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바디스와 행로난](41) 중화의 결을 바꾼 ‘번역’

2017. 7. 4. 12:35쿠오바디스 행로난

ㆍ서학의 물결 번역, 중국문명을 풍요롭게 하다

17년에 걸친 서역 순례를 마친 후 다량의 불경 원전을 지고 장안으로 돌아오고 있는 현장법사의 모습.

17년에 걸친 서역 순례를 마친 후 다량의 불경 원전을 지고 장안으로 돌아오고 있는 현장법사의 모습.

홍대용은 가슴이 벅찼다. 드디어 서양 선교사를 만나는 날이었다. 연행사로 북경에 오기 전, 일찍이 혼천의를 직접 제작했던 그는 서양 신부와 담론할 생각에 한껏 달떠 있었다. 발걸음은 어느덧 천주교 남당(南堂)에 닿아 있었다. 본당의 문을 열고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눈에 띄는 것마다 다 신기했음은 물론이었다. 

■문명의 지층을 빚어내는 번역 

그중 압권은 본당 북쪽 벽을 접한 경험이었다. 홍대용의 연행 일기에 나오는 술회다. 여기서 소상(塑像)은 벽에 새겨 넣은 부조, 안정(眼精)은 눈동자, 화격(畵格)은 화법이란 뜻이다.

“(본당) 북쪽 벽 위 한가운데 한 사람의 화상을 그렸는데 (…) 이것이 곧 천주(天主)라 하는 사람이다. 형체와 의복이 다 공중에 서 있는 모양이고, 선 곳은 깊은 감실 같아 처음 볼 때는 소상인 줄만 알았는데 가까이 간 후에 그림인 줄을 알았다. 안정이 사람을 보는 듯하니 천하에 이상한 화격이었다.(김태준·박성순 역,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 돌베개, 2001, 162쪽.)

본당 입구에 들어선 홍대용에게 저만치께 정면의 광경이 눈에 띄었다. 먼 데는 작게 보이고 가까운 데는 크게 보이기에 그저 조각이려니 했다. 그런데 가까이 보니 아뿔싸 그림이었다는 고백이다. 차원을 인지하는 방식이 달랐음이다. 그는 3차원의 입체감을 2차원의 평면에 재현해내는 선원근법을 몰랐다. 하여 가깝고 먼 것의 차이가 느껴지면 입체로, 그렇지 않으면 평면으로 여겼던 것이다.

문명이 다르면 같은 사실도 이렇게 판이하게 인지한다. 그래서 번역은 문명 교류의 장에서 값지게 활약한다. 그건 모르는 언어를 아는 언어로 바꿔주는 데 그치지 않고 기존 사고방식에 균열을 내 세상을 달리 보게도 하고 한계를 넘어서게도 한다. 그럼으로써 문명이 자기 갱신을 이루게 해준다.

다만 이 과정이 그리 평온한 것만은 아니다. 문명의 자기 갱신은 기존 세계관의 부정을 요구하기 마련인데, 여태껏 지녀온 것을 부정하고 낯선 것을 수용하는 일이 순탄할 리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선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기에 그렇다.

번역은 그런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을 또 낯섦을 줄여줌으로써 기존 문명과 외래 문명 간 건설적 만남을 중재한다. 덕분에 중화라는, 다분히 자기중심적 문명조차 제법 다채로운 지층을 품게 되었다. 번역은 문명을 아픈 만큼 다양케 해주는 ‘고약한’ 문명 장치였던 셈이다.

■ 제1차 서학(西學)의 물결을 번역하다 

청의 건륭제가 열병하는 모습을 그린 <건륭대열도>. 주세페 카스틸리오네(1688~1766. 중국명 郞世寧)의 작품이다. 그는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로 청의 궁정화가로 활약하면서 선원근법에 입각한 서구 근대 화법이 중국에 전파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 북경 고궁박물원 소장

청의 건륭제가 열병하는 모습을 그린 <건륭대열도>. 주세페 카스틸리오네(1688~1766. 중국명 郞世寧)의 작품이다. 그는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로 청의 궁정화가로 활약하면서 선원근법에 입각한 서구 근대 화법이 중국에 전파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 북경 고궁박물원 소장

이미 3000여 년 전부터 자신만이 문명이고 주변은 죄다 야만이라 여겨오던 중국에 열등감을 야기하며 문명 패러다임 자체에 일대 충격을 가한 물결이 적어도 두 차례 있었다. 한 번은 불교라는 서역의 문명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라는 서구 문명이다. 둘 다 서쪽에서 전래됐다는 점에서 ‘서학(西學)’으로 불린다. 

