 세계의 생식기인 것처럼 인간은 기술 세계의 생식기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잉태된 기술들은 문명을 잉태하고 갱신하며 진보시켜왔다. 정신문명만이 인문의 진화를 추동해온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앞서서 또는 동시적으로 기술도 늘 그것을 진화시켜왔던 것이다. 인간이 기술의 생식기였듯이, 기술은 인문의 쏠쏠한 생식기였음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705262122005#csidxc12c579319d8d48b67a4b922e29389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