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바디스와 행로난](40) 말을 ‘지배자’로 만든 생각…생각은 정녕 말의 노예일까

2017. 7. 4. 12:34쿠오바디스 행로난

ㆍ고르기아스 증언으로 본 진실과 오해

다비드(Jacque-Louis David)가 1788년에 그린 파리스와 헬레네의 밀회 장면.

다비드(Jacque-Louis David)가 1788년에 그린 파리스와 헬레네의 밀회 장면.

세상의 지배자는 소리다. 일단 말이 강력한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증인은 고르기아스(Gorgias·기원전 480~380년)다. 

“말은 강력한 주인이다. 말은 아주 작고 보이지 않는 몸이다. 하지만 가장 신과 같은 일을 해낸다. 두려움을 멈추게 하고, 슬픔을 가시게 하며, 즐거움을 빚어내며, 연민의 마음을 키우기 때문이다.”(<헬레네 찬사> 제8장) 

말의 힘이 어떻게 위력적인지가 잘 드러난다. 두 가지다. 작은 몸이지만 신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사람의 마음을 좌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연민, 공포, 기쁨, 슬픔과 같은 감정을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시 고르기아스의 말이다.

“모든 시가는 운율을 따르는 것이다. 시가는 듣는 사람에게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공포와 눈물을 자아내는 슬픔과 슬픔이 빚어내는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다른 사람의 일과 다른 신체가 겪어야 하는 행복과 불행도 말을 통해서 영혼은 자기 자신의 것으로 겪기 때문이다.”(<헬레네 찬사> 제9장)

이에 대한 보증인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기원전 384~322년)다.

“아주 좋은 비극을 짓기 위해, 이야기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해야 한다. 이야기는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모방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모방이 지니는 속성에서 기인한다.”(<시학> 제13장 1452b 31~34) 

고르기아스의 두상.

고르기아스의 두상.

양자의 차이는, 고르기아스가 말의 힘을 강조한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관점에서 모방이 만들어내는 특징에 초점을 두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모방도 결국은 말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에 큰 차이는 없다. 이야기도 결국은 말의 엮음체이기에. 각설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말의 힘은 어떻게 해명해야 할까? 그러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과 불행을 보면서 슬퍼하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언제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은 어떤 이가 겪는 불행이 부당한 것이라고 느낄 때 생기는 감정이고, 공포는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불행을 당할 때에 생기는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부당함에 대한 연대감의 표현이 연민이고, 나도 저렇게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공포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생겨난 연민과 공포를 혹자는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고, 혹자는 사회적 연대 정신(solidarity)이라고 부른다. 이를 어떤 관점에서 무엇으로 부르든, 중요한 것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연대의 끈이 말의 힘이라는 점이다.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이 말의 힘이라는 것이다. 각설하고, 고르기아스는 심지어 말을 강력한 지배자라고까지 주장한다. 역사를 결정하는 정치를 지배하는 힘이 말이기 때문이다.

■ 말을 세상의 지배자로 만든 것은 생각 

그렇다면 말을 지배자로 만든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의 해명이다.

“실상은 이렇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도, 현재를 자세히 살피는 것도, 미래를 예견하는 것도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다. 이런 까닭에 일상에서 벌어지는 대개의 일들을 처리함에 있어서 우리는 생각(doxa)을 영혼의 길잡이로 삼는다. 생각은 쉽게 넘어지고, 쉽게 흔들린다. 생각을 길잡이로 여기는 사람을 사로잡는 것은 쉽게 넘어지고 쉽게 흔들리는 행운이다.”(<헬레네 찬사> 11장)

진범은 ‘생각’이었다. 뜻밖이다. 말을 세계의 지배자로 올린 힘의 실체가 너무도 가까운 곳에 있기에. 우리 안에 있다. 바로 ‘생각’이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고 늘상 의지하는 ‘생각’이 너무 허약하고 너무 쉽게 흔들리는 탓에 말이 지배자가 되었다고 한다. 세상에서 유혹과 미혹에 가장 쉽게 무너지는 것이 ‘생각’이라고 한다. 다시 그의 말이다. 

“말에 깃들인 신적인 힘은 즐거움을 불러일으키고 고통을 내몰아준다. 영혼에 생겨난 생각과 함께하는 이 신적인 힘은 감미롭게 유혹하고 설득하여 생각을 바꾸어 놓는다. 마술과 사술도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영혼의 일탈과 생각의 기만이 그것들이다.”(<헬레네 찬사> 제10장)

이렇게 미약한 ‘생각’을 따로 분리해 관리하는 소수의 사람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의 ‘생각’을 말이 지배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라는 것이다. ‘생각’을 특별하게 관리하는 사람을 혹자는 현자(sophos)라고, 혹자는 철학자(philosophos)라고 부른다. 이 구별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생각’을 특별 관리의 대상으로 놓고 가르쳐야 한다는 사람마저도 정작 자신의 ‘생각’을 돌보는 일에는 게으른 경우가 부지기수이기에.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고르기아스는 ‘생각’을 말의 노예로 놓고, 이 관계를 심지어 인간의 본성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 사례로 헬레네를 든다. 보충하겠다. 다수의 사람들이 헬레네를 나쁜 여자라고 보는데, 이는 잘못된 견해라는 것이다. 물론, 파리스와 바람이 난 헬레네가 자식과 남편과 조국을 버리고 트로이로 떠났고, 그것이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었다는 점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이 헬레네의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헬레네는 피해자라는 것이다. 고르기아스가 내놓는 해명이다. 