1세기경에 이르면 불교는 조정의 대신들도 널리 알고 있을 정도로 중국에 꽤 스며들어 있었다. 유력한 근거는 64년 후한(後漢)의 명제가 꿨다는 꿈 얘기다. 어느 날 그는 어전회의를 하다가 간밤에 꾼, 온몸이 황금이었던 금인(金人)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신하 가운데 하나가 그 금인은 서역 천축국의 부처라고 아뢨다. 이에 명제는 10여 명의 사절을 보내 불법을 구해오도록 했다.

황제가 꿈 얘기를 하자 신하가 지체하지 않고 부처라고 단정하고 황제도 바로 사절을 파견하는 일련의 활동은 당시 불교가 자못 알려져 있지 않고서는 쉬이 일어나기 힘들다. 아무튼 이 일이 있은 지 3년 만에 사절단은 축법란, 섭마등 등의 고승과 함께 사십이장경 등의 불경을 구해 돌아왔다. 황제는 낙양성 밖에 백마사를 지은 후 거기에 머물면서 불경을 번역하게 하였다. 이것이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불경 한역(漢譯), 곧 역경(譯經) 사업이었다. 이후 불경은 꾸준히 번역되었다. 그러다 후한이 망하고 사뭇 혼란했던 위진남북조시대가 펼쳐지자 불교는 한층 넓고도 깊게 전파되었다. 특히 황하 일대를 점령한 북방 유목민 왕조는 불교를 근간으로 중원을 통치하고자 했다. 서역에서 불경을 들여왔고 황실의 후원 아래 고승을 초빙하여 역경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실크로드 연변에서 명망이 자자했던 쿠차국 고승 쿠마라지바(Kumarajiva)를 후진(後秦) 황제가 직접 나서 장안으로 모셔온 것은 그렇기에 그다지 주목할 만한 일은 못 되었다. 

그러나 이는 중국 역경사에 일대 전기가 된 엄청난 사건이었다. 2000년을 상회하는 불경 번역사는 흔히 두 인물을 기준으로 셋으로 나뉘는데 그 첫째가 바로 쿠마라지바였기에 그렇다. 후진의 황제는 그를 국사로 예우하면서 장안에 대단위 역경소를 마련하여 불경 번역에 전념케 하였다. 그 결과 <대반야경>과 <금강경> <묘법연화경> 등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과 용수(龍樹)의 <중론> 같은 주요 이론서가 줄줄이 번역되었다. 그중 일부는 16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본(善本)으로 꼽힐 정도로 경쟁력 있는 번역이었다. 장안에 정착한 후 입적하기 전까지 불과 12년 남짓한 기간에 이뤄낸 눈부신 성취였다. 

그 후 250년가량 흘렀을 무렵, 이번엔 중원 출신 현장법사가 나와 쿠마라지바의 성취를 일신하였다. <서유기> 속 삼장법사의 실존 모델이었던 그는 17년에 걸친 서역으로의 구법(求法) 순례를 마친 후 526개 상자에 657부의 방대한 불경 원전을 싣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당 태종은 장안의 홍복사에 역경원을 설치하고 충분한 인력과 재정을 지원하여 불경 번역에 전념케 해주었다. 현장은 그렇게 입적하기까지 19년간 <대반야경> <심경> <해심밀경> 같은 신유식종의 주요 경전을 번역하였고, 이를 토대로 쿠마라지바의 역경 성과를 수정, 보완하였다. 

