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4. 12:34ㆍ쿠오바디스 행로난
ㆍ중국,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다
지난 8일, 채용 인원 4910명인 국가공무원 9급 선발 시험이 치러졌다. 올 2월 접수 결과 모두 22만8368명이 응시, 경쟁률이 46.5 대 1에 달했고 그중 17만여명이 응시해 실질 경쟁률 35.2 대 1인 상태에서 필기시험이 치러졌다. 국가공무원뿐 아니라 지방공무원 선발 시험 경쟁률도 만만치 않다. 인터넷 등에서 관련 내용을 접하다 보면 한껏 예민해진 응시생의 숨결에 절로 절박해지기도 한다.
■ 시 짓기로 공무원을 뽑는다?
‘공시생’이 아닌데도 이러하니 출제가 선발 목적에 적합해야 하고 채점이 공평무사해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하리라. 그런데 공무원을 뽑는 시험 과목이 ‘시 짓기’이고 응시생이 지은 시를 평가해서 당락을 결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모르긴 해도 이를 수긍할 응시생은, 아니 오늘을 사는 사람은 몹시 적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선 그런 일이 버젓이 일어났다. 짧은 기간 그러다 만 게 아니라 무려 1300여년간이나 그러했다. 해당 지역도 무척 넓었다. 때론 지금 유럽의 1.8배가량 되는 광활한 지역에서 시 짓기로 관리를 임용했다. 589년 중원을 통일한 수대에 처음 시행된 후 1905년까지 존속됐던 과거(科擧) 얘기다. 본격 시행된 때를 당대 중엽인 8세기로 잡는다고 해도 천년을 훌쩍 넘는 세월 동안 과거는 관리 임용의 골간으로 활용됐다.
사실 어느 한 제도가 천년 넘게 시행됐다는 것은, 그것도 중국처럼 넓은 지역에서 그랬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다. 물론 그 세월 내내 많은 폐단이 양산됐고 왕조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시 짓기 과목은 비중이 낮아지는 일은 있었어도 폐지되는 일은 없었다. 과거 비판 가운데 시 짓기 자체에 대한 것도 드물었다. 부정부패 등 운용상의 공정성이 문제됐지, ‘시 짓기는 시험 과목으로 부적절하다’ 유의 비판은 거의 없었다. 당시라고 하여 경쟁률이 낮거나 관직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것은 아니다. 나이 마흔이나 쉰에 과거 급제하면 선방했다는 소리를 듣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과거에 목을 맨 이들이 많은 때였다.
이런 형국에서, 시가 감성과 주관의 산물임이 분명하고 그렇기에 평가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기하기 무척 어려웠음에도 과거를 채택한 왕조들은 시 짓기 과목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사뭇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 소리, 제국의 국정을 지배하다
결론부터 밝히자면 수천년간 소리로 빚어온 중화란 전통을 버릴 수 없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소리가 중화라는 제국 수준의 보편문명을 빚어냈다는 진술이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지 않을 수 있다. 이를 해명하자면 먼저 과거 이전에 시행됐던 관리 임용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거 실시 전, 문헌을 통해 관리 임용 방식을 확인 가능한 시기는 춘추시대부터다. 그때부터, 그러니까 기원전 8세기부터 수가 중원을 통일하기까지 1300여년에 걸친 기간 동안 주된 관리 임용 방식은 추천제였다. 수 직전의 위진남북조시대엔 조조의 아들 조비가 채택한 구품중정제가 주로 시행됐다. 그것은 인재를 상상(上上)부터 하하(下下)까지 아홉 품급으로 나눠 추천하면 심사를 거쳐 관리로 임용하는 방식이었다. 덕분에 덕행이나 학식 등으로 어느 한 지역을 자기 이름으로 채우면 ‘민간인’ 신분에서 단번에 태자 측근의 요직에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조비가 멸한 한대 또한 소리가 제국 운영에 크게 기여한 시절이었다. 전성기를 구가했던 무제 때엔 악부(樂府)란 관서를 두고 사방에 관리를 파견하여 민요, 곧 민간의 노랫소리를 수집해 이를 정사에 참작하였다. 공자가 표방한 아정(雅正)한 음악으로 천하를 교화한다는 악교(樂敎) 이념을 현실 정치에 실제로 구현하고자 했음이다. 미술이나 건축 등을 관장하는, 이를테면 회화부나 건축부 등은 없었으니 한 조정이 세상 경영에 소리를 얼마큼 의지했는지, 익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제는 태학이란 국립교육기구를 설치했는데 많게는 3000명을 웃돌았다는 이곳의 학생을 중심으로 세상사 이치와 정사의 잘잘못을 매섭게 논하는 청의(淸議) 풍조가 강하게 형성됐다. ‘맑은 여론’이란 뜻의 이 풍조는 외척이나 환관, 대장군 같은 권세가에 맞서 청류(淸流)를 형성했고, 현실 정치의 한 축을 담당하며 무시 못할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삼국지연의>에서 미인계로 동탁을 처단한 사도 왕윤이나 유비 스승으로 나온 중랑장 노식 등은 실제로 청류파의 대표적 인사였다. 황제의 손발이 되어 제국을 돌리는 일꾼들의 수급뿐 아니라 국정 전반이 소리를 기반으로 돌아갔던 셈이다.