“말은 영혼을 설득해서 말해진 것을 따르고 행해진 것을 동의하도록 강제한다. 따라서 설득한 것이 강제한 것으로서 잘못을 범한 것이다. 오히려 설득된 사람은 말에 의해서 강제된 사람이므로, 그 사람이 나쁜 평판을 듣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헬레네 찬사> 제12장)

궤변이다. 행위의 책임은 말이 아니라 영혼에 귀속되어야 하기에. 따라서 헬레네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조금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말과 생각의 관계가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말은 처음에는 영혼을 설득하고 나중에는 강제한다고 한다. 설득이라는 소통 과정을 거치므로, 또한 설득은 그 자체로는 형식적이고 가치중립적인 매개의 과정이다.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강제”라는 언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다. 원어는 ‘아낭케(ananke)’이다. 우리 말의 “어쩔 수 없음”에 해당한다. 말에 무슨 힘이 들어 있기에 생각도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일까? 기원전 7세기에 활약한 사포(Sappho)를 참고인으로 이 자리에 부르겠다. 참고로, 사포도 헬레네의 무죄를 주장한 시인이었다. 그녀의 노래다. 

“어떤 이는 기병이, 어떤 이는 보병이, 어떤 이는 수병이 검은 대지에서 가장 빛나는 자라고 말하지요. 하지만 나는 말해요.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이를 깨닫게 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지요. 누구나 인정할 거예요. 헬레네를 보세요. (…) 아프로디테 여신이 그녀를 데리고 가버렸지요.”(<단편 16>)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구절에 눈길이 간다. 다음의 이유에서다. 사포도 헬레네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서 아프로디테 여신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이는 부차적이다. 중요한 것은, 사포가 헬레네의 변론을 위해서 보편의 논리, 그녀의 말대로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을 논증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일단 사포가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가장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나’를 강조하고 ‘무엇’을 특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사포의 논리는 보편적이다. 이처럼 말의 보편적인 힘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은 사포를 제10의 무사로 예찬한다. 혹자는 이를 말의 실정성(positivity)이라 부른다. 생각이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고르기아스에 따르면, ‘강제’의 어쩔 수 없음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는, 즉 말의 보편적인 힘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 ‘강제’를 싫어하는 ‘생각’ 

문제는 ‘생각’이 말의 ‘강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말의 ‘강제’를 주장한 고르기아스의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말이 생각을 전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기에. 단적인 증거는 생각이 말의 ‘강제’를 훈련시키는 공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점이다. 또한 ‘생각’이, 자신이 좋아하는 말에만 귀를 연다는 점도 중요하다. 생각에게도 자율권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은 천성적으로 가볍고 변덕스럽다. 이것이 생각의 속성일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을 따르려는 생각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실은 소문(fama)이다. 증인은 베르길리우스(Vergilius·기원전 70~19년)다.

“소문은 세상의 악 가운데에서 가장 빠르다. 소문은 움직임으로써 강해지고 나아감으로써 세력을 늘린다. 소문은 처음에는 겁이 많아 왜소하다. 하지만 금세 하늘을 찌른다. 발은 땅 위를 걷지만 머리는 구름에 가려져 있다. (…) 소문은 발이 빠르다. 날랜 날개를 가진 무시무시하게 거대한 괴물의 몸에는 많은 깃털들이 나 있다. 그 깃털들보다 많고 잠들지 않은 눈과 혀와 소리를 내는 입과 쫑긋 선 귀들이 깃털 아래에 있다. 밤마다 소문은 어둠을 뚫고 대지와 하늘 사이를 윙윙거리며 날아다닌다. 한시도 눈을 감고 단잠을 자는 적이 없다. 낮에는 지붕 꼭대기와 높은 성탑 위에 앉아 망을 보면서 도시를 놀라게 한다. 사실을 전하는 것 못지않게 조작과 왜곡을 좋아한다. 바야흐로 소문은 신이 나서 여러 백성들 사이에서 온갖 이야기를 퍼뜨렸다. 사실과 조작을 똑같이 퍼뜨렸다. (…) 가증스러운 여신은 도처에 사람들의 입에 이런 이야기를 쏟아부었다.”(<아이네이스> 제4권 174~190행)

“이런 이야기”란 아프리카의 리비아에 표류하게 된 트로이의 왕자 아이네이스와 그곳을 다스리고 있던 여왕이 눈이 맞아 바람이 나서 불륜을 범했다는 소문이다. 인용은 그런데 소문이 왜 위력적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문이 위력적인 이유는 그것이 사실의 진위 여부와는 별로 큰 관계가 없기 때문이라 한다. 자신이 듣고자 하는 부분 혹은 믿고 싶어 하는 생각이 만든 것이 소문이기에. 생각의 자율권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하지만 생각이 말에 얼마나 복종적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사태의 진상 파악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말의 달콤함만을 좇는 것이 ‘생각’이기에.