이로써 불교는 별다른 낯섦이나 두려움 없이 중국에 녹아들게 되었다. 서역 출신이던 쿠마라지바의 번역을 중국인 현장법사가 업그레이드함으로써 불교는 이물감을 거의 느낄 수 없는 ‘중국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번역의 힘, 다채로운 변주 

북경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주교회 남당의 전경. 1605년 마테오리치가 처음으로 연 성당으로, 지금 건물은 20세기 초에 중건된 것이다. 원 후 불교로 대변되는 제1차 서학의 충격이 불교 사원을 중심으로 퍼졌듯이, 천주교 성당은 제2차 서학의 충격이라 불리는 근대, 중서문화 교류의 허브였다.

북경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주교회 남당의 전경. 1605년 마테오리치가 처음으로 연 성당으로, 지금 건물은 20세기 초에 중건된 것이다. 원 후 불교로 대변되는 제1차 서학의 충격이 불교 사원을 중심으로 퍼졌듯이, 천주교 성당은 제2차 서학의 충격이라 불리는 근대, 중서문화 교류의 허브였다.

그렇게 중화, 그러니까 중국문명에 스며든 불교는 엄청난 변이를 일으켰다. 적어도 위진남북조시대부터는 불교 없는 중국이 상상되지 않을 정도였다. 개인부터 제국과 문명 차원까지, 감각부터 사유와 상상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혁명적 변이가 야기돼 중국문명의 결을 다채롭게 직조해냈다.

예컨대 고대 중국인은 불교와 만남으로써 과거나 현재와 완전히 다른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불교 수용 전, 중국의 미래 상상은 요임금, 순임금으로 대변되는 이상적 과거의 재현이 주를 이뤘다. 현재도 마찬가지였다. 옛적 성군의 태평성대를 오늘날에 재현함이 경세의 목표였다. 그렇다 보니 미래는 과거나 현재와 질적으로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설정되지 않았다. 불교의 번역은 이에 일대 충격을 가해 지옥이나 극락 같은, 과거나 현재와는 패러다임 자체가 완전히 다른 미래를 사유할 수 있게 해주었다. 

중국문화의 핵인 시에 미친 영향도 지대했다. 아니, 불교의 번역 없이는 두보나 이백 같은 대가가 배출될 수 없었다. 고대 중국인은 불경을 번역하면서 비로소 자기 말을 이론적으로 대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됐다. 사상 최초로 자기 언어를 분석적으로 바라보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표음문자인 산스크리트어를 표의문자인 한문으로 바꾸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다. 그전까지는 중국어 외의 타민족의 말을 어엿한 말이라고 여기지 않았기에, 자기 말을 타자에 비추어 객관화할 계기가 갖춰지질 않았다. 불경 번역 전까지 번역이랄 것이 없었던 까닭이다. 

불경 번역이 실은 다른 언어를 자기 언어와 대등하게 여겼던 최초의 사건이었던 셈이다. 덕분에 중국인들은 자기 언어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를 잡게 되었다. 한참 전부터 그렇게 사용해왔던 자기 언어가 네 가지 성조로 구성됐음도 이때 처음 알았다. 음의 성질도 변별하여 평성과 측성 식으로 이론화했다. 말을 어떻게 결합해야 더욱 아름다운 소리를 조직하게 되는지, 그 법칙도 촘촘하게 구축해냈다. 중화의 핵인 한시, 그것의 가장 진화된 형식인 5, 7언 근체시는 이렇게 하여 완성될 수 있었다. 게다가 불교와 만난 한시는 그 깊이와 높이가 한층 심원해지고 고양되었다. ‘시의 나라(詩國)’이기도 한 중국에서 번역된 불교는 어느덧 시를 짓고 논하는 데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 됐던 것이다. 

시가뿐만이 아니었다. 쿠마라지바가 불교를 번역할 즈음, 포교 과정서 유포된 불경 속 이야기들로 중원의 이야기 세계는 한창 풍요로워지고 있었다. 이야기는 공자의 시대 한참 전부터 중원을 유지하고 갱신해오던 중요한 문명 장치였다. 번역된 불교는 거기에 색다른 자양분을 공급, 중원의 서사와 상상, 허구의 세계를 한결 알록달록하게 구성해냈다. 중국이 사대기서라 명명하며 자랑스레 내놓는 <서유기>나 지금도 널리 향유되는 경극이 있게 된 데에는 번역된 불교가 공급한 자양분이 일찍부터 자리 잡고 있었음이다. 