■ 소리로 중화 문명을 싹틔우다
이런 사정은 제국 단계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진시황 이전의 시대, 곧 춘추전국시대는 명성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명성은 개개인의 실존에 개입하여 그의 삶을 바꾸기도 하는 매우 쏠쏠한 사회적 밑천이었다.
그 시절은 장자가 통탄했듯이 자기 육신을 해하고 신체를 훼손해서라도 명성을 얻고자 애쓰던 때였다. 맹자가 명성을 진정으로 추구하는 이는 제후 자리조차 초개같이 버릴 수 있다고 단언했을 정도였다. 전쟁 등 거대 폭력이 일상화됐던 시대, 정·관계 진출은 그나마 안정적 삶이 가능한 길이었다. 명성은 그런 삶을 실현해주는, 곧 정·관계 진출의 미더운 통로였다. 인력이 국력의 가장 든든한 요체였던 시절, 세상을 자기 이름으로 자작자작하게 채운 이를 수하에 두면 그만큼 많은 인심과 인력을 얻을 수 있었다. 내 이름이 칭해지는 소리를 키우는 것이 정·관계 진출의 고갱이가 됐던 연유다.
그렇다보니 “내가 무능한 것을 나무라야지 남이 나를 몰라줌을 탓해서는 안된다”(<논어>)며, 남에 의해 좌우되는 명성 대신 내가 좌우할 수 있는 수신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한 공자조차도 군자는 죽은 후 명성이 칭해지지 않음을 싫어한다고 잘라 말했을 정도였다. 후생은 두려워함 직하지만 나이 40~50이 되어서도 이름이 나지 않으면 두려워할 바 없다고 단정하기도 했다. 심지어 “명성이 나지도 않고 늙어서 죽지도 않으면 이를 일러 도적이라고 한다”(<논어>)고까지 했다. 그가 소리에 얼마나 주의했는지를 잘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제국 출현 전인 춘추전국시대 역시 소리를 장악한 이들이 국가·사회의 근간이 되어 중원의 역사를 돌리고 있었음이다.
비단 관리 임용이란 차원에서만 소리가 중용됐기에 하는 말이 아니다. 공자의 악교 이념이 잘 말해주듯이, 소리는 국가 운영 전반에 걸쳐 중요한 자산이 되어왔다. 중국 역사의 시조 격인 하·상·주 세 왕조에 대한 역사 서술을 보면 이는 더욱 확연해진다. 춘추시대보다 앞선 시기인 이들 모두 소리로 중원을 주조하고 다스렸다고 기술됐기에 그렇다. 순임금은 소(韶)란 악곡을 지어 그것으로 천하를 경영, 태평성대를 일궜다고 한다. 그에게 군주 자리를 물려받아 하나라를 연 우임금은 <하(夏)>를, 하를 멸하고 상나라를 세운 탕왕은 <호(護)>를, 상을 멸하고 주를 천자의 나라로 거듭나게 한 무왕은 <무(武)>란 악곡을 지어 순임금처럼 활용했다고 한다.
이는 공자의 악교 이념이나 한 무제의 악부 설치 같은 정책의 연원이 사뭇 깊음을 말해주는 증좌들이다. 그 존재가 입증된 상의 탕왕 때부터만 치더라도 이후 과거가 시행되기 전까지 2000년을 상회하는 시간 동안 중원에서 명멸했던 왕조들은 소리를 기반으로 국가를 운영하며 중화라는 문명을 빚어냈던 것이다.
■ 소리, 중화 수성의 기반
그럼, 과거 시행을 계기로 이러한 전통이 소멸되거나 약화된 것일까. 과거가 ‘듣고 말하는 문명’ 패러다임보다는 ‘보고 읽는 문명’ 패러다임에 가까운 문명장치여서 하는 말이다. 과거는 분명 필기로 시험을 치고, 문자로 쓰인 답안을 채점하여 관리를 뽑는 형식이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과거는 소리로 중화를 빚어내고 중국을 지탱했던 전통 위에 여전하게 서 있었다. 과거의 여러 과목 중 시 짓기가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설정됐던 역사가, 작금의 논술고사와 유사한 논(論), 책(策)이 당락에 더욱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때조차 시 짓기가 폐기되지 않았던 역사가 이를 잘 말해준다. 시 짓기는 무엇보다도 음률, 그러니까 소리가 핵질을 이루기에 그렇다. <시경>의 주석 가운데 최고 권위를 지닌 <모시서(毛詩序)>의 언급이다.