■ 역사는 원래 소문 출신 

하지만 소문이 원래 그렇게 무시무시한 괴물은 아니었다. 오비디우스(Ovidius·기원전 43년~서기 18년)의 말이다. 

독일 드레스덴 대학 시각예술대학 건물의 지붕에 세워진 소문의 여신. 헨제(Robert Henze)의 2005년 작품.

독일 드레스덴 대학 시각예술대학 건물의 지붕에 세워진 소문의 여신. 헨제(Robert Henze)의 2005년 작품.

“세상의 한가운데에, 대지와 바다와 하늘의 중심에, 우주의 삼계가 서로 만나는 장소가 있다. 그곳에서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무엇이든 다 보이고, 무엇이든 열린 귀에 다 들린다. 바로 이곳에 소문의 여신 파마(fama)가 살고 있다. 여신은 맨 꼭대기에 거처를 고르고, 그 집에 수많은 입구와 천개의 통로를 내놓으며, 문턱에는 문을 달지 않았다. 집은 밤낮으로 열려 있다. (…) 군중들이 홀을 메우고 있다. 경박한 무리들이 오가고, 참말과 거짓말이 도처에 섞여 돌아다닌다. 더러는 수다로 한가한 귀들을 채운다. 더러는 들은 것을 전한다. 지어낸 말이 자꾸 커진다. 새로이 전하는 자마다 들은 것에 뭔가를 보탠다. 경박함과 부주의와 근거 없는 기쁨과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출렁댄다. 갑작스러운 선동과 알 수 없는 속삭임이 일렁인다. 소문의 여신은 하늘과 바다와 대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지켜보고, 온 세상에서 새로운 소식을 찾는다.”(<변신이야기> 제12권 39~64행)

소문을 바라보는 오비디우스의 시선은 베르길리우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가증스러운 여신이 아니다. 온갖 소리 세계의 주인으로 소문의 여신이다. 소리 세계는 우주의 삼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해명은 이렇다. 

소문의 여신이 원래는 문자가 없던 시절에 역사를 전승하는 역할을 담당한 사관이었다. 참고로, 그리스 말로 소문의 여신은 클리오(Clio)라 불렸다. 클리오는 원래 역사를 관장하는 여신이었다. 작은 몸통의 사실과 거대한 몸통의 소문이 싸우는 과정에서 무엇이 진실인지를 밝혀서 제우스에게 보고하는 것이 여신의 업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에서 이렇게 중요한 보직을 수행했던 클리오 여신은 로마에서는 뒷골목의 수군거림을 대변하는 소문의 잡신으로 전락하고 만다. 베르길리우스는 이를 비난하는 것이고, 오비디우스는 소문의 여신의 원래 위상을 찾아주려고 한 셈이다. 하지만, 소문의 여신은 잡신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유인즉, 실제 가볍고 변덕스러운 생각을 특별하게 관리하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인 반면, 특별한 관리를 받지 않은 생각들이 언제나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다수가 대개는 사실보다는 소문을 더 좋아하기에. 이와 관련해서 역사는 대개 특별 관리를 받지 않은 다수의 생각들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단적으로 소문이 역사의 방향을 결정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이런 이유에서 당장의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고 승리하는 것은 거대 몸통의 소문이다. 그렇다고 작은 몸통의 사실이 항상 패배하는 것은 아니다. 작은 몸통의 사실이 거대 몸통의 거짓과 조작을 뒤집어버렸다는 새로운 소식에 열광하는 것도 실은 소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은 몸통의 사실을 지켜주는 것이 역사이다. 

그렇다면, 역사와 소문은 아주 묘한 관계에 놓여 있는 셈이다. 소문과 싸우는 것이 역사이지만, 역사를 반대로 지켜주는 것이 새로운 소식을 좋아하는 소문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소문으로 흥한 자를 소문으로 망하게 만든 것이 소문의 작동 원리라는 소리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는 분명해진다. 생각이 본성적으로 유혹과 미혹에 너무 유약한 것이라는 점, 이 점이 말을 강력한 지배자로 만들어준다는 것만큼은. 생각이 특별한 관리와 훈련을 받지 않는 한에서는 말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705051859005#csidx5e951cf4d54a4c99a199c29b953e737