불교의 번역은 철학적 지층도 다채롭게 변주해냈다. 쿠마라지바를 전후한 시대에 번역된 불교는 앞선 시대의 유가와 도가 사상에 사변의 깊이를 가하고 직관의 넓이를 더해 현학이란 사뭇 독특한 중국적 사유체계를 일궈냈다. 불교 철학이 유교와 도교 철학과 결합되어 훗날 ‘유-불-도 삼교 통합’이란 도저한 흐름을 빚어내기 시작했음이다. 여기에 현장법사가 번역을 통해 신유식종을 설파하자 불교 철학은 더는 ‘서역의 것’이 아니게 됐다. 그것은 지식인에게 익혀야 하는 ‘기본’으로 학습되었고 내면화되었다. 

훗날 송대 주희가 불교를 척결하고자 성리학을 집대성했지만 도리어 “전통 유학에 불교를 입혀 성리학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성리학을 극복하고자 했던 명대 양명학도 마찬가지였다. 불교가 양명학의 근간에 외양만 달리 하여 알알이 박혔기에 그렇다. 이 둘을 아우른 명칭인 이학이 몽골의 원 제국 이래 1000년 가까이 한자권을 석권했음을 보건대, 강고한 자기중심적 문명에 스며들어 그것마저 변주해내는 번역의 힘 덕택에 오늘날 중국문명이 한층 풍요롭고 유의미해졌음을 부인할 수는 없게 된다. 

■ 번역이 일궈낸 중국적 사회주의 

명대 중엽 이후에는 예수회 선교사를 통해 ‘제2차 서학의 물결’이 도래하기 시작했다. 서구 근대가 이룩한 과학적 성과뿐 아니라 선원근법 등 예술적 성취가 속속 중국에 유입되었다. 중국의 지적 자산도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구로 흘러들어갔다. 그렇게 중국과 서구는 번역의 중재를 통해 변이되고 있었다. 

그리고 19세기 중반, 드디어 중국과 서구는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적 야욕이 늘 문제됐지만 그럼에도 중국은 서구를 꾸준히 번역해갔다. 여기에는 조정과 재야가 따로 없었다. 근대적 무기의 위력을 경험한 청 조정은 “오랑캐의 장기를 배워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명분 아래 북경과 상해 등지에 서구 과학기술을 중국어로 옮기는 번역기관을 세웠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같은 진화학설을 비롯하여 서구 근대과학이 일궈낸 성과가 담긴 수백 종의 책이 그렇게 번역되었다.

지식인들은 그들대로 중국이 부강한 근대국가로 거듭나는 데 필요한 서구의 자양분을 활발하게 번역해 들였다. 엄복은 <진화와 윤리> <국부론>같이 서구 근대를 정초한 지적 자산을 번역 소개하여 당대 중국을 크게 뒤흔들었다. 서구 근대의 걸작도 번역됐다. 임서는 <로빈슨 크루소> <아이반호> 같은 작품을 옮김으로써 근대적 감각과 상상을, 또 의식을 중원으로 적극 끌어들였다.

물론 중국이 근대화하는 과정이 평탄치는 않았다. 그러나 결국에는 ‘중국적 사회주의’를 드넓은 강역에 펼쳐냈다. 서구 근대를 번역함으로써 중국은 자기 문명에 또 다른 켜를 쌓는 데 성공했음이다. 불교를 번역함으로써 인도의 불교가 아닌 중화가 풍요로워졌듯이, 서구 근대가 빚은 사회주의를 중국화함으로써 사회주의가 아닌 중화가 보존됐던 것이다. 나아가 중국은 그렇게 일궈낸 문명의 소산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디지털-네트워크 시대에 걸맞도록 재차 번역하고 있다. 아날로그적 문화자산을 디지털 문화자산으로 번역하고 이를 여러 언어로 바꿔 전 세계로 퍼트리고 있다.

번역이 문명에 스며들어 그것을 변이해내는 힘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번역을 통해 중국의 문화자산이 지구촌 곳곳에서 구실을 할 때 중국이 미래세계의 문명표준으로 우뚝 설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러는 것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705121931005#csidx4d7c9d9d7e88c09808df1addfcd1ec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