“시는 마음이 가는 바이다. 마음에 있으면 뜻이 되고 말로 피어나면 시가 된다. 감정이 마음에서 움직이면 말로 드러나는데, 말로 해서 부족하기에 감탄하게 되며,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읊조리고 노래하게 된다. 또한 읊조리고 노래함만으로는 부족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손이 덩실대고 발이 굴러진다.”
이를 보면 고대 중국인이 시를 말, 그러니까 사람이 내는 ‘문화적 소리’와 동일시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시가 사람의 마음, 감정 등과 유기적으로 연동되어 있음을, 마음에서 감정이 태동되면 입으로 시가 나와 노래가 되고, 몸으론 춤이 추어짐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인식했음도 목도된다. 공자가 악교를 논의할 때 줄곧 ‘시교(詩敎)’와 연동하고, 악부란 관청에서 민간의 노래를 수집하는 관리를 ‘채시지관(採詩之官)’, 곧 시를 채집하는 관리라고 명명한 연유다.
하여 시를 지으려면 말, 곧 어음(語音)을 잘 알아야 했다. 더구나 과거에서는 음률을 엄격하게 준수하며 시를 지어야 했다. 결코 쉽지 않은 또 적지 않은 격률을 지켜가며 시를 지어야 했다. 이때 기준이 되는 어음, 그러니까 말의 소리는 조정에서 정한 ‘바른 소리’였다. 공자가 <시경>이나 <서경> 등을 가르칠 때 항상 취했다는 ‘아언(雅言)’이나 ‘훈민정음’ 할 때의 ‘정음(正音)’이 바로 그러한 바른 소리였다. 오늘날 표준어의 발음에 해당되는 소리다.
그러니 어디서 태어나든 관리가 되고자 하면 반드시 바른 소리를 익혀야 했다. 자기 고장의 발음으로 시를 지었다간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자로 낙인찍혀 ‘광속탈락’될 수밖에 없었다. 송대 이후 중원의 표준어음이 바뀌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국(國)이 ‘귁’ 비슷하게 발음됐음에서 보이듯이 당대(唐代) 중국어엔 입성 받침이 있었지만 송대를 거치면서 중국어는 받침이 모두 사라지는 등 근본적 변화를 겪었다. 그럼에도 과거에서는 변치 않고 당대 어음을 기준으로 시 짓기를 요구했다. 과거를 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당대 한자음을 외워 그것으로 시를 지어야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조정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느냐와 무관하게 지식인의 사유와 감성을, 또 상상을 통일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중화라는 문명을 짓는 이들의 내면을 예측 가능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말은 하이데거의 정의를 빌리면 존재의 집이고, 헤겔의 통찰에 기대면 자아로서의 정신이 직접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바이기에 그렇다. 말이라는, 사람이 내는 문화적 소리를 지배함으로써 그들의 감성을, 또 사유와 직관을, 나아가 상상까지도 제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관적이고 감성적일 수밖에 없는 시 짓기임에도, 그에 대한 평가가 객관적이고 이성적이기 참으로 어려운 시 짓기임에도, 천년을 훨씬 초과한 성상 동안 관리 임용의 주요 과목으로 채택되어왔던 것이다. 관리를 뽑는 가장 주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중화라는 문명을, 또 자신이 천자로 있는 그 정치체를 통일적으로 보존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만들어온 역사를 우리는 함성으로 기억한다. 3·1운동의 함성부터 4·19 민주혁명을 거쳐 5·18 광주민주화항쟁, 6·10 시민혁명 그리고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거기서 성난 파도와 같이 진동했던 목소리들이 오늘날의 민주주의 한국을 빚어냈다. 그런데 상술한 중국의 역사는 소리가 역사를 주조해내는 데만 쓸모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준다. 소리는 그렇게 만들어낸 새 단계의 역사를 수성하고 갱신해가는 데도 크게 기여했음을 일러준다. 대선을 둘러싸고 한국의 시공간을 가득 메운 수많은 목소리들, 그중 어떤 목소리들로 공정하고 평화로운 우리의 미래를 빚어갈 것인지, 역사의 의미가 참으로 심장하게 다가오는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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